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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지 못한 인생 말년, 모차르트는 왜 갑자기 눈을 감았나? [세상에이런여행] ㉕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전기학자나 역사학자는 모차르트를 ‘빈곤에 시달리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천재 음악가’라고 묘사했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본 사람이라면 모차르트가 능력에 맞는 대우도 받지 못하다 죽었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는 공동묘지의 평민 묘역에 묻혔기 때문에 ‘홀대받았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새로운 사료가 발견되면서 이 같은 평가는 사실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
모차르트가 빈곤했거나 홀대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인생의 말년이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엄청난 돈을 벌었던 대작곡가가 왜 그렇게 된 것일까. 그는 힘든 시기를 어디에서 어떻게 버텼을까. 그리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그의 인생 마지막을 살펴보려면 지하철을 타고 빈 외곽으로 나가야 한다.
■사치가 불러온 몰락
모차르트가 전성기를 보냈던 모차르트하우스가 있는 구시가지의 슈테판스플라츠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3개 정류장을 지나 로쿠스가세역에서 내린다. 이곳은 빈의 링슈트라세 바깥에 있는 지역이다. 빈에 성벽이 있던 시절에는 성벽 외곽이었다. 시내와 그다지 많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도 외곽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다.
1787년 오스트리아와 오스만투르크 사이에 전쟁이 터졌다. 전쟁 탓에 음악 연주회 손님이 줄고 작곡을 의뢰하는 고객도 모두 사라져 모차르트의 재정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다. 큰돈을 벌고도 저금이라고는 몰랐던 모차르트는 자금난에 쪼들리다 집세 부담을 덜기 위해 란트슈트라세 75번지로 이사를 갔다. 오페라 ‘돈 조반니’와 현악 세레나데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를 작곡한 곳은 여기였다. 여기에서도 자금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집을 더 싼 곳으로 다시 옮겼다.
로쿠스가세역에서 다시 지하철을 타고 가다 쇼텐토르역 앞에서 내린다. 역 바로 앞에 지그문트 프로이트 공원이 나타나고 공원 뒤편에 뾰족한 첨탑 두 개가 솟은 교회가 보인다. 19세기 말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암살 위기를 넘긴 뒤 성모 마리아에게 감사를 드리는 뜻에서 만든 교회다.
교회 옆의 베링거슈트라세를 따라 3분 정도 걸으면 베링거슈트라세 26번지가 나온다. 계속 자금난에 시달린 모차르트는 1788년 6월 이곳으로 이사를 가 1789년 초까지 살았다. 이곳은 지금도 빈 중심가까지 걸어서 20분 이상 걸리는 곳이다. 모차르트가 살아 있을 때에는 성벽 밖이었기 때문에 더 외곽이었을 게 분명하다. 이 일대 집값은 시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쌌다. 그가 오페라 ‘코지 판 투테’를 쓴 곳은 여기였다. 이곳 입구에 이런 사실을 알리는 명판이 붙어 있다. 모차르트가 살던 때의 건물은 허물어졌고 지금은 새 건물이 들어섰다.
모차르트는 1784~1787년 사이에 매년 5000~1만 굴덴을 벌었다. 빈에서 최고 소득자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는 1787년 후반기부터 빚을 많이 지고 재정난에 시달렸다. 100굴덴이 없어 곳곳에 돈을 빌리러 다녔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문제는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더 많았다는 것이었다. 일부에서는 그의 아내인 콘스탄체의 씀씀이가 헤펐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모차르트가 아버지, 누나와 주고받은 편지는 물론 다른 자료를 살펴보면 사정은 다르다. 근본적인 원인은 모차르트에게 있었다. 씀씀이가 헤펐던 사람은 콘스탄체가 아니라 모차르트였다. 그는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매우 신경을 썼다. 옷, 신발은 늘 최신 유행의 고급만 고집했다.
모차르트는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가 연주회를 진행하는 곳은 대부분 왕의 궁전이나 귀족의 대저택이었다. 연주회를 마치면 왕이나 귀족이 대접하는 진수성찬을 즐겼다. 그들로부터 값비싼 선물을 받았다. 옷, 신발, 보석 등 선물은 다양했다. 당연히 어릴 때부터 비싸고 고급스러운 물건에 익숙했다.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어 했고 생활수준에서 귀족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했다.
게다가 모차르트는 도박을 즐겼고 알코올 중독자였다. 당시 빈 귀족의 오락거리는 음악과 도박이었다. 그들은 밤에 연주회를 보러 가지 않으면 당구장이나 카지노에서 도박을 했다. 귀족 친구가 많았던 모차르트도 마찬가지였다. 연주회, 작곡 시간이 아니면 당구장에서 공을 치거나 노름을 했다. 거기서 탕진한 재산이 만만치 않았다.
잘츠부르크에서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 때에는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부모가 통제를 했기 때문이었다. 빈에 가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직접 돈을 벌었고 주변에 통제하는 사람이 없어 버는 족족 돈을 써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국 작곡가 겸 음악사학자인 앨런 크란츠는 모차르트 전기에 ‘모차르트는 아량, 충동성, 과소비의 희생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어릴 때부터 절제를 모르면서 버릇없이 자랐다. 남의 말에 잘 속아 넘어갔다. 돈은 마치 물처럼 그의 손에서 흘러나갔다’ 면서 ‘모차르트의 어머니조차 ‘볼프강은 새 친구를 사귀면 늘 인생이나 재산을 모두 쏟아부을 것처럼 행동한다’고 하소연했다’고 적었다.
■대가의 비참한 최후
모차르트는 1790년 11월 말 라우헨슈타인가세 8번지로 집을 옮겼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제법 큰 아파트였다. 그는 이곳에 이사를 간 뒤 돈을 벌기 위해 필사적으로 곡을 썼다. 발세그 스튜파흐 백작에게서 의뢰를 받고 유작이 된 미완성곡 ‘레퀴엠’을 작곡한 곳은 이 집이었다. 또 오페라 ‘마술피리’와 ‘티토의 자비’도 작곡했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이듬해 12월 5일 이곳에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을 지켜본 건물은 이제 남아 있지 않다. 그 자리에는 ‘슈테플백화점’이 들어섰다. 백화점 건물 7층 스카이 바에는 모차르트를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졌고, 건물 뒤편에는 명판이 붙여졌다.
모차르트의 마지막을 지킨 의사 클로셋이 발행한 사망 증명서에는 사망 원인이 ‘속립진열’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것이 어떤 질병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모차르트가 죽기 전인 11월 아내에게 ‘몸이 아파. 죽을 것 같아. 독을 먹은 모양이야“라고 말했다는 것 때문에 독살설이 퍼지기도 했다. 이후 많은 의학 전문가가 모차르트의 사인을 분석했지만 결과는 늘 달랐다. 앞으로도 사인을 둘러싼 논쟁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 어느 누구도 100% 명확한 사인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덩치가 작았던 모차르트는 어릴 때부터 튼튼한 아이가 아니었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는 각종 병에 걸려 세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여섯 살 때 빈에 처음 가서 성홍열에 걸려 생사를 헤맸다. 이때 간을 상했는데 평생 신장 질환에 시달린 원인이 됐을 가능성이 있다. 빈을 두 번째 방문했을 때에는 천연두, 네덜란드 헤이그에 갔을 때에는 발진티푸스에 걸렸다. 이때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게 거의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모차르트가 이렇게 자주 병에 시달린 것은 각종 전염병이 수시로 유행한 게 이유일 수 있지만, 그가 어릴 때 제대로 못 먹어 체질적으로 약한 것이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는 모유 수유를 하지 않고 보리죽만 먹였는데, 이 때문에 모차르트는 늘 영양실조에 허덕였다는 게 일부 전기학자의 주장이다.
모차르트의 장례식은 성슈테판대성당에서 거행됐다. 관은 대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사인이 전염병 때문이라고 짐작한 대성당 사제주임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간단한 장례 미사가 거행된 곳은 대성당 외부의 십자가 경당 앞이었다. 지금 십자가 경당의 철문 뒤에는 모차르트의 장례 미사가 열린 장소임을 알리는 명패가 붙어 있다.
‘1791년 12월 6일 불멸의 작곡가 모차르트의 육체는 이곳에서 축복을 받았다. 여기에서 그의 관은 공동묘지로 옮겨졌다.’
■마지막 흔적
성슈테판대성당 십자가 경당 앞에서 잠시 묵념한 뒤 그라벤거리를 거쳐 호프부르크왕궁으로 이어지는 콜마르크트거리를 따라 간다. 이 거리의 종점은 미하엘러플라츠광장인데, 이곳에는 13세기에 만들어진 장크트미하일러교회가 있다.
세상을 떠난 모차르트를 위해 첫 추모 미사가 열린 곳은 여기였다. 그가 미완성으로 남긴 유작 ‘레퀴엠’이 초연된 것도 이곳이었다. 교회에 들어가서 잘 살펴보면 한쪽 구석에 이런 내용을 담은 동판을 찾을 수 있다. 대다수 외국인 관광객은 교회의 역사를 잘 몰라 들어가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광장 정면에 보이는 호프부르크왕궁 사진 찍기에만 바쁘다. 역시 여행에서는 아는 만큼만 보이기 마련이다.
교회에서 나와 호프부르크왕궁을 가로질러 왕실 정원인 부르크가르텐으로 간다. 정원 한쪽 모퉁이에 조그맣게 따로 단장된 공간이 나타난다. 온전히 모차르트를 위한 공간이다. 모차르트 동상이 서 있고 동상 바로 앞에는 봄여름이면 ‘음표’ 모양의 꽃이 피어나는 화단이다.
모차르트 동상은 독일어로 ‘모차르트 덴크말’이라고 부른다. 동상은 악보대를 든 모차르트를 형상화했다. 정면의 부조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의 두 장면을 의미한다. 뒷면의 부조는 여섯 살인 모차르트가 아버지, 누나 난네를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을 담았다.
모차르트 동상을 찾는 관광객의 발걸음은 1년 내내 끊이지 않는다. 동상과 주변의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날씨가 따뜻한 4~5월이다. 이 무렵이면 부르크가르텐에는 알록달록한 색깔의 꽃이 화사하게 핀다. 동상 앞에는 높은음자리표 모양의 꽃밭이 조성된다. 꽃밭 앞에서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이 줄을 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모차르트 동상에서 길을 건너 71번 트램을 탄다. 목적지는 빈 중앙공동묘지다. 이곳에 가는 이유는 모차르트의 기념비가 있고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2세 같은 유명 음악가가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 기념비가 있는 곳은 중앙공동묘지 ‘32 A-55’ 구역이다.
모차르트는 원래 중앙공동묘지가 아니라 장크트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때만 해도 평민의 경우 개인무덤이 아니라 공동무덤을 쓰는 게 일반적이어서 모차르트도 공동무덤에 묻혔다. 나중에는 그 위에 다른 공동무덤을 또 만들었다. 이 때문에 모차르트의 유해를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돼 버렸다.
빈 시청은 모차르트가 죽고 68년 뒤인 1859년 장크트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모차르트 기념비를 세웠고, 사망 100주기이던 1891년에는 중앙공동묘지로 옮겼다. 기념비는 크게 상단과 하단으로 나눌 수 있다. 상단에는 위대한 작곡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뮤즈의 조각이 설치됐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뮤즈는 음악 같은 예술을 관장하는 여신이니 모차르트 같은 작곡가를 추모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하단에는 대리석 비석 몸체에 모차르트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이 붙었다.
모차르트 기념비 주변은 베토벤, 브람스,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의 무덤이 둘러쌌다. 의도는 분명하다. 오스트리아의 대표적 작곡가인 모차르트가 최고의 음악가라는 걸 내세우기 위해서다. 다들 베토벤을 ‘음악의 황제’라고, 모차르트를 ‘음악의 신동’이라고 불러 베토벤을 한 수 높게 친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셈이다.
2024-07-23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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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음악적 전성기 경제적 황금기…빈 최고소득자 대열 합류 [세상에이런여행] ㉔
빈에 정착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자신감에 넘쳤다. 음악을 사랑한 도시였던 빈은 그에게 음악적으로 경제적으로 많은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매일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바쁘게 살았다. 그래도 힘들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게 즐겁고 행복했다. 작곡해서 연주하는 작품마다 대성공을 거둬 명성을 얻었고, 적지 않은 돈을 벌었고 결혼을 했고 아이까지 낳았다.
성슈테판대성당에서 결혼해 조촐한 셋집에서 신혼살림을 차렸지만 성공을 거둬 큰돈을 번 뒤에는 화려한 저택으로 이사를 갔다. 빈 곳곳을 돌아다니며 각종 공연장에서 많은 작품을 연주했던 무대도 돌아본다. 모차르트의 전성기를 돌아보는 코스의 시작은 그가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했던 성슈테판대성당이다. 다행히 첫 하숙집 바로 인근이어서 멀지는 않다.
■성슈테판대성당
오페라 ‘후궁탈출’의 성공으로 적지 않은 돈을 벌어 자신감을 얻은 모차르트는 체칠리아 부인에게 딸과 결혼하겠다고 밝혔다. 체칠리아 부인은 사윗감의 밝은 미래를 기대하며 결혼을 허락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결혼에 반대했지만 정작 아들은 여기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모차르트가 1782년 8월 4일 결혼식을 거행한 곳은 체칠리아 부인의 집이 있던 밀히가세 1번지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성슈테판대성당이었다. 모차르트는 원래 장모의 집 근처에 있던 장크트페터교회에서 결혼하려 했지만 주변 지인의 도움으로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치를 수 있었다. 이때 모차르트는 스물여섯 살, 콘스탄체는 스무 살이었다. 결혼을 승낙한다는 아버지의 편지가 도착한 것은 결혼식 다음날이었다.
