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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없어도 세상에서 국민행복지수 가장 높은 섬나라 [세상에이런여행] ⑮
바누아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이다. 국민행복지수 전 세계 1위라는 언론 보도를 통해서였다. 도대체 어떤 나라이기에?
당시 바누아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 더 관심이 갔다. 1인당 국민소득(GNP)이 4000달러 전후이니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나라는 아니다. 서양의 침략으로 수백 년간 식민지로 살아야 했던 불행한 역사를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행복지수가 세계 1위라니?
나는 그 이유를 직접 가서 꼭 확인하고 싶었다. 오세아니아의 다른 섬나라들과 함께 여행해야 했기에 가는 데 10년이나 걸렸다. ‘많이 알수록 설렘은 준다.’ 나의 오지탐험은 연애와 같다.
■낯선 이도 반기는 섬
솔로몬제도의 일본전쟁박물관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인이 이번 여행의 중심에 있다. 다음 여행지는 바누아투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녀는 핸드폰으로 내 얼굴을 찍는다.
“바누아투에 도착하면 남편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여인은 방금 찍은 사진을 남편에게 보냈다 하지 않는가! 얼떨결에 바누아투 공항에 마중 나올 사람이 생긴 것이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설마’ 하는 심정이 있었다. 1시간이나 연착해 바누아투의 포트빌라 공항에 도착한 후 우선 돈을 환전하고 핸드폰 유심카드를 사서 여인에게서 받은 전화번호를 눌렀다. 그녀의 남편이 ‘10분 후’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정말 10분 후에 노란색 봉고차가 내 앞에 섰다.
“웰컴 투 바누아투!”
남편의 이름은 제넥이다. 운전은 존이라는 청년이 한다. 앞에서 활짝 웃는 제넥을 보며 나도 미소에 전염된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제넥은 당연히 내가 호텔을 예약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어디냐고 물었다. 그의 집에서 묵을 순 없는지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물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물론 가능합니다.”
그런데 말꼬리가 분명하지 않다.
“집이 작고 가족이 많아 불편할 텐데 괜찮겠어요?”
전혀 문제없다며 감사 인사를 했지만 그의 표정은 망설이는 듯했다.
“노모와 함께 사는데 정신질환과 피부병이 있으세요.”
제넥은 이 말을 하면서 더 미안해한다. 여기저기 섬을 안내하면서도 표정이 편치 않아 보인다. 그의 큰 덩치와는 다르게 속삭이듯 내게 제안한다.
“오늘은 일단 이곳 사람들이 머무르는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로 가고, 내일 어머니 피부병이 외지인에게 괜찮은지 의사와 상의해본 다음 우리 집으로 가면 어떨까요? 정말 송구합니다.”
제넥은 마치 죄인인 양 몸을 옹송그린다. 덕분에 외국인은 묵고 싶어도 몰라서 못 가고, 불편해서도 못 가는 현지인의 게스트하우스를 체험할 수 있었다.
한국인은 처음이라는 여사장의 안내를 받아 방에 들어가니 무엇보다 먼저 멀리 도망치는 바퀴벌레 수십 마리의 반질한 엉덩이가 손님을 반긴다. 곰팡이가 핀 데다 변기 뚜껑도 없어 지저분하긴 했지만 ‘일박에 5000원이면 거저’라고 생각하며 밝은 표정을 짓는다.
제넥은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정말 괜찮겠어요?”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진짜 마음에 듭니다. 고마워요. 내일 당신의 집에서도 묵을 수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다음 날 아침 나무에서 자라 뾰족한 호두같이 생긴 망가이 땅콩을 곁들여 간단한 식사를 했다. 제넥과 그의 아들 제리와 함께 바누아투의 수도인 포트빌라에서 유일한 정글을 탐험하기로 했다. 제리의 집은 아버지 집 바로 뒤에 있다. 젊은 바누아투인은 어떻게 사나 싶어 제리의 집을 기웃거렸다. 마당에서 네 살인 첫째 딸이 두 살인 동생을 씻겨준다. 나를 쳐다보던 딸의 동그랗고 큰 눈망울을 오래 간직하고자 셔터를 누른다.
정글로 간다더니 제넥과 제리는 집 뒤쪽으로 향한다. 50cm 길이의 큰 칼로 숲을 헤치자 정글이 펼쳐졌다. 야생 바나나와 카사바가 좌우로 꽉 차 있다. 카사바는 고구마, 감자와 비슷하게 생겼다. 뿌리에 매달린 것도 같다. 이곳에서는 주요 음식재료다.
“두 달 전이라면 코코넛 크랩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정글에 게가 있다고?
“코코넛을 잘라먹을 정도로 집게의 힘이 어마어마합니다. 우리말로는 웅아라고 하는데, 식당에서 팔기도 하지만 우린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산 과일과 함께 지천에 깔려 있다는 말이다.
“아! 그래서 한 달에 10달러만 있어도 살 수 있다는 거군요.”
많은 나무가 엉겨 붙어 하나를 이룬 게 특이했다. 겹겹의 연리지 같기도 하고, 다른 종의 나무가 한 뿌리 또는 줄기에서 같이 자라는 나무인 키메라 같기도 하다.
“이건 반얀트리라고 해요. 조그만 열매가 열리는데 박쥐 먹이랍니다.”
이곳에 박쥐가 많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제리는 섬뜩한 말을 이어간다.
“우리는 이 열매를 먹는 박쥐를 잡아먹지요.”
모르는 게 때로는 약일 수 있다는 말을 이번 여행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세계 제일의 행복 국가
공동묘지를 지날 때였다. 많은 사람과 그들이 가져온 꽃이 주변을 꽉 채웠다. 한 사람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다.
“오늘이 무슨 날입니까?”
그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한다.
“휴일이거나 날씨가 좋으면 우리는 세상을 떠난 분을 찾아갑니다. 좋은 날에는 돌아가신 부모나 조상에게 가서 형제, 자녀와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이랍니다.”
조금 떨어진 무덤가에서 한 여인이 서글피 울었다. 그녀는 스스럼없이 사연을 알려준다.
“가족이라곤 언니밖에 없었는데….”
외로워서 먼저 세상을 떠난 언니 곁에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실컷 울고 가면 슬픔도 견딜 수 있다는 것이다. 언니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여전히 곁에 있는 듯하다면서 눈물 자국이 선명한 얼굴이 밝게 활짝 펴진다. 코끝이 시큰하고 눈앞이 흐려진다.
연말연시가 되면 부모나 조상을 더 찾는다는 바누아투인.
“돌아가신 분과의 추억을 생각하다 보면 더 좋은 날이 되거든요.”
이래서 세계 제일의 행복지수 국가이며 국민이로구나. 숙연한 느낌에 머리가 절로 끄덕여진다.
공동묘지에서 시간을 보내다보니 식사시간이 훌쩍 지났다. 누군가 나를 배려해서 싸고 맛있는 중국식당을 추천한다.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존의 차에 휴대폰을 두고 내린 것을 알아차렸다. 정신을 놓는 일이 없어 소지품을 잃어버릴 일도 없었는데, 묘지에서 얻어 마신 카바 때문일까?
심신을 안정시켜 준다는 음료수라고 해서 주는 대로 한 컵을 다 들이켰는데….
제넥에게 휴대폰을 놔두고 내렸다고 하자 그는 존에게 전화를 걸어 차 뒷좌석을 확인해보라고 한다. 그런데 없다고 한다.
그 순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휴대폰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 사고와 찾아내는 재미가 섞여 만들어낸 장난기였다. 제넥의 안내로 방송국을 찾아가서 아나운서에게 방송을 부탁했다.
“잃어버린 휴대폰을 찾습니다. 찾아주는 사람에게는 상금으로 5만 바투(약 55만 원)를 드리겠습니다.”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교회나 슈퍼마켓 앞에 ‘잃어버린 핸드폰 찾아주시면…’이라는 내용의 경품 문구를 붙여놓고 기다렸다.
핸드폰을 찾으면 시상식도 벌이고자 했던 이벤트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냥 웃어넘길 수 있었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도 웃음으로 대처할 수 있었던 건 바누아트인의 천진난만함에 물들어서이지 않았을까? 돌아와 생각하며 또 웃는다. 휴대폰을 잃어버리고도 웃는 바보가 됐다.
도용복 오지여행가
2024-04-2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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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하지 않게 만나는 현지인, 오지여행의 진정한 즐거움 [세상에이런여행] ⑭
파푸아뉴기니에서 불과 며칠 사이에 사귄 젊은 친구들 그리고 경찰관 캄보가 솔로몬제도로 떠나는 나를 배웅하러 공항까지 나왔다. 안심시켜주려는 배려에서인지 캄보가 포옹하며 말한다.
“솔로몬제도는 안전해요. 자유로운 영혼인 레미는 마음껏 다닐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언제 또 만날지 모를 친구들과 석별의 정을 나눴다. 그들과의 추억은 평생 지워지지 않고 가슴에 담겨 있을 터. 짧은 만남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을 감고 회상하는 머리에서 흐른다.
파푸아뉴기니 동부에 위치한 솔로몬제도는 동남쪽으로 뻗은 1000여 개의 섬으로 이뤄졌고 120개의 언어를 쓰는 섬나라다. 스페인은 1568년 섬을 발견하자 천연자원이 풍부할 것으로 생각하고 성경에 나오는 ‘풍요의 왕’인 솔로몬을 섬 이름으로 붙였다. 이후 1978년 독립할 때까지 솔로몬의 역사는 외세 침략의 연속이었다.
