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우키시마호 사망자 500명? 수천 명은 더 죽었습니다” ['8000원혼' 우키시마호의 비극]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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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확인된 생존자 전영택 씨

부산일보 보도 후 아들이 연락해 와
95세 전 씨 기억은 아직도 생생
“만실 돼도 사람들 계속 배 태워
아래칸 아이 동반 가족 더 피해”
구사일생 후 증언 기회도 없어
희생자 추모 공간 마련 등 촉구

지난 3일 울산 울주군 자택에서 우키시마호 생존자 전영택(95) 씨가 78년 전 폭침 사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전 씨는 당시 17세로 한국인 강제징용자들의 우키시마호 탑승부터 피해, 구체적인 생환 과정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이정 PD luce@ 지난 3일 울산 울주군 자택에서 우키시마호 생존자 전영택(95) 씨가 78년 전 폭침 사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전 씨는 당시 17세로 한국인 강제징용자들의 우키시마호 탑승부터 피해, 구체적인 생환 과정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이정 PD luce@

“500명이요? 수천 명은 더 죽었습니다.” 전영택(95·울산 울주군) 씨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자세를 고쳐 앉더니 목소리를 높였다. 취재진으로부터 일본이 발표한 우키시마호 사건 공식 사망자가 500여 명이라는 사실을 처음 듣게 된 것이다.

“굉장히 큰 배에 사람이 한없이 탔습니다. 아오모리 쪽으로 강제 징용을 가거나 돈을 벌러 간 사람은 아이랑 가족을 데리고 다 거기 탔지. 대부분 배 아래 1~2층에 탔으니 못 나오고 돌아가셨습니다. 말로 다 못 합니다.”

전 씨는 새로 확인된 우키시마호 생존자다.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회가 1995년 마지막으로 기록한 81명의 우키시마호 생존자 기록부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생존자·유족을 찾는다는 본보 기사(부산일보 8월 22일 자 1면 보도)를 보고 전 씨 아들이 취재진에게 연락을 해왔다. 전 씨의 아들 전병관 씨는 “생존자가 최근에도 돌아가셔서 이제 두 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보도를 봤다”면서 “아버님 생전에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겠다 싶어 연락하게 됐다”고 말했다. ‘해방 귀국선’ 우키시마호는 1945년 8월 24일 당초 목적지 부산항이 아닌 일본 마이즈루만에서 의문의 폭발과 함께 침몰했다. 지난 3일 울산 울주군 자택에서 만난 전 씨는 당시 만 17세였을 때의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귀만 조금 어두울 뿐, 한 시간 이상 그날의 기억을 쏟아낼 정도로 정정했다. 취재진이 앞서 생존자 81명을 확인한 결과, 사건을 기억하는 생존자는 당시 열 살이었던 이순연(87·경남 진주시) 할머니가 유일했다. 전 씨는 일본의 우키시마호 고의 폭침 의혹을 뒷받침할 증언도 했다. 그는 “젊은 강제 징용 대장이 한국인이었다. 같은 전라도 출신 친구에게 ‘저 배는 위험하니 타지 마라. 침몰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면서 “그 둘은 배를 타지 않았다. 나는 예사로 듣고 그냥 탔다”고 말했다.

전 씨는 해방을 1년가량 앞둔 시점에 강제 징용 영장을 받고 일본 아오모리현으로 끌려갔다. 집 뒤 매봉산에 토굴을 파고 일주일간 숨었지만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사람이)살려고 하니 희한하게 탄광이 아니고 아오모리 해군 본부 쪽에 배치됐습니다. 탄광에 들어간 사람은 얼추 다 죽었거든. 평소 모래 나르는 일을 했는데, 일본 패전 후에는 본부 2, 3층 서류를 다 태우라고 하더라고. 군용·징용 서류도 싹 타 버렸지.”

우키시마호를 탄 건 출항 직전. 군용 모자를 쓰고 금테를 두른 한 일본군 간부가 “열차를 타려면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해 고민 없이 배에 올랐다. 이미 만실이어서 전 씨와 일행은 갑판에 탔다. 그 덕분에 침몰하는 배에서 빠르게 탈출할 수 있었다. “그렇게 큰 군함은 처음 봤습니다. 워낙 커서 육지에 못 들어오고 저 물 밖에 대 놓고 사람을 사흘간 실어 나르더라고. 배 밑에서부터 사람을 채웠는데 아래 칸은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이 많이 탔습니다.”

폭발 과정도 구체적으로 기억했다. 배에서 뛰어 내린 사람들이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직접 보기도 했다.

“물이 모자라 인근 항에 간다고 들었습니다. 작은 항구로 들어가는데 한 번 쾅 하더니 배가 꾸부정했고, 다시 쾅 하니 배 복판이 내려앉았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쾅 하니 그만 배가 가라앉더라고. 해군이 항구 쪽으로 신호를 보내니 고깃배들이 막 모여들어 배에 갖다 댔습니다. 그때 퍼뜩 넘어가 살았지. 밑에 탄 사람은 안에서 다 죽고….”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빈털터리가 됐다. 귀국할 때 일본군으로부터 받았던 현금 20만 원과 가방은 모두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 주변에서 돈을 빌려 가까스로 뱃삯, 차비를 내고 귀향했다. “남보다 뒤늦게 돌아오니 제가 죽은 줄 알고 아버지가 울고 앉아 있었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해서 남의 집에서 일하며 그렇게 버텼지. 생환 때 빌린 돈도 갚고.”

이후 강제징용과 관련해서는 관련 기관, 언론 등에서 한번씩 찾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우키시마호 사건에 대해서는 증언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한편 우키시마호 생존자·유족을 찾는다는 〈부산일보〉 보도 이후 전 씨를 비롯해 당시 여러 생존자의 유족이 취재진에게 연락을 해왔다. 이들은 모두 역사 속에서 사라져 가는 우키시마호 사건에 안타까움을 드러내며 희생자 유해 봉환과 추모공간 마련 등을 촉구했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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