갓 결혼한 모차르트 부부의 뒤를 따라 성슈테판대성당 앞의 로텐투름슈트라세를 걷는다. 리히텐슈테그 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조금만 가면 호허마르크트가 나타난다. 여기서 4~5분 정도 더 이동하면 비플링거슈트라세가 보인다. 모차르트가 신혼살림을 차린 곳은 이 거리의 19번지였다. 그는 이곳에서 ‘대미사곡 C단조’를 작곡해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초연했다. 결혼에 반대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른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려는 뜻이 담긴 곡이었다.
모차르트의 신혼집인 비플링거슈트라세는 그가 여섯 살 때 첫 빈 연주회를 열었던 암호프광장 인근이다. 그는 이 집에서 결혼 이듬해 6월에 첫 아들 라이문트 레오폴트를 낳았다. 부부는 첫 아들을 암호프교회에 데려가 세례를 받게 했다. 하지만 아들은 불과 두 달 만에 눈을 감고 말았다. 부부는 결혼하고 첫 8년 사이에 아이를 여섯이나 낳았다. 그중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아이는 둘이었다. 카를 토마스 모차르트와 프란츠 자베르 볼프강 모차르트였다.
비플링거슈트라세 19번지에서 다시 거꾸로 호허마르크트 쪽으로 1분 정도 걸어가면 조그만 골목길 사이로 유덴플라츠가 나타난다. 과거에는 유대인 밀집 지역이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홀로코스트 위령탑’이 있다. 모차르트는 1783년 4월 유덴플라츠 3번지 건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1784년 1월까지 9개월 정도 살았다. 그는 여기서 유명한 ‘터키 행진곡’이 들어간 ‘피아노 소나타 11번 A장조 K331’를 작곡했다. 이 건물은 지금은 학교 등으로 사용된다.
■모차르트하우스
유덴플라츠에서 호허마르크르트를 지나 다시 성슈테판대성당으로 간다. 북쪽 탑 앞을 지나 슐러스트라세로 들어간 뒤 곧바로 돔가세 쪽으로 우회전한다.
모차르트는 1784년 9월 29일 돔가세 5번지 2층으로 이사했다. 둘째 아이 카를 토마스가 태어나고 8일 뒤였다. 이곳은 당시에는 빈에서 가장 좋은 건물 중 하나였다. 그가 입주할 때 내기로 한 집세는 3개월에 230굴덴, 연간 960굴덴이었다. 직전에 살았던 곳의 집세는 3개월에 65굴덴, 연간 260굴덴이었다. 결국 새 집의 집세는 이전 집과 비교해서 3.7배 정도였다. 그가 잘츠부르크에서 받았던 연봉의 배 이상 수준이었다.
모차르트가 빈에서 가장 멋진 저택에 들어가게 된 것은 수입이 엄청나게 늘어난 덕분이었다. 1784~1787년은 그의 음악적 전성기였고 경제적 황금기였다. 당시 그는 빈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로 이름을 날렸다. 저명한 사회 지도층 인사 중에서 친구도 많았다. 저택에서 연주회를 열어달라고 초청장을 보낸 귀족이 줄을 설 정도였다.
모차르트는 돔가세에서 살 때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은 물론 피아노 협주곡 20~25번을 작곡했다. 이 기간 중에 그가 번 돈은 해마다 5000~1만 굴덴이었다. 잘츠부르크에서 받던 연봉 400굴덴과 비교하면 12~24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당시 빈의 유명 병원의사가 받는 연봉은 600굴덴이었다. 상류층이라도 1년에 1000굴덴을 벌면 소득이 높은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따라서 그가 번 돈은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거액이었을 게 분명하다.
모차르트가 살았던 돔가세 5번지 주택 2층에는 큰 방 4개, 작은 방 두 개, 그리고 부엌이 있었다. 그의 가족이 살기에는 지나치게 큰 집이었다. 그는 평생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집뿐 아니라 옷, 신발도 마찬가지였다. 낡은 집에서 살거나 옷, 신발이 추레하게 보이는 걸 무척 부끄럽게 여겼다. 모차르트는 이곳에 친구를 초청해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그가 사람 만나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랬던 측면도 있었지만 과시욕이 더 강했다고 볼 수도 있다.
빈 시청은 2004년 모차르트하우스를 대대적으로 재단장했다. 공사는 2006년에 마무리됐다.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후 이 건물은 모차르트의 인생과 예술세계를 소개하는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이곳은 성슈테판대성당 인근에 자리를 잡은 데다 ‘피가로의 결혼’이 작곡된 곳이라는 상징성도 가져 관광객의 관심을 끌기에 훌륭한 장소다.
세계적 팝스타 마돈나는 2012년 6월 30일 딸 로드, 그리고 밴드 멤버 일부를 데리고 모차르트하우스를 방문했다. 마돈나가 20세기 최고 여성 팝스타라면 모차르트는 18세기 최고의 음악가였다. 마돈나는 방명록에 ‘늘 영감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적었다.
■쇤브룬궁전
빈 여행을 하면서, 특히 모차르트가 빈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하면서 쇤브룬궁전을 안 가볼 수는 없다. 빈 여행의 하이라이트일 뿐 아니라 그의 음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잘츠부르크에서 온 소년이 놀라운 연주 실력을 발휘한다는 소식을 들은 프란츠 슈테판-마리아 테레지아 황제 부부는 지체하지 않고 그들을 쇤부른궁전으로 초청했다. 모차르트 가족이 궁전에 들어간 것은 1762년 10월 13일이었다.
쇤브룬궁전 ‘거울의 방’에서는 황제 부부 외에 황태자였던 요제프 2세 그리고 나중에 프랑스 파리로 시집을 가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는 마리아 앙투안 공주 등 황실 가족이 모두 모여 있었다. 모차르트와 누나 난네를은 궁정 작곡가 게오르그 크리스토프 바겐세일이 작곡한 콘체르트 전곡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부부는 두 아이의 연주에 매혹당하고 말았다.
일화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연주를 마치고 걸어가다 미끄러져 넘어졌다. 이때 마리아 앙투안이 달려가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모차르트는 공주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나중에 나랑 결혼하자”고 말해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지어낸 이야기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모차르트보다 다섯 살 많았던 공주 요제파는 모차르트의 손을 잡고 궁전의 여러 방을 구경시켜 주었다.
이틀 뒤 궁전의 시종이 모차르트 가족이 묵고 있던 숙소로 찾아가 황실의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모차르트와 누나 난네를에게 준 선물은 옷이었다. 모차르트에게는 대공 막시밀리안 프란츠가 입었던 실크 드레스가 주어졌다.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의 막내아들인 막시밀리안은 모차르트와 동갑이었다. 난네를도 드레스를 선물로 받았다. 레오폴트는 금화 100듀캇을 챙겼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요제프 2세 황제에게서 우대를 받았던 모차르트는 1786년 쇤브룬궁전의 오랑제리에서 이색적인 연주회를 가졌다. 1985년 체코 출신의 밀로스 포만 감독이 만든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그를 암살한 것으로 묘사되는 궁정음악가 살리에리와 작곡 대결을 벌인 것이었다.
요제프 2세는 1766년 결혼해 브뤼셀로 건너간 여동생 마리아 크리스텐이 결혼 20년 만에 친정을 방문하자 여동생을 환영하기 위해 여러 행사를 진행했다. 그중 하나로 모차르트-살리에리 음악 대결을 기획한 게 계기였다.
오랑제리는 초대형 온실이었다. 유리로 만든 아치형 천장의 길이는 무려 189m였다. 황실은 오랑제리를 단순히 열대식물의 온실로만 사용하지는 않았다. 추운 겨울에는 따뜻하게 연주회나 파티를 여는 장소로도 이용했다. 규모가 컸기 때문에 대규모 파티를 열기에 제격이었다.
두 작곡가의 대결은 빈의 겨울 추위가 가장 매서운 시기인 2월 7일에 벌어졌다. 참석자는 황제 부부는 물론 귀족 등 80명이었다. 모두 부인을 데리고 갔으니 총 참석 인원은 160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오랑제리에는 양쪽 끝에 하나씩 두 개의 무대가 설치됐다. 모차르트가 먼저 자작 오페라 ‘극장 감독’을 공연했고, 이어 맞은편에서 살리에리가 자작 오페라 ‘처음에는 음악, 나중에는 말’을 공연했다. 두 무대의 가운데에는 초대된 손님들이 앉아 심판 역할을 맡았다. 한쪽의 오페라가 끝나면 의자를 뒤로 돌려 반대쪽의 오페라를 봤다. 손님 박수가 큰 오페라가 이기는 게 규칙이었다. 결과는 살리에리의 완승이었다.
모차르트가 쇤브룬궁전에서 연주한 걸 기념하기 위해 해마다 여름에는 비엔나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서머 나이트 콘서트 쇤브룬’이라는 음악회가 열린다. 또 모차르트-살리에리의 맞대결 행사가 열린 걸 기념하기 위해 지금도 오랑제리에서는 매년 여름에 모차르트 콘서트가 진행된다. 물론 두 작곡가의 맞대결 형식은 아니다. 단순히 모차르트와 요한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연주하는 콘서트일 뿐이다.
2024-07-1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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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매혹한 6세 꼬마의 연주 “내가 바로 모차르트” [세상에이런여행] ㉓
잘츠부르크에서 출발한 기차는 채 3시간도 안 걸려 빈에 도착한다. 숙소에 짐을 푼 다음 곧바로 지하철을 타고 시내로 나가 빈대학교 앞의 쇼텐토르역에 내린다. 이 역은 빈 구시가지를 원형으로 둘러싼 도로 ‘링슈트라세’의 일부분인 쇼텐링과 유니버시타츠링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를 잡고 있다. 링슈트라세 자리에는 원래 빈을 보호하던 성벽이 있었지만, 19세기 말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도시 발전을 앞당긴다며 허물어 빈을 에워싸는 도로를 건설했다.
빈에 와서 이곳을 가장 먼저 들른 것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 빈의 인연이 시작된 곳에 가기 위해서다. 그가 여섯 살 때 빈을 처음 방문해 첫 연주회를 가진 곳과 잘츠부르크를 떠나 빈에 정착하게 된 계기를 제공한 곳이다. 그의 이름이 잘츠부르크를 넘어 전 유럽에 퍼지는 계기가 된 두 곳인 만큼 가장 먼저 들르지 않을 수 없다.
■암호프광장 콜랄토궁전
쇼텐토르역에서 나와 남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쇼텐가세가 나온다. 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베토벤이 1804~1815년에 살았으며, 지금은 ‘베토벤 기념의 방’이 운영되는 묄커바스타이 8번지 저택이 나온다. 목적지는 이곳이 아니어서 사진만 찍고 그냥 지나친다. 길을 따라 5~6분 더 내려가면 암호프광장이 나온다.
암호프광장은 관광객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다. 이곳에 모차르트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광장에 어떤 역사가 숨어 있는지 아는 사람도 드물다.
암호프광장은 ‘궁정에서’라는 뜻이다. 빈이 오스트리아의 수도가 되는 역사를 연 바벤베르크 가문이 12세기 빈에 정착한 뒤 최초로 궁전을 건설한 곳은 바로 여기였다. 그래서 이름이 암호프가 된 것이다.
모차르트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이곳에 가장 먼저 간 이유는 광장에 있는 ‘암호프교회’ 왼쪽에 붙은 저택을 보기 위해서다. 저택의 이름은 ‘콜랄토궁전’이다.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모차르트가 여섯 살 때인 1762년 빈을 처음 방문해 첫 연주회를 가진 곳이 바로 여기였다. 모차르트가 빈에서 데뷔한 장소였고, 그가 유럽 최고의 음악가가 될 것이라는 걸 예고한 장소였다.
콜랄토궁전의 주인은 이탈리아계 귀족인 콜랄토 가문의 토마스 빈치게라 콜랄토 백작이었다. 그는 90년 전에 지어 낡은 저택 개축 공사를 마무리한 상태였다. 지인을 초청해 집들이 행사를 어떻게 진행할지 고민하다 마침 빈을 방문한 모차르트를 초대한 것이었다.
콜랄토궁전은 아쉽게도 관광객에게 개방되지는 않는다. 다만 문이 닫혀 있지는 않으므로 살짝 들어가 볼 수는 있다. 여기가 모차르트의 흔적이 남은 곳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모차르트기념협회가 1956년 6월에 설치한 동판을 1층에서 볼 수 있다. 동판 내용은 이러하다.
‘1762년 10월 둘째 주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빈에서 최초의 연주회를 개최한 곳은 바로 이 궁전이다.’
먼 훗날의 일이지만 암호프교회도 모차르트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21년 뒤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한 모차르트는 첫 아기인 라이문트 레오폴트 모차르트를 낳았다. 아기가 다음 날 유아 세례를 받은 곳은 암호프교회였다. 다섯째 딸 안나 마리아도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두 아기는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았다.
모차르트 가족의 콜랄토궁전 연주회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던지 다음 날부터 빈의 여러 귀족이 이들을 먼저 초청하려고 난리를 피웠다. 이들은 빈에서 1년여 동안 머물며 여러 귀족 저택을 찾아다니면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아우어스페르크슈트라세 1번지인 아우어스페르크궁전에서는 군 최고사령관인 히트부르크하우젠 공작을 위해 연주했다. 마우니츠 백작의 저택인 발하우스광장 2번지와 방크가세 2번지인 쇤보른바티아니궁전 그리고 왕립도서관 앞의 요제프광장 6번지 팔피궁전에서도 연주했다. 각 궁전 안팎에는 ‘모차르트가 연주한 장소’라는 명패가 붙어 있다.
