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 시대 문화풍경] 이데올로기와 노래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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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협동과정 강사

뉴욕챔버가 지난해 10월 카네기홀에서 개최한 리사이틀 콘서트. 황윤주 제공 뉴욕챔버가 지난해 10월 카네기홀에서 개최한 리사이틀 콘서트. 황윤주 제공

정지용 ‘고향’, 박화목 ‘망향’, 이은상 ‘그리워’는 곡조가 같다. 1933년 작곡가 채동선이 정지용의 시 ‘고향’에 처음으로 곡을 붙였다. 서정적인 멜로디와 가사는 나라 잃은 설움과 고향상실의 비애를 달래며 널리 불렸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명망가 시인 정지용이 사라졌다. 냉전시대 한국에서는 납월북 예술인들의 흔적을 지우기에 바빴다. 채동선의 노래에 정지용 대신 박화목과 이은상의 시를 얹었다. 월북 어린이문학가 윤복진의 ‘물새 발자욱’이 윤석중의 ‘물새알’로 바뀐 사연도 이와 다르지 않다. 납월북 음악가들의 노래가 해금된 것은 1988년 10월의 일이었다.

와세다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채동선은 독일로 건너가 바이올린과 음악이론을 공부했다. 1929년 귀국하여 작곡과 연주, 실내악단체와 음악단체의 설립, 민요채집 등 다채로운 활동을 펼쳤다. ‘대추 씨 같은 마르고 곧은 체구’에도 부두 노역까지 감당해야 했던 그는 1953년 2월 부산에서 52세로 운명을 달리했다. 피란 시절 빈한(貧寒)한 예술가의 죽음을 통절하게 애도한 이는 문화인의 사명을 함께 고심하던 윤이상이었다. 그는 대중이 ‘문화라는 영양’을 섭취하는 것은 문화인의 빈약한 혈관에서 피를 뽑아 민중의 혈관에 수혈해 주는 것과 같다고 여겼다.

2022년 10월 2일 채동선의 ‘고향’과 월북작곡가 김순남의 ‘자장가’가 뉴욕 카네기홀에서 연주되었다. 이데올로기의 장벽에 가로막혔던 금지곡들이다. 김지영이 작곡한 ‘바람을 좇는 호랑이(Tiger Chasing the Wind)’는 윤이상을 기린 곡이다. 이 공연을 주도한 이는 황윤주다. 미국 센트럴플로리다대 교수로 자리 잡은 바수니스트이자 음악 연구자다. 도전적인 이력보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 근대음악사에 대한 열정이었다. 콜로라도대 박사과정에서 민족음악학을 접하면서 한국음악의 정체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즈음 미군정 일라이 헤이모비츠와 김순남, 북한음악과 식민지시대 동요에도 관심이 깊다.

최근 부산에서 그녀를 만났다. 한국전쟁기 부산음악에 관심을 두고 필자를 찾았다. 피란수도 부산의 음악으로 물꼬를 튼 이야기는 근대음악사를 일군 음악가의 삶과 냉전시대 북한음악을 넘나들며 좀체 끝날 줄 몰랐다. 냉전과 열전을 거치며 민족음악의 미래를 고민하던 채동선은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병사했으며, 그의 노래는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했다. 해방기 북으로 향했던 김순남은 남과 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가혹한 운명을 맞았다. 분단의 희생양 윤이상은 평생 그리던 고향 통영을 살아서 밟지 못했다. 예술가의 삶과 음악에 숨결을 불어 넣는 일에는 이데올로기의 금제나 지역의 경계란 있을 수 없다. 미국에서든 변방 도시 부산에서든 물길은 끝내 한길에서 만난다. 그 어디에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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