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칼럼] 우리는 잘 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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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희 공모 칼럼니스트

허무와 냉소 만연한 젊은 층
마약에 의존하는 사례 급증
즉각적 해방구 찾아 헤매다
우울감에 극단 선택 하기도
여유보다 경쟁 내몰린 이들
그 아픔 공감하고 응원해야

통계에 따르면 하루 평균 3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삶을 등진다. 10대와 20대, 30대 모두에게서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이다. 한창 미래를 꿈꾸고 삶의 활기를 누려야 할 청년들이 어느 때보다 극단적인 선택에 내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근래에 젊은 층 사이에서 마약 유통이 확산하고 정신질환과 자살 시도 사례가 급증했다. SNS에 투신자살 과정을 생중계한 충격적인 사건도 일어났다. 이 모든 암울한 뉴스들을 접하고 있으면 한국사회가 걱정되는 걸 넘어서 점점 이 사회가 싫어지는 마음마저 든다.

온라인의 댓글들만 읽어 보아도 누군가는 이미 정이 떨어져 ‘극혐’이라 적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미워하는 마음일 것이다. 미워하는 마음과 싫어하는 마음은 다르다. 대상이 미울 때는 탐탁지 않은 상황을 개선하고자 원인을 찾고 노력할 수 있지만, 싫어질 때 우리는 화해를 포기하고 희망을 버리고 단념하며 결국 손을 놓는다. 이것은 기대도 없고, 그러므로 실망도 없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모습일 것이다. 또한 미워도 다시 한번 일어섰던 열정을 모두 증발시키고 어떤 소식에도 무감각해진다.


자살의 주요 원인이 되는 우울증은 이러한 싫증의 대상이 나를 둘러싸고 일어난다는 점에서 내가 나를 싫어하는 경험과 비슷하다. 나를 오래도록 미워하다가 내가 나를 싫어하게 되는 단계에 이르면 나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해지고 삶에 희망이 사라지고 끝내 생을 포기하는 일을 고민하게 된다. 자신을 아껴 주고 사랑을 주고받던 가족과 친구들, 혹은 잠깐이라도 소중한 추억들을 나눴던 주변 사람들의 존재마저 잊어버린다. 불행하게도 그가 세상을 떠나 버린다면 상실을 맞닥뜨린 남겨진 사람들은 죄책감으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을까. 그리고 무력한 상황에 우울해지기 시작한다.

우울이라는 단어는 사전적으로 ‘근심스럽거나 답답하여 활기가 없는 상태 혹은 반성과 공상이 따르는 가벼운 슬픔’으로 정의된다. 만약 우울로 정의되는 상태가 2주에서 한 달 이상 지속될 때는 우울감이 아니라 우울증으로 심화하는 위험신호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역으로 2주에서 적어도 한 달간은 우울감을 벗어나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은 유예가 허락된다고 말하고 싶다. 부정적인 감정들도 그대로 존중받아야 할 것으로 끌어안는 순간 어쩌면 우울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생의 곡선이 처음부터 끝까지 우상향만 그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시련과 좌절은 때때로 꽤나 자주 우리 인생에 노크한다. 불쑥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낯선 손님이 참 예의가 없긴 하다. 그렇지만 문을 열고 자리에 앉혀 지내다 보면 손님은 차갑고 아픈 기억들을 양껏 남기고 결국엔 떠나갈 것이다. 반갑지 않았던 손님을 잘 배웅하고 난 후 당분간은 방문이 잠잠할 것 같다는 일말의 예감이 스친다. 그러나 손님을 문전박대하거나 미처 이야기를 마치기도 전에 돌려보내려고 안간힘을 쓰거나 만용으로 대화 대신 칼싸움을 하려 든다면 손님은 화가 나서 우리 마음에 우울증의 똬리를 틀거나 마음의 공간을 아예 자신의 것으로 빼앗으려고 하거나 더 무서운 친구들을 불러오는 악몽이 펼쳐질 수도 있다.

문제는 손님이 머무는 시간은 멈춘 것처럼 느껴지고 그가 남긴 차갑고 아픈 흔적들은 치유가 더딘 것이다. 이럴 때 젊은 세대가 탈출구로서 손쉽고도 즉각적인 방법으로 떠올리는 것이 오늘날 마약과 자살인 것 같다. ‘시간이 약이다’와 같은 위로는 무용해져 버린 기다림에 관대하지 못한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수단들을 해결책으로 미화하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채 방관하고 있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마약과 자살이 흔한 소재로 사용되고 관련한 유명인들의 사건 역시 빈번하게 보도된다. 마약상거래와 ‘우울증 갤러리’는 얼마큼 가까이에서 우리가 그것을 알고도 지나쳐 왔고 모른 체하다가 비로소 드러난 것일까 성찰하게 한다.

또한 삶의 재미를 누릴 여유와 기회를 박탈당하고 일찍부터 경쟁에 내몰고 채근한 결과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 결과 청년들은 허무와 냉소가 만연한 채 세상을 바라보고, 그들의 태도와 방식에는 어른들의 비난이 따르곤 한다. 20대를 지나온 뒤 그때의 불안하고 연약했던 세계들이 점차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는 걸 느낄 때면 가끔 한유주 작가의 소설집 〈연대기〉에 수록된 〈그해 여름 우리는〉이라는 단편소설을 꺼내 읽는다. 이 소설에는 밥 먹듯이 자살을 말하는 네 명의 이름 없는 무서운 20대가 있다. 매번 잘 살고 있는지 안부를 물으며 이들을 애정하는 만큼 현재의 청춘들에 공감하고 응원하고 싶다. 소설은 8년 전에 발표되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젊음의 감수성은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늙어가는 대신 썩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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