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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청춘 성장의 밑거름…보름 만에 한 뼘 더 큰 아이들 [세상에이런여행] ㉗
■런던, 파리의 일상적 여행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교수 특강을 들은 학생들은 남은 일정에 대한 기대를 키웠다. 이제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런던 시내를 돌아보는 일정은 일반적인 여행 코스와 다르지 않았다. 겨울철에는 이틀마다 한 번 진행하는 버킹엄궁전 근위병 교대식,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위용을 느낄 수 있는 영국박물관, 의회민주주의 출발점 국회의사당 등이었다.
런던 시내 곳곳의 명소를 둘러보는 일정으로 영국 일정을 마무리한 뒤 유로스타를 타고 바다를 지하로 건너 프랑스 파리 북역에 도착했다. 화려한 왕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베르사유궁전은 아이들에게도 단연 인기가 높았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협약이 열린 ‘거울의 방’과 웅장한 정원을 둘러보면서 프랑스대혁명을 일으킨 민심을 읽지 못했던 왕실의 무능을 함께 느껴보는 시간이었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 ‘르 프로코프’도 방문했다. 1686년에 문을 열었다고 하니 올해로 338년이나 된 곳이다. 장 자크 루소, 볼테르, 당통 등 당대의 지식인과 유명인이 단골로 드나들었다. 프랑스대혁명 주동자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나폴레옹 황제의 베레모다. 나폴레옹이 음식 값 대신 두고 갔다는 모자가 유리 액자에 담겨 보관돼 있다.
루브르박물관, 센강 유람선, 오르세미술관 등도 둘러보며 학생들은 파리가 왜 유럽의 중심도시인지 느낄 수 있었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소매치기와 눈싸움하면서 긴장된 순간을 맞기도 했다.
파리에 이어 진행된 스위스 일정은 축복이었다. 융프라우로 대표되는 알프스 고봉은 눈의 천국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스위스는 언제나 여행자에게는 천국이다. 호텔보다 더 시설이 좋고, 외국인들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인터라켄 유스호스텔에서 자유로운 2박 3일을 보냈다. 학생들은 “꿈같은 일정”이라고 탄성을 터뜨렸다.
기차를 타고 올라가면서 호수와 하늘, 산맥이 맞닿아 있는 풍경을 보고 입을 다물 줄 몰랐다. 학생들은 기차에서 부모에게 엽서를 썼다. 장난기가 가득하던 학생들의 눈에 진지한 기색이 역력하다. 우체국에서 우표를 사서 유스호스텔 직원에게 맡기면 집배원에게 전달해 준단다.
■베니스의 가면 축제
아침 일찍 기차를 여러 번 갈아타고 이탈리아 베니스에 도착했다. 마침 2월 둘째 주에 일주일 동안 진행되는 세계 3대 축제 중 하나인 까르네발레 가면 축제가 한창이었다. 형형색색 화려한 망토와 가면을 쓴 사람들이 산마르코광장을 누볐다. 학생들은 축제 분위기에 들떠 기념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중세에 전쟁이 너무 잦아 죽는 남자가 폭증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는 귀족과 평민이 결혼할 수 없는 구조였다. 베네치아 정부는 인구를 늘려야 했기에 궁여지책으로 일주일간 가면축제를 열어 남녀가 신분에 관계없이 만남을 갖도록 했다. 결과는 수많은 사생아. 그 아이들 중에서 소녀들에게만 음악과 악기 교육을 실시했던 사람이 안토니오 비발디다.
베니스에 이어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로 건너갔다. 피렌체 중앙역 로커에 짐을 맡기고, 곧바로 기차를 타고 피사에 다녀오기로 했다. 피사의 사탑은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관광지가 아닐까 싶다. 다시 한 번 중세 천동설과 만유인력으로 이야기를 꽃피운다.
피렌체 하면 티본스테이크다. 한국인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식당에서 여학생들은 4명당 1kg, 남학생들은 2명당 1kg에 파스타, 샐러드를 곁들여서 만찬을 즐겼다. 모두 하나도 남김없이 뼈까지 삼켜버릴 기세였다.
■로마의 음악 공연
어느덧 마지막 일정인 로마의 3박 4일이 다가왔다. 고대 로마 제국의 흥망성쇠를 살펴보고 바티칸박물관, 교황청을 둘러보는 것도 중요한 일정이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산타체칠리아음악원 오케스트라 공연이 압권이었다. 소프라노 조수미 씨의 모교이기도 한 곳이다.
