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자생적 문화공간을 위하여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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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금아 문화부 에디터

전포돌산공원 아래 ‘월하마을’
부산 소공연장 ‘원먼스 페스티벌’
시민 위한 ‘슬세권 문화예술’ 역할
민간 문화공간 지속에 관심 필요

전포동 산 65-27.

어플에 목적지 주소를 찍으면서도 위치가 가늠이 안 됐다. 내비게이션 안내를 따라 언덕을 오르니 갈림길이 나왔다. 재개발을 위한 이주가 시작된 동네 가운데를 지나가며 ‘여기가 맞나?’ 살짝 고민했다. 차도의 끝이 보일 즈음 아래쪽에 보이는 작은 마을. 곳곳에 숫자와 에어리어(area)가 쓰인 지붕이 보였다. 문화마을로의 변신을 꿈꾸는 ‘월하마을’이다. 전포돌산공원 아래 있는 작은 마을로 영화 ‘1번가의 기적’에도 잠깐 등장했던 곳이라고 한다. 사실 월하마을은 정식 명칭이 아니다. 밤 풍경이 예뻐서 정은숙 대표가 지은 이름이다.

정 대표가 전포동에 오래된 집을 사서 뭔가 해보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는 꽤 됐다. 오래된 건물이나 비어 있는 주택을 정비해서 전시나 작은 공연을 여는 정 대표의 행보를 봐왔던 터라 이번에는 어떤 공간이 나올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던 차에 SNS에 새 공간에서의 전시 초대장이 올라왔다. 작가 모임, 지붕 도색, 작품 설치 사진을 보며 머릿속에 그린 것보다 실제 현장의 규모는 더 컸다. 굽이진 골목을 따라 오르락내리락 8채의 빈집을 방문했다.


누군가의 안방이었을 공간에 자개장과 식물, 꽃을 가꾸는 동산바치 캐릭터를 상징하는 작품이 놓여 있다. 천장에 구멍이 뚫린 집 중앙에는 비단 베개를 잔뜩 짊어진 사람 모습의 조각이 설치됐다. 행복에 대한 강박을 다룬 작품으로, 작가는 비가 오는 날이면 느낌이 더 커진다고 했다. 전포동에 자라는 잡초 등을 직접 고아서 말린 풀 조형물은 빈집에 풀 냄새를 채웠다. 창문이 있던 자리로 들어오는 바람에 아이 모습의 조각에 매달린 연이 팔랑팔랑 움직인다. 전시장 한쪽에 마른 옥수수가 매달려 있는 모습에서는 지나간 삶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전포동에 거주한다는 한 관람객은 전시를 보니 옛날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고 했다. 좁은 골목, 작은 집에 살았지만 행복했던 시절을 추억했다.

정 대표가 이 마을을 선택한 이유는 자연과 지역민 삶의 역사가 공존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암반 위에 자리한 마을이라 개발의 물결이 미치지 않았고, 그 때문에 마을이 문현금융단지나 새로 생긴 고층 아파트 단지와 묘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곳을 문화마을로 만들고 싶어요.” 어쩌면 무모한 도전일 수 있지만 정 대표가 10년에 걸쳐 준비한 월하마을을 보니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인파견지원사업으로 월하마을을 찾은 이혜진 작가는 문화예술에 있어 민간의 자발적 움직임이 가지는 긍정적 효과를 이야기했다.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인한 빈집 증가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도시는 없다. 부산도 직면한 빈집 문제를 문화예술적으로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 논의할 필요가 있다. 월하마을이 그 문제에 해법을 찾는 하나의 샘플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이 갔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는데 알아서 문화공간을 만드는 예술인들이 있다. 지난해 말 방정아 작가는 부산 동구 좌천동에 새로 만든 작업실 일부를 전시장으로 꾸몄다. 벌써 두 차례의 기획전을 열어 지역 작가에게는 전시 공간을, 주민에게는 예술 감상 기회를 제공했다. 하반기에도 국내외 작가 3인의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다. 오유경 작가는 산복도로에 위치한 외갓집을 전시 겸 작업 공간으로 만들었다. 원도심 오래된 아파트에 자리 잡은 영주맨션이나 갤러리 수정도 있다. 직접 공간을 만드는 청년 작가들의 움직임도 눈에 띈다. 남구에 위치한 프로젝트 스페이스 릴리즈, 부산진시장 옆 상가 건물에 자리 잡은 아이테르가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간다. 도시 구석구석에 스며든 작은 문화공간은 집 가까이에서 즐기는 ‘슬세권’ 문화예술의 축이 된다. 이런 공간을 잘 엮으면 새로운 미술 감상 코스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24일자 신문에 소개된 ‘원먼스 페스티벌’. 6월 한 달 내내 부산시 전역에 퍼져 있는 민간 소공연장에서 클래식, 재즈, 국악, 인디밴드 등 다양한 음악 공연이 이어진다. 시민과 음악을 나누는, 작지만 알찬 공간을 가꿔온 부산소공연장연합회가 부산시와 손잡고 여는 음악 축제라 의미가 더 크다. 자생적 문화공간들이 긴 시간 이어 온 노력에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지역 문화예술의 발전을 위해서는 대형 문화시설 유치도 중요하지만 실핏줄 같은 작은 문화공간도 중요하다. 크고 작은 문화가 균형을 이뤄야 시민의 삶이 더 풍성해진다. 자생적 문화공간들이 지속될 수 있도록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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