솔로몬제도에 도착해 환전을 하고 나니 택시기사들의 호객행위가 시작됐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금액에 바가지를 뒤집어 쓸 수는 없어 주저하는데 마침 비행기에서 만난 스위스 커플이 지나간다.
“혹시 시내로 가는 길이면 같이 타고 가는 게 어때요. 택시비도 나누고….”
내 제안에 그들은 반갑게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도 좋지요.”
섬에 웬 차가 그리 많은지 교통체증이 부산보다 더 심하다. 시내까지 약 20km 거리를 가는 데 두 시간이나 걸렸다. 다행히 택시에 갇힌 시간은 스위스 커플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그들은 15년째 연애 중이며 1년 내내 세계 곳곳을 여행 중이라고 했다. 프로다이버여서 여행 중에 현지에서 다이빙클래스를 운영하며 여행경비를 충당한다고 했다.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곳 중에서 좋은 여행지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다음에 필리핀의 블리보스 섬에 가보세요. 무인도인 그 섬은 여행자가 원하는 만큼 살고 나올 수 있고,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생 생존을 체험하는 곳입니다. 자연과 하나가 된 원시적 삶을 만끽할 수 있으니 오지여행가 레미가 더 원할 듯해 적극 추천합니다. 디지털시대의 현재를 원시시대로 돌려놓는 곳이거든요.”
늘 가지고 다니는 작은 메모장에 ‘필리핀, 블리보스 섬, 무한자유의 원시’라고 적었다. 다음에 꼭! 아직도 가야 할 곳이 많이 남았다는 사실은 축복이다.
어느새 그들이 묵을 ‘코럴 시 리조트’에 도착했다. 리조트 직원이 건네는 환영 음료수인 코코넛을 나도 엉겁결에 한 잔 얻어 마시고 내가 머물 숙소로 출발하려는 찰라 그들이 붙잡았다.
“레미. 오늘 택시 타고 오는 시간이 참 재미있었어요. 감사의 보답으로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같이 드시겠어요?”
솔로몬 최고급 리조트의 레스토랑에 만찬을 초대받았지만 아쉽게도 정중히 거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이드를 동반한 오지마을 방문이 예정됐고 현지인들이 사는 주택가의 작은 아파트에 머물 예정이라 찾아가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장을 지나고 주택가를 벗어나 구불구불한 언덕길에 들어서니 건장한 체구의 청년들이 다가와 그림을 내민다. 호기심 많은 내가 고개 숙여 그림을 들여다보는 순간, 주머니 안으로 한 청년의 손이 쓰윽 밀려 들어왔다. 불길한 생각이 들어 그의 손을 제지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행인들은 보고도 듣고도 모른 체한다.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급박감에 손에 잡힌 청년의 손을 비틀며 제압하자 손을 뿌리치고 도망친다.
거리를 두고 적개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째려보는 그들의 행동에서 그냥 물러날 것 같지 않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할렘 같은 어두침침하고 고불고불한 좁은 주택가는 불안을 더 가중시켰다. 달리 피할 방법이 없어 가까운 집으로 가서 마치 잘 아는 집인 양 문을 두어 번 두드린 후 고개를 들이밀었다. 흰색수염을 기른 서글서글한 인상에 대머리로 구릿빛이 돋보이는 속옷 차림의 솔로몬 아저씨가 나온다.
“길을 잃었습니다. 도와주실 수 있겠어요?”
그는 다급해 보이는 외국인을 순순히 집안으로 받아준다. 나를 소개하자 대뜸 질문부터 던진다.
“한국이 어디 있느냐?”
메모지에 중국과 일본 사이의 호랑이 모양의 한반도를 그려 보이니 고개를 끄덕끄덕. 한국인은 처음 만난다면서, 숨가빠하는 나에게 주황색 열대과일 포도를 내민다. 방심하고 자만했던 것일까. 친절한 스위스 커플을 만나 경계심을 잃은 것일까. 나의 행동을 점검하듯 돌아보는 동안 서서히 소매치기 일당의 공포가 사라졌다.
안정을 되찾고 다시 미지의 숙소를 향해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장대비가 쏟아진다. 알려준 지도상의 숙소 근처에 왔지만 찾는 아파트는 보이지 않는다. 큰 나무를 우산 삼아 소낙비를 피하는데 아이들의 환호성이 거센 빗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초등학교 저학년쯤일 아이들이 철버덕 철버덕 소나기를 반기며 소리를 지르는 장면에서 세상의 모든 아이들의 천진난만을 엿볼 수 있었다.
인근 주민들에게 묻고 물어 간신히 찾아낸 숙소는 아파트가 아니라 우리나라 시골집 길가의 도로보다 낮은 움막 같은 아주 작은 가정집이었다. 일부러 이런 숙소를 찾았으니 잘됐다 싶었다. 이미 해는 져서 예정된 일정은 내일로 미뤄야 했다. 늦은 이유를 설명했다. 변명으로 들렸을 텐데 숙소주인이 더 미안해하며 예정에 없던 저녁투어를 하러 가자고 앞장섰다.
이런 횡재가! 오지탐험의 ‘찐’은 예정이나 예상을 깨는 것에서 시작된다. 산골짜기의 노상좌판에서 상인들과 격의 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저렴하게 과일도 샀다. 버스킹 같은 시골장터의 라이브 공연과 전통춤도 볼 수 있었다. 솔로몬제도의 전통춤은 뉴질랜드의 하카와 매우 유사하지만, 노를 젓고 씨를 뿌리는 등 일상 그대로의 어부와 농부의 삶이 깃든 노동요라서 공격과 방어의 전투를 연상케 하는 하카와는 사뭇 달랐다.
한참 솔로몬 전통춤에 빠져 있는데 누군가 반갑게 인사한다. 스위스 커플이다. 우리는 오랜 친구처럼 내가 선창한 “얼씨구절씨구. 좋구나, 좋아!”로 덩실덩실 함께 춤을 추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오세아니아 섬나라 여행의 특징은 나라 간의 직항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대개 호주나 뉴질랜드를 경유해 새 목적지를 향해야 한다. 비행편이 매일 있는 게 아니어서 태풍 같은 악천후 때에는 꼼짝없이 며칠간 일정을 연기해야 한다. 솔로몬제도에서 그런 경우가 생겼다.
시간이 많아진 나는 솔로몬제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신호를 분석해 가야 할 곳을 결정하는 것은 오랜 여행 경험에서 나오는 나만의 노하우다. 보이는 것만큼 들리는 것이 중요하다. 멀리서 희미하게 퍼져 나오는 노랫소리가 흥미로워 발길을 돌린 곳에 교회가 있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니 안에서는 결혼식 리허설이 한창이다. 그들의 축가가 노인 여행객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것 같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여행이란 이렇듯 ‘보물찾기’가 아닐까.
여행을 다니다 늦은 밤 지친 몸을 뉘고 천장을 보니 문득 맹자가 한 말이 떠오른다. ‘불위야비불능야(不爲也非不能也).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즉 ‘할 수 있어도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지닌 능력보다 할 의지가 중요하단 말일지니. 이 먼 태평양의 외딴 섬나라 오지에 온 것만으로도 나는 행동했고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았는가, 하며 씨익 자화자찬에 빠져 우쭐해진다.
도용복 오지여행가
2024-04-1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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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시마 앞바다엔 매일 활화산 연기가 솟아난다 [세상에이런여행] ⑫
화산이 분화했다는 외신뉴스를 접하고 깜짝 놀랄 때가 더러 있다. 일본에서도 자주 뉴스에 등장하는 화산이 있다. 바로 가고시마현의 사쿠라지마 활화산이다. 전 세계에 약 1500개의 활화산이 있는데 그중 110개가 일본에 있다고 한다. 사쿠라지마는 바다에 섬처럼 자리를 잡은 덕분에 일본의 활화산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다.
■사쿠라지마
가고시마에서 바다를 보면 늘 연기를 뿜어내는 산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사쿠라지마다. 어떤 날에는 실낱같은 연기가 올라오고, 좀 심한 날에는 금세라도 폭발할 듯이 굵은 연기가 나온다.
사쿠라지마는 기리시마금강만국립공원의 일부다. 이 국립공원은 거대 칼데라 화산이 남북으로 열을 지어 구성된 곳이다. 사쿠라지마는 공원 남부 지역인데, 북부 기리시마 지역에는 크고 작은 20개 이상의 화산이 이어져 기리시마 연산을 이룬다. 화산 활동과 더불어 탄생한 화구호, 온천, 고원 등과 함께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경관이 많이 남아 있다.
가고시마시의 사쿠라지마 페리터미널에서 배를 타면 15분 만에 사쿠라지마에 갈 수 있다. 페리는 사쿠라지마 주민의 대중교통수단이어서 하루 24시간 운행된다.
사쿠라지마항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사쿠라지마 방문자센터가 손님을 맞아준다. 센터는 사쿠라지마의 분화와 성장의 역사, 식물의 천이 과정, 지역의 관광 정보와 방재활동 등을 소개한다. 대형 스크린과 영상 등을 통해 살아있는 사쿠라지마를 체감할 수 있다.