실력이 대단하다는 소문이 황실에까지 퍼진 덕에 나중에는 모차르트는 물론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 누나 난네를까지 쇤브룬궁전에 들어가 황실 가족 앞에서 음악을 연주했다.
■독일기사단궁전
암호프광장 한가운데 벤치에 앉아 따스한 햇살을 즐기며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 21번’ 2악장 ‘엘비라 마디간’에 빠져든다. 광장의 분위기와 1967년 스웨덴의 영화 ‘엘비라 마디간’의 주제곡이었던 음악의 낭만적인 음률이 정말 조화롭다는 생각에 저절로 미소가 감돈다.
암호프광장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빈의 중심지인 그라벤거리와 콜마르크트거리가 나타난다. 이 중 그라벤거리를 따라 걸어 성슈테판대성당 쪽으로 향한다. 대성당에서 맞은편 골목, 즉 싱거슈트라세로 들어간다. 목표는 싱거슈트라세 7번지 건물이다. 건물의 이름은 도이치오던하우스, 즉 독일기사단궁전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독일기사단 단장이 관할하는 독일수도원교회와 독일기사단 보물관이 있다.
모차르트는 스물다섯 살인 1781년 뮌헨에서 오페라를 공연한 뒤 잘츠부르크의 1인자인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 대공‧대주교에게서 빈으로 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그가 달려간 곳은 대주교가 빈에 갈 때마다 숙소로 삼던 싱거슈트라세 7번지였다.
성인이 된 모차르트는 재정적, 정치적 위기에 빠진 잘츠부르크의 개혁을 추진하던 콜로레도와 사이가 나빠졌다. 그는 궁정악단에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하고 싶었지만 콜로레도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독일기사단궁전에서 콜로레도와 설전을 벌이다 잘츠부르크를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화가 난 콜로레도는 마음대로 하라며 그를 내쫓고 말았다.
자료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엉덩이를 걷어차여’ 쫓겨났다고 한다. 그것이 ‘쫓겨났다’는 말의 상징적 표현인지, 정말 ‘엉덩이를 걷어차여’ 쫓겨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아들에게 ‘대주교에게 용서를 구하고 고향에 돌아오라’고 간청했지만 모차르트는 이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길을 걷기로 했다. 그는 속박에서 풀려나 원하던 ‘자유’를 얻게 됐다. 이 장면에서 가장 어울리는 음악은 모차르트가 18세 때 잘츠부르크에서 작곡했으며 영화 ‘아마데우스’에 등장하는 ‘교향곡 25번’ 1악장이다. 이 곡을 들으며 독일기사단궁전을 보노라면 의기양양한 모차르트가 콧노래에 발장단을 맞춰 걸어가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오늘날 독일수도원교회인 독일기사단궁전에서는 모차르트 연주회가 정기적으로 열린다. 문이 늘 열려 있어 누구나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있다. 교회도 개방되기 때문에 둘러볼 수 있다. 궁전 입구 쪽 벽에는 ‘모차르트가 1781년 3월 18일부터 5월 2일까지 이곳에 살았다’는 명패가 붙어 있다.
■빈의 첫 하숙집
독일기사단궁전에서 나와 다시 그라벤거리로 돌아간다. 17세기 빈을 강타했던 역병이 사라진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성모 마리아에게 바친 기둥인 페스트조일레가 나타나고, 기둥 왼쪽으로 난 짧은 골목길 끝에는 작은 교회가 하나 보인다. 빈에서 가장 오래된 성소 중 하나인 장크트페터교회다.
교회 뒤쪽은 ‘우유 거리’라는 뜻인 밀히가세인데, 독일기사단궁전에서 쫓겨난 모차르트가 곧바로 찾아간 곳은 밀히가세 1번지 저택이었다. 그가 이곳으로 간 것은 집주인이 잘 알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집주인은 남편을 잃고 만하임에서 빈으로 이사를 가 혼자 네 딸을 키우던 체칠리아 베버였다. 모차르트는 여러 해 전 만하임에 연주여행을 갔을 때 베버 가족을 만나 이미 알던 사이였다.
모차르트는 이 집에서 1781년 5~9월 다섯 달 동안 머물렀다. 저택 벽에는 ‘모차르트가 1781년 이 집에 살면서 오페라 ‘후궁 탈출’을 작곡했다’는 내용을 새긴 명판이 붙어 있다. 모차르트에 대해 잘 알거나 관심이 많은 외국인 관광객은 일부러 이곳을 찾아가 기념사진을 찍는다.
스물다섯 살이었던 모차르트는 그 짧은 기간에 당시 열아홉 살이던 체칠리아 부인의 둘째딸 콘스탄체와 사랑에 빠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체칠리아 부인은 모차르트를 집에서 쫓아냈다. 모차르트가 과거 만하임에서 큰딸과 결혼하겠다고 난리를 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아직 제대로 돈을 못 버는 처지여서 딸을 먹여 살릴 수 있을지 걱정이 됐고, 염문이 퍼지면 딸이 혼처를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기도 했다.
체칠리아 부인의 등쌀에 못 이긴 모차르트는 그라벤거리 17번지 집의 3층으로 이사를 갔다. 새로 옮긴 하숙집은 그라벤거리에 있는 분수 요제프브루넨 맞은편이었는데, 밀히가세 1번지에서 걸어서 1~2분 거리였다. 지금 이집은 상점으로 변했다.
모차르트는 그라벤거리 17번지 집에서 살면서 첫 오페라 ‘후궁 탈출’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1782년 7월 16일 부르크극장에서 초연돼 대성공을 거뒀고, 모차르트는 단번에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 체칠리아 부인의 반응이 변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024-07-09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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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 카페에 미사곡 초연 성당도…볼프강 흔적, 아직 살아 숨 쉬네 [세상에이런여행] ㉒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음악이 귓가에 흐르는 환청을 느끼면서 ‘옛 시장’이라는 뜻인 알터마르크트 광장으로 향한다. 이곳은 잘츠부르크 대성당에서 게트라이데가세 사이를 오가는 길목이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하루 종일 많은 사람으로 붐빈다.
모차르트 여행을 진행하면서 그의 음악과 인생을 살펴보느라 잘츠부르크 곳곳을 다니다 보니 피곤하다. 이제는 커피 한 잔과 짧은 휴식이 필요한 시간이다. 알터마르크트 광장에 간 것은 ‘모차르트 초콜릿’을 사고 ‘모차르트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잠시 쉬기 위해서다.
목적지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찻집인 ‘카페 토마셀리’와 모차르트 초콜릿 원조 제품을 판매하는 ‘카페 콘디토레이 퓌르스트’다.
■카페 토마셀리와 카페 퓌르스트
다른 카페를 놔두고 굳이 카페 토마셀리로 간 것은 이곳이 모차르트의 단골 카페였기 때문이다. 그가 자주 들른 이유는 간단했다. 차가 맛있는 데다 그의 집이 있던 게트라이데가세 9번지에서 가까웠다. 아무리 느리게 걸어도 5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모차르트는 카페 토마셀리에 가면 늘 아몬드 밀크를 주문했다. 가끔 아침 식사를 들기도 했다.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혼자 빈으로 떠났다가 1783년 아버지 허락 없이 결혼한 아내 콘스탄체 베버를 데리고 잘츠부르크로 잠시 돌아갔을 때에도 아내와 함께 카페를 찾았다.
콘스탄체는 1791년 모차르트와 사별한 뒤 시누이가 살던 잘츠부르크로 이사를 갔다. 그녀는 모차르트의 추억이 서린 카페 토마셀리 2층에 세를 얻어 두 번째 남편과 함께 살다 세상을 떠났다.
카페 토마셀리에 들어가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난 것처럼 느낄지도 모른다. 가구, 크리스탈 샹들리에, 하얀 앞치마를 두른 직원, 테이블 사이를 오가며 디저트를 운반하는 카트, 나무 가판대에 놓인 신문 등은 200여 년 전 중상류층 인사들이 즐겨 찾던 시절의 모습 그대로다. 관광객이 너무 많이 입장해 가끔 소란스러울 때도 있지만 우아한 분위기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어폰을 끼고 휴대폰에 저장한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소야곡)’를 틀어본다. 모차르트가 1781년 빈에서 작곡한 음악이지만 잘츠부르크의 분위기와 너무 잘 어울려 이곳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곡이다. 입안을 즐겁게 해주는 고소한 아몬드 밀크와 귀를 달콤하게 만들어주는 아름다운 음악이 마치 협연을 펼치는 느낌이다.
카페 토마셀리에서 아몬드 밀크를 다 마신 뒤 바로 맞은편에 있는 초콜릿 가게 ‘카페 퓌르스트’로 걸음을 옮긴다. 이곳은 오스트리아에서 널리 판매되는 모차르트 초콜릿, 즉 ‘모차르트 쿠겔’의 원조 가게다. 카페의 첫 주인은 ‘모차르트 탄생 100주년’이던 1856년에 태어난 폴 퓌르스트였다. 그는 1891년 ‘모차르트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둥근 공 모양의 초콜릿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모차르트 쿠겔이었다.
퓌르스트의 모차르트 쿠겔이 큰 인기를 얻자 다른 곳에서도 우후죽순처럼 모차르트 쿠겔이라는 이름을 단 제품을 내놓았다. 지금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모차르트 쿠겔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제품이 무려 13개나 생산된다. 퓌르스트가 상표권을 등록하지 않은 탓에 아무나 똑같은 이름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에 가면 어디에서나 모차르트 쿠겔을 볼 수 있다. 기념품 가게는 물론 제과점이나 초콜릿 전문점에도 있다. 달콤한 초콜릿 포장지에 새겨진 모차르트의 얼굴을 보고 지갑을 열지 않을 관광객은 하나도 없다.
■호프슈탈가세
카페 토마셀리에서 맛있는 아몬드 밀크를 마시고 퓌르스트에서 산 초콜릿을 입에 문 채 다시 거리로 나선다. 인근의 잘츠부르크대학교 법학부 건물을 지나면 ‘대학교 광장’이 나온다. 광장 인근에는 잘츠부르크대학교 관련 시설 천지다. 대학교 성당, 대학교 도서관, 대학교 강당 등이다.
광장 끝까지 가면 그야말로 ‘모차르트 거리’가 나타난다. 거리의 실제 이름은 호프슈탈가세이지만 ‘모차르트거리’라고 불러도 지나친 것은 아니다. 모차르트를 핵심으로 하는 잘츠부르크 음악축제 공연장인 ‘그로세스 페스트슈필하우스’와 ‘모차르트 회관’ 등이 이곳에 모였기 때문이다.
잘츠부르크대학교 대강당은 모차르트가 다섯 살 때 학예회에 무용수로 출연한 곳이다. 열두 살 때에는 역시 이 대강당에서 자작 오페라 ‘아폴로와 히아킨투스’를 초연했다.
대강당은 2001년 미국 기업인 도널드 칸 부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수리 작업을 거쳐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이던 2006년 재개장했다. 재개장 기념 연주회 무대에 오른 곡은 ‘아폴로와 히아킨투스’였다.
해마다 여름철 잘츠부르크 대축제가 열리면 호프슈탈가세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빈다. 미리 축제를 염두에 두고 일정을 잡아 표를 예매하지 않는다면 각종 공연장에 들어갈 입장권 한 장 구하기도 쉽지 않다. 사정이 안 돼 음악축제 공연장이나 대강당에서 음악을 들을 수 없더라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거리를 한번 걸어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만하다. 모차르트가 이곳에서 살아 숨 쉰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장크트페터 수도원·성당
호프슈탈가세 끝까지 걸어가면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성소인 ‘장크트페터 수도원·성당’이 나온다.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독일어권 지역을 통틀어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곳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5세기에 만든 작은 성당이 있었는데 잘츠부르크를 재건한 성 루프레흐트가 8세기 초 새로 수도원 겸 성당을 건설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잘츠부르크의 많은 명소처럼 이곳도 모차르트와 직접적으로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모차르트는 이곳에서 1769년 ‘도미니쿠스 미사곡’을, 1783년 ‘대미사곡 C단조’를 초연했다.
‘도미니쿠스 미사곡’은 신부가 된 동네 형 카예탄의 첫 미사 집전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곡이다. 카예탄은 모차르트가 살던 게트라이데가세 9번지 하겐나우어하우스의 집주인이던 요한 로렌츠 하겐나우어의 아들이었고, 도미니쿠스는 그의 세례명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모차르트와 친해 서로 집을 오가며 형제처럼 함께 놀기도 했다.
‘도미니쿠스 미사곡’은 종교음악이지만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곡이다. 카예탄은 신부가 되기 전 오페라를 좋아했는데 모차르트는 이 점을 고려해 미사곡을 일부러 축제 음악처럼 작곡한 것이었다.
‘대미사곡 C단조’는 1781년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빈으로 떠났다가 역시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한 모차르트가 빈에 간 이후 처음 귀향해 아버지에게 사죄하는 뜻을 담은 곡이었다. 이날 행사는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에서 진행한 마지막 연주회였다. 이 곡은 나중에 유럽의 여러 국왕, 황제 대관식에 쓰여 ‘대관 미사곡’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장크트페터 수도원·성당에는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큰 공동묘지가 있다. 모차르트의 누나 난네를도 이곳에 묻혔다. 장크트길겐으로 시집을 갔던 그녀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잘츠부르크로 돌아가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다. 아버지마저 별세하자 혼자 장례식을 치르고 외롭게 살다 눈을 감았다.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는커녕 단 한 번도 귀향하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는 누나를 찾아가 위로한 적도 없었다. 세상을 떠날 무렵 난네를에게 모차르트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장크트페터 수도원 공동묘지는 뮤지컬 영화 ‘사운드오브뮤직’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다. 합창대회를 마친 트랩 가족은 잘츠부르크에서 탈출하다 나치에 쫓길 때 공동묘지를 지나가는데, 영화를 촬영한 장소가 바로 장크트페터 수도원 공동묘지였다.
