[편집국에서] 변방의 일광, 돔 구장

이현우 기자 hoor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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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 신문센터장

‘일광은 욱일기의 상징’ 논란
2만 5000여 일광 주민 모욕

수도권 구성원, 지역을 변방 취급
안중에 없는 변방 낮잡아 보는 듯

거대 수도권 권력 카르텔
한 치 양보 없이 지역에 어깃장

‘①부산시 기장군 일광면은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행정구역…⑤일광은 영어로 선라이즈, 욱일기의 상징입니다.’

유튜브 매체 ‘더 탐사’가 얼마 전 내놓은 주장이다. 부산 해운대구 ‘일광수산횟집’을 놓고 한 말이다. 누가 봐도 ‘일광’과 일본 제국주의, 욱일기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문해력이 뛰어나든 모자라든 그렇게 연관 짓는 건 당연하다. 수도권에 기반을 둔 한 유튜브 매체의 어설픈 주장은 곧바로 ‘일광=친일’ 논란으로 이어졌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 주장대로라면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골프 경기는 욱일기와 관련된 장소에서 열렸다. 경기장 아시아드CC는 일광읍에 있다. 박형준 부산시장도 일제 군국주의 깃발과 연관된다. 박 시장 부부는 일광읍 청광리 765㎡의 대지에 근린시설 건물을 한동안 갖고 있었다. ‘욱일기의 상징 일광’에 땅과 건물을 소유했던 박 시장 일가는 친일파인가. 그룹 BTS(방탄소년단)도 지난해 10월 하마터면 일본 제국주의 정신이 깃든 일광(옛 한국유리 부지)에서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 찬가를 부를 뻔 했다. 수도권 일극주의자들이 시비를 걸 수 있다는 걸 예지하고 공연 장소를 바꾼 걸까. 그랬다면 역시 글로벌 스타다운 안목이다. 무엇보다 괘씸한 건 일광읍에 사는 2만 5000여 명의 부산시민이 졸지에 얼간이 꼴이 돼버렸다는 사실이다. 음식점 이름에 일광 지명이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조롱거리가 된다면, ‘일광=욱일기의 상징’이라는 공식이 당연한 상식이라면, 그걸 알고도 일광에 사는 주민은 아무 생각 없는 개돼지나 다름없단 말인가.

분명히 말해 두지만 최근 일광수산횟집을 찾아 논란을 촉발시킨 윤석열 대통령을 옹호할 의도는 티끌만큼도 없다. 대통령을 비판하기 위해 어쭙잖게 일광을 끌어들여 부산과 부산시민을 업신여긴 경솔을 나무라고 싶을 뿐이다. 변방은 늘 억울하다. 이 나라 구성원의 절반을 넘게 차지하는 수도권 무리들의 시각에선 모든 지방은 멀리 떨어진 변방인 듯하다.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형적 수도권 초집중화가 빚은 기이한 집단의식이다. 만약 일광이 수도권 어느 곳의 지명이었다면 어땠을까. 단편적 정보를 짜깁기해 ‘아니면 말고’ 식으로 아무렇게나 말할 수 있었을까. 더 탐사 해명은 군색하다. “최고 실세들이 도열한 채 윤석열 대통령과 악수하는 등 권위적인 모습에 대한 비판은 사라지고 ‘일광면 주민들이 친일이란 말이냐’는 식으로 본말을 왜곡시키며 물타기를 시도하고 있다.” 안타깝다. 그들이 비판하려는 논지와는 별도로 일광 지명과 관련해 의도치 않은 허점이 있었다면 사과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도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만 한다. 요즘 말로 ‘의문의 1패’를 당한 기장군 일광읍 입장에서 보자면 참 뻔뻔한 태도다. 수도권 구성원들은 지역을 변방 취급하며 낮잡아 보는 걸까. 서울공화국의 입장에선 안중에 없는 공간인 변방에 대해 아무렇게나 내뱉어도 된다고 보나. 일광을 둘러싼 논란을 지켜보며 이런 생각을 해봤다.

부산 사정을 전혀 모르는 한 서울 정치인의 ‘사직 돔 구장’ 제안도 뜬금없다. 부산시민에게 '철새 정치인' 이미지를 남긴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은 지난달 중순 부산 돔 구장 건설 방안을 제시했다. 부산시가 사직야구장을 2028년까지 개방형 구장으로 재건축하겠다고 공식 발표한 지 한 달이 채 안 지난 시점이었다. 돔 구장이라는 당근을 던져주면 구도 야구팬들이 정신을 못 차릴 거라 판단했다면 큰 오산이다.

요즘도 틈만 나면 수도권 언론들은 가덕신공항을 물고 늘어진다. 보수·진보 성향 가릴 것 없이 서울지역 언론은 포퓰리즘 정책 1순위로 가덕신공항을 꼽는다. 대규모 정책 사업에 대해 국비 지원 여부를 결정하는 예비타당성조사(예타) 면제 기준을 24년 만에 조정하겠다고 국회가 나서니 그것도 포퓰리즘이라고 수도권은 어깃장을 놓는다. 그동안 물가가 얼마나 올랐나. 총사업비 500억 원, 국가재정 지원 규모 300억 원 이상을 각각 1000억 원, 500억 원 이상으로 기준을 올리겠다는 국가재정법 개정안은 전혀 허황되지 않다. 통계청 홈페이지 소비자물가지수 계산기로 산출해 보면 1999년 1월 500억 원은 지금 898억 원 가치와 같다. 이 기간 국내 소비자물가는 1.796배 올랐다. 물가상승률과 비슷한 수준으로 조정하겠다는 법안 개정안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거대한 수도권 권력 카르텔은 지역에 조금도 양보해선 안 된다는 논리로 가로막는다.

윤석열 정부 출범 1년. 부산을 비롯한 지역의 소외는 여전하다. 지방자치분권 및 지역균형발전에 관한 특별법은 지난해 국무회의를 거치고도 국회에서 처리되지 않고 있다. 방향성 잃은 대한민국 변방의 암울한 현실이다.



이현우 기자 hoor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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