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부산의 뱃길]ⓛ예나 지금이나 대마도는 부산에서…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 김수빈 부산닷컴 기자 suvely@busan.com ,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 강승민 부산닷컴 기자 kang00527@busan.com , 박정훈 부산닷컴 기자 pjh045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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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맨눈으로 보이는 이국의 섬 대마도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교류 흔적 오롯이 담겨
갈등과 평화의 역사 평화와 선린우호로 승화


영도 전망대에서 보이는 대마도. 왼쪽 수평선의 육지가 대마도다. 영도 전망대에서 보이는 대마도. 왼쪽 수평선의 육지가 대마도다.

부산은 예로부터 대륙의 관문이다. 세계로 뻗어가는 출발지였고, 또 대륙의 시작점이다. 부산은 해양수도라는 이름에 걸맞은 도시다. 부산의 옛 뱃길을 좇아 부산을 중심으로 실핏줄처럼 연결된 동북아 해양수도 부산의 지위를 톺아보려 한다. 부산항을 기착지로 삼았던 옛 뱃길을 조명하고, 북항재개발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미항으로 거듭나는 부산의 위상을 널리 알리기 위해 <부산일보 특별취재팀>은 이번 기획 시리즈를 준비했다. 특히 이번 기획은 영상 콘텐츠 제작에 공을 들였다. 물론 기사 콘텐츠도 함께 해, 보는 구독자와 읽는 독자의 이해와 요구에 모두 부합하려 했다.


부산일보 | 부산, 역사의 뱃길을 잇다⛵ 바다 건너 국경을 달리한 부산과 대마도🏞️ 대륙 문명의 해양 전파 기착지인 대마도의 특이성을 알아보고 해양의 전초기지이자 대륙의 관문인 부산의 위상을 제고한다👏 ------------------------------------------------------------- 🔥 부산일보 홈페이지 🔥 http://www.busan.com/ -------------------------------------------------------------- #부산의뱃길 #부산 #대마도 #한일뱃길

특별기획 시리즈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부산, 역사의 뱃길을 잇다

1.부산항은 세계와 만나는 관문이었다-대마도 옛 뱃길

2.남해와 동해의 뱃길이 통하는 부산-남해 동해 옛 뱃길

3.내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대동맥-낙동강 옛 뱃길

4.이순신의 바다, 옛 뱃길로 톺아보다-부산대첩 옛 뱃길


특별기획은 모두 4부작으로 1~3부작은 부산일보와 국립해양박물관이 공동기획했다. 4부 '이순신이 지킨 바다'는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의 공모 사업에 선정돼 별도로 제작했다.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는 공모 심사에서 "'이순신의 바다, 옛 뱃길로 톺아보다' 기획은 이순신 장군의 출정로를 직접 배를 타고 좇으며 역사의 현장을 방문, 해양수도 부산의 미래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는 점에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부산일보>는 특별기획 시리즈를 연말까지 차례로 영상 콘텐츠와 함께 선보인다. 이 시리즈를 통해 '부산다움'과, 해양·대륙의 투지가 융화하는 '부산 정신'을 점검하고 드높이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부산항을 막 벗어나면 왼쪽으로 보이는 오륙도. 부산항을 지키는 석상 같다. 부산항을 막 벗어나면 왼쪽으로 보이는 오륙도. 부산항을 지키는 석상 같다.

1.부산항은 세계와 만나는 관문이었다-대마도 옛 뱃길.


부산에서 대마도까지는 직선거리로 49.5km. 날씨가 좋으면 맨눈으로도 선명히 보이는 이국의 섬이다. 일본 본토보다 한국이 가깝기 때문일까. 대마도와 부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관계가 고대로부터 있었다. 선사 문명은 대륙에서 한반도를 거쳐 대마도, 이키섬, 후쿠오카로 이동한 족적이 뚜렷하다. 그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역사 어느 시기나 대마도는 갈등과 교류의 주체로 존재하고, 특히 부산과 긴밀히 협력한 흔적이 있다.

공식적으로는 정기 문화사절단인 조선통신사가 오간 뱃길이었고, 그 이전엔 임진왜란 침략의 뱃길이 있었다. 조선 초기 조선이 대마도의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보내기도 했고, 역사를 더 거슬러 오르면 백제 멸망 후 유민이 건너간 곳이기도 하다.