다행히 우리 일정 기간 중에 공연 프로그램이 있어 인터넷으로 미리 예매했다. 클로드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과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교향곡 5번으로 짜인 레퍼토리였다. 2시간 공연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학생들도 한국에서는 쉽지 않은 경험을 하면서 의외로 졸지 않고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한 학생은 “오케스트라가 주는 음악을 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감상평을 붙이기도 했다.
여행 마지막 날 밤 호텔방에서 서로 소감을 나눴다. 다들 더 성장한 진지한 얼굴이었다. 역시 ‘아이들은 가만히 두면 잘하는데, 부모의 과도한 간섭이 반발심을 주는 건 아닐까'라는 짧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삶이니 스스로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 내년 2월에 출발하는 팀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벌써 기대가 된다. 손준호 준투어 대표
2024-08-2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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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호텔식·외식에 학원도 안 가는 꿈같은 일정 [세상에이런여행] ㉖
20년 넘게 유럽 배낭여행 인솔자로 일하면서 많은 여행자를 만났다. 대학생부터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30대 청년, 인생 후반기를 설계하는 은퇴자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유럽 곳곳을 다니며 동고동락했다.
코로나19 이후 다시 유럽 전문여행사를 열었을 때 특히 주목한 분야는 초중학생들과 함께하는 여행이었다. 어른보다 더 바쁜 학생들이 잠시나마 학습 부담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해 눈을 뜨게 하자는 게 기획 취지였다.
부모가 따라가면 학생이 부모에게 의존하게 되고, 부모나 학생 모두 제대로 된 여행을 즐기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경험도 한몫한 프로그램이었다. 자립심을 키우고, 새로운 문화와 언어를 직접 경험해서 열린 사고를 체화하는 데 여행만큼 훌륭한 도구는 없다는 개인적 생각도 큰 영향을 미쳤다.
여행 프로그램의 롤 모델은 17세기 후반 영국 귀족 자녀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자녀교육 여행 프로그램 그랜드투어였다. 당시 영국 귀족은 가문을 지키려면 후세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녀를 길게는 2년 이상 로마와 그리스로 여행을 보냈다고 한다. 역사와 문화가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도시들을 찾아 높은 수준의 지성과 문화적 안목을 기르는 이른바 엘리트 교육의 최종단계라고 생각했다.
■꿈같은 12박 14일
지난 2월 춘계방학 때 출발하는 것을 목표로 6개월 전부터 준비했다. 20여 년 이상 배낭여행을 하다 보니 이전에 함께 돌아다닌 동지들이 많다. 지금도 SNS로 연락하면서 서로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됐다. 이들에게 먼저 청소년 서유럽 문명기행 프로그램을 알렸더니 조금씩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대학생일 때 필자와 함께 여행한 것을 계기로 사귀게 돼 결혼까지 한 A씨와 B씨는 중학교 2학년 학생인 자녀를 보내겠다고 했다. 지인들이 여기저기 소개한 덕분에 순전히 초중학생 14명과 보조 인솔자 한 명 그리고 필자까지 16명이 출발하는 첫 팀이 성사됐다. 부산 학생만이 아니라 서울에서도 여러 학생이 참가하게 됐다.
대한항공을 타고 영국 런던으로 들어갔다가 프랑스 파리, 스위스 취리히, 이탈리아 베니스~피렌체를 거쳐 로마에서 귀국하는 12박 14일의 일정이었다. 프로그램에 참가한 학생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침은 호텔, 점심과 저녁은 외식에 학원에는 안 가도 되는 꿈같은 일정’이었다.
부산과 서울에서 각각 모인 학생들은 인천공항 2청사에서 ‘합체’해 런던으로 떠났다. 예전에는 런던을 통해 입국할 경우 18세 미만인 사람은 ‘부모 미동행 시 가디언’이라는 양식의 서류를 제출해야 했지만, 요즘은 간소해져 인솔자만 있으면 입국할 때 아무런 문제가 없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특강
런던에 도착하고 첫날 일정이 시작됐다. 이번 여행에서 부모들이 가장 기대했고 학생들도 바랐던 하이라이트인 케임브리지대학이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학생들은 태어나서 처음 런던 시내 교통시스템을 경험하기 위해 지하철과 2층 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정액카드인 오이스터카드를 구입했다. 일정금액을 충전하면 런던에 머무르는 사흘간 지하철과 버스를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케임브리지에 가려면 지하철 킹스크로스 역으로 가야 한다. 숙소에서 지하철을 타고 킹스크로스 역에 내려 케임브리지행 기차를 탑승하면 된다. 물론 케임브리지 왕복 기차표는 인터넷에서 미리 구입했다.
킹스크로스 역은 소설과 영화 <해리포터>로 유명해진 곳이다. 마법학교로 가려면 이곳에 있는 ‘9와 4분의 3’ 플랫폼에서 기둥으로 들어가야 한다. 물론 원래 역에는 이런 플랫폼은 없지만 소설과 영화 때문에 관광객 사진촬영용 스폿이 생겼다.
