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할 부처 이관하겠다"는 말뿐 [8000 원혼 우키시마호 비극 ③]

손희문 기자 moonsl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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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놓쳐 버린 기억들

1993년 진상규명회 꾸려 활동
폭침 사건 알리려고 유족 발버둥
일본 시민단체와 진상 규명 협업
일본 해군승무원 찾아 기록 남겨
영화도 제작했지만 국민 잘 몰라

부산일보 | #미스터리 #미스테리 #대한민국 1945년 8월 24일. 해방의 기쁨도 잠시, 강제동원 한국인을 태운 귀국선 ‘우키시마호’가 일본 마이즈루항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4730t급 거함은 돌연 뱃머리를 돌려 그곳으로 향했고, 의문의 폭발과 함께 사라졌다. ▶영상제공 및 도움 _ 김진홍 감독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족 김자야 씨가 14일 78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부산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을 찾아 우키시마호 추모비를 어루만지고 있다. 김종진 기자 kjj1761@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족 김자야 씨가 14일 78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부산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을 찾아 우키시마호 추모비를 어루만지고 있다. 김종진 기자 kjj1761@

1945년 8월 24일. 해방의 기쁨도 잠시, 강제동원 한국인을 태운 귀국선 ‘우키시마호’가 일본 마이즈루항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4730t급 거함은 돌연 뱃머리를 돌려 그곳으로 향했고, 의문의 폭발과 함께 사라졌다.

그토록 그리던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수천 명의 한국인이 수장됐다. 일본이 발표한 한국인 공식 사망자는 524명. <부산일보>와 <서일본신문>은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및 옛 오미나토 해군시설부의 우키시마호 희생자 명단을 각각 단독 입수해 번역했다. 1950년 일본 외무성 기록문서인 ‘우키시마호 인양요청서’에 따르면 배 탑승 인원은 8000여 명이었다.

2023년 8월 8일. 78년이 흘렀지만 그들은 죽어서도 고향을 찾지 못한다. 배는 고철로 팔렸고, 대부분의 유해는 주변에 집단 매장되거나 바닷속에 잠겼다. 50년 전 각계의 노력 끝에 국내로 반환된 유골조차 뿔뿔이 흩어졌다.

<부산일보>는 자매지 <서일본신문>과 한일 지역언론사 최초의 공동기획으로 일본에 남은 유골을 되찾고 ‘잊힐 위기’에 놓인 우키시마호의 마지막 기록을 남긴다. 이미 봉환된 유골도 한데 모아 ‘그날’을 기억할 역사적 공간이 마련되길 바란다. 현 정부의 미래 지향적인 한일 관계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풀어야 할 실타래다. 목적지 부산항을 향한 우키시마호의 마지막 항해다.

“제 나이 여든한 살입니다. 죽어서 아버지를 뵈면 적어도 ‘유골은 고국의 금수강산에 모셔뒀습니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유족 한영용 씨)


“지난 30년은 ‘잊히지 않으려 발버둥 친 역사’였습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줬다면 이렇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텐데…. 여태까지의 활동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이 어떻게든 역사와 기억에 남아야, 다음 세대라도 이 문제를 풀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 전재진 회장)

우키시마연혁표 우키시마연혁표

 

■30년 전부터 기록·홍보 총력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을 규명하고, 기록하려는 민간의 노력은 1990년대부터 본격화됐다. 1993년 발족한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이하 진상규명회) 전 회장은 전국에 흩어진 생존자와 희생자 유가족 등을 찾아 사건에 얽힌 이야기를 모으고 각종 증언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수도권, 부산, 광주, 대전, 대구 등 대도시뿐 아니라 생존자가 있는 곳이라면 산골 마을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1995년 충남 천안 시민회관 강당에서 전국 생존자 합동증언대회가 열렸다. 전국에 흩어진 생존자가 한 자리에 모인 첫 모임이었다. 이후 진상규명회는 증언대회에 참석한 생존자 23명과 이후 전국을 돌며 만난 생존자 58명 등 총 81명의 증언을 엮어 세상에 내보였다. 증언록에는 연행 당시의 이야기부터 강제노동 생활상, 우키시마호 승선과 침몰 경위 등이 소상하게 담겼다.

