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인생경기
강희경 부국장 겸 문화스포츠부장
한동희 만루홈런 등 한 이닝 13득점
0-8 뒤집은 롯데의 기적 같은 역전승
뜨거웠던 여름, 오래 기억될 ‘인생 경기’
선수들 더 성장해 더 나은팀 되길 기대
1시간여 운동을 다녀와 TV를 다시 켰다. 마침 7회 롯데의 공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0-8. 1회 0-2로 뒤지고 있던 경기가 어느새 8점 차로 벌어져 있었다. ‘오늘도 글렀구나’ 생각하면서도 채널을 돌리진 않았다. 볼넷과 상대 실책, 안타가 이어지면서 타자들이 계속 누상에 나갔고, 차곡차곡 점수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루가 됐다. 4번 타자 한동희가 타석에 들어섰다. 그런데 한참 높은 공에 방망이가 나갔다. ‘저런 공에 왜 휘두르나’ 한탄한 것도 잠시, 타구는 그대로 외야 관중석을 강타했다. 만루홈런이었다. 7-8. 순식간에 한 점 차가 됐다.
두 타자가 연달아 아웃되면서 7회 말 공격이 이대로 끝나는가 싶었다. 하지만 롯데의 방망이는 다시 불을 뿜었다. 전민재를 시작으로 장두성, 손성빈, 황성빈, 나승엽, 레이예스, 한동희, 고승민까지 8연속 안타가 이어졌다. 7회 말에만 무려 18명의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11개의 안타와 3개의 볼넷을 묶어 13점을 뽑았다. 0-8이 13-8로 뒤집혔다. 이후 키움이 솔로홈런 두 방으로 추격했지만 롯데도 손성빈의 투런홈런으로 응수했다. 결국 경기는 15-10, 롯데의 승리로 끝났다.
이렇게 큰 점수 차로 뒤지던 경기를 한 이닝에 뒤집는 장면은 처음 봤다. 경기 후에도 한동희의 만루홈런 장면을 몇 번이나 다시 봤다. 볼 때마다 짜릿했다. 야구라는 스포츠가 주는 쾌감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문화스포츠부에 온 올해 모처럼 롯데 경기를 챙겨보고 있다. 그러다 보니 롯데의 지난 세월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프로야구 원년 멤버인 롯데는 1984년과 1992년 고작 두 차례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그 뒤로 우승 트로피는 더 이상 부산으로 오지 않았다. 우승은커녕 이제는 가을야구에 진출하는 것 자체가 오랜 숙제가 됐다.
마지막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것은 2017년이다. 2000년대 초반 8-8-8-8-5-7-7위라는 암흑기를 보낸 이후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순위는 7-10-7-8-8-7-7-7위였다. 더 긴 터널 속을 헤매고 있다. 올해도 별 다르지 않다. 그 경기를 기점으로 최근 연승을 달린 롯데는 순위를 끌어올리긴 했지만 포스트시즌 마지노선인 5위와 격차는 상당하다. 아직 산술적으로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가을야구를 바라보기에는 갈 길이 멀다.
시즌 초부터 팬들의 마음을 답답하게 한 장면도 많았다. 투타에서 잦은 실수가 이어졌다. 투수가 버티면 타선이 침묵했고, 타선이 살아나면 마운드가 흔들렸다. 이기고 있는 경기를 놓치는가 하면, 잡을 수 있는 경기를 허무하게 내주기도 했다. 최근 순위가 말해주듯이 좋은 날보다 힘든 날이 훨씬 많았다.
그런데도 롯데 팬들은 야구를 끊지 못한다. 잘해서 계속 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가끔 보여주는 말도 안 되는 장면 때문에 또 보게 된다. 0-8이 15-10이 되는 경기처럼 말이다. 모두가 포기한 경기에서 기적처럼 살아나는 순간, 야구가 얼마나 짜릿한지를 보여주는 그런 순간을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팬들이 마냥 기다려주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이 훌쩍 넘은 기다림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가을야구와 우승에 대한 갈증이 커질수록 구단의 책임도 커진다. ‘응원하는 팬들이 있으니 괜찮다’는 식으로 팬들의 인내를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올해 사직야구장 관중 수가 예년만 못한 것은 시즌 초반부터 줄곧 하위권을 전전한 팀 성적의 영향이 절대적일 것이다. 야구장에서 팬들의 함성은 공짜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팬들은 시간을 내고 돈을 쓰고, 때로는 먼 길을 찾아 야구장을 찾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반드시 승리만은 아닐 것이다. 지더라도 다음 경기를 기대하게 만드는 팀, 어제보다 오늘이 나아지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팀을 보고 싶은 것이다.
좋은 선수들을 길러내고, 선수층을 두껍게 만들고, 경쟁력 있는 팀을 만드는 것은 결국 구단의 몫이다. 한두 명의 선수에게 기대거나 매년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긴 시간 꾸준히 경쟁할 수 있는 팀을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야 팬들도 ‘언젠가는 되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올해는 정말 해볼 만하다’는 마음으로 시즌을 기다릴 수 있다. 팬들이 원하는 것은 기적만이 아니다. 오히려 매년 기적에 기대지 않아도 되는 팀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도 역대급으로 덥고 짜증났던 이번 여름, 며칠 전 ‘인생 경기’ 하나는 시원하게 잘 봤다. 젊은 선수들이 주축이 된 롯데의 더 나은 활약을 기대한다. 어린 선수들이 더 성장하고 팀이 더 단단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
강희경 기자 hima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