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형제들] 03번째 증언(2) "형 찾으려다 잡혀온 동생…결국 스스로 목숨 끊어"
밥 먹으러 줄 섰다 마주친 동생
형 찾으러 부산 왔다 서면서 잡혀와
형제복지원에서 만난 담임 교사
집에 연락해달란 부탁 끝내 '외면'
※편집자주-1987년 봄, 부산 사상구 주례동 백양산 자락 육중한 담장 너머로 '형제복지원'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12년 동안 공식 사망자만 513명. 이후 33년이 지났지만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피해자 지원까지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부산일보>는 '살아남은 형제들-형제복지원 절규의 증언' 영상구술사 프로젝트를 통해 피해자들 기억 속 진실의 조각을 맞춰보려 한다. 33인의 목소리가 모여 33년 전 '한국판 아우슈비츠'의 실체를 밝히는 한 걸음, 수만 명 피해자의 아픔을 치유하는 다음 걸음으로 이어지길...('살아남은 형제들' 시리즈는 매주 토요일 게재됩니다.)
<간추린 이야기>
'왜 내가 14살 때 형제복지원에 끌려가야 했나'. 그날 이후 최승우(51) 씨 가슴 속에 품고 있는 물음이다. 그리고, 답을 찾아야 하는 질문이 하나 더 있다. '왜 내 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나'.
1985년 봄, 형제복지원에 잡혀온 지 3년째 되던 어느 날이었다. 식사를 하러 소대별로 줄을 서는데, 순간 동생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부동자세로 입도 뻥끗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 씨는 얼굴을 찌푸리는 등 갖은 애를 쓴 끝에 동생과 눈이 마주쳤다. 형제는 서로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1986년 10월 아버지가 찾아와 귀가조치를 받은 뒤에야 비로소 동생이 잡혀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형이 보고 싶다"며 무작정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 온 동생은 서면 오락실에 들렀다 경찰에게 '잡혀' 형제복지원으로 끌려 들어왔다. 이후 동생 역시 최 씨와 똑같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경찰관에 의해 억울하게 끌려온 형과 아우. 하지만 형제의 원망과 분노는 부당한 공권력이 아닌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왜 좀 더 빨리 우리를 데리러 오지 않았을까.
더욱이 형제복지원 실상을 몰랐던 아버지는 "남자라면 (군대처럼) 그런 데 다녀올 수도 있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버지의 한마디는 깊은 상처를 남겼고, 이후 삶은 엇나갈 수밖에 없었다. 형제는 '공무집행방해'로 교도소를 들락날락 했고, 구걸과 막노동을 전전하던 동생은 결국 2009년 가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형제복지원 지옥에서 탈출한 지 23년 만이었다.
최 씨에게 '평범한 삶'은 특별한 무엇이었다. 형제복지원 안에서 동성에게 수없이 성폭행을 당했던 그는, 퇴소 후 여자친구를 만나면서 비로소 성정체성에 눈을 떴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여자친구는 만삭일 때 가족에게 붙잡혀 끌려가버렸다. 아이는 낳자마자 입양을 보냈고, 그녀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대한민국은 살 곳이 못 된다. 외국으로 가자'. 자포자기 심정으로 어선을 타고 전 세계 바다를 떠다녔던 최 씨. 불행인지 다행인지 배가 침몰하면서 구사일생으로 구조돼 다시 한국땅을 밟았다.
언론을 통해 형제복지원 사건이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게 되자 최 씨는 용기를 냈다. 2014년부터 형제복지원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며 국회 앞 농성, 단식투쟁, 삭발식, 국토대장정, 그리고 작년 11월과 얼마 전 5월 5일 어린이날 '고공단식농성'을 이어왔다.
오는 20일 제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포함한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비로소 작은 걸음 하나를 내딛게 된다.
"돈보다 '명예회복'이 우선입니다. 국가가 만든 '부랑아' 낙인을 벗겨달라는 겁니다."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진정한 사과를 위해 오늘도 최 씨는 국회 앞 농성장에서 새우잠을 청하고 있다.