장크트페터 수도원·성당에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이 있다. 12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슈티프츠켈러 장크트페터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이곳에서 가끔 식사를 했다. 때로는 가족과 함께, 때로는 지인과 함께 식당을 방문했다. 난네를이 1783년 10월에 쓴 일기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아버지는 슈티프츠켈러에서 친구와 점심을 들었다. 폭우가 내렸다.’
슈티프츠켈러에서는 매일 저녁 모차르트 디너 콘서트가 진행된다. 음식을 즐기면서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는 프로그램이다. 식사는 연주회 중간 휴식기에 제공된다. 오스트리아 전통의상을 입은 직원이 다양한 음식을 대접한다. 잘츠부르크에서 하룻밤을 묵어간다면 호텔 로비 직원에게 부탁해 예약하면 된다.
2024-07-0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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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볼프강 연주에 놀란 대주교 “넌 영원한 잘츠부르크의 보석” [세상에이런여행] ㉑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태어난 게트라이데가세와 유아세례를 받은 잘츠부르크 대성당에서 나와 레지덴츠 광장을 거쳐 모차르트 광장을 지난다.
모차르트 광장에는 모차르트가 죽고 50여 년 후인 1842년에 제막된 모차르트 동상이 있다. 남편 사후에 재혼한 부인 콘스탄체는 동상이 만들어질 때 잘츠부르크로 이사를 갔지만 제막식 6개월 전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완성된 옛 남편의 새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대신 모차르트의 두 아들 카를 토마스, 프란츠 자베르 볼프강이 행사에 참석했다. 프란츠 자베르는 아버지를 기리면서 직접 작곡한 칸타타를 연주했다.
모차르트 동상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뒤 잘자크강으로 나가 다리를 건넌다. 뮤지컬 영화 ‘사운드오브뮤직’에도 나오는 ‘모차르트다리’다. 대부분 이 다리의 이름은 물론 영화 이야기도 몰라 굳이 찾아가지 않는다.
잘자크강에서는 유람선이 한가롭게 돌아다닌다. 강변에는 자전거 전용도로도 마련돼 자전거 동호인들이 신나게 속도를 즐긴다. 보행자가 전용도로에서 얼쩡거리면 “비켜”라는 호통이 터져 나올지도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
다리를 따라 죽 걷다보면 마카르트 다리 앞에 세계적 지휘자였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태어난 생가가 나타나고, 이어 잘츠부르크의 대표적 랜드마크인 미라벨 궁전과 정원이 나온다. 궁전을 찾아온 것은 모차르트가 ‘음악신동’이라는 사실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곳이기 때문이다.
■미라벨 정원
당시 귀족이나 부자 집안에서는 아들, 딸 할 것 없이 음악을 가르쳤다. 유명 음악가를 초청해 저녁마다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게트라이데가세는 지금은 쇼핑거리에 불과하지만 부자, 귀족이 많이 살았던 당시에는 하루 종일 클래식 음악 연주 소리가 끊이지 않는 거리였다. 특히 모차르트의 집에서는 궁정 악사였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누나 난네를이 밤마다 수준 높은 음악을 연주했다.
이런 환경 덕분에 모차르트는 출생 직후부터 음악에 둘러싸여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음악을 배우던 누나의 모습을 훔쳐보면서 악기 다루는 법을 익혔다. 원래 음악에 소질을 타고난 데다 어릴 때부터 매일 음악만 듣고 살았으니 천부적 재능이 일찍 폭발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레오폴트가 아들의 천재적 재능을 발견한 것은 세 살 때라고 한다. 그는 게트라이데가세의 집에 친구를 초대해 모차르트와 난네를의 음악 연주를 들려주었고, 어린 아들이 만든 곡을 직접 연주하기도 했다. 남매의 연주를 듣고 놀라지 않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남매, 특히 모차르트가 ‘음악의 신동’이라는 소문은 금세 잘츠부르크에 퍼졌다. 귀족이나 부자가 모차르트 가족을 저녁에 집으로 초청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어린 아이가 ‘음악 신동’으로 알려지자 당시 잘츠부르크의 정치, 종교 지도자이던 지기스문트 폰 슈라텐바흐 대주교·대공도 호기심이 동해 모차르트를 미라벨 궁전으로 불렀다. 대주교는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음악을 좋아했고, 지식이 풍부해 음악을 듣고 구분할 줄 아는 귀도 갖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에는 대주교가 두 명이다. 동부를 담당하는 한 명은 빈에, 서부를 책임지는 다른 한 명은 잘츠부르크에 교구를 두고 있다. 잘츠부르크 대주교는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도시의 정치적 지도자인 대공을 겸임했다.
다섯 살이었던 모차르트는 미라벨 궁전에서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연주했다. 대주교는 혼자서 옷도 제대로 못 입는 ‘꼬마’가 연주하는 음악에 얼마나 감동했던지 눈물을 글썽이며 감탄했다.
“너는 영원히 빛나는 잘츠부르크의 보석이 될 거야.”
슈라텐바흐는 이후 모차르트를 전폭적으로 지원해 대음악가로 성장할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모차르트가 대주교를 위해 처음 음악을 연주한 곳은 미라벨 궁전 ‘대리석의 홀’이었다. 매우 값비싼 대리석과 화려한 예술품으로 장식된 방이었다. 모차르트는 이후에도 대주교의 요청이 올 때마다 대리석의 홀에서 음악을 연주했다. 지금도 대리석의 홀에서는 모차르트 음악을 주제로 연주회가 열린다.
미라벨 정원은 영화 ‘사운드오브뮤직’에서 주인공들이 ‘도레미송’ 등을 부른 곳으로 유명한데, 모차르트가 산책을 자주 즐기던 곳이기도 했다. 그는 일요일이 되면 잘츠부르크 대성당에서 열린 미사에 참석한 뒤 집에서 가족, 친구와 함께 볼츨쉬센이라는 놀이를 즐겼다. 게임을 마친 뒤에는 꼭 미라벨 정원으로 산책을 갔다.
미라벨 궁전을 처음 만든 사람은 16세기 말~17세기 초 대주교·대공이었던 볼프 디트리히 라이테나우였다. 결혼을 할 수 없는 사제 신분이었던 그는 1592년 시의원의 딸이었던 살로메 알트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이 열다섯 명을 낳기도 했다. 볼프 디트리히는 주변의 눈총이 따가워지자 살로메가 편히 지낼 수 있게 하려고 잘자크강 인근에 미라벨 궁전을 지어주었다.
라이테나우의 후임 대주교였던 파리스 폰 로드론은 미라벨 궁전을 매우 좋아했다. 그는 궁전을 더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정원을 확장했고 궁전 별채도 새로 지었다. ‘사운드오브뮤직’에 등장하는 미라벨 정원의 아름다운 모습은 이때 완성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미라벨 정원은 연중 어느 때 가더라도 아름답다. 그래도 가장 훌륭한 풍광을 눈에 담으려면 봄이나 여름에 가는 게 최고다. 정원에 피어난 각양각색의 꽃과 푸른 잎은 세상을 환상적으로 만든다. 가장 풍광이 뛰어난 포인트는 정원의 가장 높은 곳인 미라벨 궁전 앞이다. 여기에서는 정원은 물론 멀리 호엔잘츠부르크성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미라벨 궁전을 둘러본 뒤 인근 마카르트 광장으로 향한다. 이곳에는 모차르트 가족이 게트라이데가세에서 이사를 가서 10년 이상 살았던 ‘모차르트하우스’가 있다. 그들이 이사를 간 것은 모차르트와 난네를이 청소년으로 성장하는 바람에 방을 따로 줘야 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모차르트는 이곳에서 1773년부터 빈으로 떠났던 1781년까지 8년간 살면서 피아노협주곡 5~10번, 바이올린 소나타 26번, 바이올린 협주곡 3~4번 같은 훌륭한 곡을 수없이 작곡했다.
모차르트하우스도 모차르트 생가처럼 모차르테움재단이 관리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보험사 소유 건물이었는데 재단에서 사들여 건물을 부수고 옛날 모양대로 새로 지었다. 2년 뒤에는 새 저택을 박물관으로 바꿔 문을 열었다. 지금 이곳의 일부 공간은 콘서트 홀로 이용되며, 모차르트가 살았을 때 사용했던 각종 악기와 여러 가지 서류 등이 전시돼 있다.
■레지덴츠
아직 채 열 살도 안 된 어린 소년이던 시절 모차르트의 연주 활동 흔적을 추적하기 위해 다시 잘츠부르크 대성당 쪽으로 돌아간다. 대성당 바로 앞에는 역대 대주교·대공이 살았던 궁전인 레지덴츠가 있다. 각종 방과 홀이 무려 180개에 이르는 대형 저택인 레지덴츠는 화려하다.
유럽 다른 도시의 궁전처럼 레지덴츠에는 그림이 매우 많다. 액자에 담은 별개의 작품은 물론 벽화, 천장화에 이르기까지 그림 종류는 다양하다. 상당수는 1710~1714년 사이 오스트리아 화가 요한 미하엘 로트마이어와 이탈리아 화가 마르티노 알토몬테가 그렸다.
레지덴츠의 벽화, 천장화에는 특징이 있는데, 한 인물의 인생을 시리즈로 담았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BC 4세기 그리스의 위대한 영웅 알렉산더 대왕이다. 대표적인 곳은 리저탈, 즉 ‘기사의 방’ 천장화다. 여기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애마 부케팔로스를 아버지에게 자랑하는 장면 등이 그려졌다.
미라벨 궁전에 갔다가 다시 잘자크강을 건너 레지덴츠에 온 것은 모차르트가 대주교·대공 처소인 이곳에서도 수시로 음악을 연주했기 때문이다. 그가 대주교·대공을 위해 최초로 연주회를 연 것은 일곱 살 생일이 한 달 지난 1763년 2월 28일이었다. 바이에른 공국~프랑스~영국~네덜란드 등 유럽 전역을 돌며 연주 여행을 한 이른바 ‘그랜드투어’를 떠나기 다섯 달 전이었다. ‘기사의 방’에서 열린 이날 연주회에는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많은 신부, 귀족, 고위 관리가 참석했다.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온 것은 불문가지다.
모차르트는 열한 살인 1767년 3월에 오라토리오 ‘첫 계명의 의무’를 역시 ‘기사의 방’에서 초연했다. 이 곡은 사실상 모차르트의 첫 오페라였는데, 다른 곳에서는 거의 연주되지 않았다. 1769년에는 오페라 부파(희극 오페라) ‘어리석은 아가씨’를 초연했다. 이 작품은 원래 빈에서 공연하려고 만들어졌지만 ‘열세 살 꼬마가 만든 작품을 연주하고 싶지 않다’는 빈 음악계의 반대 때문에 공연되지 못하고 책상 서랍에 처박혀 있었는데 대주교·대공 슈라텐바흐가 공연을 주선한 덕에 무대에 올랐다.
모차르트는 1775년 4월에는 막시밀리안 프란츠 대공의 잘츠부르크 방문을 환영하는 뜻에서 오페라 ‘양치기 왕 K208’을 작곡해 초연했다.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아들인 막시밀리안은 동갑내기인 모차르트를 매우 좋아했다. 모차르트가 선택한 대본 주인공은 알렉산더 대왕이었다. 대왕이 시돈의 왕 자리를 물려주는 과정을 묘사한 오페라였다.
연간 방문객이 15만~20만 명 정도인 레지덴츠는 오늘날에는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된다. 일부 공간은 박물관, 미술관으로 바뀌었다. 잘츠부르크 대학교 강의실로 사용되는 공간도 있다.
모차르트가 음악을 연주한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모차르트 연주회도 수시로 열린다. 그가 레지덴츠에서 맹활약했다는 사실을 잘 아는 관광객은 주저하지 않고 지갑을 연다. 연주를 들어본 사람 중에서 후회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연주자가 모차르트가 아니라는 점을 아쉬워할 뿐이다. 모든 사람의 머리에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다섯 살 때 모차르트의 연주 실력은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2024-06-25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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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역사 골목에 울려 퍼진 ‘음악 신동’ 울음소리 [세상에이런여행] ⑳
장크트길겐에서 태어난 안나 마리아 발부르가 페트를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 생계를 위해 어머니 에바 로시나, 한 살 위의 언니 마리아 로시나와 함께 잘츠부르크로 이사를 갔다.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네 살 어린 아기였던 그녀가 어머니 품에 안겨 마차를 타고 간 길은 힘든 인생처럼 험한 산악의 돌길이었다.
300년 전 마차가 오갔던 울퉁불퉁한 돌길은 지금은 아스팔트로 미끈하게 포장돼 자동차들이 쌩쌩 달린다. 여행객을 가득 태운 버스는 에바 로시나가 두 어린 딸을 안고 고심에 빠진 채 달렸던 그 도로를 따라 잘츠부르크로 향한다.
■게트라이데가세
18세기의 안나 마리아는 꼬박 하루 정도 걸렸을 거리를 21세기의 여행객이 버스로 30분 만에 달려 잘츠부르크에 도착한 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구시가지와 잘자크강 사이를 따라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인 게트라이데가세였다. BC 1세기 고대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게르만족과 로마인, 켈트족이 무역을 위해 이용한 길이라고 하니 길의 역사만 해도 2000년을 넘는다.
