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형제들] 02번째 증언 "부전역에서 형이랑 놀다가 같이 잡혀갔어요. 세 번씩이나..."
"따라오라"는 경찰 한마디에 '악몽' 시작
퇴소해도 한 달만에 다시 잡혀가길 '반복'
형이랑 같이 끌려갔지만 안에서 못 만나
"한 대라도 덜 맞으려 하사품 받아도 헌납"
※편집자주-1987년 봄, 부산 사상구 주례동 백양산 자락 육중한 담장 너머로 '형제복지원'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12년 동안 공식 사망자만 513명. 이후 33년이 지났지만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피해자 지원까지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부산일보>는 '살아남은 형제들-형제복지원 절규의 증언' 영상구술사 프로젝트를 통해 피해자들 기억 속 진실의 조각을 맞춰보려 한다. 33인의 목소리가 모여 33년 전 '한국판 아우슈비츠'의 실체를 밝히는 한 걸음, 수만 명 피해자의 아픔을 치유하는 다음 걸음으로 이어지길...('살아남은 형제들' 시리즈는 매주 토요일 게재됩니다.)
<간추린 이야기>
김대우(49) 씨 몸에는 10여 개의 칼자국이 있다. 자해를 시도한 흔적이다. 경찰에 잡혀갈 때마다 너무 분하고 억울해 동맥을 그었다고 했다. 그래서 전과 개수와 칼자국 수가 정확하게 일치한다.
언제부터 인생이 꼬여버린 걸까. 거슬러 올라가면 꼬인 매듭의 시작점에 '형제복지원'이 있다.
1981년 여름 어느 날, 열 살 소년 김 씨는 평소처럼 부전역 앞에서 형과 놀다가 "따라오라"는 경찰의 한마디에 역전파출소로 끌려간 뒤 형제복지원으로 향했다. 김 씨 형제는 퇴소와 입소를 반복하며 81년, 82년, 83년, 세 차례나 형제복지원에 잡혀가야 했다. 그 사이, 직접 찍어 날랐던 흙벽돌로 만든 교회당이 완성돼 있었다.
구타가 일상인 형제원 소대 생활. 수많은 기합 중에서도 특히 견디기 힘든 건 '고춧가루'였다. 이마나 머리가 아닌, 코와 얼굴을 바닥에 대고 흔들림 없이 견뎌야 하는 악명 높은 '원산폭격' 자세다.
다치거나 병에 걸리기 일쑤였지만 의무실에 가는 건 하늘의 별따기였다. 누군가 운 좋게 '물약' 처방이라도 받은 날엔 옹기종기 모여앉아 그 친구의 상처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상처에 발린 달콤한 물약을 찍어먹기 위해서다.
김 씨가 형제복지원에서 끄집어 올린 유일하게 좋은 기억은 '풀장'이다. 무더운 여름날 사무실 옆 풀장에 몸을 담갔던 기억... 하지만 그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탈출 생각'이 가득했다.
아버지가 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나간 탓에 김 씨 형제에게 3번째 입소는 기약없는 기다림이었다. 어떤 연유에선지 다행히 1985년 10월 김 씨의 15번째 생일 며칠 뒤 서울소년의집으로 '전원 조치'가 내려졌다. 잼 바른 식빵을 먹을 수 있는 서울소년의집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김 씨 형제는 또 한 번 운좋게도 갱생원이 아닌 요한보스코(기술원)로 보내졌다.
하지만 거기까지. "엄마 찾으러 가자"며 형을 따라 부산으로 내려오면서 또 다시 악몽이 시작됐다.
부전역 근처 여인숙에서 생활하던 시절, 17살의 나이에 서면파 부두목 '까마귀'라는 이름으로 신문에 대서특필되며 '전과자' 딱지를 달았다.
김 씨는 당시 경찰이 몽둥이를 갖다 놓고 조폭으로 몰았다며 "억울하다"고 했다. 지금도 경찰만 보면 분노가 치밀고 욕설부터 튀어나오는 이유다. 특수절도, 본드흡입, 공갈 등 10개가 넘는 전과를 당장 바로잡고 싶지만,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형제복지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2018년 문무일 검찰총장과 부산시가 형제복지원의 인권유린에 대해 사과했지만, 정작 경찰은 요지부동이다. 김 씨는 "경찰은 사과 자체를 생각조차 안 한다"며 "다만 1만 원이라도, 형제복지원의 모든 피해자들이 죽기 전에 국가로부터 배상을 받았으면 한다"고 했다.