언론 촬영 등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형제복지원 식당에서 밥을 먹은 박인근(왼쪽) 원장과 가족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더 많은 이야기>
■ 선생님께 집에 연락 좀 해달랬지만…
내가 별명이 뭐냐면 진짜 정말 재수 없는 별명이었어요. '통띠'라고 해서... 통띠가 뭐냐 하면, 얼굴이 조금 예쁘게 생기고 좀 귀엽게 생긴 아이들은 남자들의 '성노리갯감'이었죠.
저는 늘 어디어디 소대에 가면 소대장, 조장, 서무 이런 사람들한테 성폭행을 당했어요.
형제복지원에서 주는 밥은 거의 전어젓갈... 그리고 배추김치가 나오는데 고춧가루는 찾아볼 수도 없었어요.
박인근 원장이 어쩌다 식당에서 밥 먹고 하는 건 설정이죠. 형제복지원을 좋게 포장하기 위해서, 자기 가족들도 다 이 안에서 밥 먹는다는 걸 보여주기식이었어요.
1984년도 후반 즈음 짜장면이 처음으로 식당에서 나왔어요. 썩은 재료들을 가져와서 짜장을 만들다 보니까 냄새가 진동을 하더라고요.
냄새 때문에 못 먹고 눈치보고 있는데 중대장이 돌아다니면서 "이 새끼 왜 안 처먹어" 하면서 뒤에서 머리를 후려치더라고요.
식판을 들더니 "이 새끼!" 하면서 탁 찍었는데, 머리 뒤에 이만큼 갈라져버린 거예요. 피가 막 훅 나는데, 중대장이 "이 새끼 데리고 가" 이러더라고요.
그때 의무과를 갔었죠. 그런데 의사도 없고 그냥 원생들... 하얀 가운 입은 형들이 '된장'을 상처에다 붙여가지고 이렇게 감아주더라고요. 그게 다였어요.
이건 정말 충격적인 이야긴데... 제가 개금국민학교를 졸업했어요. 그런데 개금국민학교 때 담임선생이 형제복지원 개금분교 선생으로 들어왔더라고요.
그때가 84년도에 막 형제복지원에 개금분교가 들어올 때였어요. 이름도 안 잊어먹어요. 정병록 선생이라고...
"너 이 새끼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라고 묻더니 "집에 연락 좀 해 달라"고 했는데 결국 연락 안 해줬죠. 그 뒤부터는 저를 안 부르더라고요.
형제복지원 안에 들어와서 가르치는 교사들한테도 철저하게 함구를 시키는 모양이더라고요. '아는 사람이 있더라도 절대 말하면 안 된다'고...
짜장면용 면을 뽑고 있는 모습.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형 찾으러 부산 왔다 끌려온 동생
85년도 그때... 아마 그때가 봄 쯤이었을 거예요. 식당에 밥 먹으러 가는데... 소대에 줄을 서고 있는데, 그때 눈앞에 동생이 딱 보이는 거예요.
순간 너무 놀래가지고. 말 한마디도 못 했죠. 부동자세로 있어야 되니까.
얼굴을 막 인상 지으면서 쳐다보니까 동생도 나를 알아봤어요. 보더니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제가 동생과 같이 86년도 10월 30일에 아버지가 와서 귀가조치 됐거든요.
그때 들어보니, 동생은 85년도에 서울에서 아버지하고 있다가 형이 보고 싶어서 부산에 내려왔대요.
서면에 오락실에 있다가 경찰관에게 끌려가지고, 형제복지원에 들어오게 됐다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13소대에서 내가 겪었던 것들과 똑같은 일들을 겪었더라고요. 너무 기도 안 차더라고요.
결국 동생은 안에서 고통들이 트라우마들이 심하다 보니까, 사회에 나와서 서면 시내에 다니면서 구걸 생활을 하고...
일용직 막노동을 하다가 돈 못 받은 것도 많고 해서, 2009년도 10월 3일에 스스로 자살을 해버린 거죠.
경찰들이 잡아 넣었지만 국가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그런 생각조차도 못했어요.
그냥 부모 탓만 했죠. '왜 우리가 안에 있을 때 찾으러 오지 않았나'라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어요. 왜냐하면 동생하고 그때 귀가조치 되고 나서 아버지가 했던 말이...
군대를 생각했는지 "그런 데 들어갔다 올 수도 있지 인마!"라는 한마디... 그 한마디가 엄청나게 큰 충격이었고 상처였던 거죠.