학생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 기차 출발 1시간 전 미리 도착해서 9와 4분의 3 플랫폼부터 먼저 구경한다. 기차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에 사진은 나중에 돌아올 때 찍기로 하고 케임브리지행 기차에 올랐다. 케임브리지는 런던에서 한 시간 정도 달리면 도착한다.
케임브리지대학교는 울타리에 갇힌 캠퍼스가 아니라, 도시 전체가 캠퍼스 같은 곳이다. 케임브리지대학교는 옥스퍼드에서 일어난 폭동을 피해 케임브리지로 달아난 옥스퍼드대학교 교수, 학생들이 세운 학교였다. 그래서 케임브리지대학교는 옥스퍼드대학교에 이어 영어를 쓰는 지역에서는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이다.
케임브리지대학교 출신 유명인으로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물리학자 겸 수학자인 아이작 뉴턴, 철학자인 프란시스 베이컨, 17세기 독재자 올리버 크롬웰, <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 인도의 네루 총리 등이 있다. 케임브리지대학 출신 총리만 해도 초대 총리인 크리스 월폴 등 13명에 이른다. 외국 대통령 등 정부 최고 지도자가 된 사람도 30명이나 된다. 현재 영국 국왕인 찰스 3세 등 이 학교 출신 국내외 국왕만 해도 9명이다.
케임브리지에서는 생화학과에 재직 중인 마틴 교수의 특강을 들었다. 지인이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물리학 박사인데 그의 소개로 마틴 교수를 알게 됐다. 대학교에서 수업이 진행 중이어서 특강은 학교 근처 유학원 강의실을 빌려 진행됐다.
강의는 만유인력의 법칙과 수학의 미적분 외에 케임브리지대학교 노벨상 수상자 이야기와 학교 역사에 관한 내용으로 1시간 30분간 이어졌다. 이 대학교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130명이나 나왔다는 이야기에 학생들은 모두 놀라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많은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인지 학생들은 매우 흥미로워했다.
강의가 끝난 뒤 질의응답이 진행됐다. 어떤 학생은 통역을 통하지 않고 영어로 직접 질문했다. 요즘 학생들은 확실히 영어를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2시간의 강연과 질문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고 어느덧 점심시간이 됐다.
학생들은 점심식사를 마친 뒤에는 캠퍼스 곳곳을 구경했다. 도보여행은 케임브리지대학교를 구성한 31개 칼리지 중 제일 유명한 세인트존스칼리지, 가장 큰 트리니티칼리지, 성당이 아름다운 킹스칼리지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가장 자금이 풍부한 ‘부자’ 학교인 세인트존스칼리지 출신 인물로는 1958년과 1980년 노벨상 화학상을 두 번이나 받은 프레더릭 생어 교수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저자 더글러스 애덤스가 있다.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 인도의 만모한 싱 총리도 이 칼리지 졸업생이다.
수학과 물리학으로 특화된 트리니티칼리지는 노벨상 수상자를 제일 많이 배출했는데, 옥스퍼드대학교 전체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냈다고 한다. 필자의 지인은 “그래서 트리니티칼리지는 세인트존스칼리지와 묘한 경쟁관계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킹스칼리지성당과 학교 건물이 가장 화려하고 예쁜 킹스칼리지에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암호를 해독하는 내용을 담은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실존 인물이었던 앨런 튜링 이야기가 소개됐다. 학생들은 튜링 이야기를 듣고는 매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킹스칼리지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소는 잔디마당에 있는 아이작 뉴턴의 사과나무였다. 뉴턴과 시인 바이런, 다윈, 베이컨, 찰스 3세 국왕이 이곳 출신이다.
학생들은 퀸스칼리지 근처에 있는 ‘수학의 다리’와 도시 전체를 휘감아 도는 캠강의 나룻배 모양의 펀팅을 바라보며 투어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런던 킹스크로스 역으로 돌아가 플랫폼 9와 4분의 3에서 빨려드는 것 같은 자세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모두가 만족한 하루였다.
손준호 준투어 대표
2024-08-1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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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지 못한 인생 말년, 모차르트는 왜 갑자기 눈을 감았나? [세상에이런여행] ㉕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전기학자나 역사학자는 모차르트를 ‘빈곤에 시달리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천재 음악가’라고 묘사했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본 사람이라면 모차르트가 능력에 맞는 대우도 받지 못하다 죽었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는 공동묘지의 평민 묘역에 묻혔기 때문에 ‘홀대받았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새로운 사료가 발견되면서 이 같은 평가는 사실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
모차르트가 빈곤했거나 홀대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인생의 말년이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엄청난 돈을 벌었던 대작곡가가 왜 그렇게 된 것일까. 그는 힘든 시기를 어디에서 어떻게 버텼을까. 그리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그의 인생 마지막을 살펴보려면 지하철을 타고 빈 외곽으로 나가야 한다.