<더 많은 이야기>
■ '밖에서 놀다가' 경찰에 잡혀 형제복지원으로
1981년도에 들어갔다가 82년도 나오고 82년도에 들어갔다가 83년도에 나오고 83년도에 들어갔다가 85년에 나왔어요. 총 세 번 잡혀갔죠.
1971년에 부암동에서 태어났어요. 국민학교 1학년 2학년 3학년까지 잘 다녔는데... 1981년 여름 어느 날 저녁에 부전역 앞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경찰이 "따라와 봐라"하면서 바로 옆 부전역전 파출소로 딱 잡아가는 거예요. 이유도 없이 강제로 끌려간 거죠.
그래서 내가 "아니, 왜 잡아가냐"고 대드니깐 차 안에서는 안 맞았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형제복지원)사무실 앞에서 좀 맞았거든요.
형제복지원 안에서 고생 실컷 하다가 82년도에 어떻게 수소문해가지고 '고모'(아버지 친구의 부인)가 저를 빼왔어요.
그런데 한 달도 안 돼서 또 다시 그 역전파출소에 또 잡혀간 거예요. 우리 형님하고 같이 잡혀갔어요. (두 번 다?) 예. 총 세 번입니다.
83년도에 아버지가 또 배 타고 (육지로)나왔는데 아들들이 없으니까 찾으셨죠. 고모가 "형제복지원에 있을 수도 있다"고 얘기해서 아버지가 찾아왔고, 또 귀가조치를 받았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또 배를 타러 나가신 거예요. 우리 형제는 고모집에 있다가 부전동 시립도서관(부전도서관) 그 옆에 보면 지금 있는 그 파출소가 그때도 있었는데 거기서 또 잡혀간 거예요.
83년도에는 누가 데리러 올 사람도 없어서 계속 형제복지원 안에 있었죠. 그러다 마침 85년 10월 말 부산소년의집에 갔다가, 하루 머물고 바로 서울소년의집으로 가서 그 뒤에 나오게 된 거죠. (놀다가 끌려가신 거예요?) 예. 저녁에 놀다가요.
교회당을 짓기 위해 흙벽돌을 찍어 나르는 아이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20~30kg 흙벽돌 지고 산중턱으로
교회당 짓는다고 그 어린 아이를 갖다가 동원했죠. 교회 짓는데 쓸 흙벽돌을 직접 찍어서 만들었어요. 흙을 딱 채우면 위에서 한 사람이 찍어누르는 거예요. 찍어눌렀다 놓으면 흙이 탁 튀어오르거든요. 그러면 그걸 받아서 한 사람이 옆에다가 재어서 말리는 거죠.
벽돌 한 개 무게가 20~30kg 정도 나갈 것 같아요. 그 무거운 걸 우리가 지고 올라가는 거예요. 만약에 하나 깨뜨려먹었다 그러면 단체로 기합 받는 거예요.
(83~85년 2년 정도는?) 그때는 나는 노역을 안 했습니다. 하루 종일 딱 앉아 있는 거죠. 요렇게 가부좌 자세로 딱 있는 거예요.
(아무 것도 안 하고요?) 예. 형제원 갔다온 사람들 한 70~80%는 이 자세가 다 돼요.
밥을 제대로 못 먹었죠. 살기 위해서 먹은 거죠. 고깃국에 보면 고기 자체가 없어요. 김치도 보면 완전히 뭐 고춧가루도 아니고...
여름이 되면 날파리 날린다고 해서 '파리 잡기'를 했어요. 100마리면 100마리, 200마리면 200마리, "잡아라!" 하거든요.
그걸 목표를 못 채우면 또 맞는 거예요. 한 소대에 60~70명인데 정량을 어떻게 다 채웁니까. 절대로 정량 못 채웁니다.
그러면 가위바위보 해서 '파리 따먹기' 하는 거예요.