김태만 국립해양박물관장은 "대마도는 예로부터 자체적으로 농산물과 공산품 생산이 풍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부와 교류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며 "그렇게 볼 때 지리적으로 가까운 부산(한반도)과 연결하는 교류의 중심지였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대마도에서 만난 멀구슬나무. 히말라야 인도가 원산지인 멀구슬나무는 전라남도 해안 지대와 제주도에서 유독 많이 발견되는데 대마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대마도에서 만난 멀구슬나무. 히말라야 인도가 원산지인 멀구슬나무는 전라남도 해안 지대와 제주도에서 유독 많이 발견되는데 대마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대마도 자연에서 만나는 한반도

취재진은 대마도 북단 한국 전망대를 찾았다. 낮에는 물론 밤에 부산항 일대 한국 영토가 더 잘 보인다는 전망대다. 이 전망대 부근에는 익숙한 나무가 산책로 따라 많이 자라고 있었다. 조선산철쭉이다. 뿐만 아니다. 일본 본토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팝나무 군락지가 한국전망대 아래 와니우라항 절벽에 있다. 이팝나무 군락지는 일본 정부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이팝나무는 한국에서 봄이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쓰시마 시가 천연기념물로 보호하고 있는 야마네코(산고양이)도 한반도에서 역시 보호종인 삵과 똑 닮았다. 대마도에서 숙박업을 하는 최용오 미도리하우스 대표는 틈만 나면 꽃과 식물을 SNS에 올린다. 최 대표의 SNS에서 볼 수 있는 원추리꽃, 나리꽃 등은 한국종이라고 한다. 대마도의 시조는 고려꿩(한국 꿩)이고, 시화는 현해진달래(진달래)다. 이팝나무는 당연하게도 시목. 이런 이유가 있다.

자질 자료에 따르면 일본 열도는 약 37만 년 전 아시아 대륙과 분리됐지만, 대마도는 한반도 동남단에서 불과 1만 2000년 전에 완전히 분리됐다고 한다. 대마도의 동식물이 일본 본토와 다르게 익숙한 이유는 과학이었다.


1950년대 제주에서 희생된 주검이 밀려든 대마도 서북단 해안. 1950년대 제주에서 희생된 주검이 밀려든 대마도 서북단 해안.

해류를 통해 한국과 밀접한 교류

제주도를 지나 북으로 올라가는 구로시오 난류는 대한해협의 대마도를 거쳐 동해로 북상한다. 반대로 한류는 동해를 따라 남하해 부산에서 대마도 방향으로 흐른다. 한반도, 제주도와 대마도는 해류를 통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 해류는 양국에 깊은 인연을 만들어 준다.

1950년 어느 날. 대마도 서북단의 사고만 일대 바닷가에 사람의 익사체가 떠밀려 오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깜짝 놀랐다. 대체로 어민이나 바닷가 표류 변사체가 발견되면 잘 수습해 주었다. 대마도 히타카쓰에서 목공 사업을 하는 에토 유키하루 씨의 선친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고만 근처에서 살았던 부친은 궂은 일이었지만 친구 서넛과 함께 떠밀려 온 시신을 바닷가 몽돌밭에서 화장해 장례를 치렀다. 그런데 문제는 한두 구가 아니었다. 줄잡아 수백 구의 시신이 사고만 일대 해안으로 밀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주민들은 더러 바닷가에 매장도 하고, 동네 뒷산에 묻어주기도 했다. 시신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옷과 일부 옷에 쓰인 한국어 때문이었다. 에토 씨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한국 전라도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한국에 대한 남다른 애착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에토 씨 선친이 4·3 희생자 시신 수습을 주도한 것은 묘한 인연이다. 평소 희생자 위령탑을 세우고 싶어 하다 뜻 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신 선친의 유지를, 아들 에토 씨가 받들었다.

사고만 푸른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곳에 숨진 이들을 기리는 '공양탑' 있다. 순전히 사비를 들여 만든 것이다. 이후 제주에서 4·3 유족들도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 요즘은 해마다 양국의 주민들이 한데 모여 위령제를 지낸다고 한다.


대마도 해안에 밀려든 한국 쓰레기. 대마도 해안에 밀려든 한국 쓰레기.

역시 부산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사고이구치 해변도 특이한 행사가 있다. 한국 대학생들이 해마다 해양 쓰레기 수거 운동을 하는 곳이다. 이곳에 쓸려온 쓰레기 중 한국산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한글 상표가 뚜렷한 플라스틱 쓰레기가 지천이다. 관련 단체를 통해 이 운동에 관여하고 있는 와키모토 하루키 시의원은 "바다는 국경이 없다. 환경 보호는 국경과 나라를 초월한 인류의 과제"라고 말했다.