1946년 대폭발로 유출된 용암벌판의 작은 언덕에는 아리무라 용암전망대가 있다. 이곳에 오르면 사쿠라지마 분화구와 금강만을 바로 앞에서 바라볼 수 있다. 분화구를 배경으로 사진도 찍을 수 있다. 운이 좋으면(?) 분화구의 울림과 분화에 따른 폭발음을 들을 수도 있다.
사쿠라지마는 봉우리 높이 1117m, 면적 약 80㎢, 둘레 52km에 이르는 곳이다. 약 2만 6000년 전에 생성돼 17번이나 대분화를 반복했다. 사쿠라지마는 섬이면서 섬이 아니다. 과거에는 이름대로 바다 한가운데의 섬이었지만, 1914년 대분화 때 흘러내린 용암이 해협을 메꾸어 오늘날에는 육지와 연결됐기 때문이다.
사쿠라지마에서는 지금도 매일같이 작은 규모의 분화가 반복된다. 그런데 이 활화산 주변에 사는 주민은 무려 5100명이나 된다. 화산 재해를 감수하면서 화산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화산이 가져다주는 여러 혜택 때문이다.
사쿠라지마 무, 사쿠라지마 귤 그리고 비파와 같은 농작물은 물론이거니와 일상의 피로를 씻어주는 풍부한 온천 그리고 산과 바다가 만들어 내는 자연경관이다. 사쿠라지마 주민들은 온난한 기후를 활용해 250년 전부터 비파를 재배해 왔다. 사쿠라지마 무는 세계에서 제일 큰 무로 알려졌다. 무게 31.1kg, 둘레 119cm의 무가 기네스북에 등재될 정도다.
올해는 사쿠라지마가 1914년 분화 때문에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된 지 110주년 되는 해다. 화산은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에너지와 플레이트의 움직임 탓에 활동을 계속한다. 사쿠라지마에 사는 5100명 외에 바다를 사이에 두고 활화산에서 불과 4km 거리에 인구 60만 명이 산다. 매일 사쿠라지마를 바라보는 가고시마 시민들은 과연 어떤 마음으로 지척에 활화산을 두고 살아가는지, 사쿠라지마는 가고시마 시민들에게 어떤 존재인지 이방인으로서는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일본 소설가 미야오 도미코는 <덴쇼인 아쓰히메>라는 책에 ‘사쿠라지마는 기분이 좋은 날에는 담배 한 개비를 아주 기분 좋게 피우듯이 똑바로 연기를 내뿜을 뿐이지만, 조금 언짢을 때에는 비스듬히 피어오르고, 그리고 화를 내면 눈앞이 뿌옇게 될 정도로 재를 뿌리는데, 나는 지금 그 모습을 그리워하고 있다’고 적었다. 사쿠라지마와 가고시마 사람들의 관계와 심정을 잘 담아낸 문장이다.
■가라쿠니다케
사쿠라지마까지 온 김에 기리시마에 안 가 볼 수 없다. ‘한국’이라는 이름이 붙은 산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일본어로 ‘가라쿠니다케’로 발음되는 ‘한국악(韓国岳)’이다. 원래 일본어로 ‘한국’은 ‘강코쿠’인데 유독 ‘한국악’에서는 ‘가라쿠니’라고 발음한다.
사쿠라지마에서 기리시마로 이동할 때는 페리를 타지 않고 차량을 이용해 가면 된다. 기리시마는 화산활동으로 탄생한 화구호와 산정습원 등의 특색 있는 지형과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는 풍부한 자연이 아름다운 곳이다. 봄이면 진달래과의 미야마기리시마가 선명한 분홍빛으로 산을 수놓는다. 가을에는 단풍이 주변을 가득 채우고 겨울에는 환상적인 상고대가 일품이다.
가장 먼저 갈 곳은 기리시마 에코뮤지엄센터다. 해발 1200m의 에비노고원에 위치한 시설이다. 이곳은 가라쿠니다케와 산악호수 자연탐방로를 비롯한 기리시마 연산의 등산거점이다. 패널과 영상을 이용해 기리시마의 자연을 소개한다. 상주 직원이 각 계절의 볼거리와 자연정보, 등산정보와 신모에다케 화산활동 등에 대해 안내한다.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인 기리시마국립공원에는 해발 1500m 전후의 산 23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를 기리시마 연산(連山)이라고 부른다. 일본의 천손강림 건국신화와 관련이 있다는 다카치호(해발 1574m) 봉우리와 가라쿠니다케가 기리시마 연산에서 대표적인 산이다. 신기한 것은 해발 1700m인 가라쿠니다케가 일본건국신화가 깃든 봉우리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는 점이다.
본격적으로 등산하기 전에 가라쿠니다케의 내력에 대해 알아보자. 가고시마국립공원 최고봉에 한국의 산을 뜻하는 가라쿠니다케라는 이름이 붙은 건 왜일까.
의문을 풀어가는 출발점은 일본 역사서 <고사기>다. 이 책에는 ‘이곳은 한국을 향하고 있다. 아침 해가 비치는 나라. 저녁 해가 비치는 나라. 그러므로 여기는 좋은 나라’라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등장하는 한국은 도대체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로 유명한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이 책 ‘규슈 편’에서 ‘신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한국을 향하고 있다는 대목’이면서 ‘한국과 연관이 있음이 천손강림은 단군신화와 비슷하고 또 가야 김수로왕의 7왕자 이야기와도 비슷하여 신화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고 썼다.
지금까지 알려진 이야기로는 <고사기>에 등장하는 한국은 가락국과 연관이 깊다고 한다. 한국을 가라쿠니라고 읽는데, 여기서 ‘가라’는 한반도의 남쪽 지방 김해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가락국, 즉 가야의 ‘가락’을 음차한 말이라는 것이다.
기리시마의 가라쿠니다케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만약 한국에 일본산이 있다면, 일본사람들은 어떻게 했을까?’ 일본에 한국산이 있다는 걸 안 이후 나는 틈 날 때마다 한국산을 만나러 갔다.
조현제 이와사키호텔 서울사무소장
2024-04-0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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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 7000년 삼나무와 원령공주 함께 사는 ‘생명과 치유의 섬’ [세상에이런여행] ⑪
일본 가고시마현에 야쿠시마라는 섬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20년 전인 2004년 이와사키호텔그룹에 입사해 서울사무소장을 맡은 이후였다. 입사 교육의 하나로 야쿠시마의 이와사키호텔을 견학하기 위해 가고시마시에서 고속선을 탄 게 섬에 첫발을 디딘 계기였다. 나는 첫눈에 인생의 사랑을 찾은 젊은이처럼 한눈에 야쿠시마의 매력에 반해버렸다. 이후 한국인 관광객을 인솔하거나, 때로는 영화나 드라마 또는 다큐멘터리 촬영차 그곳에 가는 촬영감독, 배우를 안내하기 위해 섬을 방문한 게 수십 차례에 이르렀다.
야쿠시마의 매력은 오감을 활용하는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곳에서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다 사용해야 여행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먼저 초록의 이끼와 나뭇잎을 눈으로 보고 계곡에 흐르는 맑은 물소리와 새소리를 듣는다. 숲의 향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솟아나는 샘물의 맛을 본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살아온 삼나무를 만져본다. 나는 거기에 상상력을 추가한다. 그루터기를 보고 잘리기 전의 모습을 상상하거나, 쓰러진 삼나무를 보고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고 나면 야쿠시마의 숲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야쿠시마를 ‘생명의 섬’이라고 부른다.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치유의 섬’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곳에 가면 몸과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치유를 받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 30주년을 맞은 야쿠시마가 유명해진 계기는 두 가지다. 먼저 추정 수령 7200년의 삼나무 조몬스기다. 야쿠시마 사람들은 원래 섬의 깊은 숲을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해 안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가끔 사냥꾼이 거대한 나무를 봤다며 놀라워했을 뿐 그 나무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나무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오랫동안 은밀히 숨어 있던 조몬스기가 발견된 것은 1966년이었다. 섬 주민이 카메라 풀샷으로도 찍을 수 없는 거대한 원시목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남일본신문’이 보도한 것이었다. 신문은 ‘신석기 시대에 싹을 피웠다’는 뜻에서 이 삼나무에 조몬스기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몬은 BC 1만 4000년 무렵 일본의 선사시대를 의미하고 스기는 삼나무를 뜻한다. 신문 보도를 기점으로 야쿠시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야쿠시마를 더 유명하게 만든 두 번째 계기는 1997년 개봉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였다. 작품 제작의 배경이 야쿠시마라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미야자키 감독은 영화를 만들기 전 제작진을 데리고 야쿠시마에 들어가 5박 6일간 지내기도 했다. 3년 뒤인 2027년이면 개봉 30주년을 맞는 영화 덕분에 야쿠시마의 인기는 더 높아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야쿠시마에 들어가 보자. 야쿠시마에 가려면 가고시마에서 고속선을 이용해야 한다. 고속선 이름은 ‘토피’인데, 토피는 날치인 ‘토비우오’의 가고시마 방언이다. 야쿠시마 인근 바다에서는 날치가 많이 잡히기 때문에 고속선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야쿠시마 근처에 가면 언제든 배 옆을 날아가는 날치를 볼 수도 있다. ‘날치’를 타고 날치를 보는 셈이다.