안나 마리아는 먹고 살기 위해 잘츠부르크에 갔지만 병으로 언니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가난하게 살았다. 신심이 돈독했던 그녀는 늘 잘츠부르크 대성당에 가서 기도를 드리다 대성당에서 음악을 가르치던 작곡가 겸 연주자 레오폴트 모차르트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레오폴트는 바이에른공국의 아우크스부르크 출신이었다. 제본공 길드 회장이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가업을 이으라는 어머니의 강요를 뿌리치고 여섯 동생마저 내팽개친 채 혼자서 성공하겠다며 잘츠부르크로 달아난 청년이었다. 그는 낯선 도시에서 음악가가 됐고 나중에는 궁정 악사로 채용됐다. 모차르트 가문의 역대 조상은 소작농이나 벽돌공, 제본공으로 일했을 뿐이어서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한 사람은 레오폴트가 처음이었다.
평민이었던 레오폴트는 안나 마리아와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수년간 열애를 이어가다 1747년 11월 21일 잘츠부르크 대성당에서 결혼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스물일곱, 레오폴트는 스물여덟 살이었는데 그때 기준으로는 만혼이었다. 두 사람의 자유연애와 결혼은 잘츠부르크에서는 화제를 불러 모았고 많은 청춘남녀의 부러움을 샀다.
두 사람이 신혼살림을 차린 곳은 향신료 무역상이던 레오폴트의 친구 로렌츠 하겐나우어가 소유한 게트라이데가세 9번지 주택 ‘하겐나우어하우스’ 3층이었다. 3층은 부엌, 거실, 침실 하나, 작은 옷방 그리고 레오폴트의 독서실로 이뤄졌다.
게트라이데가세는 다른 곳보다 살기에 매우 편리한 시내 중심가였다. 부유한 상인, 시 행정관, 교회의 관리, 판사 등이 저택을 지어 살았다. 지역사회에서 돈이나 권력을 가진 최고 상류층이었다.
레오폴트 부부는 결혼하고 7년 동안 여섯 아이를 낳았지만 모두 어릴 때 병으로 죽고 난네를로 불렸던 딸 마리아 안나 발부르가 이그나티아만 살아남았다. 아들을 간절히 원했던 부부는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1756년 1월 27일 새벽 소원을 이뤘다. 나중에 음악가가 되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이날 태어난 것이었다.
게트라이데가세에서 모차르트가 태어난 9번지 주택을 발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골목을 걷다 노란색으로 칠해진 벽에 ‘Gebursthaus(생가)’라는 독일어가 새겨진 건물만 찾으면 된다. 골목길을 오가는 관광객은 너나할 것 없이 이곳에 들어가 보거나 대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이곳은 모차르트의 생가인 데다 그의 음악 인생이 시작된 곳이며, 유럽에 모차르트라는 이름을 널리 알린 발판이 된 곳이다. 유럽 여러 나라에 있는 모차르트 관련 시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로 여겨지는 곳이니 만큼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겐나우어하우스는 19세기에 모차르트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모차르트 기념사업을 담당하는 모차르테움재단이 1856년 이곳에서 개최한 모차르트 전시회에서 번 돈으로 아예 건물을 사들여 박물관을 만들고 모차르트의 일생을 엿볼 수 있는 많은 자료를 비치한 것이었다. 악기, 악보, 모차르트 가족이 사용하던 가구는 물론 그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 등 자료는 다양하다.
재단은 해마다 1월 모차르트의 생일이 다가오면 ‘모차르트 주간’을 선정해 1주일 동안 각종 콘서트를 개최한다. 8월에 열리는 잘츠부르크 축제 기간 중에도 마찬가지다. 이때 모차르트 생가에 가면 모차르트 음악을 연주하는 콘서트를 즐길 수 있다.
모차르트 생가를 꼼꼼히 둘러본 뒤 피로를 달랠 겸 커피 한 잔을 마시러 간다. 멀리 갈 필요는 없다. 생가 바로 앞에 딱 어울리는 카페가 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의 이름을 붙인 ‘모차르트카페’가 바로 그곳이다. 모차르트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가게이지만 모차르트라는 이름을 가진 카페는 잘츠부르크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모차르트 카페는 1923년 10월 6일 문을 열어 지난해에 개업 100년이었다. 이 카페가 개장하자 많은 예술가가 모여 커피를 즐겼고 음악 연주회, 토론회, 문학 낭송회 같은 행사를 자주 열었다. 이런 전통은 지금도 이어진다.
■잘츠부르크 대성당
게트라이데가세에는 빈틈이라고는 하나 없이 건물이 가득하다. 100년 전만 해도 이곳 건물 대부분은 저택이었지만 지금은 상점으로 변했다. 1970~1980년대 잘츠부르크가 관광지로 떠올라 외국인이 몰려든 게 계기였다. 잘츠부르크 시청은 골목길의 옛 모습을 유지해 정체성을 지키려고 애썼지만 상업화의 바람을 막을 수 없었다.
게트라이데가세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건물의 정면에 붙은 특이한 연철 간판이다. 놀라운 건 한두 개가 아니라는 점이다. 골목이 시작하는 곳에서 끝나는 곳까지 넉넉잡아 100개는 넘어 보인다. 간판은 옛날 건물 주인이 어떤 종류의 길드에 속했는지 알려주는 상징물이다.
모차르트 카페에서 나와 건물 사이 작은 골목길을 지나 5분 거리인 잘츠부르크 대성당으로 향한다. 268년 전인 1756년 1월 28일 아침에도 모차르트 생가에서 대성당으로 걸어간 젊은 부부가 있었다. 바로 레오폴트와 안나 마리아였다. 두 사람은 전날 밤늦게 태어나 이제 겨우 하루 된 어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안고 있었다. 부부가 이른 아침에 모차르트를 데리고 게트라이데가세에서 걸어서 대성당에 간 것은 유아 세례를 받기 위해서였다.
성 베르길리우스가 잘츠부르크를 재건한 성 루프레흐트를 기리기 위해 8세기에 만든 잘츠부르크 대성당은 지역 시민의 종교생활은 물론 일상생활의 중심지였다. 그것은 안나 마리아-레오폴트 부부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신앙심이 두터웠던 부부는 1747년 11월 21일 대성당에서 결혼했고, 일요일마다 반드시 미사에 참석해 기도를 드렸고, 힘들거나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면 찾아가 하느님의 가호를 빌었다. 난네를은 물론 일찌감치 세상을 떠난 다섯 아이의 유아 세례도 이곳에서 받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잘츠부르크 대성당 정면에는 조각상 4개가 나란히 서서 대성당에 들어오거나 주변을 오가는 사람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잘츠부르크의 수호성인인 성 루프레흐트와 대성당을 세운 성 베르길리우스 그리고 기독교 기초를 세운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였다.
모차르트의 유아 세례식은 출생 열네 시간 만에 거행됐다. 정확하게는 1756년 1월 28일 오전 10시였다. 아기의 대부인 상인 요하네스 테오필루스 페르그마이어, 부부가 세를 들어 살던 집의 주인인 요한 로렌츠 하겐나우어 부부와 이제 열 살인 아들 카예탄 루프레흐트 하겐나우어가 세례식에 손님으로 참석했다.
잘츠부르크 대성당을 둘러보면 1311년에 청동으로 만든 침례반이 보인다. 모차르트가 유아 세례를 받을 때 몸을 담가 세례를 받은 도구다. 모차르트뿐 아니라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많은 아기가 이 침례반에 몸을 담가 세례를 받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캐럴인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가사를 만든 작사가 요셉 모어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가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것은 1792년 12월 11일이었다. 모차르트가 태어나고 36년 뒤였다.
모차르트 세례의 흔적은 세례 기록을 담은 등기서류에도 남았다. 기록을 남긴 사람은 당시 잘츠부르크 대성당의 행정 담당 신부 레오폴트 람프레흐트였다. 서류에는 모차르트의 이름이 그리스식으로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 볼프강우스 테오필루스 모차르트’라고 기록됐다.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는 4~5세기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던 성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의 이름이었다. 그가 태어난 날은 모차르트와 같은 1월 27일이었는데 이날은 그의 축일이었다. 중세 유럽에서는 새로 태어난 아기의 생일과 비슷한 날짜의 축일을 가진 기독교 성인의 이름을 세례 때 붙여 주는 게 관례였다. 물론 일상생활에서는 이런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볼프강우스는 모차르트 외할아버지의 이름이었다. ‘달리는 늑대’라는 뜻이었는데 독일어로 바꾸면 볼프강이었다. 모차르트가 태어난 이후 가족이 일상적으로 부르던 이름은 볼프강이었다. 테오필루스는 대부인 요하네스 테오필루스 페르그마이어에게서 얻은 이름이었다. 독일어로는 고틀리에브, 라틴어로는 아마데우스였다. 테오필루스, 고틀리에브, 아마데우스의 뜻은 모두 ‘신의 사랑’이었다. 모차르트는 자신을 볼프강오 아마데오라고 부르곤 했다.
모차르트는 열여섯 살이던 1771년 잘츠부르크 궁정 악사로 취업했다. 1779년에는 오르가니스트로 승격됐는데, 잘츠부르크 대성당의 음악을 책임지는 게 주요 임무였다. 대성당에서 연주할 음악을 작곡하는 것은 물론 대성당의 오르간을 직접 연주하거나 대성당 합창단 소년들을 가르치는 게 그의 일이었다.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 대성당에 남긴 최고 유산은 ‘대관식 미사 C장조’였다. 이 곡은 1779년 4월 4일 대성당에서 거행된 부활절 미사에서 초연됐다. 이날 대성당 신도석에는 빈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대관식 미사’를 들은 신도들은 하염없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곡이 정말 웅장해 나중에 여러 황제, 국왕의 대관식 때 사용됐기 때문에 ‘대관식 미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는 음반이나 유튜브를 통해서가 아니라면 직접 연주장에서 듣기는 쉽지 않다. 곡을 직접 경청하고 싶다면 날짜를 잘 골라 잘츠부르크 대성당에 가야 한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여러 차례 ‘대관식 미사’를 연주한다. 물론 무료는 아니다. 입장권을 사야 한다.
좌석에 앉아 두 눈을 감으면 웅장하고 화려한 음악이 온 세상을 압도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도 가슴에서 갑자기 신앙심이 솟아나오는 기적을 경험할지 모른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그만큼 위대하다.
잘츠부르크 대성당에는 오르간 다섯 대가 있다.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에서 살 때 늘 연주했던 오르간이었다. 잘츠부르크 사람들은 “알프스 북부에서 오르간 다섯 대를 가진 성당은 하나도 없다”면서 큰 자부심을 느낀다. 이 주장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웅장한 오르간을 보면 그들의 자부심은 납득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운이 좋으면 무료나 유료로 오르간 콘서트를 관람할 수 있다. 일요일 미사나 휴일은 물론 평일에도 수시로 오르간이 연주된다. 물론 연주되는 곡은 대부분 모차르트가 작곡한 것이다.
2024-06-18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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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호숫가 작은 마을, ‘아마데우스’ 어머니의 고향 [세상에이런여행] ⑲
오스트리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물은 음악가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스트리아를 여행하다 보면 어디에서나 모차르트를 만날 수 있다. 그의 삶과 음악을 따라 오스트리아를 한 바퀴 돌아본다.
■안나 마리아
모차르트 여행의 출발지는 그가 태어난 잘츠부르크에서 서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인 장크트길겐이다. 이곳은 모차르트의 어머니 안나 마리아 발부르가 페트를이 태어난 마을이다. 또 ‘난네를’로 불렸던 그의 누나 마리아 안나 발부르가 이그나티아 모차르트가 결혼해서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장크트길겐은 볼프강 제(볼프강 호수) 주변에 있는 세 마을 중에서 가장 큰 곳이다. 크다고 해야 인구가 채 4000명도 되지 않는 작은 동네라서 볼거리가 많은 곳이 아니고 할슈타트 제(할수타트 호수)에 붙은 할슈타트처럼 그림 같은 풍경을 자랑하는 곳도 아니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어머니가 태어났고 그의 누나가 결혼생활을 했던 곳이니 만큼 들러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실제 모차르트 가족의 흔적을 찾아보려고 여기를 들르는 사람은 적지 않다.
장크트길겐이라는 지명은 7세기 그리스 출신의 성인인 성 애기디우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성 애기디우스는 독일어권에서는 길그, 또는 길겐으로 불린다. 마을의 원래 이름은 ‘윗동네’라는 뜻인 오베르드룸이었다. 볼프강 호수의 윗부분에 자리를 잡았다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었다.
장크트길겐에서 가장 먼저 가야 할 곳은 모차르트 가족의 내력이 담긴 ‘모차르트하우스’다. 이슐러 슈트라세(이슐러 거리)를 따라 걸으면 공용주차장에서 2~3분 거리다.
모차르트하우스는 볼프강 호수 바로 앞에 자리를 잡고 있다. 볼프강 호수의 옛날 이름은 아베르제였다. 볼프강이라는 지명은 모차르트의 이름이 ‘볼프강 아마데우스’라고 해서 붙여진 것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이전인 10세기 성직자였던 성 볼프강이 장크트 볼프강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슐러 슈트라세는 한산하고 조용하다. 거리 끝에 옅은 미색 2층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초대형 저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작은 건물도 아니다. 이곳이 바로 모차르트의 어머니 안나 마리아와 누나 난네를이 살았던 모차르트하우스다.
장크트길겐은 원래 안나 마리아의 아버지, 즉 모차르트의 외할아버지인 볼프강 니콜라우스 페트를의 고향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고향을 떠나 잘츠부르크에서 법을 공부해 빈과 잘츠부르크에서 대학교수, 법원 직원으로 일했다.
