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돌려차기’ 사건 뚜렷한 성범죄 징후·다수 정황증거 쥐고도 ‘초동수사 부실’

변은샘 기자 iamsa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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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잃은 피해자 특수 상황 감안
모든 가능성 열어두고 나섰어야
2차례 DNA 감정도 형식에 그쳐
혐의 입증 소극 탓 ‘진실규명’ 지연

‘부산 돌려차기’ 사건 DNA 감정서에 첨부된 청바지 사진. 안쪽 허리밴드와 허벅지 부위 등에서 가해자 DNA가 검출됐다. 피해자 제공 ‘부산 돌려차기’ 사건 DNA 감정서에 첨부된 청바지 사진. 안쪽 허리밴드와 허벅지 부위 등에서 가해자 DNA가 검출됐다. 피해자 제공

‘부산 돌려차기’ 사건 항소심 막바지에 성범죄 혐의가 뒤늦게 드러나자 경찰의 초동수사에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경찰은 CCTV 영상과 디지털 포렌식 검색 결과 등 다수의 정황 증거를 갖고 있었지만, 기억을 잃었던 피해자가 초기에 성범죄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혐의 입증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1일 〈부산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사건 현장에는 뚜렷한 성범죄 징후가 있었다. 오피스텔 로비 CCTV를 보면 가해 남성은 피해자를 입간판 뒤의 CCTV 사각지대로 끌고 간 다음 7~8분이나 머물렀다. 가해 남성의 휴대전화에서는 사건 직후인 당일 오전 ‘실시간 서면 강간미수’ 등 강간 관련 키워드를 포함해 총 17개의 검색 내역이 발견됐다. 처음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항소심 재판에서 “피해자의 청바지가 V자 형태로 열려 속살이 보였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피해자 진술이 없어 성범죄 입증에 한계가 있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수사를 맡았던 부산진경찰서 관계자는 “피해자에게 여러 번 성범죄 피해를 물었으나 ‘없다’고 했다”며 “성범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다각도로 수사를 진행했지만 정황증거만 있을 뿐 피해자 진술과 같은 확정적 증거가 없어 성범죄를 확인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건 피해자가 돌려차기로 가격당한 뒤 곧장 실신해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피해자의 진술에 기댄 경찰의 판단은 안일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피해자는 경찰 조사 당시 심한 상해를 입은 채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성범죄가 의심되는 결정적인 사건 자료인 CCTV 영상은 1심 재판에서야 처음 확인했다. CCTV 영상을 비롯해 가해자의 증언 등은 수사기관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진행한 민사소송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기억이 없는 피해자로서는 사건 초기 진술이 어려웠던 데다 성범죄를 의심할 만한 사건 자료도 받지 못해 성범죄 가능성을 경찰에게 적극적으로 제기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피해자 박민지(28·가명) 씨는 “병실에서 진술 요청을 받았다. 사건 당시 기억이 없어 성범죄가 의심되는 정황은 없다고 답했다. CCTV 사각지대 등 성범죄 의심 정황을 알게 된 것은 모두 직접 사건 자료를 구해 확인하고 난 후의 일”이라며 “기억이 없는 피해자가 사건 당시 성범죄 가능성을 입증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모든 정황을 파악하고 있던 경찰이 애초 성범죄 입증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진실규명이 더 앞당겨졌을 텐데 아쉽다”고 말했다.

최초 DNA 감정에서 가해 남성의 DNA를 확인하지 못한 것도 초동수사의 맹점이다. 경찰은 당초 2차례에 걸쳐 DNA 감정을 실시했다. 경찰은 1차 감정에서 속옷 1점을 의뢰해 속옷 밴드를 감식했으나 가해자 DNA는 나오지 않았다. 2차 감식에서 피해자 청바지 감식이 이뤄졌지만 바지 겉면 일부를 면봉으로 닦는 방식에 그쳤다. CCTV에서 가해자가 피해자를 들쳐 멘 행동이 확인된 상황이었기에 2차 감식은 사실상 가해자를 특정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성범죄 입증이 목적이었다면 청바지, 속옷에서 더 넓은 부위를 정밀하게 감정했어야 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도 피해자가 범죄를 진술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경찰의 대응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성균관대 임시근 과학수사학과 교수는 “성범죄 의심 정황이 있는 사건은 어떤 증거물을 채취하느냐에 따라 유형 자체가 달라진다”며 “사건 직후 증거물에서 최대한 넓은 부분을 확인했다면 DNA가 검출됐을 텐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어 “경찰이 애초 성범죄 가능성에 비중을 뒀다면 응급 치료 이후 증거물을 정밀하게 채취하는 성폭력 응급센터 등을 통해 성범죄를 입증할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경찰대 한민경 범죄학과 교수도 “명확한 현장 증거가 없고 피해자가 기억을 잃은 이번 사건은 일반 성범죄 사건과는 다르다”면서 “애초 경찰이 성범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DNA 검사를 의뢰했을 텐데 검사에서 속옷의 특정 밴드만을 확인했다는 것이 아쉬운 지점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결과 이외 다른 부분에서도 성범죄 의도를 적극적으로 검토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변은샘 기자 iamsa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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