■사치가 불러온 몰락
모차르트가 전성기를 보냈던 모차르트하우스가 있는 구시가지의 슈테판스플라츠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3개 정류장을 지나 로쿠스가세역에서 내린다. 이곳은 빈의 링슈트라세 바깥에 있는 지역이다. 빈에 성벽이 있던 시절에는 성벽 외곽이었다. 시내와 그다지 많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오늘날에도 외곽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곳이다.
1787년 오스트리아와 오스만투르크 사이에 전쟁이 터졌다. 전쟁 탓에 음악 연주회 손님이 줄고 작곡을 의뢰하는 고객도 모두 사라져 모차르트의 재정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다. 큰돈을 벌고도 저금이라고는 몰랐던 모차르트는 자금난에 쪼들리다 집세 부담을 덜기 위해 란트슈트라세 75번지로 이사를 갔다. 오페라 ‘돈 조반니’와 현악 세레나데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를 작곡한 곳은 여기였다. 여기에서도 자금 상태가 나아지지 않자 집을 더 싼 곳으로 다시 옮겼다.
로쿠스가세역에서 다시 지하철을 타고 가다 쇼텐토르역 앞에서 내린다. 역 바로 앞에 지그문트 프로이트 공원이 나타나고 공원 뒤편에 뾰족한 첨탑 두 개가 솟은 교회가 보인다. 19세기 말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암살 위기를 넘긴 뒤 성모 마리아에게 감사를 드리는 뜻에서 만든 교회다.
교회 옆의 베링거슈트라세를 따라 3분 정도 걸으면 베링거슈트라세 26번지가 나온다. 계속 자금난에 시달린 모차르트는 1788년 6월 이곳으로 이사를 가 1789년 초까지 살았다. 이곳은 지금도 빈 중심가까지 걸어서 20분 이상 걸리는 곳이다. 모차르트가 살아 있을 때에는 성벽 밖이었기 때문에 더 외곽이었을 게 분명하다. 이 일대 집값은 시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쌌다. 그가 오페라 ‘코지 판 투테’를 쓴 곳은 여기였다. 이곳 입구에 이런 사실을 알리는 명판이 붙어 있다. 모차르트가 살던 때의 건물은 허물어졌고 지금은 새 건물이 들어섰다.
모차르트는 1784~1787년 사이에 매년 5000~1만 굴덴을 벌었다. 빈에서 최고 소득자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는 1787년 후반기부터 빚을 많이 지고 재정난에 시달렸다. 100굴덴이 없어 곳곳에 돈을 빌리러 다녔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문제는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더 많았다는 것이었다. 일부에서는 그의 아내인 콘스탄체의 씀씀이가 헤펐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모차르트가 아버지, 누나와 주고받은 편지는 물론 다른 자료를 살펴보면 사정은 다르다. 근본적인 원인은 모차르트에게 있었다. 씀씀이가 헤펐던 사람은 콘스탄체가 아니라 모차르트였다. 그는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에 매우 신경을 썼다. 옷, 신발은 늘 최신 유행의 고급만 고집했다.
모차르트는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가 연주회를 진행하는 곳은 대부분 왕의 궁전이나 귀족의 대저택이었다. 연주회를 마치면 왕이나 귀족이 대접하는 진수성찬을 즐겼다. 그들로부터 값비싼 선물을 받았다. 옷, 신발, 보석 등 선물은 다양했다. 당연히 어릴 때부터 비싸고 고급스러운 물건에 익숙했다.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그런 집에서 살고 싶어 했고 생활수준에서 귀족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했다.
게다가 모차르트는 도박을 즐겼고 알코올 중독자였다. 당시 빈 귀족의 오락거리는 음악과 도박이었다. 그들은 밤에 연주회를 보러 가지 않으면 당구장이나 카지노에서 도박을 했다. 귀족 친구가 많았던 모차르트도 마찬가지였다. 연주회, 작곡 시간이 아니면 당구장에서 공을 치거나 노름을 했다. 거기서 탕진한 재산이 만만치 않았다.