야쿠시마에는 3대 트레킹 코스가 있다. 시라타니운스이 계곡, 야쿠스기랜드, 조몬스기 트레킹 코스다. 섬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3개 코스를 다 돌아봐야 한다. 그중에서 수천 년 전부터 살아온 조몬스기를 보러 가는 조몬스기 트레킹 코스의 시작점은 아라가와 등산로 입구다.
등산로 주차장이 작기 때문에 이곳에는 택시와 전세버스, 등산버스만 올라갈 수 있다. 야쿠스기자연관에서 출발하는 등산버스는 매년 3월 1일~11월 30일에 운영된다.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매일 오전 4시 40분, 5시, 5시 20분, 5시 40분, 6시에 출발한다.
아라가와 등산로 입구에 도착하면 먼저 아침식사로 도시락을 먹고 맨손체조를 한다. 이어 화장실을 이용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산행을 시작한다. 산행에는 9시간~9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아라가와 등산로에서는 먼저 삼림철도 위를 걷게 된다. 철길은 과거 삼나무를 벌채하고 운반하기 위해 설치됐다. 출발한 지 50분쯤 지나면 고스기다니 마을 터가 나온다. 삼림벌채가 성행하던 시기에 조성된 마을인데, 벌채가 중단돼 50년 전에 없어지고 지금은 터만 남았다.
올라가는 도중에 운이 좋으면 원숭이나 사슴을 만날지도 모른다. 야쿠시마에는 ‘원숭이 2만 마리, 사슴 2만 마리, 사람 2만 명’이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원숭이와 사슴이 흔하다. 일본어로 사슴을 시카라고 부르는데 야쿠시마 사슴은 야쿠시카라고 한다. 나는 등반 도중 야쿠시카를 만나기도 했다. 사슴은 사람을 보고도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한참이나 쳐다보다가 축지법이라도 쓰는 듯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곤 했다.
고스기다니 마을 터에서 30분 정도 더 걸으면 바이오화장실이 나온다. 이후 중간 중간에 삼대스기, 인왕스기 등을 만나게 되고, 1시간 정도 더 걸으면 오오카부 보도 입구에 도착한다. 이곳에도 화장실이 있다. 여기서부터 조몬스기를 보고 내려올 때까지는 화장실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여기서 ‘볼일’을 해결해야 한다.
오오카부 보도에서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된다. 길이 힘든 대신 볼거리가 많아 산행의 피로를 달래준다. 밑동만 남은 오키나(할아버지)삼나무, 하트 사진으로 유명한 윌슨 그루터기, 그리고 대왕삼나무와 부부삼나무 등이 차례로 나타난다.
수령 3000년으로 추정되는 윌슨 그루터기를 보는 순간 감탄이 터져 나온다. 둘레가 13m, 두께가 4m에 이르는 이 나무는 몸통은 없어지고 밑동, 즉 그루터기만 남았다. 나무의 속은 비어있기 때문에 큰 구멍을 통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나무 안은 시냇물이 흐를 정도로 넓어 어른 2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데, 위를 올려다보면 하트 모양 구멍이 보인다. 그래서 이곳은 청춘남녀에게 사진 촬영 포인트로 유명하다. 하트 사진을 찍으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소문 때문이다. 물론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윌슨이라는 영어 이름은 미국 식물학자인 어네스트 헨리 윌슨 때문에 생겼다. 그는 야쿠시마 식생을 조사하러 갔다가 갑자기 쏟아진 폭우를 피하려다 동굴에 들어갔는데 그곳이 바로 윌슨 그루터기였다.
윌슨 그루터기에서 조금 더 걸으면 마침내 목적지인 조몬스기가 나온다. 추정 수령이 7200년이라고 하지만 최근 과학적 방법을 통해 재어본 바로는 2170년 정도라고 한다. 어느 것이 맞든 인간의 기준으로는 감히 엄두도 내어보기 힘든 시간이다.
야쿠시마 삼나무 중 수령 1000년 이상인 나무를 야쿠스기라고 부른다. 이곳에서는 1000년 이하는 그냥 이름이 없는 ‘어린 나무’다. 삼나무 수명은 대개 500년인데, 야쿠시마에 유독 수령 1000년을 넘는 야쿠스기가 많은 것은 섬의 지질 때문이다. 영양이 빈약한 토양이어서 나무가 자라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 나이테가 치밀하고 단단하다. 그래서 삼나무는 벌레와 부패에 강한 특성을 갖게 됐다.
성인 10명 이상이 팔을 잡아야 둘레를 잴 수 있다는 조몬스기는 많은 일본의 삼나무 중에서 가장 몸통이 굵다. 굵기에 비해 키가 작은데, 태풍이 상습적으로 통과하는 야쿠시마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키가 큰 게 불리했기 때문이다. 야쿠시마의 많은 삼나무가 에도시대에 벌채됐지만 조몬스기는 표면이 울퉁불퉁해 이용가치가 낮은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지금은 뿌리 손상을 막기 위해 나무 전망대가 만들어져 등산객은 지나치게 가까이 접근할 수 없다.
2005년 폭설 때 조몬스기의 큰 가지 하나가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부러졌다. 가지의 나이테를 측정했더니 1000년이 넘은 것으로 나왔다. 섬사람들은 부러진 가지를 버리지 않고 ‘생명의 가지’라는 이름을 붙여 야쿠스기 자연관에 ‘모셨다’.
야쿠시마에 가본 적이 없는 여러 사람이 질문을 던지곤 한다. 조몬스기가 정말 그렇게 감동적이냐고. 솔직히 뭐라고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보는 사람에게 달렸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다른 등산로인 시라타니운스이 계곡은 ‘모노노케 히메’의 배경지다. 이름 그대로 계곡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이 흰색 포말로 부서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름의 뜻은 ‘하얀 골짜기와 구름, 물이 어우러진 계곡’이라는 뜻이다. 푸른 나무가 우거진 숲속의 계곡에 ‘푸르다’가 아니라 ‘하얗다’는 이름을 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곳에 가면 이유를 알게 된다. 계곡 사이로 흐르는 냇물이 흰색 포말로 부서지는 모습은 왜 ‘하얗다’는 이름을 붙였는지 알게 해준다. 계곡을 오르다보면 미야자키 감독이 왜 이곳에 반했는지 이유도 알게 된다.
트레킹 코스는 60분을 걸어야 하는 야요이스기 코스, 3시간이 걸리는 부교스기 코스, 4시간이 소요되는 다이코이와 왕복코스로 나뉜다. 등산로 입구에서부터 시라타니강의 맑은 물, 겹겹이 쌓인 바위, 깎아지른 계곡을 볼 수 있다.
계곡 깊숙이 들어가면 ‘모노노케 히메’에 등장하는 나무의 정령 고다마와 사슴 신 시시가미가 어디선가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특히 ‘모노노케 히메’의 주무대인 ‘고게무스모리(이끼 무성한 숲)’에 도착하면 너 나 할 것 없이 연신 사진을 찍게 된다. 영화와 흡사한 광경이 눈앞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고게무스모리를 지나다 보면 야쿠시마의 설화 ‘야마히메’가 떠오른다. 야마히메는 소녀의 모습을 한 숲의 정령이다. 야쿠시마 노인들은 옛날부터 아이들에게 “산속 깊은 곳에는 야마히메가 산단다. 머리는 방금 씻은 듯 윤기가 흐르고 뒤로 길게 흐르지. 음력 설날과 산신제 날에는 야마히메가 물을 길으러 내려온단다. 혹시 야마히메를 만나면 먼저 웃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피를 다 빨아 먹혀 죽을지도 몰라”라고 이야기했다. 수많은 삼나무를 보면서 불현듯 이런 생각을 했다. ‘원령공주는 야쿠시마의 야마히메가 아닐까.’
쓰지 고개에서 마지막 구간인 다이코이와 바위까지는 급한 경사로이지만 올라가보는 게 좋다. 영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사방이 탁 트인 멋진 전망을 실제로 볼 수 있다. 시라타니운스이 계곡은 특히 초봄 강가에 핀 영산홍과 산철쭉이 그야말로 장관이다.
다이코이와 바위는 ‘큰 북’이라는 뜻인데, 바위를 두드리면 북소리가 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미야자키 감독이 영화에서 늑대엄마가 휴식하던 큰 바위로 묘사한 곳이 바로 여기였다. 영화를 보고 여기 오르는 사람도 많아졌고, 이곳에 오른 뒤 영화를 봤다는 사람도 많아졌다.
야쿠시마의 농부시인이며 구도자로 살았던 야마오 산세이는 ‘신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야쿠시마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나는 조몬스기를 볼 때마다, 야마히메 이야기를 생각할 때마다 야마오가 생각한 신은 무엇인지 묻고 또 묻는다.
조현제 이와사키호텔 서울사무소장
2024-03-2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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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서핑 즐기는 사이 머리 위로 우주로켓 “슝~” [세상에이런여행] ⑩
일본 규슈는 한국에서 가까워 한국인이 많이 방문하는 곳이다. 한국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규슈의 가고시마현에는 관광자원이 많다. 전국 2위 원천수를 자랑하는 풍부한 온천과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인 야쿠시마 섬 그리고 고구마소주와 흑돼지 샤부샤부는 일본에서 매우 유명하다. 조현제 이와사키호텔 서울사무소장이 가고시마현을 대표하는 3대 섬인 다네가시마, 야쿠시마, 사쿠라지마를 3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다네가시마는 가고시마에서 고속선을 타고 90분간 달려가면 도착하는 길쭉한 섬이다. 바로 옆에는 야쿠시마 섬이 마치 형제처럼 붙어 있다. 섬의 연 평균기온은 19도, 겨울 평균기온은 12도 내외여서 연중 온난하다. 사계절 언제 방문해도 좋은 곳이지만 특히 겨울에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해안을 거닐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곳이다.