니콜라우스 페트를은 병에 걸리는 바람에 고생하다 공기가 좋은 곳에서 치료하려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휘텐슈타인 성에서 성 관리인 일을 하면서 살았지만 나중에 이슐러 슈트라세 거리의 지방법원에서 직원으로 일하면서 청사의 한쪽 구석에 방을 얻어 아내와 함께 살았다.
그는 건강이 조금 나아지자 아이도 둘이나 낳았다. 귀향한 지 5년 만에 첫딸 마리아 로시나를, 이듬해에는 나중에 모차르트의 어머니가 되는 막내딸 안나 마리아 발부르가를 얻었다. 안나 마리아는 성탄절을 앞둔 1720년 12월 15일 출생했고 인근에 있는 장크트길겐(성 애기디우스)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니콜라우스 페트를은 끝내 병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병을 치료하느라 이곳저곳에서 돈을 많이 빌리는 바람에 유산은커녕 적지 않은 빚만 남겼다. 어머니는 재산이라고는 한 푼도 없이 두 딸만 떠안게 되자 궁여지책으로 자선연금이라도 받으려고 잘츠부르크로 돌아갔다.
안나 마리아가 어떻게 자랐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건강이 나빴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언니는 병에 걸려 잘츠부르크에서 일찌감치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가난 때문에 고생한 탓일 가능성이 높다. 안나 마리아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학교에 다니는 대신 어머니와 함께 하루 종일 수를 놓아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했다.
안나 마리아는 매우 활발하면서 신앙심이 두터웠고 총명했다. 1755년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끝까지 보살필 정도로 책임감도 강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처럼 고집이 세고 독선적인 남자와 결혼해서 끝까지 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성격 덕분이었다.
■난네를
모차르트의 누나 난네를은 장크트길겐이 어머니의 고향이라는 걸 어릴 때부터 잘 알면서도 나중에 그곳에 들어가 결혼생활을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모차르트의 그늘에 결국 가려지고 말았지만 난네를은 사실 동생 못지않은 음악의 신동이었다. 그녀는 여덟 살 때부터 하프시코드를 배웠다. 하루가 다르게 실력은 일취월장했고 기술은 완벽에 가까웠다. ‘음악 신동’으로 불렸던 모차르트가 롤 모델로 삼은 사람은 바로 누나였다. 꼭 이겨야 할 경쟁 상대로 생각한 사람도 누나였다.
안타깝게도 난네를은 음악가의 삶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녀가 열여덟 살이던 1769년부터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딸을 연주 활동에서 배제했다. 오페라 가수를 제외하면 성인 여성은 음악가로 활동할 수 없는 게 당시 현실이었다.
난네를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으면서도 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결혼을 포기했다. 대신 아버지가 골라 준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결혼을 두 번이나 했고 아이를 다섯 명이나 둔 홀아비였다. 외할아버지의 법원 직원 자리를 물려받은 요한 밥티스트 프라이허였다.
난네를이 결혼해서 신혼살림을 차린 곳은 어머니가 태어났던 지방법원 청사였다. 그녀는 공개 연주회에 나갈 수는 없었지만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다. 집에서 하루에 세 시간 이상 피아노를 연습했고, 장크트길겐의 귀족 자녀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도 했다. 가끔 그녀의 실력을 잘 아는 귀족의 초청을 받아 저택에서 개인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난네를은 남편이 1801년 세상을 떠나자 다시 잘츠부르크로 돌아가 아버지를 모시며 여생을 마쳤다. 누나와 달리 모차르트는 장크트길겐에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다.
■모차르트하우스
난네를이 잘츠부르크로 돌아간 뒤 지방법원 청사가 모차르트 가족과 깊은 인연을 가졌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망각의 안개로 덮였다. 이런 놀라운 사실이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은 거의 100년이 지난 1905년이었다.
당시 지방법원 판사였던 안톤 마치그가 법원 다락에서 낡은 서류를 발견했는데, 그 서류 기록에 지방법원 청사의 내역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모차르트의 어머니와 누나가 청사에서 살았다는 사실에 감동해 조각가 야코브 그루버에게 안나 마리아와 난네를의 두상을 담은 부조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는 이듬해 8월 두상 부조를 청사에 부착했는데, 부조는 지금도 건물 중앙 벽에 붙어 있다.
법원청사는 이후 안나 마리아, 난네를 기념관인 ‘모차르트하우스’로 바뀌었고, 2005년에는 ‘장크트길겐 모차르트협회’에 소유권이 넘어갔다. 이곳에서는 2008년부터 해마다 모차르트 못지않게 뛰어난 음악가였던 난네를을 기리는 영구 전시회가 진행된다. 이곳은 또 ‘장크트길겐 모차르트 챔버오케스트라’ 공연장으로 사용된다. 건물에 있는 폴켄슈타인 홀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이 진행된다.
모차르트하우스 덕분에 장크트길겐은 오스트리아 국내외적으로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됐다. 모차르트하우스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장크트길겐을 맛볼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각종 기념품가게는 물론 식당, 카페, 술집이 이어진다.
모차르트하우스 맞은편은 장크트길겐 교회와 공원묘지다. 교회를 지나면 한가운데에 분수가 세워진 작은 광장이 나온다. 분수 앞에는 라트하우스, 즉 시청이라고 적힌 건물이 보인다. 라트하우스 앞에는 난네를의 이름을 붙인 ‘카페 난네를’이 보인다. 벽에는 천사의 보살핌을 받는 난네를의 얼굴이 새겨졌다. 카페 창문에는 난네를의 이름을 붙인 ‘난네를 술’과 황후 엘리자베트의 애칭인 시씨를 붙인 ‘시씨 술’이 전시돼 있다.
많은 사람이 이곳에 들어가 커피나 술 한 잔을 마시려고 줄을 선다. 나도 안에 들어가 라떼 한 잔을 시킨다. 종업원은 친절하지도, 그렇다고 불친절하지도 않다. 워낙 많은 사람이 오가기 때문에 정신이 없어 보인다. 창밖으로는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비가 내려 약간 쌀쌀한 날씨에 따뜻한 커피 한 잔만큼 좋은 것은 없다. 잘츠부르크에서 다시 만날 모차르트와 난네를의 인생을 생각하며 달콤한 커피를 입안에 머금어 본다.
카페 난네를에서 나와 왼쪽 골목을 따라 1~2분만 걸어가면 모차르트플라츠(모차르트 광장)가 나온다. 광장 한가운데 분수에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청년을 새긴 작은 동상이 설치돼 있다. 청년은 다름 아니라 바로 모차르트다. 그는 장크트길겐에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지만 이곳 사람들은 장크크길겐 사람이었던 볼프강 니콜라우스 페트를의 외손자를 영원히 자랑스러워한다는 뜻에서 동상을 세운 것이었다.
2024-06-1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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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해 뜨는 나라, 가장 먼저 가라앉는 나라 [세상에이런여행] ⑱
세상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나라는 어딜까? 기후변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가장 먼저 없어지는 나라는? 극지방의 빙하가 모두 녹으면 해수면은 무려 60m나 높아진다고 하니 영향을 받는 나라는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세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뜬다는 영광스러운 표현보다 가장 먼저 물에 잠길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서는 나라, 키리바시다.
키리바시에 도착하니 공항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뉴질랜드, 피지 등지에서 일하기 위해 떠난 가장들이 연말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오는 날이기에 마중 나온 가족들로 붐비는 것이었다. 환전소는 공항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공항이 외딴 섬에 있어 도심까지 약 3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해야 했다. 이곳의 길은 하나뿐이었다. 화산섬처럼 둥글지도 않고 긴 지렁이처럼 생긴 섬의 덩치가 점점 작아지는 모양새였다. 토사가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섬과 섬 사이는 가교로 이었다. 옛날에는 이 가교 없이도 섬끼리 통행할 수 있었는데 바닷물이 점점 섬을 집어삼키기 시작한 것이다. 이곳에서는 뉴질랜드 달러를 사용한다.
키리바시에서는 잔잔한 파도에 토사가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맹그로브를 기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섬의 테두리는 맹그로브로 둘러싸였다고 해도 무방하다. 물속 토양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물 밖으로 자라는 맹그로브는 생명의 보고다. 물고기들이 알을 낳는 산란의 장소이며 뿌리가 서로 뒤엉켜 들어온 토사를 나가지 못하게 잡아주는 역할도 하므로 섬나라에서는 필수다. 맹그로브 나무의 뿌리는 물밑으로 10m까지 내려갈 수 있기 때문에 급작스럽게 토사가 유실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다. 태풍에는 방풍림 역할까지 할 수 있어 정말 유용하다.
문제는 환전소에 가려면 도심으로 가야하는데 거기까지 갈 돈이 없다는 점이었다. 거리에 따라 버스비에 차등을 두고 한 방향으로만 순환하기 때문에 지나가는 아무 버스나 타면 되고 요금도 비싸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물가가 높다는 사실이었다. 대부분의 생활필수품과 공산품을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이었다.
도심지까지 갈 방법이 막막했지만 더 어두워지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그때 사람 좋아 보이는 운전자가 앉은 승용차가 주차장에 섰다. 나는 자연스럽게 운전자에게 다가갔다. 도시로 가야하는데 돈이 하나도 없다고 하자, 조금만 기다리라더니 태워주겠다고 한다. 큰 칼 하나가 운전석 옆에 떡하니 실려 있는 걸 보고 살짝 긴장됐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빼앗길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잠시 뒤 그가 공항에서 나왔다.
“차에 타세요.”
“오, 정말 감사합니다.”
조수석에 큰 칼이 버티고 있어 칼을 치우고 앉기는 껄끄러웠기에 뒷자리에 탔다. 공항을 벗어난 지 2분 정도 되었을까? 그가 말했다
“제 아들이 곧 공항에 도착하는데 도시까지 갔다 올 시간이 안 될 것 같아요. 여기서 버스를 타세요.”
“저는 지금 돈이 없는데요?”
“버스비는 호주달러로 2달러 아니면 2달러 50센트일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2달러짜리와 1달러짜리 호주 동전을 손에 쥐어 주었다. 모두 8달러나 됐다. 한 차례 버스 값이면 충분하기에 3달러만 남기고 돌려주자 도로 쥐어주면서 지폐까지 한 장 더 꺼내줬다. 무려 10달러짜리다.
“아니 왜 이러세요? 이거면 됩니다. 정말 고마워요.”
공짜로 주면서도 더 못 줘서 미안해하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
“명함 있으면 주세요. 한국에 돌아가서 여행기를 쓸 때 당신처럼 아름다운 분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그래요.”
“여기서는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보면 누구라도 저와 같은 행동을 할 겁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마친 그는 명함 한 장을 건넨 후 차를 타고 공항으로 돌아갔다. 조수석에 있는 칼만 보고 사람을 섣불리 판단한 것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고, 이렇게 소중한 인연이 맺어진 것에 대한 고마움도 있었다.
그런데 명함이 조금 이상했다. 직책이 장관이었다. 피닉스제도와 라인제도 개발을 맡은 그는 키리바시의 생명 연장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키리바시는 크게 3곳의 섬으로 구분된다. 길버트제도, 피닉스제도, 라인제도다. 길버트제도는 수도인 타라와가 포함된 16개의 섬, 피닉스제도는 8개의 섬, 라인제도는 8개의 섬으로 이뤄졌다. 차를 태워준 장관은 길버트제도를 제외하고 피닉스제도와 라인제도의 개발을 맡았다는 것이었다. 이런 호의를 그렇게 높은 사람이 주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권위의식도 없고 여행자에게 친절한 모습이 정말 인상 깊었다.
이번에는 버스정류장을 묻기 위해 그가 내려준 곳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데 10명쯤 탄 흰색 트럭이 내 앞에 멈추었다. 대개 이야기할 수 있게 조수석 옆에 세우지만, 이 트럭은 신기하게 트럭 뒷부분의 사람들과 인사할 수 있도록 조금 더 지나서 세웠다. 바로 나를 소개하고 길을 물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레미라고 해요. 한국에서 왔어요. 도심으로 가는 버스는 어디서 탈 수 있나요?”
트럭에 탄 사람 중 하나가 물었다.
“어, 당신은? 아까 비행기 타고 오신 분 맞죠?”
“네, 맞아요. 반갑습니다.”
비행기가 크지 않았고 승객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서로 기억할 수 있었다. 그도 나도 서로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반가워요. 저도 비행기에서 오랜만에 아시아 사람을 만나서 뭐하는 분일까 궁금했는데 이렇게 인연이 닿네요. 어디 가신다고 하셨죠? 저는 도심까지 가지는 않는데 괜찮으시면 제가 가는 곳까지 태워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서 다시 낯선 사람들과 동행하게 됐다. 그의 가족이 이런저런 질문을 했지만 또박또박 천천히 말하는 영어도 알아듣기 힘든데, 특유의 억양이 섞인 영어가 엔진소리로 시끄럽고 흔들리는 트럭에서 제대로 들릴 리 없었다. 애석하게도 깊은 대화보다 친밀감을 쌓겠다는 생각에 다짜고짜 물었다.
“한국 노래 아세요?”
“당연히 알아요! BTS! 사랑해요.”
공통관심사를 만들기 위해 노래 이야기를 꺼냈는데 요즘 세계를 울리는 한국가수들의 이름이 술술 나온다. 이들은 단순한 연예인이 아니라 민간외교와 국익 증진에 톡톡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여행을 통해 더욱 피부로 느낀다. 아쉽게도 그들의 노래를 흥얼거리기에는 나이가 적지 않다.
