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주인으로 산다는 것
이국환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최선을 다해 일하는 마트 직원
자기 가게도 아닌데 왜 저럴까
지금 있는 자리 주체로 사는 삶
동네 작은 아파트 옆에는 우리 내외가 오래 다닌 마트가 하나 있다. 낮 시간제로 일하는 한 여성이 늘 그 자리를 지킨다. 손님이 들어서면 마치 자신의 마트인 듯 반갑게 맞이하고, 좋은 물건이 들어오면 먼저 권하곤 한다. 아내와 나는 이 마트가 소중하여, 가격이 조금 비싸도 산책 삼아 들러 장을 본다.
언젠가 아내가 사과 한 봉지를 고르고 있을 때였다. 일하던 여성이 슬며시 다가와 봉지 하나를 바꿔주며 말했다. “이건 며칠 지나면 물러질 거예요. 저쪽 게 더 나아요.” 그 한마디에 우리는 마트를 깊이 신뢰하게 되었다. 손님이 없을 때면 진열대를 정리하고, 시든 채소를 골라내며, 물건 하나하나 제자리를 챙겼다. 시간만 채우면 될 일인데, 저 여성은 왜 저토록 마음을 다하는 것일까. 마트 사장도 아니고 누가 지켜보는 것도 아닌데, 늘 주인의 마음으로 일하는 듯했다.
어느 늦가을, 수업을 마치고 나오던 길이었다. 강의실 복도에서 한 학생이 친구에게 하는 말을 우연히 들었다. “알바는 어차피 받은 만큼만 하는 거야. 너무 마음 쓰지 마.” 첫 출근을 앞둔 친구를 걱정해 주는 말 같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계약은 계약이고 시급은 시급이며, 더 마음을 쏟는다고 세상의 셈법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그것이 이 시대의 지혜로운 처세임을 알면서도, 그 조언 뒤에 남는 서글픈 셈법이 한동안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나 역시 여러 대학을 전전하던 시간강사 시절이 있었다. 당시 내 직업은 행정상 ‘일용잡급직’으로 분류되었다. 시간당 강의료만 생각하면 수업에 그토록 마음을 쏟을 까닭은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방학이면 다음 학기 강의안을 새로 짜고, 수업 준비를 위해 읽었던 책도 밑줄을 그으며 다시 읽었다. 어느 해 겨울, 그렇게 두 달을 꼬박 매달려 새 강의안을 완성했을 때였다. 개강을 코앞에 두고 다음 학기 수업이 없다는 사실을 다른 경로로 전해 들었다. 강단에 서 있는 동안만큼은 그 자리가 내 자리라 믿고 싶었던 마음이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졌다. 주인으로 서겠다는 다짐과 나를 주인으로 대접하지 않는 세상 사이의 거리. 그 아득한 간극이 그해 겨울 내가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였다.
그처럼 삶의 자리가 휘청일 때마다 가만히 마음속으로 읊조리던 문장이 있다. 당나라 선사 임제의 법문을 모은 〈임제록〉에 나오는 구절이다.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어디에 있든 그 자리의 주인이 되면 그곳이 곧 참된 삶의 자리가 된다는 뜻이다. 임제 선사는 이 말을 꺼내기 전 “큰 그릇은 남에게 미혹되지 않는다”고 일갈한 바 있다. 임제에게 주인이 된다는 것은 특별한 자리를 얻는 일이 아니라, 어떤 자리에 있든 그 자리의 조건에 삶을 맡기지 않는 일이었다. 남의 시선이나 세간의 박한 통념에 휘둘리지 않고,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온전히 내 삶의 주체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임제가 말한 주인 됨의 조건이었다.
손님은 스쳐 지나가지만, 주인은 그 자리를 지킨다. 그렇다고 모든 이에게 주인으로 살라 요구할 수는 없다. 삶의 자리가 주는 서러움이 엄연하고, 세상의 셈법 또한 한없이 야박한 탓이다. 그 마트의 여성도, 시간강사 시절의 나도, 돌아보면 세속의 셈을 따지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저 멀리 다른 목표를 바라볼지라도 오늘 내게 주어진 자리에 진심을 다하는 것. 세상의 셈법이 아무리 박할지라도 내 삶을 향한 정직함만큼은 놓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세상이 정해준 자리에 매이지 않고,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이다.
오늘도 그 마트 앞을 지나며 다시 임제의 말을 떠올린다. 수처작주, 입처개진. 삶을 바꾸는 것은 자리가 아니라, 그 자리에 서는 마음이다. 그때마다 나는 같은 질문 앞에 선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나는 손님인가 아니면 주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