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으로] 내 안의 우생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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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숙 동아대 젠더·어펙트연구소 조교수

아이를 키우다 보면 “저 애가 누굴 닮아 저러나?” 싶어 한숨이 날 때가 종종 있다. 좋은 점만 닮고 나쁜 점은 안 닮았으면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인데, 어째서인지 대개 나쁜 점을 쏙 빼닮는다. 그것도 내가 아닌 배우자의 못마땅한 점일 땐 괜스레 짜증이 배우자를 향한다. 유전이란 게 대단하구나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좋은 유전자만 물려받은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최근 생명공학 기술의 발전으로 이러한 바람이 상상이 아닌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좋은 형질의 유전자만 골라서 아기를 만드는 ‘슈퍼 베이비’는 윤리적 문제 때문에 막혀있지만, 기술적으로는 가능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런 기술이 현실화하면 세상은 더 살기 좋아질까? 글쎄. 대답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다. SF영화 가타카가 보여 주듯이 유전자가 조작된 세상은 인간에게 결코 낙원이 아니다. 자손에게 좋은 것을 물려주고 싶다는 단순한 소망은 어느새 인간을 우수한 인간과 열등한 인간으로 나누는 우생학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불행으로 다가왔는지는 20세기 독일 나치의 역사만 봐도 알 수 있다. 열등한 인간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나치는 유전성 질병이 있거나, 장애가 있거나 알코올에 중독된 자들에게 강제 불임수술을 실시하고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안락사시켰다. 그리고 우수한 나치인을 증가시키기 위해 생명샘이라는 시설을 만들어 나치 친위대원으로 하여금 정부가 선발한 ‘우수한’ 여성들과 동침하여 아이를 낳도록 명령하였다. 기본적인 인권을 짓밟은 이런 일들이 어찌 가능할까 싶지만, 강제 단종이 단지 나치 독일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스웨덴, 노르웨이, 스위스, 미국 등 소위 선진국들은 물론, 가까운 일본에서도 강제불임수술이 광범하게 실시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1973년 제정된 모자보건법에는 특정 유전성 질환이 있는 경우 공익상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보건사회부 장관이 그 환자에게 불임수술을 명령할 수 있는 조항이 있었다. 1999년 이 조항이 폐지될 때까지 사회복지시설에서 지적장애인, 발달장애인 등에 대한 강제불임수술이 시행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이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 일본에서는 전후 우생보호법 아래에서 장애나 질병을 이유로 불임수술을 강요받은 이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진행 중이다. 다행히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는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아쉽게도 한국에서는 아직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불행한 역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언젠가 이들의 목소리를 우리 사회가 제대로 들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생학으로 점철된 과거에 대해 제대로 된 성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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