다네가시마는 인근에 구로시오 해류가 흐르는 바닷길 요충지여서 예로부터 많은 문물이 유입되는 통로였다. 이 섬을 통해 도입된 고구마는 일본 전국으로 퍼져 구황작물로서 기근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줬다. 니시노오모테 시에는 일본 최초의 고구마 재배지를 기념하는 비석인 ‘일본감저초재배 초지지비’가 있어 그 역사를 설명한다. 고구마는 일본어로 사츠마이모다. ‘사츠마’는 가고시마의 옛 지명이고 ‘이모’는 감자, 고구마, 토란, 마 등 뿌리작물의 총칭이다. 가고시마현 소속인 다네가시마에서 고구마 재배가 시작된 이후 전국으로 보급됐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이곳에서 고구마를 먹는 방법은 한국과 비슷해 여기서 고구마를 보면 무척 반갑다. 특히 고구마를 발효시켜 만든 고구마소주는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겨울에는 따뜻한 물에 희석해서 ‘오유와리’라는 방식으로 즐긴다. 아무리 추운 날이라도 오유와리 한 잔이면 몸이 따뜻해진다. 고구마 도래지답게 다네가시마의 다양한 농작물 중에서 자색고구마가 유명하다.
고구마 못지않게 역사적으로 일본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은 포르투갈에서 온 조총이다. 1543년 중국으로 향하던 배가 표류하다 다네가시마의 남부인 가도쿠라미사키로 떠내려갔다. 당시 다네가시마의 영주가 배에 탔던 포르투갈인에게서 조총 두 자루를 구입했다. 영주는 대장장이 우두머리인 야이타킨베에게 똑같은 조총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포르투갈 조총이 전해진 이후 일본에서 전쟁의 양상은 크게 바뀌었다. 조총은 일본어로 ‘데포(鉄砲)’라고 했는데, 오늘날에는 전장에 철포를 가져가지 않는다는 의미의 ‘무데포(無鉄砲)’라는 단어가 주변을 살피지 않는 막무가내인 사람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된다.
가도쿠라미사키에는 조총 전래의 역사를 전해주는 조총전래기공비가 세워졌고 전망대와 기념조형물도 있다. 규모는 작지만 주변 경치와 잘 어울리는 미사키신사도 있다. 이곳은 섬의 최남단이어서 바로 옆의 야쿠시마도 볼 수 있다.
가고시마에서 출발한 고속선이 도착하는 니시노오모테의 항구에 내리면 가장 먼저 가봐야 할 곳은 외국의 배를 형상화한 외관이 눈길을 끄는 ‘데포칸(철포관)’이다. 이곳은 총뿐만 아니라 다네가시마의 역사, 문화, 자연 등을 널리 소개하는 종합박물관이다. 다네가시마에 전해진 포르투갈 총과 일본산 1호 총, 국내외 구식 총 등 100여 정이 전시돼 화승총의 역사와 세계의 총을 둘러볼 수 있다.
니시노오모테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면 섬의 동남쪽 끝에 실용위성 발사기지 ‘다네가시마 우주센터’가 있다. 일본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가 1968년 NAL-16H 1호기를 발사한 것을 시작으로 여러 번 위성발사를 진행했고, 지난달 대형 로켓인 H3 2호기를 발사한 곳도 바로 여기였다.
다네가시마 우주센터 총면적은 약 970만㎢에 이른다. 섬에는 높은 산이 없는 데다 열도의 남단이라는 입지적 조건이 좋아 1969년 JAXA가 우주센터를 설립했다. 우주센터는 야트막한 언덕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발사대는 산호초로 둘러싸인 곶의 끝부분에 설치됐다. 부지 일부는 초록색 잔디로 덮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주센터로 불리기도 한다.
우주센터 현장 견학도 가능하다. 미리 신청하면 센터 내 우주과학기술관에서 가이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로켓은 물론 인공위성이나 국제우주스테이션 계획, 지구 관측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실물 크기 모델과 게임 등을 이용한 안내를 받으면서 견학할 수 있다.
다네가시마는 최근에는 ‘서핑의 성지’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이전부터 일본 서퍼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요즘에는 아예 서핑을 즐기려고 섬으로 이주하는 사람도 늘었다. 우리나라에서 서핑이 시작된 것은 1990년대 후반이라고 하는데, 다네가시마의 서핑 역사는 훨씬 오래됐다.
다네가시마는 남북으로 길쭉한 형태의 섬이어서 곳곳에 서핑 포인트가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태평양의 거친 파도가 밀려오는 동쪽의 가네하마 해변이 가장 인기가 좋은 곳이다. 풍향과 너울에 맞춰 포인트를 고르기 쉽고, 연중 파도타기가 가능해서 1년 내내 서퍼로 붐빈다. 온난한 기후와 손때가 묻지 않은 대자연이 인기의 비결이라고 한다. 아직 한국 서퍼는 거의 보이지 않지만 점차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니시노오모테는 2020년 전일본요가연맹으로부터 ‘요가의 성지’로 선정됐다. 여행객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요가교실도 여러 군데 생겼다. 여행객은 비행기나 배로 이동하면서 몸이 피로해지기 마련인데, 요가교실은 여행자의 척추를 곧게 잘 펴서 혈액 순환이 나빠지지 않도록 도와준다고 한다. 니시노오모테 북쪽 끝에 있는 우라다해수욕장은 포구 안쪽에 형성된 사구의 모래사장이 눈부시게 하얗고 바닷물 투명도가 높아 ‘일본 인기 해수욕장 88곳’에도 선정됐다. 이곳에서는 스쿠버다이빙이나 스노클링, 낚시 등의 활동을 즐길 수 있다.
다네가시마의 중간 지역에 있는 치쿠라노 이와야도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태평양의 거친 파도가 만들어낸 해식동굴인데, 동굴 안에 1000명이 들어가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다. 간조 때에는 동굴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다.
조현제 이와사키호텔 서울사무소장
2024-03-19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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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 당한 베를린 교회, 복원하지도 허물지도 말라 [세상에이런여행] ⑨ 업사이클링
독일의 수도 베를린만큼 사연 많은 도시가 또 있을까.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죗값으로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돼야만 했다. 당초 기준대로라면 베를린은 사회주의 진영인 동독의 영토에 속했지만, 역사적 상징성과 문화적 중요도 때문에 자유주의 진영은 쉽게 베를린을 내어 줄 수 없었다. 결국 도시를 반으로 나누는 장벽이 세워져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대치하며 냉전 시대를 상징하는 도시가 됐다. 훗날 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하면서 베를린 장벽도 함께 허물어졌는데, 그때부터 베를린은 극적인 반전을 이루며 자유와 화합을 상징하는 도시가 되었다.
지금에 이르러선 그마저도 옛이야기가 돼버렸고, 이제 베를린은 힙스터의 성지라 불리며 유럽에서 가장 핫한 도시로 손꼽힌다. 세계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현대 예술의 중심지가 된 건 물론이고, 최신 유행을 이끄는 클럽과 카페, 레스토랑이 즐비한 도시가 된 것이다. 그러나 베를린이 제아무리 예술과 트렌드라는 새 옷을 입었다 해도, 여행자의 눈에 가장 빛났던 지점은 아픈 상처를 기억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는 당국과 시민들의 모습이었다. 철거하지 않고 일부러 남겨놓은 베를린 장벽의 잔해가 곳곳에 전시돼 있고, 유대인 박물관을 비롯해 홀로코스트 기념비 등 자신들이 범한 잘못을 시인하고 기억하며 추모하느라 바쁜 모습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건 빌헬름 카이저 교회다.
베를린 최대의 번화가에 자리 잡은 이 교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폭격으로 첨탑이 무너져 내리고 교회당 곳곳이 파괴됐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어도 베를린은 이 교회를 복원하지 않았고, 마저 허물지도 않았다. 전쟁의 참상을 잊지 않기 위해, 다시는 전쟁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기 위해, 폭격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기로 한 것이었다. 곳곳이 무너져 내리고 불에 그을린 자국이 선명한 빌헬름 카이저 교회는 아이러니하게도 평화의 상징이라는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폭격 당해 쓸모를 다한 교회를 가만히 놔두어서 세상의 어떤 건축물도 흉내 내지 못할 의미를 부여한 지혜가 소름 돋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일본 도쿄에도 극적인 반전을 이루어낸 건물이 있다. 날로 인기를 더해가는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오모테산도 힐스’라는 쇼핑몰이다. 과거 오모테산도 지역은 황폐화돼가던 곳이었는데, 지역 한가운데엔 아주 오래된 아파트가 있었다. 재개발을 하는 데까지는 의견을 모았으나, 개발 방식을 놓고 주민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오랫동안 난항을 겪고 있었다. 그때 안도 다다오가 극단적인 리모델링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난국을 타개했다. 아파트를 허물고 쇼핑몰을 ‘재건축’ 하되, 아파트 한 동은 허물지 않고 새로 지은 건물과 연결해서 ‘리모델링’ 하자는 것이었다. 현대적인 쇼핑몰 한쪽 끝에 당장 무너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오래된 아파트가 붙어있는 다소 파격적인 설계안이었다. 주민들은 반신반의했으나, 안도 다다오의 집요한 설득 끝에 결국 사업은 진행되었다. 그래서 번듯한 쇼핑몰에 오래된 아파트의 추억과 흔적이 겹쳐 있는 이종교배 건축물이 탄생했다.