기합 중 하나인 일명 '한강철교'. 형제복지원 피해자 한종선 씨 그림
기합 중 하나인 '히로시마'. 형제복지원 피해자 한종선 씨 그림
■ 히로시마, 한강철교보다 힘든 '고춧가루'
기합을 줄 때 '원산폭격' '고춧가루' '히로시마' '나룻배' '한강철교' '김밥말이' 이런 식으로 쫘악 있거든요.
'한강철교'는 뭐냐면 사람이 줄을 쫙 서잖아요. 등 위에 다리를 올리는 거예요.
조장들이나 서무들이 그 위에서 밟는 거죠. 만약에 무너졌다 그러면 무너진 놈은 또 맞는 거예요.
그리고 '고춧가루'는 뭐냐면, 그게 기합 중에서 제일 힘들거든요.
'원산폭격'인데 머리가 아니라 얼굴을 바닥에 박는 거예요. 조금만 몸이 흔들린다 싶으면 발로 밟아요.
'히로시마'는 양손을 바닥에 대고 2층 침대 위에 다리를 걸치거든요. 그러면 손으로 이렇게 다리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거예요.
여름 때는 그냥 뭐... 아예 찜통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선풍기 자체가 없었거든요.
겨울에는 3단짜리 난로가 있었어요. 양쪽에 2개를 놓거든요. 소대장들은 이쪽에... 조장들 서무들은 요쪽에... 자기들은 좋은 데 자고 우리는 항상 추운 데서 잤어요.
신발은 고무신이었고, 어쩌다 운 좋으면 축구화를 줄 때가 있었어요.
그러면 오래 신으려고 나사를 박았어요. 나사 박은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잘나가네" 하면서 부러워했죠.
연말 되면 대통령 하사품이 와요. 최고로 기억나는 게 뭐냐면 '밀크카라멜'!
조장들한테 안 뺏기려고 숨겨 놓잖아요. 그런데 내 침대 주변으로밖에 못 숨기기 때문에 결국 조장들이 찾아냅니다. 다 뺏겨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줄 때마다 빨리빨리 먹었죠. 조장들이 달라고 하면 줘야 돼요. 그래야 한 대라도 덜 맞거든요.
난로가 설치된 내무반 모습.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상처에 바른 물약, 달콤해서 먹었죠"
이 아세요? 이 잡는 거 있잖아요. '소매 단' 같은 데 이가 있는데 그걸 잡고 그랬습니다.
피부병은 항상 걸리는 병이고, 눈병도 걸리면 최고로 추운 구석 자리로 밀었어요. 오줌싸개들하고 같이...
그러면 오줌싸개들은 항상 피부병이랑 눈병에 걸리는 거예요.
"아프다"고 해서 운이 좋으면 의무실에 갈 수 있어요. 하얀 색인데 그 물약이 달달하거든요 설탕처럼.
그걸 먹었어요. "야~ 의무실 갔다왔다" 하면서 자랑을 하거든요. "자 먹자 먹자" 하면서 상처에 바른 약을 손으로 찍어서 먹는 거예요.
알약은 많이 모아놨다가 확 털어먹기도 했어요. '죽자'고 해서. 근데 안 죽어요. 근데 갑자기 '우웨에엑~' 이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 형님하고 나하고 얼굴을 볼 수 없어요. 형님이 보고 싶어도 소대가 다르니까.
식당에서도 어떻게 봅니까. 사람들이 억수로 많은데.
줄서서 밥 먹고 "빨리! 선착순 10명!" 하거든요. 밥도 제대로 못 먹습니다. 대충 먹다가 그냥 빨리빨리 나가는 거예요
사무실 옆에 보면 풀장이 하나 있었어요. 풀장갈 때 그때가 참 좋았어요. 풀장갈 때 도망갈까 생각도 했는데 도망갈 틈이 안 나더라고요.
나이가 어리니까. 잡히면 맞아 죽으니까.
솔직히 지금 웃어도 웃는 게 아닙니다.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부서지죠.
백양산 자락 계곡물을 받아서 만든 풀장.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17살 소년이 서면파 부두목?
갑자기 "김대우 전원!" 이러는 거예요. '전원' 하면, 일단 형제복지원에서 빠져나오면 무조건 좋은 거잖아요. "와!" 했죠.
1985년 10월 말에 부산소년의집에 갔다가 하루 자고, 기차 타고 응암동 서울소년의집으로 갔어요.
분도반에 있다가 요한보스코 기술원으로 보내주더라고요.