대마도 이즈하라 시에 있는 조선통신사 역사전시관. 대마도 이즈하라 시에 있는 조선통신사 역사전시관.

유네스코문화유산 조선통신사

한국과 일본의 정기 뱃길 교류를 이야기할 때 조선통신사를 빠뜨릴 수 없다. 지난 8월 초 대마도 남쪽 이즈하라 시에서 축제가 열렸다. 이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조선통신사였다. 이 행사에 한국 조선통신사선이 초청받았다.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일본 막부 요청으로 조선이 파견한 외교·문화사절단이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공식적으로 12회에 걸쳐 일본을 오갔다. 물론 공식 파견 이외에 이 기간을 물론 구한말까지 조선과 일본의 교류는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잦았다.

조선통신사는 서울에서 출발해 육로로 부산에 도착했다. 이어 부산 영가대에서 해신제를 지낸 후 조선통신사선을 타고 대마도를 향해 출항했다. 지난 7월 28일 부산진성터에서 조선통신사 해신제가 재현됐다. 이미연 부산문화재단 대표이사는 "해신제에 오르는 옛 전통 음식을 하나하나 고증해 재현할 만큼 신경을 썼다"며 "긴 여행에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해신제여서, 음식 등 모든 면에서 최고의 제례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과 일본에 있는 조선통신사의 기록물은 201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조선통신사 일행 중 화공이 그린 그림들은 국립해양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정은 국립해양박물관 선임 학예사는 "박물관 소장 유물 중 수행화원 이원찬의 '호도'와 이의양의 '화조도' 등이 있는데, 특히 화조도는 채색이 화려하고 빼어난 솜씨로 그린 그림"이라고 평했다. 일본에는 호랑이가 서식하지 않아 임진왜란 때 왜군이 호랑이 가죽을 탐내는 경우가 많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의 호랑이 그림도 일본 지배층의 인기를 독차지했다고 한다.



대마도 사스나 항의 번소터. 한국과의 교역이 활발해지자 사스나항에는 세관이 들어서 무역을 관장했다. 대마도 사스나 항의 번소터. 한국과의 교역이 활발해지자 사스나항에는 세관이 들어서 무역을 관장했다.

대마도 북단 항구의 교류 흔적

조선통신사 일행이 대마도에 도착한 항구는 서북단에 있는 와니우라 항과 사스나 항이다.

마치다 가즈토 대마도박물관 관장은 고대로부터 와니우라항은 대륙과 소통하는 항구였다고 말했다. 마치다 관장은 "와니우라 항은 고대부터 한반도의 선박이 오가던 곳으로 백제의 왕인 박사가 머문 곳"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와니우라 항은 배를 접안할 공간인 만이 좁았다. 마치다 관장은 "와니우라 항이 좁아 서북쪽에 있는 사스나 항이 이후 한반도와 교역하는 항구로 발전했다"며 "조엄이 고구마를 가져간 곳이 이 항구이고, 조선통신사선이 왕래하던 곳"이라고 말했다.

사스나 항은 한반도와의 교류가 잦아지자 세관과 관공서, 관리의 관사 등이 들어섰다. 1672년 제3대 대마도 번주는 사스나 항 북쪽과 남쪽에 각각 번소를 설치해 조선에서 오는 배의 통관을 담당하게 했다.

사스나 현지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에서 공출한 벼 가마니가 산더미처럼 쌓였던 곳이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 관공서는 대부분 남쪽 이즈하라시로 옮겨갔다. 옛 세관터와 우물만 남아 영화로웠던 과거를 담고 있었다.


와니우라 항 인근에 있는 백제 왕인 박사 현창비. 와니우라 항 인근에 있는 백제 왕인 박사 현창비.

1607년 조선통신사선이 도착한 와니우라 항에는 백제 왕인박사 현창비가 서 있다. 왕인 박사는 4세기 백제인으로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건네주며 유학을 알린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 태자에게 학문을 가르쳤다고도 한다. 왕인 박사는 전남 영암 출신인데 백제와의 교류 역시 뱃길을 통해 이뤄졌을 것이다. 사실 거문도에서는 부산보다 대마도가 뱃길로 더 가깝다고 한다.

