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재판 아닌 제3의 길 ‘중재’… 부산에서 꽃피울까 [비즈앤피플]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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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재인 판정으로 분쟁 해결하는 제도
단심제로 법원 판결과 같은 효력 지녀
국내 유일 법정기관 ‘대한상사중재원’
GTX 공사비 중재 등 최근 성과 주목
글로벌 중재 시장 확대 제2 도약 채비
“해사법원 개원하는 부산, 기회 삼아야”

재판이 아닌 대안적인 분쟁 해결 방식으로 중재가 주목을 받는다. 부산이 해사법원 개원을 앞두고 해사 중재를 비롯한 국제 분쟁 해결의 허브가 되어야 한다는 제언도 나온다. 대한상사중재원의 모의 국제 중재 심리 모습. 대한상사중재원 제공 재판이 아닌 대안적인 분쟁 해결 방식으로 중재가 주목을 받는다. 부산이 해사법원 개원을 앞두고 해사 중재를 비롯한 국제 분쟁 해결의 허브가 되어야 한다는 제언도 나온다. 대한상사중재원의 모의 국제 중재 심리 모습. 대한상사중재원 제공

사람이 있는 곳에 다툼이 있다. 당사자끼리 해결이 안 되면 대개 법원을 찾지만, 재판이 유일한 문제 해결 방식은 아니다. 갈등의 시대, 대안적 분쟁 해결 방식으로 주목을 받는 중재의 세계를 들여다봤다. 마침 무역 분쟁부터 소비자 분쟁까지 다루는 대한상사중재원은 최근 부산지부를 부산상공회의소 회관으로 이전하고 지역과 밀착 협력을 선언했다. 해양수도 부산 정책과 부산해사법원 개원을 기회로 부산의 해사 중재·법률 시장을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육성해야 한다는 제안도 쏟아진다.

■재판 없이 최종 해결을

중재는 분쟁 당사자의 합의에 따라 법원의 재판이 아니라 중재인의 판정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제도다. 크게는 중립적인 제3자의 중재나 조정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는 ADR(대안적 분쟁해결)의 하나다. 언론중재위원회 같은 전문 중재기관이 있고, 한국소비자원이나 정부 부처·산하 위원회의 전문 분야별 분쟁조정 기구도 ADR 기관에 속한다.

중재가 조정과 다른 점은 법원의 확정 판결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는 점이다. 조정은 당사자 쌍방이 조정인의 도움을 받아 자율적으로 합의하는 과정이고, 합의했더라도 여건이 바뀌면 조정 결정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 반면 중재는 중재인이 판정을 내리면 합의 여부과 관계 없이 법적 구속력을 갖고 미이행 시 강제집행도 보장된다. 중재가 임의 재판, 사적 재판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대한상사중재원(KCAB)은 중재법에 근거한 국내 유일의 상설 법정 중재기관이다. 1966년 대한상공회의소 내 국제상사중재위원회로 시작해 올해 창립 60주년을 맞았다. 중재뿐 아니라 조정과 알선, 상담을 통해 국내외 상거래에서 발생하는 분쟁을 해결하거나 예방한다.

최근에 주목을 받은 중재 사건으로는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C 노선 건설사업이 있다. 경기도 양주시 덕정에서 수원·상록수역을 잇는 총 86.5km 구간의 4조 6000억 원 규모 민자투자사업은 2024년 1월 착공식을 열고도 2년 가까이 첫 삽을 뜨지 못했다. 사업시행자가 코로나19 이후 급등한 공사비를 총사업비에 반영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정부가 난색을 표하면서 시공계약 체결이 지연됐다.

지난해 11월 말 국토교통부와 사업시행자가 공사비 증액 여부를 중재 판정에 맡기기로 합의하면서 물꼬가 트였다. 12월에 중재 신청이 접수됐고, KCAB는 지난 4월 1일 총사업비 일부 증액을 결정했다. 2년 넘게 멈춘 사업을 다시 본궤도에 올리는 데는 약 100일이 걸렸다. 착공 전 민간투자사업이 중재를 통해 공사비 증액 갈등을 조정받은 첫 사례다.

부산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지난해 12월, 부산도시공사가 전국 최초로 부산 지역 민관 합동 사업에 참여한 지역 건설사들에게 중재를 통해 물가 급등으로 인한 공사비 상승분의 50%, 총 228억 원가량을 지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상승분 지급 근거와 산정 기준이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감사원 사전 컨설팅을 거쳐 중재 판정으로 지역 건설업계의 어려움을 해소한 적극 행정으로 꼽혔다.

중재의 가장 큰 특징은 신속성과 경제성이다. 중재는 3심제로 운영되는 민사소송과 달리 단심제로, 항소나 재심 없이 즉시 확정된다. 지난해 KCAB 중재사건의 종결까지 걸린 시간은 평균 305일이다. 2024년 합의부 민사사건이 확정 판결까지 평균 1271일이 소요된 것을 고려하면 4분의 1 수준이다.