오모테산도 힐스 쇼핑몰이 개장하자 낯설고 독특한 아이디어가 구현된 건물을 보려는 사람들이 몰려들며 세계적인 유명세를 떨치게 됐다. 사람들이 모여들자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들이 주변에 플래그십 매장을 열기에 이르렀고, 폐허 같았던 오모테산도 지역은 이제 도쿄의 쇼핑 랜드마크가 됐다. 모두가 허물어야 마땅하다고 여긴 건물을 이야기를 품은 쇼핑몰로 만들어낸 천재 건축가의 기지는 다시 생각해봐도 놀랍기만 하다.
빌헬름 카이저 교회와 오모테산도 힐스가 가진 공통점은 각기 다른 이유로 허물어질 위기에 처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두 장소가 지금 누리는 위상은 그 어떤 건물도 따라가지 못할 만치 높다. 그것은 리모델링과는 다른 개념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버려진 것을 남겨진 것으로 전환하며 가치를 발굴한, 이른바 업사이클링(Upcycling)이었다. 재활용을 뜻하는 리사이클링(Recycling)에 업그레이드(Upgrade)가 합쳐진 업사이클링은 버려진 물건을 단순히 재활용 하거나 용도를 변경해서 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더해 이전보다 더욱 값진 것으로 만드는 일을 아우른다. 업사이클링의 가장 쉬운 예이자 가장 성공한 예를 들자면, 젊은이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는 프라이탁 가방을 빼 놓을 수 없다.
프라이탁은 시한이 다 되어 버려진 재료들을 수거해서 가방을 만드는 회사다. 트럭 화물칸을 덮는 방수천, 자전거의 고무 튜브, 안전벨트 등이 재료가 된다. 버려진 재료들을 수거해 일일이 세척한 후 수작업으로 만드는 프라이탁 가방은 세상에 똑같은 디자인이 하나도 없기로 유명하다. 트럭 방수천의 문양이 제각각이고 재단되는 면 또한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방 하나마다 개별 공정을 거치는 덕분에 가격은 제법 고가에 속하는데도 세계적으로 불티나게 팔린다. 스위스 취리히에 본사를 둔 프라이탁은 사옥마저 중고 컨테이너를 업사이클링해서 지었다. 덕분에 취리히는 도시를 대표하는 명소 하나를 더 가지게 됐다.
취리히를 다녀가는 수많은 여행자의 블로그나 SNS를 보면 한낱 가방 만드는 회사에 불과한 프라이탁 본사를 다녀간 것을 자랑하고 인증하는 데 여념이 없다. 재활용 재료로 만들었음에도 비싼 가방을 기꺼이 사고 세월의 때가 덕지덕지 붙은 컨테이너 건물에 이토록 열광하는 것은 단지 취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업사이클링의 철학을 구매하고 방문한 것이다. 버려진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업사이클링은 환경 문제와도 맞닿아 있다. 철거되지 않은 베를린의 교회와 도쿄의 아파트 한 동은 그만큼 건축폐기물을 줄인 것이고, 해마다 버려지는 수백 톤의 천막은 가방이 되었으니 말이다.
업사이클링은 환경오염을 줄이는 아주 구체적이며 실천적인 방법이다. 유럽에는 업사이클링 제품만을 취급하는 편집숍이 더러 있고, 버려진 컨테이너로 만들었으면서도 힙한 상업 시설이 제법 눈에 띄는 것을 보면 트렌드인 모양이다. 반가운 흐름이다. 스스로를 환경주의자라고 자신 있게 외칠만한 사람은 못되지만, 업사이클링이 환경마저 보호한다고 하니,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2024-03-1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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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곧장 힘 발휘하는 최고 여행은 성지 순례 [세상에이런여행] ⑧
‘성지’란 종교의 역사 안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유적을 말한다. 사람들은 성지를 순례하며 그들 각자의 종교가 가지는 의미를 돌이켜보고 스스로 신앙을 다지는 시간을 가진다. 우리에게 익숙한 ‘산티아고 순례길’은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였던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참배하러 가는 기독교의 대표적인 순례지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태어난 곳인 인도의 ‘룸비니’, 성불한 장소인 ‘부다가야’ 등이 대표적인 성지이고, 이슬람교에선 창시자인 무함마드가 태어난 곳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최고의 성지로 여긴다(이슬람교에서는 이교도의 성지 출입을 엄격히 제한한다. 메카로부터 사방 100km가 성역으로 지정되어 근처에는 얼씬도 할 수 없다. 가볼 수 없어서 아주 슬프다).
나는 신앙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이지만 종교 자체에는 관심이 많아 여러 성지를 여행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캠에 의하면 우리가 ‘신’이라고 믿는 것은 실은 ‘사회’다. 종교는 그 사회가 도달해야 할 궁극적인 이로움을 좇는다. 그래서 신의 이름을 빌려 사회 구성원의 공동체 윤리를 계율로써 다스린다. 저마다 섬기는 종교에서 성지를 만들고 순례 여행을 권하는 것은 그만큼 여행이 사회를 이롭게 하는 지점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사연이 복잡한 성지도 있다.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의 한 성전을 두고 유대교에서는 솔로몬 왕이 세운 최초의 성전터로 삼아 ‘템플 마운트’라 부르고, 이슬람교에서는 무함마드가 유일신 알라에게 승천한 곳으로 삼아 ‘하람 알 샤리프’라고 부른다. 거룩한 성지에서 두 종교인들이 평화롭게 지내면 참 좋으련만, 종종 방화를 비롯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며 서로를 향해 칼날을 세우며 첨예하게 대립한다. 단순히 지구 위의 어느 한 장소를 차지하는 일에 지나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종교 대립을 넘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대립해온 역사는 국가 분쟁의 뇌관이자,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양 세계와 이슬람 세계 사이의 갈등과 대치가 얽혀 언제라도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과 같은 대립이 지속되는 세계 분쟁사의 축약판이다. 이처럼 종교란 결국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고 세상 안에서 발생하는 일이기에 공부거리를 찾아 세상 밖으로 나선 여행자에게 성지는 종교를 가리지 말고 가 보아야 할 여행지다.
성지는 넓은 의미로 거룩하고 성스러운 세상의 모든 지점을 뜻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가 품은 성지가 있다. 죽기 전에 가보기를 꿈꾸는 곳, 이미 가보았어도 다시 가서 보고 느끼고 배우고 싶은 곳. 종교 이외에도 우리네 삶과 가치관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 유적이나 위인들, 선지자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까. 이를테면 건축학도에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가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비롯한 가우디 건축을 친견하는 것이 성지 순례가 될 것이고, 클래식 음악가에게는 쇼팽의 심장이 지하 묘지에 안치되어 있는 폴란드 바르샤바 성 십자가 성당이 성지일 것이며, 문학 청년들에게는 헤밍웨이가 머물며 소설을 썼던 스위스 레만호수가 성지가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성지를 순례하는 여행자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얻고 그것은 곧 감화로 이어진다.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와 여행에서 얻은 긍정 에너지를 조금씩 삶에 녹여가며 지난한 날들을 견디며 크고 작은 것들을 성취해 낼 것이다. 그 성취가 발판이 되어 또 다른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지고, 다시 여행은 삶을 조금 더 윤택하게 만드는 에너지를 제공할 것이다. 여행은 금세 끝나지만 삶은 오래 지속된다. 나는 여행이야말로 소시민이 삶을 감당해 내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여행 중에서 성지 순례만큼 우리 삶에 곧장 힘을 발휘하는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
종교가 없는 나에게 성지는 프랑스 파리다. 10대 후반에 영화에 이끌렸던 나는 청춘을 영화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를 만나면서 세상을 향해 눈뜨게 됐고, 영화로 알게 된 세계의 면면을 몸으로 만나기 위해 여행을 다녔다. 좋아하는 영화는 수십 번 보게 마련인데, 그중 하나가 프랑스 영화 ‘퐁뇌프의 연인들’이었다. 파리의 세느강에 놓인 퐁뇌프 다리가 배경이었고 내가 영화를 만드는 일원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영화였다.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는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의 어느 카페에서 ‘기차의 도착’이란 짧은 필름을 상연한 데서 기원한다. 뿐만 아니라 파리엔 세계 최고의 영화 관련 시설인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있다. 이곳엔 예술영화 상영관은 물론이고 영화 박물관과 도서관을 비롯해 영화와 관련된 각종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다. 그러니 파리는 나에게 성지가 되기에 충분한 곳이다.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2024-03-05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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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에겐 각자의 소울 푸드가 있다 [세상에이런여행] ⑦
러시아의 항구 도시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을 다녀왔다.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유럽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도시답게 일본으로 가는 정도의 비행시간으로 아시아를 완전히 벗어난 도시를 만날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음식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곳이었다. 서양식 중에서도 너무 뻔하지 않은 동유럽 전통음식이 다양하고 킹크랩을 비롯한 해산물도 풍부하고 저렴했으며, 유제품이나 빵 또한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웠다. 한국, 중국, 일본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즐비했고 심지어는 북한 식당까지 있었으니 식도락가들에겐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그러나 나는 별미에 연연하지 않고 끼니를 대충 때웠다. 몇 번은 숙소에 딸린 주방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고, 대부분은 마트에서 산 샐러드나 과일로 끼니를 때웠다. 아니면 아예 굶거나.