“오, 자랑스러운 우리 BTS! 한국을 사랑해줘서 고마워요. 그렇다면 이 노래도 알아요?”
그렇게 말하며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를 살짝 불렀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
“잘 모르지만 노래는 좋네요!”
휴대폰으로 니우에에서 나를 재워주었던 왓데와 제이니 부부 중 제이니와 듀엣으로 노래를 불렀던 영상을 보여주며 말을 이어갔다.
“제가 이 노래를 니우에에서 가르쳤습니다. 거기서 저를 10일 동안이나 재워주었던 은인이었어요. 저는 여행할 때 가능하면 현지인들 집에서 머물거든요.”
“통안(통가 사람)이군요.”
“어떻게 그렇게 바로 알아요?”
“그냥 알아요. 하하.”
왓데와 제이니는 니우에 사람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들은 니우에에 자리를 잡았지만, 원래는 통가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걸 바로 알아본 그들이 신기했다. 나를 재워줬다는 것을 은근히 설명하며 그런 기회를 여기서도 잡아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드러냈지만 눈치를 못 챈 건지, 말을 돌리는 건지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
언어가 잘됐으면 조금 더 다가갈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호의를 베풀어주는 사람에게 너무 과한 기대를 하는 것도 실례가 될 수 있고 아직 만남의 기회는 많았기 때문에 가는 곳까지만 같이 가기로 했다.
그들 집 앞에서 내렸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고 집에 들어갔다.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 기다리자 돈을 가지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가 건네준 돈은 10호주달러. 왜 돈을 주느냐고 묻자 마을에 도착하면 은행 문이 이미 닫혔을 수도 있다면서 이 돈으로 차비를 내고 남으면 식사하라고 했다.
처음 보는 이방인에게 왜 이렇게 호의를 베풀까? 아까 그 장관과는 다르게 가족 수에 비해 작은 집, 형편이 좋은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런 도움을 주는 게 너무 감사했다. 그가 보여준 호의에 감사하며 돌아섰다. 그리고 버스정류장으로 가는데 가족들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레미 잘 가요! 좋은 여행이 되길 바라요.”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버스정류장은 따로 정해진 게 아니었다. 그냥 길가에 나무둥치가 놓여 앉을 수 있게 되어 있으면 그게 버스정류장이었다. 나무둥치에 앉아 기다리는데 내 앞에 회색 밴이 멈췄다. 2.3달러 버스비를 지불하고 탔다. 2.5달러인 줄 알았는데, 2.3달러만 받는 게 의아했다. 그 눈치를 읽었는지 뒤에서 돈을 받는 친구가 말했다.
“여기서 목적지까지 거리를 생각해서 돈을 덜 받은 거예요.”
정이 있는 나라, 버스비도 거리에 따라 차등해서 받는다는 게 재미있다. 우리도 버스 안내양이 있었을 때가 있었다. 그 시절이 생각나서 괜히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나라가 수년 안에 없어질 수도 있다는 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자연 경치도 그 어디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깨끗하고 아름답지만, 사람이 아름다운 나라다. 자신보다 남을 보듬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나라, 키리바시가 가라앉고 있다.
도용복 오지여행가
2024-05-2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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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잘 수 있는 교도소, 양심껏 즐기면 되는 골프장 [세상에이런여행] ⑰
세계지도를 펼쳐놓았다. 날짜변경선이 태평양을 좌우로 나눈다. 선을 따라 진파랑색의 통가 해구가 보인다. 해구 왼쪽엔 통가, 오른쪽엔 니우에가 놓였다. 통가와 니우에는 통가 해구와 날짜 변경선을 사이에 두고 인근인데도 날짜는 하루가 차이 난다. 통가가 1월 1일이라면 니우에는 12월 31일이라는 이야기다.
내가 여행할 당시 니우에 인구는 1624명이었다. 2017년 태풍이 닥치기 전에는 4000명 정도였으나 유례없는 거대 태풍이 온다는 소식에 많은 주민이 통가나 뉴질랜드로 대피해 인구가 반절로 줄었다. 인구가 1000여 명인 나라는 어떻게 운영될까?
니우에의 수도 알로피의 국제공항은 외부와의 경계인 철책이나 담 하나 없는 매우 작은 공항이다. 공항 밖에 나가서 황당했던 건 이렇다 할 대중교통이 없다는 점이었다. 버스도 없고 택시도 없었다. 아무 차나 사람을 태워주면 택시가 되는 곳이었다. 이런 알로피에 덩그러니 혼자 놓였다.
묘한 감정을 재미있어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재미난 일이 생길 것 같아 기분이 들떴다. 바누아투에서 지갑과 휴대전화를 다 잃어버려 거지나 다름없으면서 이리 웃다니, 뭘 믿고 이러나 싶을 정도다. 저만치 주차한 차들이 보인다.
“시내로 가시면 좀 태워주세요.”
돈이 없으니 트렁크에 태워줘도 좋다며 웃으면서 애원했다. 서너 번 거절당했으나 도전은 계속된다. 낡은 트럭 운전석에 덩치 큰, 그래서 더 무서워 보이는 한 남성이 앉아서 나를 흘끗 쳐다보더니 타란다.
“렌터카 가게까지 태워주겠습니다.”
이름은 니케이며 나이는 50대라는 그는 렌터카 가게에 데려다주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 집에선 차를 빌리는 건 물론 환전도 가능합니다. 무엇보다 여행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잘 알려줄 겁니다.”
렌터카 가게에서 니케와 기념사진 한 장을 찍고 헤어졌다. 한 장의 사진에는 친절이라는 니우에의 첫인상이 담겼다. 아쉽게도 렌터카 가게 문은 닫혔다. 20분쯤 걸어가니 니우 관광안내소가 나온다. 20대 안내직원은 당황하며 묻는다.
“숙소도 안 잡고 왔다구요? 어디서 오셨지요?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안내소를 빠져나와 도미토리에 갔더니 2인 1실의 작은 방이 무려 100뉴질랜드달러(약 8만 원)라고 한다. 작은 시골마을 같은 곳 어디에서나 인심, 정을 기대한 것은 나의 착각이었을까?
한국에서 송금받기 위해 방법을 찾으러 간 은행에서 또 다른 사람 로날드를 만났다. 그는 나를 친구의 집까지 바래다주며 “내 집보다 나은 친구 집”이라며 오히려 미안해한다. 순간 바누아투에서 지갑과 휴대전화를 잃었을 때 화를 내던 내가 머릿속에 불쑥 나타났다. 지갑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로날드의 환대를 만날 수 있었을까? 로날드의 친구는 노동일을 하는 왓데다. 부인은 교사인 제이니다.
“어서 오세요, 불편할 텐데 괜찮으시다면…….”
남편은 일하러 나갔고, 방학이라 쉬는 왓데의 아내 제이니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 잘 안 되는 영어지만 마음이 통하니 척하면 척이다.
“캥거루 아시죠?”
“그럼요.”
“캥거루의 뜻이 뭔지 아세요?”
“글쎄요, 뜻이 있어요?”
“예, 잘 모른다.”
“레미도 모르면서 물어본 거예요?”
“잘 모른다니까요.”
“그러니까요.”
호주에 처음 도착한 서양인이 원주민에게 저 동물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원주민의 대답은 ‘캥거루’였다. 캥거루는 호주 원주민이 쓰는 언어로 ‘잘 모른다’는 뜻이었다.
“하하하, 레미는 말도 참 재미나게 하시네요.”
싱글벙글 웃음을 그칠 줄 모르던 제이니가 니우에 음식으로 보답하겠다며 주방으로 갔다. 나는 맛난 음식을 먹으며 ‘사랑해’란 노래를 우리말로 가르쳤다. 교사라 그런지 이내 따라 부른다. 서툴지만 천천히 ‘사랑해’가 무슨 뜻이냐고 묻는 제이니가 대답을 듣고 얼굴을 붉힌다.
“아이 러브 유. 이따 왓데가 집에 오면 제이니가 노래를 가르쳐 주며 ‘아이 러브 유’ 하세요.”
나는 진심으로 며칠 이곳에서 쉴 수 있게 해줘서 고맙다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어찌 이 순간을 잊을 수 있겠어요.”
이튿날, 잠자리는 바뀌었어도 어김없이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우리나라에는 통행금지 시절이 있었다. 그때 얻은 습관이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하루 4시간을 자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제이니가 아침을 준비하고 왓데가 출근 준비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마음이 푸근해진다. 아내가 챙겨준 도시락을 들고 왓데가 아침인사를 건넨다.
“불편하진 않으셨어요?”
“내 집처럼 편했어요.”
“오늘은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
가까운 주변을 둘러보고 싶다고, 매우 적은 수의 국민이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니 차를 빌려준단다.
“정말요?”
차를 내주는 일은 쉽지 않은데 선뜻 마음대로 타고 다니며 마음껏 구경을 다니라고 하니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다. 모든 것이 고마울 뿐이다. 차에서 내리며 습관처럼 차창 문을 닫으려 하자 왓데는 그럴 필요가 없단다.
“니우에에는 교도소가 있지만 죄수는 없어요. 죄를 짓고 살 일이 없어요. 몇 안 되는 사람들은 다 가족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진짜? 정말로?”
“하하하, 기회 되면 한 번 가보세요.”
왓데의 말을 확인하고 싶어 태평양의 작은 섬에서 차를 직접 몰고 간 곳은 바로 교도소였다.
“죄수가 없다는 교도소를 보고 싶어요.”
내 뜻을 알아차리고 경찰이 ‘하하하’ 웃더니 손가락으로 교도소 있는 곳을 알려준다. 그가 가르쳐준 대로 차를 몰았지만 그 집이 그 집 같아 찾기 힘들다. 교도소라면 높은 담이 있을 터이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그런 곳은 보이지 않는다.
경찰이 교도소라고 가리킨 곳은 작고 잡초가 무성한 빈 가정집 같았다. 앞장서서 나를 안내하는 경찰을 따라갔다. 낡은 철창이 있고 그 안에 침대 하나와 세면대와 변기가 있는 방이 나왔다. 다른 방에는 일상의 잡동사니가 꽉 채워져 있다.
쓰지 않는 곳, 쓸 이유가 없는 곳임을 직감하게 된다. 창고로 쓴다는 경찰의 말이 ‘죄수 없는 나라 니우에’라는 말로 들린다. 버려진 교도소를 보니 살짝 장난기가 일어났고 실제로 그러고 싶어 물었다.
“저 교도소 방을 내가 한 달 동안 써도 될까요?”
내 발로 찾아가는 교도소? 물으면서 나는 웃었다. 장난기에도 경찰의 대답은 매우 진지하다.
“예, 물론이지요. 마음대로 언제라도 써도 됩니다. 봐서 알겠지만 정리는 직접 하셔야 합니다. 경찰이 지켜주니 어떤 곳보다 안전할 겁니다. 교도소니까요.”
니우에에 내 집을 공짜로 얻다니…. 다시 꼭 와서 한 달 이상은 머물고 싶다.
차를 몰고 가는 도중 바람도 불지 않는데 길가의 돌이 흔들린다. 차를 세우고 돌을 들어보니 그 안에 몸보다 더 길고 굵은 큰 집게를 가진 게가 숨었다. 단단한 코코넛을 집게로 깨서 먹고 산다는 ‘코코넛크랩’이다.
계곡에서 가재 잡던 동심으로 돌아가 코코넛크랩 잡이를 시작했다. 왓데 가족에게 신세만 지는 게 미안해서 오늘 저녁거리는 내가 준비할 생각이었다. 왓데가 퇴근해 집에 돌아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서둘렀다. 덕분에 네 명이 적당히 먹을 만큼 잡을 수 있었다.
“구경은 않고 저녁준비를 하신 거예요?”
제이니가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코코넛크랩이 든 봉투를 건네받아 삶기 시작했다. 구수한 냄새를 맡으며 내 질문에 대답하는 왓데의 코코넛크랩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런데 일주일에 한 번 비행기가 운항하는 니우에에 태풍이 들이닥쳤다. 2주 동안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나는 이 작은 섬에도 골프장이 있다는 말을 듣고 가보기로 했다. 골프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관리자도 없었다. 공짜? 둘러보니 ‘양심 상자’라는 게 있다. 사용료는 뉴질랜드화폐로 20달러(약 2만 원)라고 적혔다. 이 돈으로 하루 종일 쳐도 된다는 말이 아닌가! 한국에서 골프공 제조업을 하는 나는 ‘양심 상자’가 놓인 니우에 골프장을 바라보며 후회한다.
“이걸 알았으면 내 골프공을 잔뜩 갖고 와서 이곳에 놔둘 걸. 물론 공짜로!”
관리가 안 돼 엉망인 잔디를 다듬으며 혼자서 다짐한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집이 생겼고, 골프장에 내 골프공을 선물해야 하니 니우에에는 언젠가 꼭 다시 오리라. 참으로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니우에다.
도용복 오지여행가
2024-05-07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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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 가리던 버스기사, 연가 노랫가락에 마음 열어 [세상에이런여행] ⑯
얕은 암초와 환상적으로 넓게 펼쳐진 산호섬, 그리고 하얀 모래해변이 눈부신 섬나라 쿡 제도는 남태평양에서 오지 중의 오지다. 가장 가까운 이웃이 서쪽으로 1500km나 떨어진 미국령 사모아와 동쪽으로 역시 1500km 떨어진 타히티일 정도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으로도 알려져 가긴 힘들어도 한 번 가 본 사람은 다시 꼭 여행하고 싶어 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비행기 옆자리 여인 주디
뉴질랜드에서 출발한 쿡 제도행 여객기에 몸을 실었는데, 옆자리 여성이 눈길을 끈다. 와인을 마시며 책을 읽는데 무슨 책인지 궁금하다. 독서삼매경에 빠진 그녀는 말을 걸 틈을 주지 않는다. 그때 핸드폰을 보니 얼마나 반가운지….
