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자연, 예술이 공존하는 섬-나오시마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김민지 예술학 박사

부산지역 문화예술인을 주축으로 한 6명이 최근 일본 예술의 섬인 가가와현 나오시마, 데시마, 오카야마현 이누지마를 다녀왔다. 일상의 삶과 예술 작품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공간에서 예술적 영감을 길어 올린 김민지 예술학 박사의 글을 싣는다.


‘예술은 익숙한 습관들과 작별한 그 용감한 순간에 시작된다.’(아나톨리 바실리예프)

여행은 언제나 설레인다. 특히나 일본 나오시마 섬같이 기대되는 미술관이 많은 곳으로 향하는 여정은 더욱 그러하다. 함께한 사람들은 각기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로 사진작가, 미학자, 패션 디자이너, 사회학과 교수, 치과의사였다.

김해공항에 집결한 우리는 아직 다카마쓰까지 직항이 없는 상황이어서 간사이공항으로 일본에 입국했다. 입국 후에 다카마쓰까지는 렌트한 차를 이용했다. 김해공항에서 간사이공항으로, 고베를 거쳐 다카마쓰로 향하는 여정이었다. 도착 첫날은 다카마쓰 호텔에서 짐을 풀고, 다음날 다카마쓰 항에서 나오시마로 향하는 페리에 몸을 실었다. 나오시마는 오카야마와 가가와 현 사이에 있는 일본 세토내해에 자리한 수많은 섬들 중 하나이다. 약 8㎢ 면적의 작은 섬으로 주민은 고작 3600명 정도이다. 도쿄의 화려함, 교토의 여유로움, 오사카의 시끌벅적함과는 거리가 먼 아주 외딴 섬이었다. 우리나라 서해안의 작은 섬 같은 느낌이랄까.


일본의 건축가와 아티스트가 협업해 만든 테시마 미술관은 전시실이 하나뿐이다. 조명례 패션디자이너 제공 일본의 건축가와 아티스트가 협업해 만든 테시마 미술관은 전시실이 하나뿐이다. 조명례 패션디자이너 제공

미술관의 관념을 깨는 곳, 테시마 미술관

우리 일정의 미술관들은 나오시마, 데시마, 이누지마 3개의 섬에 흩어져 있었다. 나오시마 섬 투어는 다음날 여정으로 미루고 나오시마에서 다시 배를 타고 테시마에 도착하였다. 테시마 항구에 내려서 올라탄 버스는 꼬불꼬불 시골 마을길을 따라 올라가더니 언덕 꼭대기에 도착했다. 거기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푸른 세토내해가 펼쳐지고, 우측 풀밭 사이로 물방울 모양의 큰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이 낮은 돔 형태의 건물이 테시마 미술관이다. 일본의 건축가와 아티스트가 협업해 만든 이 미술관은 놀랍게도 전시실이 단 하나뿐. 안내원의 지시에 따라 신발을 벗고 미술관 입구에 들어서니 눈앞에 처음 본 광경이 펼쳐졌다. 미술관의 천장은 두 개의 큰 구멍이 뚫려 있어 햇빛과 바람, 하늘과 구름, 데시마의 흔들리는 나무들을 볼 수 있었다. 이곳에 있는 작품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바로 바깥에서 본 물방울 모양의 건축물처럼 실제 물방울을 이용한 작품들이었다. 바닥에서 방울방울 올라오는 물방울들이 굴러가는 모습, 바람에 물방울들이 흩날리며 크고 작은 물방울들을 만들어내는 장면이 너무나 인상적이다. 미술관은 많은 관람객들로 붐비고 있었지만, 공간의 일부가 된 듯 모두 조용하고 경건했다. 모두들 물방울 옆에 앉아 있거나 뚫린 천장의 자연이 펼치는 작품을 향해 누워서 데시마의 바람과 나뭇잎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명상하듯 감상에 몰두하고 있었다. 자연의 소리와 바람 속에서 조용히 머물며 명상하기에 더없이 좋았다.


이누지마 섬으로 가는 선착장 앞에선 김홍희 사진작가, 김민지 예술학 박사, 박승영 박치과의원 원장, 김종희 문화공간 빈빈 대표, 고영삼 사회학자(왼쪽부터). 조명례 패션디자이너 제공 이누지마 섬으로 가는 선착장 앞에선 김홍희 사진작가, 김민지 예술학 박사, 박승영 박치과의원 원장, 김종희 문화공간 빈빈 대표, 고영삼 사회학자(왼쪽부터). 조명례 패션디자이너 제공

