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학수의 문화풍경] 휴가, 삶의 방향을 다시 묻는 시간
동서철학 아카데미 숲길 대표
억지 위안 주는 철학 의존 성향 만연
껍질 깨는 역동성, 참된 행복 이끌어
나를 넘어설 용기 충전 시간 만들길
매일 아침 눈을 떠 어제와 다름없이 일터로 향하는 지하철과 자동차에 몸을 싣는다. 치열하게 달려온 끝에 안정적 궤도에 올랐지만, 문득 고개를 들면 가슴을 짓누르는 지독한 권태와 마주하게 된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 그리고 오늘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을 내일.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무수한 중년이 겪는 방황은 대개 이 지독한 삶의 정체 상태에서 비롯된다. 더 이상 올라갈 목표도, 나아갈 방향도 잃어버린 채 삶의 의미는 희미해지고, 그 빈자리에는 깊은 실존적 공허만이 들어앉는다.
설상가상, 이 위험한 정체 상태를 아름답게 포장하고 정당화하는 위안의 이데올로기들이 일상의 공기처럼 우리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왜곡된 에피쿠로스주의다. 에피쿠로스는 무한한 야망을 좇는 대신, 소박한 공동체 안에서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욕구만을 충족할 때 마음의 평정인 ‘아타락시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늘날 이 사상은 미디어가 앞다투어 부추기는 안락한 고립, 버림의 미학, 그리고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마케팅으로 변질된다. 물론 이것은 에피쿠로스 자신의 철학이라기보다 현대 소비사회가 그의 이름을 빌려 만들어낸 변형이다. 그러나 이 철학을 무비판적으로 삼키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에게 안이한 위안을 속삭인다. “방향을 잃고 정체되어도 마음만 편하면 그만”이라고 말이다. 진보를 향한 노력을 멈춤으로써 삶의 모든 마찰은 사라지지만, 동시에 우리 삶의 뜨거운 엔진도 꺼져버린다.
또 다른 강력한 마취제는 편협한 내세 사상이다. 많은 종교는 내세의 믿음을 교리에 포함한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현세의 노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기독교 전통은 내세의 희망을 약속하면서도,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개인의 노력을 요구한다. 칼뱅주의 신학은 신의 절대적 선택이 인간에게 책임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믿음은 현실의 일터에서 맹렬하게 일하게 만드는 동력원이 된다고 가르친다. 정작 문제는 내세의 믿음이 이 땅에서의 삶을 그저 묵묵히 버텨내야 할 ‘임시 대기실’ 정도로 격하시키는 안일한 타협으로 변질될 때 발생한다. 내세만을 바라보며 현실의 안정과 안락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태도야말로 경계해야 할 진짜 아편이다.
이 두 변질된 이데올로기는 독약과 같아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내면의 개척 본능을 마비시킨다. 그러나 그 기만적 안도의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아무리 “지금 이대로 정체된 삶도 좋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보아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문득문득 솟구치는 존재론적 텅 빔을 인간은 결코 속일 수 없다.
삶의 생생한 의미를 되찾고, 다시 한번 화산 같은 생명력의 에너지를 분출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이 중독적 위안의 철학들로부터 탈옥하는 것이다. 잘못된 사유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인간의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좋은 철학을 배워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란 편안히 머무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활동 속에서 완성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철학은 니체의 ‘초인’ 사상에 이르면 더욱 급진적 형태를 띤다. 그 사상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현재의 나를 초월하려는 처절한 투쟁이 없다면 인간의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니체가 말한 초인은 TV 드라마에 나오는 초능력자나 영웅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초월’의 과정을 끊임없이 지속하는 존재, 즉 어제의 나에게 내일을 지배당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태도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이번 달에 방정식을 탐구하고 다음 달에 도형의 성질을 공부하며 지적 지평을 넓혀가는 중학생의 하루하루, 단 0.1초의 기록을 단축하기 위해 매일 자신의 한계를 부수는 운동선수의 땀방울 속에 초인의 삶이 있다.
자기 극복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혼란을 수반한다. 낡은 껍질을 찢고 나오는 고통 없이 진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참된 행복이란 정지된 평온이 아니라, 고통을 관통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경험되는 역동성이다. 중년의 위기는 우리 삶의 에너지가 고갈되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락이라는 이름의 타성과 편안한 루틴에 길들었기 때문에 찾아오는 경고음이다.
본격적 여름 휴가철이 다가오면, 많은 이들이 도심의 마찰을 피해 조용한 휴양지로 탈출을 감행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휴가는 안락한 선잠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드는 도피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타성에 젖어 돌아가던 일상의 트레드밀에서 잠시 내려와, 우리 영혼을 좀먹던 마취제를 털어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어제의 나를 넘어설 용기를 충전하는 깨어 있는 쉼표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