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형제들] 07번째 증언 "끌려갔다가 실려나와... 산 위에 파묻혔어요"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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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구타 공간 '선도실'
제아무리 힘센 깡패 출신도 못 견뎌
친했던 원생 시신, 매장 광경 목격
"인체해부용으로 쓴다" 증언도


<간추린 이야기>

10여 년 전, 가장 아끼는 후배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울증' 때문이었다. 김경우(51) 씨는 슬픔에 겨워하다 후배의 가정을 책임지기로 했다.

후배와 김 씨에겐 남몰래 감춰온 '아픔'이 있었다. '형제복지원'이란 상처다.

김 씨는 동생('살아남은 형제들' 02번째 증언자 김대우 씨)과 함께 부전역 앞에서 놀다 형제복지원에 잡혀갔다. 구타를 많이 당한 때문인지 입소 연도 등 기억의 조각이 동생과 조금 다르다.

하지만 충격적인 장면 몇 개는 선명히 각인돼 있다. 친하게 지냈던 김철원(?) 할아버지의 죽음. 어느 날 '선도실'에 끌려간 김 할아버지는 들것에 실려 나왔다. 그 길로 교회당이 있는 산 위로 옮겨져 그대로 묻혔다.

당시 '악대반' 생활을 한 덕분에 이동 제약이 덜했던 김 씨는 몰래 뒷길로 따라 올라가 그 장면을 지켜봤다.

김 씨 별명은 '도망자'였다. 틈만 나면 도망칠 궁리를 했고, 잡혀서 빠따(방망이)질을 당하기 일쑤였다.

한번은 '선생' 역할로 방문하는 외부 여학생과 사귄다는 이유로 150대를 연달아 맞았다. "기합 받고 끝낼래? 맞고 사귈래?" 김 씨는 매를 택했다. 때리는 이가 질릴 정도로 김 씨는 독종이었다.

김 씨에겐 평생 잊지 못할 이름 석자가 있다. 유난히 그를 많이 때린 인물이다. 형제복지원에서 나온 뒤 한동안 친구와 다리에 칼을 차고 다녔다. 그를 만나면 '작업' 하겠다는 마음이었다.

구타 후유증 때문인지, 어느 날 통증도 없이 치아가 하나둘 빠졌다. 지금은 남은 이가 거의 없어 음식을 제대로 씹지 못한다.

김 씨는 지금도 가끔 악몽을 꾼다. 꿈 속에선 반대로, 때리는 역할이다. 고함을 지르면서 때리다가 일어나 보면 온몸이 식은땀 범벅이다.

"한번은 옆에서 자던 아내 얼굴을 때린 적도 있어요. 그래도 지금은 아내가 챙겨주는 덕분에 많이 나아진 편입니다".

김 씨는 뒤늦게 가정을 꾸린 뒤 한시도 마음 편하게 쉬어본 적이 없다. 다섯 식구를 책임지기 위해 운전 일을 전전하다 지금은 퀵서비스 일을 하고 있다.

후배를 각별하게 챙겼듯, 힘들게 살아가는 형제복지원 출신들이 자꾸 눈에 밟힌다.

피해자는 아니지만 아내 역시 안타까운 마음이다. “곁에서 지켜보면 일반 사람들과 뭔가 달라요. 어린 시절부터 그런 경험을 했기 때문이겠죠".

흙벽돌로 형제복지원 내 건물을 짓는 장면.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흙벽돌로 형제복지원 내 건물을 짓는 장면.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더 많은 이야기>

■ "너희들은 사회 악이다"

저는 초혼이고 이 사람은 재혼이거든요. 원래는 가장 아끼는 후배하고 같이 결혼해서 살고 있다가...

(아내 : 거기도 형제복지원...) 예. 그 후배도 형제복지원 출신이거든요. 후배가 우울증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죠.

(아내 : 제일 처음엔 몰랐는데 그 사람들이 다 사회생활을 못 했잖아요.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이 다 형제복지원 출신이더라고요. 그런데 전 남편은 그걸 말을 안 했어요. 그래서 나는 어디 고아원 같은 데서 만난 사람들인가? 싶었죠. 조금 이상한 게 많아요 하여튼. 너무 어렸을 때부터 그런 경험을 했으니까... 같이 살아 보니 일반 사람하고 달라요.)

1979년도에 제가 처음 들어갔을 때는... 여건이 뭐 숙식 생활은 거의... 텐트 있다아입니까... 천막.