폐허의 부활, 이에 프로젝트와 세이렌쇼 미술관

나오시마는 과거 해상교통의 요지였으며, 미쓰비시 중공업이 금속제련소를 세우면서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중금속 폐기물 등으로 환경이 파괴되고 제련업마저 쇠락하자 나오시마는 이내 버려진 섬이 되었다. 이 섬이 예술의 섬으로 다시 태어난 것은 후쿠다케 소이치로라는 한 기업인의 노력이 있었다. 일본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와 손을 잡고 섬 전체를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나오시마 프로젝트’를 감행하였다. 자연과 예술이 경계를 허물며 아름다운 마을로 재탄생된 것이다. 나오시마는 안도 다다오의 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연 작품들 중 최고의 전시품은 미술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안도 다다오의 작업은 단순화된 조형과 빛이 어우러진 조경, 콘크리트를 주로 사용한다. 나오시마 곳곳에 그의 회색빛 콘크리트 미술관이 있는데, 나오시마를 예술의 섬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런 멋진 미술관들 때문만은 아니다. 나오시마가 전 세계 어느 곳과도 차별화되는 건 다름 아닌 옛 가옥을 아트 하우스로 개조한 ‘이에 프로젝트’ 때문이다. 이 프로젝트는 혼무라 지역에 버려져 있던 빈집과 신사들을 새로운 개념의 예술 건축물로 복원하는 작업이었다. 나오시마의 아트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두면서 인근의 두 섬, 이누지마와 데지마도 예술의 섬으로 거듭났다.

오전 일정을 끝낸 뒤 데시마에서 다시 배를 타고 이누지마로 향했다. 이누지마 섬의 주요 명소는 이에 프로젝트와 세이렌쇼 미술관이다. 항구에 도착하면 매표소에서 두 곳을 모두 둘러볼 수 있는 티켓을 구매할 수 있다. 그리고 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어가면 세이렌쇼 미술관이 나타난다. 바다를 마주한 이 미술관은 마치 고대 유적지처럼 나지막한 산에 둘러싸인 채 고고한 모습을 드러냈다. 폐쇄된 구리 제련소를 개조하여 만든 곳으로,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을 소장하는 미술관이 아니라 섬이라는 자연환경으로 예술작품을 만들었다. 이곳은 옛 구리 제련소가 있던 자리로 한창 성장하다 쇠퇴기를 맞은 모습을 그대로 보존해 쓸쓸하면서 운치 있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기존에 있던 굴뚝과 벽돌, 태양을 이용해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난 이 건축물은 자연만이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을 없애고 치유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폐쇄된 구리 제련소를 개조해 만든 세이렌쇼 미술관.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을 소장하는 미술관이 아니라 섬이라는 자연환경으로 예술작품을 만들었다. 김홍희 사진작가 제공 폐쇄된 구리 제련소를 개조해 만든 세이렌쇼 미술관.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을 소장하는 미술관이 아니라 섬이라는 자연환경으로 예술작품을 만들었다. 김홍희 사진작가 제공

세이렌쇼 미술관을 뒤로하고 천천히 마을을 거닐면 옛 가옥을 아트 하우스로 개조한 집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버려져 있던 빈집들은 새로운 개념의 예술 건축물로 복원되어 이누지마의 아름다운 풍경과 어우러져 소박하고 검소한 멋을 자아낸다. 우리는 이누지마를 거닐며 예술과 자연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장소들을 눈으로 만끽하면서, 예술 프로젝트들이 섬의 삶에 얼마나 활력을 불어넣었는가에 대해 얘기했다. 미학자인 K는 이 결과물들은 과거를 존중하면서도 미래로 향하는 시간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재탄생 된 것이라고 표현했다. 일행들은 입을 모아 낡은 폐허들이 이렇게 완성도 높게 복원된 예술 마을은 흔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왜 부산은 이렇게 멋진 프로젴트가 없을까 정말 안타깝다고도 했다. 사실 부산은 바다, 포, 산책로 등,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많으면서도 이것 외에 이렇다 할 관광지도, 예술 프로젝트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달맞이나 해운대, 광안리에도 자연경관을 이용한 단순한 상업적 개발만 이루어지는 것이 문제라는 토론으로 이어졌다. 사회학 교수인 G는 부산도 낡고 폐허가 다 된 지역을 살리기 위해 도시재생 프로젝트가 끊임없이 시행되고 있다고는 했다. 그러나 대부분 오래된 동네를 단순히 벽화로 꾸미고 상업공간 몇 개 들여놓고는 예술적 가치를 지닌 공동체라고 급조한 수준에 그친다고 지적했다. 치과의사인 P는 관료주의 전시 행정의 결과라고도 비판했다. 계속해서 그는 우리나라도 돈을 벌면 자식에게 상속하려고 총력을 기울일 것이 아니라 이렇게 수준 높은 프로젝트에 투자해서 아름다운 문화유산, 관광지를 후대에 물려줘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패션 디자이너인 C는 지자체와 시민단체가 눈을 높여서 장기투자와 체계적인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했다. 나오시마의 성공은 그 자체로도 인정받을 만한 예술적인 성과이지만, 이러한 성공의 배경에는 장기적 계획과 지속적인 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 앞에 선 조명례 패션디자이너, 박승영 박치과의원 원장, 고영삼 사회학자(왼쪽부터). 김민지 제공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 앞에 선 조명례 패션디자이너, 박승영 박치과의원 원장, 고영삼 사회학자(왼쪽부터). 김민지 제공

거장들과의 만남,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

여행 3일차는 나오시마의 미술관 투어였다. 다카마쓰에서 쾌속선에 차를 싣고 나오시마에 도착해 이동했지만 빠듯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 바쁜 걸음을 재촉해야만 했다. 이 섬의 명소는 크게 베네세 하우스, 지중 미술관, 이우환 미술관, 안도 뮤지엄을 꼽을 수 있다. 각각의 특성이 있었지만, 공통점은 나오시마라는 섬에서 영감을 받고, 그 공간과 환경에 맞춰 작가들이 새롭게 만든 ‘장소 특정적 작품’이라는 것이다.