1995년부터 ‘우키시마호 알리기’에도 온 힘을 다했다. 진상규명회는 유동인구가 많은 광주, 대전, 천안, 영동 역전을 비롯해 여의도 소재 각 정당 당사, 독립기념관 등에서 폭침사건 관련 전단을 배포하고 사진전을 열었다. 우키시마호의 목적지였던 부산에서는 2011년 추모제가 시작됐다. 우키시마호희생자추모협회가 매년 사건이 일어난 8월 24일에 연다.

우키시마호 사건이 그나마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 계기는 2019년 영화 ‘우키시마호’ 개봉이다. 전국에 동시 상영되면서 언론과 TV 예능, 시사교양 프로그램 등에서 다뤄졌다. 이후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은 2021년이 돼서야 대한민국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에 등재됐다.

 

■일본 해군 승무원도 직접 조사

유족회와 시민단체 등은 국외에도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을 알리려 꾸준히 노력했다. 특히 일본에서 진상 규명, 유해 봉환 등을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진상규명회는 1994년 일본 현지를 답사해 강제노동 현장을 조사하고, 일본연구가들과 사건의 진상 등을 주제로 한 간담회를 가졌다. 1997년에는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재판 추진 모임’ 소속 일본 변호사들과 만나 한국인 생존자들의 진술을 공유했다.

또 3년에 걸쳐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당시 승선한 일본 해군 승무원을 직접 조사했다. 당시 증언과 사후 처리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의서를 보냈고, 도쿄에서는 해군 승무원들을 만나 기록을 남겼다. 사실상 한국 정부가 무관심으로 방치해 온 진상 규명을 민간에서 대신한 것이다.

최근에는 현지 유해 발굴을 위해 직접 나섰다. 부산 추모협회와 유족회는 지난 4월 일본 시민단체 ‘우키시마마루 순난자를 추도하는 모임’(마이즈루 추도 모임)의 초청을 받아 우키시마호 희생자 집단 매장지인 마이즈루항 일대를 답사했다. 유해 발굴·조사를 위한 사전 답사였다. 추모협회와 유족회 측은 “더 늦기 전에 하루빨리 민관 조사단이 꾸려져 유해 발굴과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1999년에는 AP, AFP, UPI, 로이터 등 외신에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을 제보했다. 사상 최대의 해양 참사임을 알려 세계 각국의 관심을 불러 모으고자 했지만 결과는 녹록치 않았다. 진상규명회 전재진 회장은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에 관심을 촉구하는 문서를 팩스로 보내는 등 외신에도 호소해봤지만 묵묵부답이었다”고 말했다.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가 1999년 일본 도쿄에서 우키시마호 해군 승무원들과 면담하는 모습. 진상규명회 제공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가 1999년 일본 도쿄에서 우키시마호 해군 승무원들과 면담하는 모습. 진상규명회 제공

 

■절절한 노력에도… 무관심했던 정부

정부와 관계 기관을 대상으로 한 탄원도 지난하게 지속됐다. 시민단체는 1995년도부터 정부가 바뀔 때마다 대통령을 비롯해 보건복지부, 외무부, 국민고충처리위원회, 국회입법민원실 등에 수십 여 차례 사건 해결과 유해봉안처 신설이 필요하다는 공문을 보냈다.

그러나 각 기관은 서로 “해당 내용을 관할 부처에 이첩하겠다”며 책임을 미뤘고, 사건의 실질적 해결을 위한 진척은 이뤄지지 않았다. 1999년 당시 관할 부처인 외교통상부의 의미있는 답변을 얻는 데 5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외교통상부는 “우키시마호 희생자 유해 발굴과 봉환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부 지원이 필요한 사항을 요청하면 지원 가능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이후 정부 차원에서 눈에 띄는 진전은 없었다.

이 같은 노력에도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은 여전히 국민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2018년 영화 ‘우키시마호’ 제작 당시 전국 10개 도시에서 일반 시민 1000여 명을 대상으로 난징대학살과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에 대한 설문조사가 진행됐다. 그 결과 ‘난징대학살을 안다’고 응답한 사람은 75%에 달했지만 ‘우키시마호 사건을 안다’는 응답자는 6%에 불과했다. 영화 ‘우키시마호’ 김진홍 감독은 “둘 다 아픈 역사지만,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더 잘 기억하는 건 기록되고 알려졌기 때문”이라며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역시 잊히지 않기 위해 역사에 제대로 기록되고 알려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손희문 기자 moonsl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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