나는 음식 먹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여행이 주는 큰 즐거움 하나를 놓치고 있는 셈이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던 청년시절에 여행을 다니자니 이것저것 욕망을 다 채울 수가 없어 가장 먼저 포기해야 했던 것이 식도락이었는데, 그 시절 몸에 밴 습관이 여태 이어지는 듯하다. 물론 나도 처음에는 이국 음식을 접하는 경험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뉴욕으로 출장이라도 가게 되면 스테이크를 비롯한 양식을 먹을 생각에 설레곤 했는데, 결정권을 가진 어른들은 매 끼니 맨해튼 한가운데에 자리한 유명 한국 식당으로 향했다. 여기까지 와서 도대체 왜! 멕시칸 셰프가 끓여 낸 설렁탕에 감탄을 쏟아내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요즘은 내가 나서서 동료나 후배들을 설득해 한국 식당으로 가곤 한다. 어느덧 나도 그저 익숙한 음식을 배불리 먹는 게 좋은 ‘꼰대’가 된 것이다. 몇 번의 혹독했던 경험을 탓하고 싶다.
커피의 무역 루트를 추적하는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 위해 서아프리카로 출장을 간 일이 있었다. 워낙 풍토병이 만연한 곳이라 황열병, 뎅기열, 장티푸스를 비롯해 예방접종을 필수적으로 해야 했고, 현지인 요리사가 제작진과 동행하며 식사를 제공했다. 음료나 초콜릿 같은 간식까지도 요리사가 주는 것만 먹을 수 있고 현지에서 어떠한 음식을 사 먹는 것도 금지됐다. 요리사가 동행했다고 해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 달 내내 똑같은 재료로 만든 스파게티와 볶음밥을 끼니마다 번갈아 가며 먹어야 했다. 병에 걸리지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끼니였다. 다채로운 식자재를 구할 수 없는 오지였고 아프리카인 요리사가 한식 레시피를 가졌을 리도 없었다. 40~50도에 이르는 더위보다 스파게티가 더 두려웠다. 그럴 땐 어떤 산해진미보다 된장찌개나 국밥 한 그릇이 간절해진다.
티베트를 여행할 때엔 고산병을 앓은 적이 있었는데 코르크 마개가 식도를 막는 듯한 통증 때문에 어떤 음식도 쉬이 넘어가지 않았다. 따로 약이 없는 병이라 병원에 가도 고작 포도당 링거를 맞는 것이 다였다. 그렇게 이틀을 앓고 나니 배낭 구석에 들어있던 고추장과 라면이 생각났다. 여행 중에 만났던 어떤 한국인이 먼저 귀국하며 남겨 준 것이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던 것이 몸이 축나자 떠올랐던 것이다. 밥에 고추장을 비비고 라면을 하나 먹었다고 해서 고산병이 낫진 않았지만, 컨디션이 한결 좋아진 건 분명했다.
이국 음식에 흥미를 가지는 것도 본능이지만 반대로 몸과 마음이 힘들거나 아플 때 가장 익숙한 음식을 찾게 되는 것도 본능이다. 이른바 소울 푸드. 어떤 문화에서는 터부시하고 먹지 않는 음식이 다른 문화에서는 아주 귀한 음식이 되기도 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에겐 각자의 소울 푸드가 있다. 어느 함경도식 냉면집에선 함경도가 고향인 사람들이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정기적으로 모인다고 한다. 그분들에겐 냉면이 소울 푸드인 것이다. 부산이 고향인 내 소울 푸드 목록엔 돼지국밥이 있다. 부산에선 정말 흔한 음식인데, 경상도를 벗어나면 제대로 맛을 내는 곳을 만나기 힘들다. 부산에 가게 되면 꼭 돼지국밥을 먹는다. 부산에게 건네는 일종의 인사 같은 나만의 작은 의식이다.
나는 베트남 쌀국수도 즐긴다. 베트남을 여행하며 좌판 식당에 쪼그려 앉아 우리 돈 오백 원 정도 하는 쌀국수를 함께 먹던 현지 친구들이 그립기 때문이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지만 쌀국수는 응당 이렇게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듯, 손으로 라임을 꾹 짜서 내 몫의 쌀국수 위에 뿌려 주던 친구들을 어찌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칭자오러우쓰라는 고추잡채도 즐긴다. 중국을 여행하며 매일 같이 먹던 음식인데, 채 썬 고추와 돼지고기를 볶은 간단한 음식이다. 식당마다 맛의 편차가 적어 실패할 확률이 낮았고 무엇보다 저렴했다. 매일 점심을 진저로스 한 접시를 시켜 절반만 먹고 남은 절반은 싸 달라고 해서 배낭에 넣고 다녔다. 그러면 저녁엔 공기밥만 하나 사서 숙소로 돌아와 남은 칭자오러우쓰를 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청승이었나 싶지만 그때는 돈을 아껴 여행을 길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가난했던 여행을 추억하며 나는 여전히 칭자오러우쓰와 쌀국수를 찾는다. 그래서 두 음식도 당당히 내 소울 푸드의 목록에 들어간다.
진미라 할 순 없어도 음식에 얽힌 추억이 내 안에 생동하고 있으니 자격이 충분하다. 낯선 음식보다 익숙한 음식에 이끌리며, 오래된 여행자는 그렇게 나이 들어간다.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2024-02-27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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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란 경계 넘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일 [세상에이런여행] ⑥
한 번 여행했던 곳은 좀처럼 다시 찾지 않는 편이다.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여행해도 좋은 곳이 세상에는 많다. 나도 잘 안다. 하지만 나는 대체로 새로운 장소에 마음을 뺏기고 만다. 여행했던 곳을 다시 여행하는 낭만도 누리고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도 골고루 여행하면 참 좋으련만,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고 세상엔 가보지 못한 곳이 너무너무 많다.
그래서 그리운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항상 새로운 여행지를 선택하게 된다. 내가 그리워하는 곳을 여행으로 다시 만나진 못해도, 운 좋게 출장이라도 가게 되기를 항상 바란다. 내가 거닐던 뒷골목을 다시 걷는 일, 허름한 어떤 식당에서 그때 먹었던 음식의 맛을 기억하며 다시 먹는 일, 그대로인 듯한 도시의 풍경을 세심하게 들추어가며 작은 변화를 짚어내는 것 또한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것만큼이나 근사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편력으로 점철된 내 여행에서 이례적으로 다시 찾아 여행한 곳이 있다. 튀르키예의 수도 이스탄불이다. 이스탄불은 로마 제국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로 천 년 가까이 위세를 누렸고 후에는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중심적 도시로서 여전한 위세를 누렸던 도시다. 그래서 지금 이스탄불엔 그리스도교를 근간으로 하는 로마 제국의 유적과 이슬람교를 근간으로 하는 오스만 제국의 유적이 한데 뒤섞여 남아 있다. 두 제국은 천 년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흥망성쇠를 겪었고 풍토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그래서 이스탄불 여행은 도시에 새겨진 중첩된 시간을 여행하는 일이다. 중세 로마와 근대의 오스만, 그리고 현대 튀르키예까지.
이스탄불 여행의 백미는 아야 소피아일 것이다. 비잔틴 건축의 대표적 걸작으로 꼽히는 아야 소피아는 로마 제국 시절 그리스도교의 성당으로 지어졌으나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한 뒤로는 증축을 거쳐 이슬람교의 모스크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박물관이 되었다. 비잔틴 건축의 특징이란 건물 외부보단 내부의 장식에 치중하는 것이어서 성당의 내부는 화려한 모자이크 성화로 가득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슬람 풍속에 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지도자들은 이교도의 아름다운 성소를 파괴하는 대신 내부에 회칠을 하여 성화를 가리고 외부에는 이슬람 건축의 특징인 첨탑을 추가로 세워 모스크로 사용하게 했다. 최고의 모스크를 의미하는 네 개의 첨탑을 세웠음은 물론이었다. 종교를 초월해 관용의 미학을 품은 아야 소피아는 현대 튀르키예의 아버지라 불리는 아타튀르크에 의해 다시금 박물관으로 변용되었다. 지금은 내부의 회칠을 모두 벗겨내어 성화를 감상할 수 있다. 종교의 경계를 지우고 두 제국의 시간이 겹쳐 있는 아야 소피아는 여행자에게 더없이 감사한 유산이다.
이스탄불에 겹쳐 있는 것은 시간만이 아니다. 이스탄불은 유럽 대륙과 아시아 대륙에 걸쳐 있다. 튀르키예는 정치적으로는 유럽에 속해 있지만 지리적으로는 영토 대부분이 아시아에 속한다.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것이 보스포루스 해협인데 이스탄불은 이 해협의 양쪽을 함께 품고 있다. 즉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는 대륙의 경계도시인 거다. 여기서 말하는 경계란 두 세계의 중첩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이스탄불을 다시 찾아 여행하게 된 까닭이다.
