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림, 기로에 서다] 산 전체가 재선충 고사 소나무… 방제는 ‘사후약방문’
① 온통 잿빛 무덤… 이미 변화 선택
밀양 상남면 조음리 청산골 일대
피해 본 지 여러 해 ‘고사목 방치’
식생 천이 진행·다양한 군락 발견
생활권 소나무 보전·관리 집중을
소나무가 기후변화와 재선충 확산 속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지난 10일 오후 경남 밀양시 상남면 조음리의 한 야산이 재선충병에 걸려 고사한 소나무로 잿빛을 띠고 있다. 정종회 기자 jjh@
유구한 시간 속에서 민족정기를 대변하며 영남의 산하를 지켜온 소나무가 기후변화와 재선충 확산 속에서 설 자리를 잃어 가고 있다. 이미 불가역적 변화를 맞이한 숲은 우리에게 소나무를 어떻게 보전하고 관리할지 선택하라고 말한다.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숲을 함께 고민할 시간이라는 뜻이다. 재선충 확산 현장을 기록하고 방제 정책 한계를 진단해 기후변화 시대 우리 산림이 나아갈 길을 살펴본다.
■재선충에 초토화한 잿빛 산림
한낮 최고 38.8도를 기록했던 지난달 31일, 경남 밀양시 상남면 조음리 산 67 ‘청산골’을 찾았다. 멀리서 바라본 청산골은 온통 뜨거운 햇볕에 타버린 듯 잿빛이었다. 소나무는 재선충병에 걸리면 솔잎이 아래로 처지며 시들기 시작해 불과 한 달 안에 잎이 모두 갈색으로 변하면서 고사한다. 아예 잿빛으로 변한 청산골 소나무 숲은 이미 재선충 피해를 본 지 여러 해가 지났다는 뜻이다.
숲길을 따라 조금 더 깊숙이 들어서자 ‘타폴린’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재선충에 고사한 소나무를 잘라 1~2㎡ 크기로 쌓은 다음 약제를 뿌리고 밀봉해 방제할 때 쓰는 방수 천막이다. 곰솔조경 박정기 대표와 나무 의사 최호선 씨가 “소나무의 무덤”이라며 입을 모았다. 요즘 소나무가 있는 숲이라면 쉽게 볼 수 있는 ‘무덤’의 흔적은 재선충과의 전쟁이 얼마나 힘겨운 싸움인지 보여주는 방증이다
소나무재선충은 소나무에 기생하는 선충으로 1mm 이하 크기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해충이 철갑을 두른 소나무를 말려서 죽이는 셈이다. 재선충은 소나무 조직 내 수분과 양분 이동 통로를 막아 말려서 죽인다. 너무 작다 보니 스스로 나무를 옮겨 다니지 못해 솔수염하늘소와 북방수염하늘소 같은 매개충을 통해 침투한다. 번식력이 강한 재선충은 암수 1쌍이 20일 후 20만 마리까지 번식한다.
매개충과 번식력을 무기로 재선충이 빠르게 확산하는 탓에 방제는 ‘사후약방문’ 수준으로 전락한 실정이다. 청산골 소나무마다 재선충 방제 대상을 의미하는 흰색 표식이 붙어 있었지만 이미 고사한 지 오래였다. 박 대표는 “물량을 계산해서 표식한 다음 방제 작업을 추진하려다가 끝내 방제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진단했다.
밀양시는 창녕군과 함께 경남 소나무재선충병 피해 소나무가 5만 그루 이상인 1등급 지역으로, 최근 5년간 재선충병에 걸린 경남 전체 소나무 282만 4640그루의 25%(72만 4372그루)를 차지할 정도로 피해가 심각하다. 이 시기 밀양에 투입된 방제 예산 규모만 487억 원이다.
문제는 소나무재선충병 발생과 확산 추세가 지속적으로 증가한다는 점이다. 산림청은 2025년 6월 1일부터 올해 5월 31일까지 전국 16개 시도 소나무재선충병 방제 결과 177만 그루가 피해로 고사했다고 밝혔다. 전년 대비 28만 그루 증가한 수치다. 경남 밀양·창녕, 울산 울주군 등 피해가 극심한 지역의 고사목이 전국의 81%를 차지했다. 기후변화로 매개충 우화 시기가 앞당겨지고 활동기간도 늘어나면서 더 증가하는 추세다.
■죽은 소나무 아래 변화 주목
소나무가 고사한 산림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부산일보〉 취재 결과 청산골은 이미 식생 천이 중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식물 군집이 점차 변화해 안정 상태로 옮겨지는 과정이라는 뜻이다. 청산골의 마을 접경지에는 큰키나무인 졸참나무가 영역을 확장하고 있었고, 상록 활엽수인 광나무 유입도 확인됐다.
“텃새의 활동이 많은 산림과 마을의 경계라서 텃새 활동으로 광나무가 유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소나무가 죽지 않았다면 광나무가 자리를 잡지 못했을 겁니다. 소나무 아래에서는 다른 나무가 자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소나무재선충 피해 현장을 둘러본 박 대표가 이처럼 말했다.
청산골은 앞으로 졸참나무가 고사한 소나무 대신 큰키나무 역할을 맡고 중간키나무로는 떡갈나무·상수리나무·광나무를 차지할 것으로 예측된다. 산림이 스스로 탈바꿈을 선택했다는 뜻이다.
특히 광나무의 발견은 여러모로 의미가 남다르다. 광나무는 상록수라 한 겨울에도 푸르므로 소나무를 대체하기에 알맞다. 광나무는 7~8m까지 자라 땅과 멀지 않다. 소나무는 큰키나무라서 땅과 거리가 멀고 침엽수라서 토지의 습도를 유지하는 역할은 광나무가 더 우월하다. 특히 광나무는 병해충이 없어서 건강한 산림 유지에 효과적이다.
박 대표는“소나무 애호가는 참나무가 겨울에 잎이 지니까 소나무를 높게 치는데 봄부터 가을까지 세 계절을 활동하는 참나무잎이 오히려 사계절 소나무보다 대기 정화, 미세먼지 저감, 온도 저감 등 역할이 훨씬 크다”며 이런 자연 천이를 자연스러운 변화로 해석했다. 소나무가 고사한 산림에도 희망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자연 천이는 산림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장점도 있다. 현장 취재에 동행한 나무 의사 최호선 씨는 “최근 거제 노자산에서 때죽나무와 졸참나무 군락을 목격했다”며 “지역 환경에 맞는 다양한 식생이 관찰되는 등 산림의 다양성이 확인된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소나무는 이대로 영영 사라져야 할까. 최 씨는 “영남권은 기후변화 때문에 소나무 식생이 갈수록 어려울 것”이라면서도 “숲이 건강하게 전환하도록 고사한 소나무를 빠르게 정리하고, 오히려 생활권 소나무를 지키는 쪽으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젠 ‘선택과 집중의 시간’이라는 제언이다.
그러나 집중 방제가 필요한 생활권 소나무마저 이미 재선충 피해로 몸살을 앓고 있다. 특히 수백 년 역사를 품은 문화재 노거수도 재선충 앞에 속수무책인 현실이 확인되면서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말 그대로 방제의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기다.
최환석 기자 chs@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