신라와의 교류 흔적도 사고만에 있다. 5세기 초 신라의 왕자가 왜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신라의 재상이던 박제상은 사신으로 와서 왕자를 모셨다. 대마도에 도착한 왕자 일행은 이곳에서 왜와 충돌했다고 한다. 그 결과 왕자는 무사히 귀국시켰지만, 박제상은 이곳 사고만에서 순국했다고 한다. 그 넋을 기리기 위해 순국비가 사고만에 세워졌다.



이즈하라 시에 있는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 이즈하라 시에 있는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

대마도 남쪽의 교류 흔적과 아픔

대마도 북쪽이 한반도와 교류하는 관문이었다면, 남쪽 도시 이즈하라는 일본 본토와 통하는 항구다. 이즈하라시는 현재 대마도에서 가장 큰 도시다. 이즈하라 시가 있는 대마도 남쪽 아소만 일대에 일본의 특별사적 가네다성이 있다.

가네다성은 백제 멸망의 역사를 담고 있다. 서기 660년 백제 부흥 전쟁에 지원한 백제·왜 연합군은 663년 백마강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대패했다. 이후 백제의 유민 등이 대마도로 유입돼 쌓은 곳이 가네다성이다, 가네다성을 짓는 데에는 백제의 축성 기술이 사용되었다.


백제 축성 기술이 사용된 가네다성터에서 바라본 아소만 일대. 백제 축성 기술이 사용된 가네다성터에서 바라본 아소만 일대.

이즈하라 시는 대마도 번주 소 씨 가문이 거주하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 황녀 덕혜옹주는 일본에 볼모 유학을 갔다가 1931년 대마도 소 씨 가문의 소 다케유키와 결혼한다. 덕혜옹주는 나중에 이혼했지만, 그 정략결혼은 양국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대마도 당국은 특별히 조선통신사 교류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2021년 대마도박물관 산하 조선통신사역사관을 별도로 만들어 관련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조선통신사역사관 인근에 사찰 반쇼인(万松院)은 소 씨 가문과 조선의 교류를 짐작할 수 있는 유물이 많다. 조선 국왕의 하사품이라는 삼구족은 불당에 공양할 때 쓰는 향로, 꽃병, 촛대다.

역대로 대마도 번주는 왜와 조선의 외교를 책임지는 역할을 했다. 특히 한반도와 교역이 활발한 시기에는 막대한 부를 쌓았다고 한다. 만송원에 있는 소 씨 가문의 가족묘에 대조선 무역이 활발했던 시기의 번주 묘가 화려한 것은 그 영향을 짐작게 하고 있다.



조선통신사 역사전시관에 있는 초량왜관 모형도. 조선통신사 역사전시관에 있는 초량왜관 모형도.

왜관을 통한 교류, 그리고 근대의 시작

일본은 대마도를 중간 기착지로 부산에 건너와 직접 무역 활동을 했다. 그 무대는 초량 일대에 있던 왜관이다. 초량 왜관에는 대마도에서 건너온 500인의 성인 남성이 거주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강석환 초량왜관연구회 회장은 "근대는 바다로부터 들어왔다는 말이 있는데 그 바다의 실체는 부산"이라며 "1881년 고종의 밀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간 신사유람단의 5개월 견문기는 근대 부산항의 체제를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부산에는 절영도와 두모포, 초량에 왜관이 있었는데, 가장 나중에 조성된 초량 왜관은 약 200년간 존속했다. 현재 지명으로는 부산 중구 일대에 속하는 곳으로 일제강점기에 자연스럽게 부산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왜관을 통해 한국과 일본은 무역 등 경제 행위는 물론 학문과 음식 등 문화 교류가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부산박물관 이성훈 학예사는 18세기 동래부의 화원은 일본 수출용 그림을 그리는 곳이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주로 동래부에 소속된 화공들이 조선통신사 수행화원으로 참가하거나, 일본 측의 요청을 받은 그림을 그려 수출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어쨌든 초량 왜관을 구성하던 인물 대부분은 대마도인이었고, 대마도는 독특한 한-일 외교 무대의 매개체였다.


대마도 북단 일·러 우호 기념비. 대마도 북단 일·러 우호 기념비.