베네세 하우스 해안가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 호박 작품은 베스트 포토존.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으려고 줄을 설 정도이다. 바다를 바라보고 선 쿠사마 야요이의 호박은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설치 작품이다. 우리 일행도 노란 호박을 배경으로 다양하게 사진을 찍었다. 차에서 내려 해안가로 조금 걸어가면 베네세 하우스 뮤지엄을 만날 수 있다. 건물 안팎에는 앤디 워홀, 게르하르트 리히터, 데이비드 호크니, 로버트 롱고 등 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들이 많아 관람 시간이 부족할 정도였다. 대도시도 아닌 외딴 작은 섬에 이런 좋은 작품들을 이렇게나 많이 가져다 놓다니. 역시 일본의 컬렉션 수준은 대단하다.


땅속의 예술작품, 지중미술관

안도 다다오의 작품인 지중미술관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땅속 미술관이다. 주변의 자연경관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 건물의 대부분이 땅속으로 들어가서 지어졌다는 이 미술관은 단 3인의 9개 작품만을 위한 공간이다. 클로드 모네, 월터 드 마리아, 제임스 터렐의 작품들이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과 조화롭게 전시되어 있는 모습은 세계 어디를 가도 볼 수 없는 특별한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 작가들의 작품만 염두에 두고 설계한 미술관이다 보니 건물과 작품의 조화는 그야말로 완벽에 가깝다. 전시장 곳곳에서 관람객들의 소리 없는 탄성이 끊이질 않는다. 이 미술관은 안도 다다오 특유의 빛과 풍경, 조형물을 한 곳에 담아낸 경이로운 건축물이다. 그 때문에 작품과 함께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건축물 감상 역시 빠뜨려선 안 되는 곳이다. 기하학적 모양으로 분리된 건물들은 내부와는 대조적이면서도 여러 공간들의 대립과 조화가 작품들과 어우러져 너무나 뛰어난 예술작품 그 자체이다.

일행 중 의사인 P는 나오시마에 있는 미술관들이 명성과 기대에 못 미친다는 얘기를 하였다. 아무래도 상업적이고 웅장한 큰 규모의 미술관을 생각하고 온 관광객은 처음에 그렇게도 느낄 수 있을 것도 같다. 서양 미술을 전공한터라 세계 곳곳의 많은 미술관들을 다녀 보았지만 이곳처럼 자연과 작품과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만나서 전체가 예술작품이 되는 곳은 보기 드물었다. 아니, 본적이 없었다. 바로 이 점이 매년 서양을 비롯한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들이는 힘이 아닐까.


나오시마의 아우라, 이우환 미술관

이우환의 작품은 서양의 미니멀리즘, 개념미술의 동양적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무언가를 창조하는 대신, 실제 사물을 그대로 제시함으로써 물질성을 부각시키고, 그 이후 사물들이 위치한 시공간의 관계에 대해 주목하였다. 자연을 상징하는 돌과 인공적인 것을 상징하는 철판, 그 둘의 관계에 평생을 천착하며 예술가로서 고민을 작품에 담아낸 이우환. 아름다운 섬의 자연환경과 이우환의 거대한 조각 작품이 미술관이라는 공간과 합해져 거대한 아우라를 뿜어낸다. 대가의 작품이 안도 다다오의 건축과 하나의 접점을 이루는 것이다. 그의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조용히 명상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어진다. 이우환의 작품이 걸려 있는 그 방은 마치 성지, 명상 센터 같았다. 테시마 미술관 그 장소에서 느꼈던 동양의 정신, 젠 사상, 숭고함. 서양 미학에만 치중해 있던 필자에게 이 두 공간의 경험은 동양 예술의 위대함을 일깨워 주는 귀한 시간이었다. 섬이라는 아름다운 공간에서 휴식하고 자연의 소리에 감동하고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는 브레인 워싱(Brain washing) 같은 경험이라까.

더 이상 버려진 땅, 쓸모없는 땅이 아니라 아름다운 예술의 섬으로 거듭난 나오시마와 이누지마, 데시마.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수많은 작품은 몇 주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가슴에 잔잔한 파도를 일으킨다. 섬이라는 공간이 예술과 만났을 때 만들어내는 상상 이상의 아름다움, 이 감동을 당신도 꼭 느꼈으면 좋겠다.


김민지 예술학 박사 bomgil0513@naver.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