잘츠부르크에서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살 때에는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부모가 통제를 했기 때문이었다. 빈에 가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직접 돈을 벌었고 주변에 통제하는 사람이 없어 버는 족족 돈을 써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미국 작곡가 겸 음악사학자인 앨런 크란츠는 모차르트 전기에 ‘모차르트는 아량, 충동성, 과소비의 희생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어릴 때부터 절제를 모르면서 버릇없이 자랐다. 남의 말에 잘 속아 넘어갔다. 돈은 마치 물처럼 그의 손에서 흘러나갔다’ 면서 ‘모차르트의 어머니조차 ‘볼프강은 새 친구를 사귀면 늘 인생이나 재산을 모두 쏟아부을 것처럼 행동한다’고 하소연했다’고 적었다.
■대가의 비참한 최후
모차르트는 1790년 11월 말 라우헨슈타인가세 8번지로 집을 옮겼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제법 큰 아파트였다. 그는 이곳에 이사를 간 뒤 돈을 벌기 위해 필사적으로 곡을 썼다. 발세그 스튜파흐 백작에게서 의뢰를 받고 유작이 된 미완성곡 ‘레퀴엠’을 작곡한 곳은 이 집이었다. 또 오페라 ‘마술피리’와 ‘티토의 자비’도 작곡했다.
그런데 모차르트는 이듬해 12월 5일 이곳에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을 지켜본 건물은 이제 남아 있지 않다. 그 자리에는 ‘슈테플백화점’이 들어섰다. 백화점 건물 7층 스카이 바에는 모차르트를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졌고, 건물 뒤편에는 명판이 붙여졌다.
모차르트의 마지막을 지킨 의사 클로셋이 발행한 사망 증명서에는 사망 원인이 ‘속립진열’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것이 어떤 질병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모차르트가 죽기 전인 11월 아내에게 ‘몸이 아파. 죽을 것 같아. 독을 먹은 모양이야“라고 말했다는 것 때문에 독살설이 퍼지기도 했다. 이후 많은 의학 전문가가 모차르트의 사인을 분석했지만 결과는 늘 달랐다. 앞으로도 사인을 둘러싼 논쟁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 어느 누구도 100% 명확한 사인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덩치가 작았던 모차르트는 어릴 때부터 튼튼한 아이가 아니었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는 각종 병에 걸려 세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여섯 살 때 빈에 처음 가서 성홍열에 걸려 생사를 헤맸다. 이때 간을 상했는데 평생 신장 질환에 시달린 원인이 됐을 가능성이 있다. 빈을 두 번째 방문했을 때에는 천연두, 네덜란드 헤이그에 갔을 때에는 발진티푸스에 걸렸다. 이때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게 거의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모차르트가 이렇게 자주 병에 시달린 것은 각종 전염병이 수시로 유행한 게 이유일 수 있지만, 그가 어릴 때 제대로 못 먹어 체질적으로 약한 것이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는 모유 수유를 하지 않고 보리죽만 먹였는데, 이 때문에 모차르트는 늘 영양실조에 허덕였다는 게 일부 전기학자의 주장이다.
모차르트의 장례식은 성슈테판대성당에서 거행됐다. 관은 대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사인이 전염병 때문이라고 짐작한 대성당 사제주임이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간단한 장례 미사가 거행된 곳은 대성당 외부의 십자가 경당 앞이었다. 지금 십자가 경당의 철문 뒤에는 모차르트의 장례 미사가 열린 장소임을 알리는 명패가 붙어 있다.
‘1791년 12월 6일 불멸의 작곡가 모차르트의 육체는 이곳에서 축복을 받았다. 여기에서 그의 관은 공동묘지로 옮겨졌다.’
■마지막 흔적
성슈테판대성당 십자가 경당 앞에서 잠시 묵념한 뒤 그라벤거리를 거쳐 호프부르크왕궁으로 이어지는 콜마르크트거리를 따라 간다. 이 거리의 종점은 미하엘러플라츠광장인데, 이곳에는 13세기에 만들어진 장크트미하일러교회가 있다.
세상을 떠난 모차르트를 위해 첫 추모 미사가 열린 곳은 여기였다. 그가 미완성으로 남긴 유작 ‘레퀴엠’이 초연된 것도 이곳이었다. 교회에 들어가서 잘 살펴보면 한쪽 구석에 이런 내용을 담은 동판을 찾을 수 있다. 대다수 외국인 관광객은 교회의 역사를 잘 몰라 들어가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광장 정면에 보이는 호프부르크왕궁 사진 찍기에만 바쁘다. 역시 여행에서는 아는 만큼만 보이기 마련이다.
교회에서 나와 호프부르크왕궁을 가로질러 왕실 정원인 부르크가르텐으로 간다. 정원 한쪽 모퉁이에 조그맣게 따로 단장된 공간이 나타난다. 온전히 모차르트를 위한 공간이다. 모차르트 동상이 서 있고 동상 바로 앞에는 봄여름이면 ‘음표’ 모양의 꽃이 피어나는 화단이다.