실제로 시간이 곧 비용인 건설업계에서 자재비와 인건비 상승으로 인한 공사비 갈등이 빈번해지면서 중재 신청도 크게 늘었다. 지난해 KCAB 접수 사건 327건 가운데 분야별로 보면 건설 분야가 155건(47.4%)으로 절반 가까이 차지했고, 전년도보다 27.1%가 증가했다. 다음은 일반(국내) 상거래 40건(12.2%), 정보통신 31건(9.5%), 무역 31건(9.5%) 순이었다.

분쟁 성격에 맞는 전문가를 중재인으로 구성해 판정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지난해 7월 기준 KCAB의 중재인은 1778명으로, 법조계(1129명)뿐 아니라 실업계(305명), 학계(225명), 공공단체(106명), 공인회계사·변리사(13명) 등이다. 중재 심리는 철저한 비공개로 열리기 때문에 사생활 보호와 비밀 유지가 중요한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중재를 활용하기도 한다.

■부산, 분쟁 해결 허브 될까

한국의 중재 시장은 선진국에 비해 규모나 활성화 정도 모두 뒤처진다. KCAB의 연간 중재 사건 접수 건수는 2022년 342건에서 2025년 327건으로 수년간 답보 상태다. 지난해 중재사건 신청 금액은 1조 6355억 원으로 전년도(7417억 원)의 배 이상 늘었는데, 신청 금액이 4700억 원이었던 GTX-C 건과 같은 초대형 사건의 덕을 봤다. 1억 원 이하 사건은 138건으로 전체의 42.2%를 차지했다.

반면 아시아의 중재 허브로 꼽히는 싱가포르국제중재센터(SIAC)는 지난해 신규 중재사건 886건을 처리했고, 총 신청 금액은 미화 약 145억 달러(약 22조 3000억 원)에 달한다. 특히 SIAC 사건의 90%는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 각국의 기업들이 신청하는 국제 사건이다. 반면 KCAB의 지난해 국제 사건 접수는 47건에 그친다.

가장 큰 문제는 일반 시민은커녕 기업 실무자들조차 중재라는 제도 자체를 낯설어한다는 점이다. KCAB가 지난 8일 부산 롯데호텔에서 개최한 ‘부산 지역 중재 발전전략 간담회’에서도 지역 기업 현장과 공공기관의 참석자들 여럿이 KCAB가 전국에서 유일하게 부산에 지부를 두고 있다는 점은 물론이고 중재 절차나 확정 판결과 동일한 법적 효력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글로벌 기업들은 국제 네트워크나 접근성, 중재 친화적 사법제도 등을 들어 KCAB보다 해외 중재기관을 찾는 경우가 많다. 한국전력공사와 한국수력원자력도 아랍에미리트(UAE) 바라카 원전 건설 과정의 약 11억 달러 규모 공사비 중재 사건을 런던국제중재법원(LCIA)에 제기했다가 최근 KCAB로 이관했다. 공기업과 공공기관은 감사와 책임 부담 때문에 중재보다 소송 관행을 유지하기도 한다.

KCAB는 기관명 ‘대한상사중재원’에서 ‘상사’를 빼고 전자중재 시스템을 도입해 중재 범위를 기업 간 분쟁뿐 아니라 부동산 거래, 소비자 분쟁, 임금 청구 사건까지 확대하고, 국민 누구나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는 분쟁 해결 플랫폼을 만든다는 계획이다. 세계 6위 무역 규모에 걸맞은 국제중재 인프라를 만들어 국제중재를 고부가가치 법률 서비스 산업으로 키워나가는 것도 과제다.

전문가들은 이 과정에서 부산의 경쟁력에 주목한다. 부산의 국제 허브 도시 인프라에 KCAB 부산지부, KCAB와 부산시의 업무협약에 따라 2018년 개소한 해사중재 전담 기구인 아시아·태평양해사중재센터, 특히 2028년 개원이 확정된 부산해사국제상사법원(부산해사법원)을 더하면 부산이 런던과 싱가포르처럼 국제 중재·법률 서비스를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김현수 원장은 KCAB 간담회에서 “부산은 이미 세계적인 국제거래 중심 도시이고, 해양수산부 이전과 HMM 등 해운기업 집적, 해사법원 개원으로 산업 인프라와 분쟁 해결 인프라가 함께 집적되는 전환점에 있다”며 “부산시와 부산상공회의소, 대학과 법원, KCAB, 금융기관 등이 도시 차원의 거버넌스를 구축해 글로벌 분쟁 해결 허브 도시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해양대 해사법학부 정영석 교수도 “2028년 해사법원 개원을 기회로 부산 해사 중재·법률 시장을 런던처럼 육성한다면 연간 8조 원 이상의 고부가가치 지식산업 시장을 기대할 수 있다”며 한국해양진흥공사 등 정책금융기관이 부산 중재 조항을 의무화하고, 부산상공회의소가 표준 해사계약서를 보급하고, 지역 대학이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등 해사 중재 활성화 방안도 제시했다.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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