“오, 삼성!”
여성이 돌아보며 밝게 웃는다.
“예, 삼성이에요.”
그녀는 내게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작은 전자제품 하나가 태평양 상공에서 처음 만난 이국 여인과의 서먹한 분위기를 일순간에 해소시켜 준다. 영문명함을 건넸다. 엘살바도르 명예영사라는 직함에 더 관심을 보인다.
“중앙아메리카에 있는 엘살바도르?”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여성이 자신을 소개한다. 이름은 주디. 뉴질랜드은행 간부여서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데, 연말이라서 오랜만에 고향 쿡 제도로 가는 중이란다. 공항에서 남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공항에서 차로 30분 거리의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또 2시간을 가야 하는 섬에 살고 있다고 했다.
나의 호기심이 발동하며 구체적으로 섬의 이름과 가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하자 그녀가 주춤한다. 이방인에 대한 경계라고 할까.
“쿡 제도의 수도는 북쪽 아바루아예요. 항공기 기착지가 아바루아지만 도심까지는 꽤 거리가 됩니다. 도심에 호텔이나 호스텔이 모여 있지요. 공항에 도착하면 도심까지 태워드릴게요.”
감사하다고 하자 주디는 이내 와인을 음미하듯 마시며 읽던 책에 집중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그녀와 만난 내용을 적는다. 그녀가 신기한 듯 묻는다.
“메모장이네요? 무엇을 그렇게 빼곡하게 적은 건가요?”
나는 수첩을 펼쳐 보이며 대답했다.
“주디를 만난 소감을 적고 있습니다. 이번 여행지는 오세아니아의 14개국이에요. 나이가 78세여서 기억이 가끔 깜빡깜빡하기에 그때그때 메모해 둔답니다.”
오지 여행가이며 현재 180개국을 다녀왔다고 했더니 다시 나이를 묻는다.
“78세.”
놀라며 이번 여행이 마지막이냐고 또 묻는다.
“아니에요!”
이번에는 오세아니아를 여행하고 북극과 아이슬란드, 그리고 남극에 갈 예정이라고 하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인다.
■경찰서에서의 하룻밤
쿡 제도에 도착한 시간은 밤 12시. 입국수속을 밟는 데 1시간이나 걸렸다. 첫 방문자인 나는 까다로운 검문검색을 받아야 했다. 더구나 직원은 한국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인지 꼬치꼬치 묻는데 영어가 짧아 애를 먹었다.
무사히 입국심사를 마치고 시내까지 차를 태워 준다는 주디를 다시 만났다. 많은 인파와 차량 속에서 기다려 준 주디의 뒷모습을 보고 달려갔지만 그녀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
내국인에겐 입국절차가 간소했기에 일찍 공항 밖으로 나왔을 터. 그런 그녀가 나를 기다려줬다는 것으로 너무나 고마웠다. 고향까지 가는 길이 많이 남은 그녀를 빨리 보내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밤은 깊었고 숙소도 정해 놓지 않아 난감했지만 현지에서 맞닥뜨리는 곤경의 체험도 나중에 돌아보면 소중한 경험이 되고 추억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낙담하지 않았다.
일단 시내로 가야 한다. 그 사이 많던 사람은 하나 둘 사라지고 공항 로비는 나홀로 남겨진 듯 썰렁하다. 지나가는 남자의 명찰에 ‘△△리조트’가 눈에 띈다. 직원이 고객을 맞이하러 나왔으려니 생각하며 물었다.
“저렴한 숙소를 찾는데 알려줄 수 있겠어요?”
그는 흔쾌히 따라오라고 한다.
“가격은 가서 얘기하시죠.”
직원의 안내로 차에 오르자 이미 8명쯤 타고 있다. 짐으로 가득 채워진 15인승 미니버스에 몸을 구겨 넣듯이 밀어 넣고 30분을 넘게 달려 도착한 호텔은 1인실이 1박에 10만 원이란다. 새벽 두 시가 지났고 기껏 서너 시간을 자기 위해서라면 너무 비쌌다. 더 싼 숙소를 물었지만 고개를 젓는다. 이 호텔마저 곧 문을 닫을 것라며 “갈 데는 없어요” 하는 호텔직원에게 경찰서가 있는 곳을 알려 달라고 했다. 오던 길을 차로 10분 정도 돌아가야 한단다. 택시를 부르는 대신 쿡 제도의 새벽을 걷기로 했다.
가로등 하나 없는 까만 밤을 더듬거리며 걸었다. 지나는 차 한 대 없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얼마쯤 걸었을까. 마침 차가 지나기에 서둘러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지나친 줄 알았는데 후진해 왔다. 달려가 보니 젊은 여성이 운전하는 차였다.
“호스텔을 찾고 있어요. 없으면 경찰서까지라도 태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단 타세요.”
처음에는 경계하던 여성은 순순히 승차를 허락한다. 경찰서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친절한 여성의 이름은 리아나. 주디와 리아나 덕분에 쿡 제도의 첫 인상은 아주 좋았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경찰서에서 만난 경찰 역시 이곳저곳 숙소를 알아봐 준다. 경찰은 안타까운 표정을 짓더니 문을 연 숙소는 한 군데도 없다고 전한다. 인상 좋고 공손한 경찰을 보니 경찰서에서 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불편할 텐데 괜찮겠어요?”
예상치 못한 쿡 제도 경찰서에서의 첫날밤. 긴 나무의자에 누워 있으려니 몸은 피곤하지만 잠이 올 리 없다. 남태평양의 오지 섬나라 경찰서에 몸을 누이는 상황에 처한 내 자신이 신기하기만 했다.
뒤척이다 잠깐 잠이 들었다. 주야 근무하는 경찰의 교대로 눈을 뜬 나는 단출한 물소가죽 가방만을 맨 채 경찰서에서 빠져나왔다. 새벽 6시. 버스정류장에서 눈곱이 낀 듯 빡빡한 눈이지만 가슴은 상큼하게 여명을 맞이했다.
■섬나라의 시골버스
정류장에 30분이나 앉아 있었지만 버스는 오지 않았다. 태평양의 섬나라는 바삐 사는 한국인의 시간과는 다를 것이다. 기다리는 것이 시간낭비 같아 걷기로 했다. 2차로의 좁은 도로. 인도와 차도 구분이 없는 길을 따라가니 좀 더 넓은 2차선 도로가 나왔다. 오른쪽으론 해안이, 왼쪽으론 건물이 늘어선 마을에 도착했다. 눈으로만 봐도 평화로운 도시다.
이른 아침인데 문을 연 카페가 보인다. 아침식사로 빵을 사서 미국화폐를 내놓자 뉴질랜드화폐만 사용한단다. 다행히 카페주인이 환전을 해 준다. 고맙다는 표시로 우유와 다른 먹을거리를 더 샀다. 인심 좋은 주인은 샌드위치 값만 받고 나머지는 서비스라고 한다. 거리에 서서 아침식사를 하며 바라보는 전경은 맑은 공기처럼 깨끗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사람이 한둘 모이기 시작하자 버스가 다가왔다. 가성비가 좋아 10회권 승차권을 구입하고 첫차에 무작정 올라탔다. 승차권에 구멍을 뚫어 1회 사용을 확인하는 것이 시간을 30∼40년 전으로 돌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외국에 나가면 나라마다 자연이 다 다르듯이 사는 모습도 다 다르다. 문명의 차이로 디지털시대에서 아날로그시대를 맛보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경험했던 일이다. 한국에서는 사라졌던 것을 만나면 과거의 나, 어릴 적이나 청년시절로 돌아가게 해준다. 그 기분은 말이나 글로는 표현할 수 없다. 이러니 직접 가서 그곳을 걸어보고 돌아보고 만나보고 대화해봐야 제맛의 여행을 즐길 수가 있다.
우리나라 시골버스처럼 이곳 버스기사는 승객을 다 아는 눈치다. 서로의 일상을 묻는 기사와 승객 간의 대화를 엿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영어가 아닌 마오리어를 사용해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들의 표정으로 대화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잘 지냈어? 요즘 어때?”
“응, 좋아, 괜찮아.”
고개를 세로로 끄덕이지만 가끔은 가로로 젓기도 한다. 사람 사는 모습은 한국이나 이곳 태평양의 섬나라나 다를 바가 없다. 생김새나 입은 옷만 다를 뿐이다. 그런데 이들은 한결 같이 얼굴에 미소를 짓는다. 오고 가는 미소가 나를 이들의 생활 속으로 스며들게 만든다.
이름이 자크라는 기사는 크리스마스가 지났는데도 산타복장을 하고 있다. 외국인인 나에게 낯을 가리는 건지 운전에 집중하려는 건지 반응이 없다. 나는 그의 뒤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마침 창밖에 해안이 펼쳐져 있고 끝없는 바다는 시원하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이 노래는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족의 ‘포카레카레 아나(영원한 밤의 우정)’에서 유래됐다. 서로 다른 부족의 남녀가 사랑에 빠졌는데 부모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지만 끝내 결혼해 행복하게 산다는 사랑의 노래다. 마오리어를 쓰는 모든 민족이 즐겨 부르는 우리나라의 ‘아리랑’ 같은 노래다.
예상한 대로 기사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싱긋 웃어 보인다. 나는 마주친 그의 눈을 바라보며 계속 노래를 불렀다. 그가 호기심을 보이며 어디서 왔느냐며 궁금해 한다. 방실방실 웃는 그에게 나도 벙긋벙긋 미소 짓는다. 역시 노래하듯 대답한다.
“도레미파솔라시도…레미, 내 이름은 레미, 도레미!”
이름이 멋지다며 운전대를 잡은 왼손을 들어 엄지 척을 해 보인다. 영국의 지배를 받은 영향으로 운전석은 오른쪽이다.
처음에는 어색해 하고 서먹해 하던 그가 어머니는 필리핀인이라고 알려 준다. 원래 오세아니아의 섬 주민 상당수는 오래전 대만과 필리핀을 거쳐 이곳으로 진출했다.
버스기사의 환대로 용기를 얻은 나는 타고 내리는 승객 모두에게 미소와 손짓으로 인사를 했다. 친구가 된 자크와 헤어지려니 아쉽다. 그도 같은 마음이었다. 자신의 운전시간을 일러주더니 또 만나자며 자리에서 일어나 포옹한다. 나도 마음이 울컥한다. 두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퇴직 여교사의 뜻하지 않은 도움
섬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수도 아바루아의 도심으로 돌아왔다. 음악과 춤이 있는 곳을 찾았지만 다 스노클링이나 마사지, 관광 상품만 즐비한 간판만 보인다. 코로 킁킁, 귀로 쫑긋하면서 감각에 의존해보기로 한다. 따라가다 보니 이스라엘 국기가 꽂힌 파란색 승용차가 보인다. 이런 외딴곳에 이스라엘이라니.
양손에 짐을 들고 있지만 걸음이 반듯하고 표정도 밝은 중년여성이 주차장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내 직감은 ‘저 분’ 했다. 그녀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이름을 밝히고 이스라엘 깃발을 가리키며 이스라엘과 파푸아뉴기니에서 얻은 유대식 이름 데이빗으로 나를 소개했다.
여인은 이스라엘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는 손자 얘기를 꺼냈다. 자동차의 이스라엘 깃발도 손자가 꽂아둔 것이라고 했다. 여행객임을 알아차린 그녀가 섬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먼저 선심을 보인다.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40년간 교사로 살아왔다는 그녀는 정년을 맞은 마지막 학교에 같이 가보자고 했다. 나는 이런 우연한 기회를 얻는 재미로 혼자서 오지 여행을 즐긴다.
“쿡 제도의 학교는 어떨까? 궁금했는데 정말 잘 됐네요.”
여인이 앞장서 들어간 학교에는 작가의 집이라는 박물관이 있었다. 작품을 팔기도 하는 작은 상점 같은 곳이 학교 안에 있다. 입장료도 내야 한다고 해서 흔쾌히 뉴질랜드화폐로 8달러를 내고 들어섰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속에 들어간 느낌이 들었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동화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기분이 들었다.
원시생활의 조상들이 전시된 방안을 기웃하고 들여다보는 창가의 덩굴이 더 인상적이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처럼 유적과 나무의 뿌리, 줄기가 한데 엉켜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어울린 세월의 흔적을 보여 준다.
여인은 언제 떠나느냐고 묻는다. ‘내일’이라고 대답하려니 정말 아쉽고 안타까웠다. 그녀도 그랬던 모양이다.
“하룻밤은 잘 수 있겠네요.”
딸과 손자가 오면 지내는 빈방이 있으니 괜찮으면 그 방에서 하루를 쉬고 떠나면 어떻겠냐고 묻는다. 좀 더 함께 있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동무가 되고 싶은 그녀의 마음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럼요, 저는 영광이지요.”
여인의 집은 망고나무가 줄지어 맞이하는 길을 따라 안쪽에 예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망고차를 내놓는다.
내일 떠나야 하다니…. 일정을 정해 두고 다녀야 하는 여행이 때로는 더 큰 오지탐험을 가로막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또 다른 미지의 세계가 앞에 기다리고 있다. 우연은 때로는 욕심을 줄이고 절제하는 겸허를 가르쳐주기도 한다. 아쉬움으로 남겨둔 여행은 그 여행을 영원으로 이끌었고, 안타까움으로 이어진 여행은 다음 여행에 더 충실하게 나를 또 인도했다. 도용복 오지여행가
2024-04-30 [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