모차르트 동상은 독일어로 ‘모차르트 덴크말’이라고 부른다. 동상은 악보대를 든 모차르트를 형상화했다. 정면의 부조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의 두 장면을 의미한다. 뒷면의 부조는 여섯 살인 모차르트가 아버지, 누나 난네를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을 담았다.
모차르트 동상을 찾는 관광객의 발걸음은 1년 내내 끊이지 않는다. 동상과 주변의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시기는 날씨가 따뜻한 4~5월이다. 이 무렵이면 부르크가르텐에는 알록달록한 색깔의 꽃이 화사하게 핀다. 동상 앞에는 높은음자리표 모양의 꽃밭이 조성된다. 꽃밭 앞에서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이 줄을 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모차르트 동상에서 길을 건너 71번 트램을 탄다. 목적지는 빈 중앙공동묘지다. 이곳에 가는 이유는 모차르트의 기념비가 있고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2세 같은 유명 음악가가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 기념비가 있는 곳은 중앙공동묘지 ‘32 A-55’ 구역이다.
모차르트는 원래 중앙공동묘지가 아니라 장크트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때만 해도 평민의 경우 개인무덤이 아니라 공동무덤을 쓰는 게 일반적이어서 모차르트도 공동무덤에 묻혔다. 나중에는 그 위에 다른 공동무덤을 또 만들었다. 이 때문에 모차르트의 유해를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돼 버렸다.
빈 시청은 모차르트가 죽고 68년 뒤인 1859년 장크트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모차르트 기념비를 세웠고, 사망 100주기이던 1891년에는 중앙공동묘지로 옮겼다. 기념비는 크게 상단과 하단으로 나눌 수 있다. 상단에는 위대한 작곡가의 죽음을 슬퍼하는 뮤즈의 조각이 설치됐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뮤즈는 음악 같은 예술을 관장하는 여신이니 모차르트 같은 작곡가를 추모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하단에는 대리석 비석 몸체에 모차르트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이 붙었다.
모차르트 기념비 주변은 베토벤, 브람스, 슈베르트, 요한 슈트라우스의 무덤이 둘러쌌다. 의도는 분명하다. 오스트리아의 대표적 작곡가인 모차르트가 최고의 음악가라는 걸 내세우기 위해서다. 다들 베토벤을 ‘음악의 황제’라고, 모차르트를 ‘음악의 신동’이라고 불러 베토벤을 한 수 높게 친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셈이다.
2024-07-23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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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음악적 전성기 경제적 황금기…빈 최고소득자 대열 합류 [세상에이런여행] ㉔
빈에 정착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자신감에 넘쳤다. 음악을 사랑한 도시였던 빈은 그에게 음악적으로 경제적으로 많은 기회를 제공했다. 그는 매일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바쁘게 살았다. 그래도 힘들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게 즐겁고 행복했다. 작곡해서 연주하는 작품마다 대성공을 거둬 명성을 얻었고, 적지 않은 돈을 벌었고 결혼을 했고 아이까지 낳았다.
성슈테판대성당에서 결혼해 조촐한 셋집에서 신혼살림을 차렸지만 성공을 거둬 큰돈을 번 뒤에는 화려한 저택으로 이사를 갔다. 빈 곳곳을 돌아다니며 각종 공연장에서 많은 작품을 연주했던 무대도 돌아본다. 모차르트의 전성기를 돌아보는 코스의 시작은 그가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했던 성슈테판대성당이다. 다행히 첫 하숙집 바로 인근이어서 멀지는 않다.
■성슈테판대성당
오페라 ‘후궁탈출’의 성공으로 적지 않은 돈을 벌어 자신감을 얻은 모차르트는 체칠리아 부인에게 딸과 결혼하겠다고 밝혔다. 체칠리아 부인은 사윗감의 밝은 미래를 기대하며 결혼을 허락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결혼에 반대했지만 정작 아들은 여기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모차르트가 1782년 8월 4일 결혼식을 거행한 곳은 체칠리아 부인의 집이 있던 밀히가세 1번지에서 걸어서 5분 거리인 성슈테판대성당이었다. 모차르트는 원래 장모의 집 근처에 있던 장크트페터교회에서 결혼하려 했지만 주변 지인의 도움으로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치를 수 있었다. 이때 모차르트는 스물여섯 살, 콘스탄체는 스무 살이었다. 결혼을 승낙한다는 아버지의 편지가 도착한 것은 결혼식 다음날이었다.