그 뒤로 동생하고 내가 밖으로 나돌 수밖에 없는 거죠. 부모를 원망하니까.
줄지어 빵을 배식받고 있는 아이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여자친구마저 저 세상으로…
88~89년도에 여자친구를 만나면서 성정체성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어요. 이성을 처음으로 사랑하게 되었던 거거든요.
임신 10개월 됐을 때, 여자친구가 엄마하고 오빠한테 끌려가 버렸어요.
여자친구는 잡혀서 그때 당시 머리가 깎이고 다락방에 있다가, 아이는 낳아서 입양을 보내고... 그 친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하더라고요.
여자친구 오빠가 "니 때문에 이 새끼야 내 동생이 죽었다"면서 그때 내가 좀 두드려 맞았던 적이 있었어요.
그러고 나서 '이 대한민국이 정말 살 곳이 못 되구나. 외국으로 가자'라는 생각에 배를 타고 5년 동안 전 세계를 다녔던 거죠.
마지막에 배 탔을 때... 그때가... 아프리카 가나에 가서 참치 배를 탔었는데, 그 배가 오래됐다고 해서 고의로 침몰시켰던 거죠.
침몰시킬 땐 몰랐고, 침몰하고 나서 그 이후에 알았어요.
난 그때 당시 구조되고, 현지 가나인들은 좀 죽고... 그러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던 거죠.
그 뒤부터 동생하고 나하고는 계속 교대로 공무집행방해로 교도소 들락날락 하다가, 결국 동사무소에서 (기초생활)수급자로 만들어주더라고요.
27~28살 때 거의 듬성듬성 (이가)빠져가지고 30대 초반에 다 빠져버렸어요. 그때부터 틀니를 하고 생활했어요. 그러니까 사회 생활이 제대로 되지도 않고...
이거는 혈압약이고, 이거는 정신과 약, 이거는 당뇨약...
악몽이 그렇게 꿔지는 거예요. 형제복지원 아니면 경찰관에 대한 악몽...
형제복지원이 발간한 '새마음'지에 실린 최승우 씨 자작시 '비둘기'. 최승우 제공
■ '왜 잡혀가야 했는지' 진상규명을…
2014년도에 그 활동(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시작하면서, 계속 서면에 나와서 피켓 시위를 1년 넘게 했었죠.
2015년도부터 종선이(당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모임 한종선 대표)와 같이 국회 앞에 노숙... 단식... 삭발식... 국토대장정...
최근래 들어와서 작년 11월 6일에 고공 단식농성을 위해 국회 앞 국회의사당역 6번 출구 꼭대기에 올라갔었죠. 그때 심정은 죽을 각오를 하고 '법이라도 통과시키자.'
가해자인 국가는 저렇게 방치를 하고 피해자는 이렇게 죽을 만큼 고생을 하는데, '이게 과연 나라인가.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국회인가'라는 회의감이 들더라고요.
내가 15일 동안 단식할 그 시점에 자유한국당 황교안 당대표가 단식을 막 시작을 했거든요. 국회 본관 앞에 하얀 천막이 막 쳐지고 난로도 갖다놓고 '황제 단식'인 거야. 얼마나 그때 기분이 더러운지...
단식 24일째 되는 11월 29일에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필리버스터'를 하는 바람에 제가 충격을 받아서 쓰러져버렸죠.
(예전에 자유한국당)모 국회의원 사무실에 들어갔는데 보좌관이 하는 말이 "우리는 과거사 따위는 취급 안 한다. 관심도 없다"라는 그런 심한 말을 한 적도 있었어요.
'돈이 우선이 아니다. 보상이 우선이 아니고 진실규명을 해달라. 그리고 국가가 만들어 놓은 '부랑인·부랑아'라는 낙인을 좀 벗게 해달라. 명예회복을 해달라'라는 차원의 '진상규명'이에요.
말 그대로 조사를 하는 거죠. 조사를 해서 국가가 잘못했던 거를 인정을 하고, 대국민 사과를 해달라는 게 첫 번째 목적이에요.
왜 내가 형제복지원에 14살 때 잡혀갔는지... 내 동생이 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는지...
좀 진상규명에 최선을 다해달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대진 기자 djrhee@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