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야 할 역사, 원양어업 60년] 1부 흔적찾기 ⑧ 침몰 제2 지남호 생존자 문인리 씨
입력 : 2017-02-19 23:03:56 수정 : 2017-02-21 19:38:21
"구조 요청하러 상어 득실거리는 바다서 20시간 헤엄쳐 "

"힘을 내는 사진이 돼야 할 거 아이요. 내한테 힘은 이거밖에 없는데."
상어떼가 득실거리는 바다를, 죽을 힘을 다해 헤엄쳐 갔던 섬에서 구출된 직후 찍은 사진 한 장. 평생 가슴에 품고 머리에 품고 온몸 곳곳에 품어, 눈을 감아도 뚜렷이 그릴 수 있는 사진 한 장이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사진이요."
부산수산대 졸업 직후 실습항해사로 제2 지남호에 몸을 실었다. 제2 지남호는 국내 원양어업 역사상 처음 침몰한 선박이다. 당시 동료 21명을 바다에서 떠나보내고 단 두 명 살아남은 이 중 한 명인 문인리(77) 씨는 보물처럼 간직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였다. "마지막까지 가져갈 내 유일한 재산이요." 그리고 50여 년 전 기억도 함께 꺼내 보였다.
조업 중 폭풍우 만나 침몰 후 표류
선원 1명과 천신만고 끝에 생환
사망 동료에 평생 죄책감으로 살아
원양선원 외화벌이 이바지했으나
파독 광부처럼 조명 못 받아 섭섭
예비 불법 어업국 지정 오명 억울
■4명 헤엄쳐 2명 섬에 도착
1963년 12월 30일, 제2 지남호가 사모아에서 폭풍우를 만나 침몰한 후, 당시 강정중 선장은 수영에 자신 있는 선원 4명을 차출했다. 구조 요청을 위해서였다. 침몰 직후 선원들은 약 100개의 유리 진공 부자와 대나무 깃대, 로프를 이어 만든 뗏목에 올라타 표류하고 있었는데 차출된 문 씨 등은 상어떼가 득실거리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때 대학 갓 졸업하고 체력에 한창 자신 있을 때 아입니꺼. 해운대에서 대마도까지도 갈 수 있겠다 할 정도로 겁이 없을 때였지."
수영 실력은 중요하지 않았다. "함께 살아남은 정명진 씨란 사람도 그랬을 거고 나도 그랬어요. 둘 다 토영(통영)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다가 겁이 안 났으요. 겁이 나면 등산도 못 하지. 둘 다 저 정도면 수영해서 갈 수 있겠다 하고 손을 들었어요." 하지만 바다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언제나 우리는 둥근 지구 제일 위에 있다 아이요. 앞은 다 내 아래에 가라앉아 있는데 수평선 말고 앞이 보일 택이 없죠. 껌껌한 바다에 뭐시 보이능교. 20시간 가까이 헤엄치고는 있지만, 옳게 가고 있는지도 몰라요. 불빛이 없으이."
4명이 뛰어들었지만, 문 씨와 정 씨는 앞서갔고 강동안 항해사, 강호일 갑판원 두 사람은 힘에 부쳤는지 뒤처져 따라왔다고 했다. 이후 모 언론사는 정 씨의 증언을 바탕으로 "3시간이 지났을 무렵 일등항해사 강 씨가 갑자기 '악' 소리를 내지르며 스르르 물속으로 잠겨버렸다. 상어가 그의 허벅지를 물고 늘어진 거다"고 보도했다. 그렇게 가까스로 두 명만 섬에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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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1월 4일 부산일보에 보도된 제2 지남호 침몰 사건. 부산일보DB |
"한참을 헤엄치니 파도 부닥치는 소리가 들려요. 얼마 안 남았구나. 5분 정도 더 헤엄을 치니 파도가 목까지 닿아요. 모래 바닥이야. '나 왔어' 이랬는데 아무도 대답이 없으요. 당시에는 산호초라는 거를 몰라. 산호초라는 단어도 몰랐다고. 그래 나중에 보니까 파도소리가 나는기, 산호초에 부닥치가 나는 소리라. 파도가 치는데 산호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어. 가까스로 사람 사는 섬까지 가서 거기서 뻗어버렸지. 피로하더라고요. 그때가 새벽이었는데 너무 추워서 야자수 잎을 좀 뜯어서 덮고 모래를 덮으니 조금 따뜻해졌어요."
먼저 도착한 정 씨가 손짓 발짓으로 설명을 했는지 그 섬(라카한카 섬) 사람들이 아침 일찍부터 문 씨를 찾아 나섰다 한다. "햇살에 눈을 뜨니 온몸이 굉장히 아팠어요. '아악' 소리를 지르고 내가 일나니까 사람들이 날로(나를) 찾아냈어요. 폴리네시아인이라는 원주민들이었지."
이후 섬 사람들의 따뜻한 간호 덕분에 문 씨와 정 씨는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입에 해수가 들어가노이, 입이 버꺼져서 먹을 수가 있어야지. 그 사람들이 빵을 주고 닭도 잡아주고 하는데 먹을 수가 없었어요. 누가 달걀 후라이를 하나 해주는데 그건 후루룩 넘어가더라고. 다음부터는 우리가 잘 먹는다고 매끼 달걀 후라이 10개씩을 해와." 그 섬에서 마니히키 섬으로 전보가 가면서 한국은 물론, 전 세계로 소식이 전해졌다.
■그날 이후, 살아남은 자의 의무
"내한테는 충격과 시련과 희망을 준 사건이었어요. 그 뒤로도 나는 바다에 대해서는 별로 겁나는 게 없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 문 씨는 제동산업이 인수·합병한 한국수산개발공사가 문을 닫은 1980년까지 그 회사에서 일했다. 현재 문 씨는 통영 굴을 러시아에 수출하는 일을 하고 있다.
"숨진 동료들에게 죄스러운 마음은 평생 지고 가야 할 짐이요. 그리고 그들의 희생이 절대 헛되지 않았다는 걸 후손들이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문 씨는 최근 이와 관련해 속상한 일이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언젠가부터 파독 간호사, 파독 광부가 산업 역군으로 엄청난 조명을 받고 있어요. 하지만 목숨까지 바쳐 국민에게 단백질 생산과 외화벌이에 이바지했던 원양 선원들에 대한 얘기는 없어 섭섭하요. 먼저 간 동료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한때 우리나라가 예비 불법 어업국(IUU)에 지정되는 오명을 뒤집어쓴 것도 문 씨에게는 억울한 이야기다. "우리는 돈을 벌자는 목적도 있었지만, 나라를 위해 이 한 몸 바치겠다는 마음도 컸어요. 그런 희생 뒤에 내 나라가 원양에서 불법을 저지르는 나라 정도가 됐다는 게 속상해요. 이런 나라를 믿고 그렇게 많은 이가 희생되며 개척을 했던 것이었나 하는 마음도 들어요."
문 씨는 한국수산개발공사에서 일했던 이들을 중심으로 2~3년에 한 번쯤 너덧 명이 만나고 있지만, 함께 살아나왔던 정명진 씨는 소식이 닿지 않아 궁금하다고 했다. "살아 있다면 나에게 연락을 좀 주소. 죽기 전에 꼭 한번 보고 싶소."
글·사진=이현정 기자 yourfoot@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