갓 결혼한 모차르트 부부의 뒤를 따라 성슈테판대성당 앞의 로텐투름슈트라세를 걷는다. 리히텐슈테그 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조금만 가면 호허마르크트가 나타난다. 여기서 4~5분 정도 더 이동하면 비플링거슈트라세가 보인다. 모차르트가 신혼살림을 차린 곳은 이 거리의 19번지였다. 그는 이곳에서 ‘대미사곡 C단조’를 작곡해 고향 잘츠부르크에서 초연했다. 결혼에 반대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른 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려는 뜻이 담긴 곡이었다.
모차르트의 신혼집인 비플링거슈트라세는 그가 여섯 살 때 첫 빈 연주회를 열었던 암호프광장 인근이다. 그는 이 집에서 결혼 이듬해 6월에 첫 아들 라이문트 레오폴트를 낳았다. 부부는 첫 아들을 암호프교회에 데려가 세례를 받게 했다. 하지만 아들은 불과 두 달 만에 눈을 감고 말았다. 부부는 결혼하고 첫 8년 사이에 아이를 여섯이나 낳았다. 그중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은 아이는 둘이었다. 카를 토마스 모차르트와 프란츠 자베르 볼프강 모차르트였다.
비플링거슈트라세 19번지에서 다시 거꾸로 호허마르크트 쪽으로 1분 정도 걸어가면 조그만 골목길 사이로 유덴플라츠가 나타난다. 과거에는 유대인 밀집 지역이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홀로코스트 위령탑’이 있다. 모차르트는 1783년 4월 유덴플라츠 3번지 건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1784년 1월까지 9개월 정도 살았다. 그는 여기서 유명한 ‘터키 행진곡’이 들어간 ‘피아노 소나타 11번 A장조 K331’를 작곡했다. 이 건물은 지금은 학교 등으로 사용된다.
■모차르트하우스
유덴플라츠에서 호허마르크르트를 지나 다시 성슈테판대성당으로 간다. 북쪽 탑 앞을 지나 슐러스트라세로 들어간 뒤 곧바로 돔가세 쪽으로 우회전한다.
모차르트는 1784년 9월 29일 돔가세 5번지 2층으로 이사했다. 둘째 아이 카를 토마스가 태어나고 8일 뒤였다. 이곳은 당시에는 빈에서 가장 좋은 건물 중 하나였다. 그가 입주할 때 내기로 한 집세는 3개월에 230굴덴, 연간 960굴덴이었다. 직전에 살았던 곳의 집세는 3개월에 65굴덴, 연간 260굴덴이었다. 결국 새 집의 집세는 이전 집과 비교해서 3.7배 정도였다. 그가 잘츠부르크에서 받았던 연봉의 배 이상 수준이었다.
모차르트가 빈에서 가장 멋진 저택에 들어가게 된 것은 수입이 엄청나게 늘어난 덕분이었다. 1784~1787년은 그의 음악적 전성기였고 경제적 황금기였다. 당시 그는 빈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로 이름을 날렸다. 저명한 사회 지도층 인사 중에서 친구도 많았다. 저택에서 연주회를 열어달라고 초청장을 보낸 귀족이 줄을 설 정도였다.
모차르트는 돔가세에서 살 때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은 물론 피아노 협주곡 20~25번을 작곡했다. 이 기간 중에 그가 번 돈은 해마다 5000~1만 굴덴이었다. 잘츠부르크에서 받던 연봉 400굴덴과 비교하면 12~24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당시 빈의 유명 병원의사가 받는 연봉은 600굴덴이었다. 상류층이라도 1년에 1000굴덴을 벌면 소득이 높은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따라서 그가 번 돈은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거액이었을 게 분명하다.
모차르트가 살았던 돔가세 5번지 주택 2층에는 큰 방 4개, 작은 방 두 개, 그리고 부엌이 있었다. 그의 가족이 살기에는 지나치게 큰 집이었다. 그는 평생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집뿐 아니라 옷, 신발도 마찬가지였다. 낡은 집에서 살거나 옷, 신발이 추레하게 보이는 걸 무척 부끄럽게 여겼다. 모차르트는 이곳에 친구를 초청해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음악을 연주하기도 했다. 그가 사람 만나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랬던 측면도 있었지만 과시욕이 더 강했다고 볼 수도 있다.
빈 시청은 2004년 모차르트하우스를 대대적으로 재단장했다. 공사는 2006년에 마무리됐다.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후 이 건물은 모차르트의 인생과 예술세계를 소개하는 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이곳은 성슈테판대성당 인근에 자리를 잡은 데다 ‘피가로의 결혼’이 작곡된 곳이라는 상징성도 가져 관광객의 관심을 끌기에 훌륭한 장소다.