한국전망대와 러·일 우호 역사

한국전망대는 대마도 거주 재일교포들의 향수를 달래는 곳이기도 했다. 대마도에 살고 있는 오야마 시케루 씨는 교포들이 고향이 그리울 때면 한국전망대에 올라가 향수를 달래곤 했다고 말했다. 한국전망대에서는 맑은 날이면 부산과 거제 일대가 잘 보인다. 특히 날씨가 맑아지는 겨울철이면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고 했다.

"부산에서 불꽃축제가 있는 계절엔 많은 사람들이 한국전망대에서 광안리에서 진행되는 불꽃쇼를 즐깁니다." 오야마 씨의 말대로 현재 수리 중인 한국전망대 내부엔 부산의 불꽃축제 사진이 전시돼 있다.

한국전망대엔 특이한 위령비 하나가 있다. 바로 조선 역관 위령비다. 1703년 음력 2월 5일 대마도에는 제5대 소 씨 번주가 취임한다. 전임 번주의 죽음을 애도하고 신임 번주 취임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이 조선에서 파견된다. 그러나 와니우라 항에 선박이 다다를 무렵 거센 풍랑이 일어 역관을 태운 배는 난파해 승선자 전원이 숨진다. 이날 희생된 112명을 기리기 위해 '조선국 역관리 순난지비'가 세워졌다. 조선시대 역관이 대마도를 공식 방문한 것이 무려 51회라고 하니 역관이 선린외교의 첨병이었음은 분명하다.

비문에는 '이날 희생된 역관의 넋을 위로하며 성신교린의 정신을 돈독히 한다'고 돼 있다. 조선과 일본은 서양 등 다른 나라와는 쇄국정책을 펼쳤지만 유일하게 양국은 교류를 멈추지 않았다.

대마도 동북단에는 '러·일 우호 증진비'도 있다.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이곳에서 해전이 벌어져 러시아 함대가 침몰했다. 배가 침몰하자 러시아 수병들이 대마도 해안으로 상륙했는데, 주민들이 다친 사람을 치료하고, 음식도 나눠줬다는 것이다. 전쟁 중이었지만, 평화와 우호 정신을 발휘한 민중의 손길은 따뜻했다.


한국전망대에서 본 와니우라 항. 한국전망대에서 본 와니우라 항.

문화와 문명의 교류 그리고 미래

국립해양박물관은 6월 29일 '한일 희망과 평화의 뱃길'이란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부산일보사 10층 강당에서 열린 이날 행사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주장 하나가 나왔다. 팬스타그룹 김보중 상무(여객부문장)는 '한·일 해양문화 교류:통신사와 크루즈' 라는 발제문을 통해 "조신통신사의 선린 우호의 교류는 현재진행형"이라고 주장했다.

부산과 대마도를 매일 오가는 여객선을 통해 양국 국민들이 만나고 소통하는 것이 우선 그렇고, 한국인이 대마도를 방문해 관광·숙박하고, 현지 유적과 문화를 접하면서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태만 국립해양박물관장은 "대마도와 부산은 역사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떼려야 떼 수 없는 관계다. 조선통신사를 통해 생성한 우호와 협력이 교류 정신이라고 본다"며 "임진왜란 이후 양국의 신뢰를 바탕으로 우호를 쌓은 것은 평화를 갈구하는 양국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재 한국과 일본은 한목소리로 ‘미래 양국 관계는 평화와 우호, 상호 번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대마도 정기여객선은 발이 끊겼다. 한 해 수십만 명이 교류하던 뱃길이 끊긴 것이다. 이 시기 현지 상점 폐업이 속출했다고 한다. 고난의 시기였다. 그런데 그 끊어진 뱃길을 다시 이은 사람이 김현겸 팬스타그룹 회장이다. 대마도 항로에 전격적으로 쾌속선을 투입한 것이다.

김 회장은 "바다에 배가 뜬다는 것은 육지에 새로 도로가 뚫리는 것과 같다"며 "양국이 정체성은 유지한 채 상호 교류한다면 우호가 더 돈독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항은 조선통신사의 선린우호 정신이 오롯이 녹아있는 곳이다. 어쩌면 한반도 번영은 부산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제 부산항은 북항재개발과 2030월드엑스포 유치로 한국 재도약의 주도자 역할을 자임하려 하고 있다.

특별취재팀=이재희 기자 jaehee@. 김수빈 기자, 조경건 기자, 강승민 PD, 박정훈 PD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 김수빈 부산닷컴 기자 suvely@busan.com ,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 강승민 부산닷컴 기자 kang00527@busan.com , 박정훈 부산닷컴 기자 pjh0450@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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