거기서 나와서 팔십 몇 년도인지 모르겠는데, 기차를 타고 밑에 숨어서... 옛날에는 철판을 닫을 수 있었거든요.
그거 타고 부산 내려와가지고 부전역 옆에 부전여인숙에서 생활할 때, 죄도 없는데 경찰이 막 잡아가는 거예요.
열 몇 살인가? 88년 3월 5일입니다.
그 어린 학생을 갖다가... 어린 아이가 무슨 서면파 부두목 '까마귀' 하면서... 억울하게 잡혀갔죠.
아버지가 "대우야, 니 진짜 마약 했나?" 그러시는데 "아버지, 내 그런 거 못하는 거 알면서 왜그라노" 하면서... 어휴 진짜 생각만 하면...
제 전과가 지금 열 몇 개가 돼요. 특수절도... 본드는 하지도 않았는데 옆에 있는 애들이 했거든요. 같이 있었단 이유로 "니도 본드 했다" 돼버린 거예요.
여기 범죄기록 보면 88년도 3월 5일 맞잖아요. 이때부터 내 인생이 다 꼬여버린 거예요.
경찰이 무슨 방망이 같은 거 갖다 놓고, '조폭이다' 해가지고 막...
22살까지는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지를 못했어요.
이 흉터들이 전과 하나씩 생길 때마다 생긴 겁니다. 처음에 여기 동맥을 그었거든요. 안 죽었어요. 여기 그으면 죽는다는 거예요. 또 여기 그으면 죽는다고 하고. 그리고 또 여기 배에도...
그냥 주변에 있는 칼로 확 그은 거예요. 너무 억울하니까요. 전과 기록하고 계산해 보면 딱 맞습니다. 죄 없을 때마다 하나씩 그었으니까.
1988년 <부산일보> 3월 9일 자에 실린 '서면파' 관련 기사. 부산일보DB
■ 생계를 위해 껌팔이 신문팔이 앵벌이까지...
출소한 뒤 배운 게 있나 뭐가 있나 할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밖에 나와가지고 껌도 팔고 신문도 팔아보고. 박카스 사가지고 위에 우황청심원 같은 거 하나 딱 테이프로 붙여가지고 서면 술집 돌아다니면서 2000원에 팔고 했죠.
싸게 주고 가져와서 약간 비싸게 판 거는 솔직히 나쁘다면 나쁜 건데. 그래도 도둑질하는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솔직히.
(제일 마지막에 교도소 나오시고 나서는?) 내가 병이 있어가지고 '기초수급'으로 계속 살았죠. 가정을 못 꾸리잖아요 이 병 때문에. 결혼을 못하게 하거든요.
아예 일 자체를 못하게 했거든요. 술집도 안 된다 하고... 공장 다니는 것도 안 된다 하고. 옛날엔 그랬어요 옛날에는...
나 보고 죽으라는 소리밖에 더 됩니까.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육교 위나 지하철 계단 중간쯤에서 이렇게 손 벌리고 '앵벌이'도 했지요.
(그런 일도 하셨나요?) 했지요 그럼. 먹고 살아야 되는데요.
■ "경찰만 보면 나도 모르게 욕부터 튀어나와요"
좀 두려운 거예요 사람들이... 그래서 난 집 밖에 잘 안 나가요. 나갈 때도 마스크나 모자를 쓰고. 경찰만 보면 자꾸 짜증이 나는 거예요. 욕 하고 싶고.
경찰차를 보면 "확 씨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옛날에 술 먹었을 때는 경찰서에 찾아가죠. 떳떳하게 가가지고 "당신들, 선배들이 내 안 잡아갔나!" 소리쳤어요.
요즘은 술을 안 먹으니까 자신이 없어서 못 갑니다. 용기가 안 납니다. 근데 경찰청에서는 사과 자체를 할 생각을 안 합니다.
내가 그동안 배우지 못한 거, 죄 없이 잡혀간 거, 형제원에 끌려간 거, 이런 거 전부 다 보상을 받고 싶어요 진짜.
나뿐만 아니라 피해 생존자, 단 하루라도 잡혀간 사람이라도 단돈 만 원짜리 하나 주더라도.
국가에서 죽기 전에 다 보상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이대진 기자 djrhee@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