세계적 팝스타 마돈나는 2012년 6월 30일 딸 로드, 그리고 밴드 멤버 일부를 데리고 모차르트하우스를 방문했다. 마돈나가 20세기 최고 여성 팝스타라면 모차르트는 18세기 최고의 음악가였다. 마돈나는 방명록에 ‘늘 영감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적었다.
■쇤브룬궁전
빈 여행을 하면서, 특히 모차르트가 빈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하면서 쇤브룬궁전을 안 가볼 수는 없다. 빈 여행의 하이라이트일 뿐 아니라 그의 음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잘츠부르크에서 온 소년이 놀라운 연주 실력을 발휘한다는 소식을 들은 프란츠 슈테판-마리아 테레지아 황제 부부는 지체하지 않고 그들을 쇤부른궁전으로 초청했다. 모차르트 가족이 궁전에 들어간 것은 1762년 10월 13일이었다.
쇤브룬궁전 ‘거울의 방’에서는 황제 부부 외에 황태자였던 요제프 2세 그리고 나중에 프랑스 파리로 시집을 가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되는 마리아 앙투안 공주 등 황실 가족이 모두 모여 있었다. 모차르트와 누나 난네를은 궁정 작곡가 게오르그 크리스토프 바겐세일이 작곡한 콘체르트 전곡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부부는 두 아이의 연주에 매혹당하고 말았다.
일화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연주를 마치고 걸어가다 미끄러져 넘어졌다. 이때 마리아 앙투안이 달려가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모차르트는 공주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나중에 나랑 결혼하자”고 말해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지어낸 이야기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모차르트보다 다섯 살 많았던 공주 요제파는 모차르트의 손을 잡고 궁전의 여러 방을 구경시켜 주었다.
이틀 뒤 궁전의 시종이 모차르트 가족이 묵고 있던 숙소로 찾아가 황실의 선물을 가져다주었다. 모차르트와 누나 난네를에게 준 선물은 옷이었다. 모차르트에게는 대공 막시밀리안 프란츠가 입었던 실크 드레스가 주어졌다.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의 막내아들인 막시밀리안은 모차르트와 동갑이었다. 난네를도 드레스를 선물로 받았다. 레오폴트는 금화 100듀캇을 챙겼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요제프 2세 황제에게서 우대를 받았던 모차르트는 1786년 쇤브룬궁전의 오랑제리에서 이색적인 연주회를 가졌다. 1985년 체코 출신의 밀로스 포만 감독이 만든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그를 암살한 것으로 묘사되는 궁정음악가 살리에리와 작곡 대결을 벌인 것이었다.
요제프 2세는 1766년 결혼해 브뤼셀로 건너간 여동생 마리아 크리스텐이 결혼 20년 만에 친정을 방문하자 여동생을 환영하기 위해 여러 행사를 진행했다. 그중 하나로 모차르트-살리에리 음악 대결을 기획한 게 계기였다.
오랑제리는 초대형 온실이었다. 유리로 만든 아치형 천장의 길이는 무려 189m였다. 황실은 오랑제리를 단순히 열대식물의 온실로만 사용하지는 않았다. 추운 겨울에는 따뜻하게 연주회나 파티를 여는 장소로도 이용했다. 규모가 컸기 때문에 대규모 파티를 열기에 제격이었다.
두 작곡가의 대결은 빈의 겨울 추위가 가장 매서운 시기인 2월 7일에 벌어졌다. 참석자는 황제 부부는 물론 귀족 등 80명이었다. 모두 부인을 데리고 갔으니 총 참석 인원은 160명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오랑제리에는 양쪽 끝에 하나씩 두 개의 무대가 설치됐다. 모차르트가 먼저 자작 오페라 ‘극장 감독’을 공연했고, 이어 맞은편에서 살리에리가 자작 오페라 ‘처음에는 음악, 나중에는 말’을 공연했다. 두 무대의 가운데에는 초대된 손님들이 앉아 심판 역할을 맡았다. 한쪽의 오페라가 끝나면 의자를 뒤로 돌려 반대쪽의 오페라를 봤다. 손님 박수가 큰 오페라가 이기는 게 규칙이었다. 결과는 살리에리의 완승이었다.
모차르트가 쇤브룬궁전에서 연주한 걸 기념하기 위해 해마다 여름에는 비엔나필하모닉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서머 나이트 콘서트 쇤브룬’이라는 음악회가 열린다. 또 모차르트-살리에리의 맞대결 행사가 열린 걸 기념하기 위해 지금도 오랑제리에서는 매년 여름에 모차르트 콘서트가 진행된다. 물론 두 작곡가의 맞대결 형식은 아니다. 단순히 모차르트와 요한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연주하는 콘서트일 뿐이다.
2024-07-16 [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