나는 20대 시절 여행에 매료되어 빈번하게 여행을 다녔다. 그때야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았으니 주로 가까운 동아시아 일대를 다녔는데, 매번 여행을 갈 때마다 항공사에 갖다 바치는 돈이 아까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묘안이라고 떠올린 게 찔끔찔끔 여행을 다니지 않고 한 번 떠나서 아시아의 모든 곳을 여행하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는 2년이 걸린 여행이었는데, 아시아 대륙의 대장정 출발점이 바로 이스탄불이었다. 이스탄불에서 시작해 아라비아 반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를 두루두루 섭렵하며 수십 개의 국경을 넘어 집으로 돌아왔다.
국경이라는 경계를 넘는 일은 때때로 고단했지만 그것을 넘고 보면 과연 그 실체가 무엇인지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국경이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실재하지도 않는 가상의 경계니까. 나에게 여행이란 결국 경계를 몸으로 넘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었다. 그렇게 아시아 여행을 마친 후, 요즘의 나는 유럽을 여행 중이다. 한 번에 긴 시간을 내지는 못하고 일 년에 두어 번씩 짧게 다녀가기를 수년째 하고 있다. 이스탄불은 아시아 여행 때 이미 다녀갔으니 유럽 여행을 한다고 해서 꼭 다시 다녀가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대륙이 중첩되어 있고 제국의 영광이 중첩되어 있는 이스탄불을 다시 여행하면 내 여행의 시간도 중첩될 것이었다. 그러다보면 지난 아시아 여행과 지금 유럽 여행의 경계도 지워져서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저 여행하고 있는 사람이 된다.
유럽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영국 런던이었다. 아시아 여행을 마치고 현업에 복귀한 후 어느 자동차 회사의 광고를 촬영하기 위해 출장을 간 것이었다. 새로운 대륙의 대장정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촬영 장소를 찾기 위해 런던의 명소를 돌아다니며 답사를 했고, 일을 마친 후 저녁이면 미술관을 찾아 머리를 식혀가며 다음 날의 일을 구상했다. 해외 출장에서는 보통 예비일을 둔다. 날씨를 비롯해 예상하지 못한 현지의 여러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여분의 일정이다. 촬영을 무사히 잘 마치면 예비일은 각자의 몫이 된다. 누군가는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쇼핑을 다니기도 하지만 나에게 예비일은 온전히 여행할 수 있는 시간이다. 나에게 출장은 여행과 매우 비슷하다. 촬영장으로 출근하는 길에 창밖으로 흐르는 풍경이 한국이 아니라는 것 만해도 이미 여행 아니겠는가.
나에게 여행이란 세상의 모든 경계를 넘나들며 지우는 일이다. 몸으로 국경을 넘는 것은 물론이고 대륙의 경계까지 지우는 것, 도시에 중첩되어 있는 시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 일과 여행의 경계를 지우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론 삶과 여행 사이를 가르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경계를 지워내는 것에 이르고 싶다.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2024-02-20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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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동물에게도 여행할 권리가 있다 [세상에이런여행] ⑤
나는 오랫동안 출장을 다녔다. 출장과 출장 사이의 틈새에는 여행을 다녔으니, 내 일이란 옷 가방을 쌌다 풀기를 일 년 내내 반복하는 것이다. 함께 사는 친구도 같은 직업을 가져 서로 경쟁하듯이 집을 비운다. 어쩌다 운때가 잘 맞아 집에 있는 시기가 같을 때면, 유난히 살갑다.
언젠가 지인이 기르는 고양이가 새끼를 여러 마리 낳았으니, 한 마리 입양하기를 권한 적이 있었다. 우리 집은 사람이 없을 적이 많으니 반려동물을 기를 처지가 아니란 것을 잘 알았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꼼지락거리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새끼 고양이를 눈으로 보고 있자니, 마다할 재간이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생명체는 바로 나라는 듯이 어미 품에 웅크려 젖을 빠는 새끼 고양이 앞에서 내 이성은 마비되었다. 너무 어린 녀석이라 어미젖을 떼면 데려가기로 하고 돌아왔다. 오는 길에 내 이름을 따서 ‘세희 타이거’, 줄여서 ‘세타’라는 이름을 지었고, 집에 와서는 맹렬하게 검색을 시작했다. 명분을 찾아야만 했다. 비어 있는 날이 많은 집에서 반려 동물을 기르는 노하우라든지, 죄책감을 덜어줄 구실이라든지 뭐든 찾아야 했다. 그러나 세상에 그런 방도는 없었다. 고양이를 입양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SNS에 올렸더니 우리 집 사정을 잘 아는 친구 몇이 격한 어조로 만류하는 댓글을 단 게 전부였다. 부끄러웠다. 곧장 전화해 입양을 철회했다.
반려동물을 기른다는 것은 큰 책임이 따르는 일이었다. 검색의 결과가 확인시켜주었다. 집 주인이 출근하고 빈집에 남게 된 반려 동물은 사람처럼 우울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얼마간 기르다 싫증이 나거나, 반려 동물을 기를 수 없는 집으로 이사 가게 된 주인들은 남몰래 개와 고양이를 버렸다. 버려진 동물들의 운명은 길가를 배회하다 차에 치여 죽거나 병들어 죽는 것이었고 운 좋게 구조되어 유기동물 보호소로 넘겨진다 해도 수용능력이 넘친 탓에 안락사를 맞이해야 했다. 우리 사회의 끔찍한 민낯이었다. 지금이 ‘반려동물의 시대’라고 하지만 그에 수반되어야 할 인식은 낮은 곳에 머물러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반려의 뜻을 찾아보니 ‘짝이 되는 동무’라고 나온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그들의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반려동물을 어렵지 않게 만난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어느 지하도 앞에 묶여 있는 견공을 보았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의연하고 외로운 기색이란 조금도 없었다. 하도 기특해 보여서 잠시 머물러 있었더니 몇 분 지나지 않아 저녁거리가 들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종이봉투를 안은 주인이 나타났다. 두어 번 꼬리를 흔들었나 싶은 사이 묶은 줄이 풀리고 그들은 총총거리며 길 끝으로 멀어져 갔다. 주인의 산책과 반려견의 산책이, 그리고 장보기가 한데 어우러진 일상의 풍경이었다.
한번은 스페인의 어느 캠핑장에 머무를 때였다. 나란히 늘어선 캠퍼밴 사이에 ‘세상에서 가장 팔자 좋은 견공’이 드러누워 있었다. 너무나도 유혹적이어서 다가가 사진을 찍고 싶었다. 사방이 트인 캠핑장이라고는 하지만 프라이버시의 영역이 존재하는 곳이라 다가섬이 조심스러웠는데, 아니나 다를까 바깥의 기척에 주인이 나와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은퇴한 지 얼마 안 된 듯한 부부였다.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그들 부부도 ‘아들’이라 표현하는 그 녀석의 자태를 보고는 깔깔거리며 기분 좋게 밴으로 돌아갔다.
내가 본 반려견 가운데 가장 압도적인 만남은 알프스산맥의 오트루트에서였다. 겨울의 오트루트는 사람 키가 넘는 눈으로 덮이고 곳곳에 크레바스(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좁고 깊은 틈)가 숨어있어 산악스키가 아니면 갈 수 없는 곳이다. 산악스키는 보통의 스키와 달라 오르막길을 미끄러지지 않고 오를 수 있다. 보통은 일주일에 걸쳐 완주하게 되는 오트루트에는 최소한의 시설을 갖춘 산장이 하루에 하나꼴로 나온다. 전기가 없는 건 물론이고 물이 부족해 샤워는 꿈도 못 꾼다. 설거지도 버거워 컵 하나로 물도 마시고 와인도 마시고 다음날 아침에 커피까지 마셔야 하는 곳이다. 체력적으로도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 길을 반려견과 함께 여행하는 사람이 있었다. 험한 곳을 여행하게 되었으니 반려견을 전용 호텔이나 주변 사람에게 맡기는 게 아니라 함께 여행하기, 반려견도 여행할 권리가 있음을 증명하는 풍경이었다.
그 못지않은 만남이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도 있었다. 한 달이 넘게 걸리는 800km의 순례길을 말과 함께 가는 커플이 있었다. 말을 짐 운반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었다. 명백하게 말과 동행하고 있었다. 중동의 사막이나 히말라야 산맥을 여행할 때처럼 낙타나 야크 등에 먹거리와 생필품을 잔뜩 싣고 가는 게 아니었다. 딱 생존에 필요한 것만이 안장에 실려 있었고, 사람이 말에 타는 일도 없었다. 그들의 삶에서 반려동물이 어떤 위상을 가지는지 잘 알 수 있는 풍경들이었다.
지금의 나는 반려 동물을 기를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는다. 아쉽지만 내 삶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다. 집 앞 마당을 어슬렁거리는 길고양이 밥 주는 것으로 허전한 마음을 달랜다. 그 집 앞에서 어슬렁거리면 공짜로 밥을 준다는 사실을 눈치 챈 녀석들이 매일 저녁 찾아온다. 함께 사는 친구가 ‘떠돌지 말고 우리 집에 들어와서 같이 살자’라고 부질없는 말을 흘려보기도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녀석들도, 우리도 잘 안다. 출장이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나마 오던 길고양이 녀석들도 제 살길을 찾아서 떠났는지 보이지 않는다. 매일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과 녀석들이 오지 않아 쓸쓸한 마음이 한데서 맴돈다.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2024-02-14 [0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