1981년도에 다시 들어갔을 때는... 그때는 이제 건물이 조금씩 지어지고 있었는데. 기초공사 이런 것도 없었어요. 벽돌을 막 착착 올려가지고 시멘트만 싹 발라버리면 끝이었으니까요.

샤워할 때도 들어가서 물을 틀면... 물이 한 번 쏴악 내려와요. 그럼 탁 꺼버려요.

"비누칠!" 하면 우리가 "비누칠!" 외치면서 그냥 쏴악 씻고. 금방 꺼버리거든요. 그러면 요령 없는 사람들은 비눗기 있는 상태에서 나와서 닦고 이래야 되니까.

그때 당시 박인근 원장이 딱 하는 말이 "너희들은 사회에서 악이다". 피부병 같은 거 걸리잖아요. "너희들은 치료할 자격도 없다". 조장이나 서무들이 소금으로 그냥 막 쌔리 막 피부에 문질러요. 그래서 오히려 더 상처가 심해지고.

본격적인 건물 공사를 하기 전 1970년대 형제복지원 모습.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본격적인 건물 공사를 하기 전 1970년대 형제복지원 모습.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흙벽돌' 벽 뚫고 필사의 탈출

제가 일곱 살 때인가 어머니하고 아버지가 이혼하시고. 그 뒤부터 가세가 완전히 기울어져가지고.

'부전여인숙'이라고 아직도 있어요. 거기서 이제 아버지하고 동생하고 같이 살았어요. 부전역 앞에서 우리는 항상 자전거 타고 막 이렇게 놀고 했거든요.

그런데 저녁에 갑자기 포터 같은 거 있잖아요? 그런 차가 와가지고 그냥 태워가버려요.

그래서 동생이랑 둘이서 울고불고 "어디 가냐"고 이렇게 하소연해도... 그 안에서 그냥 막 "조용히 해라"고 머리 쥐어박고 이래가지고.

제가 처음 끌려갔을 때가 1979년도인데, 어찌어찌 하다가 도망을 나왔어요. 형제복지원이 용당동 쪽에 있다가 주례동 쪽으로 넘어와가지고 그때는 한창 산 깎고 천막 치고 터 닦을 때니까 경비도 허술하고... 그래서 도망을 나왔다가 81년도에 다시 잡혀 들어가서...

(마지막에)나오기로는 제가 87년도... 그때도 아마 6~7월 달에... 27명이 모의를 했어요. '도망가자!'.

형제복지원 건물 구조가 어떻게 되냐면...완전한 콘크리트가 아니고 안에는 '흙벽돌'이에요. 겉은 두께가 한 1~2cm 정도 되는...

그냥 시멘트만 싹 발랐고, 안에는 흙벽돌이기 때문에 뜨거운 물을 계속 부으면 이 흙이 완전히 무너지거든요.

그래가지고 구멍을 내고 그쪽으로 해서 담 뒤쪽으로 스물일곱 명이 그냥 한 번에 '와아' 도망쳤죠.

별다른 기초공사 없이 흙벽돌로 건물을 짓는 모습.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별다른 기초공사 없이 흙벽돌로 건물을 짓는 모습.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시체를 '인체해부용'으로…"

오죽했으면 제 별명이 도망자였거든요. 툭하면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도망가려고 하다가 잡혀서 빠따(방망이)를 기본 30대 이상 맞고.

쌀가마 있잖아요. 포대자루요.그걸 목이랑 손에 구멍을 뚫어서 딱 덮어씌우고 여기다가 붉은 글씨로 '저는 도망자입니다' '사회의 악인입니다'라고 썼어요.

저한테 맞지도 않은 한여름에 그 두꺼운 군복을 입혀가지고. 양동이라고 해야 되나 그런 걸 두 개 해가지고 길게... 어깨에 울러매고... 똥 퍼가지고 산에다가 뿌리고 막 이렇게...

'선도실'이라고 있거든요. 깡패 생활 하다가 잡혀온 사람 뭐 '내가 내다' 하는 사람들... 어깨 힘주고 "내가 뭘 잘못했는데!" 하고 들어가죠? 나올 때는 진짜 거짓말 아니고 막... 실려 나와요.

어쩌다가 제가 '악대반'에 들어가게 됐어요. 기타 드럼 색소폰... 우리가 사회에 '위문 공연'도 나가고 했었거든요.

(악대반에서) 편안하게 좀 왔다갔다 하다 보니깐. 성폭행이라든지 구타라든지 그런 걸 심심찮게 많이 봤어요. 오죽했으면 남자가 남자끼리 성폭행하는... 그런 거는 뭐 다반사예요.

교회당 건물 지을 당시에 거기가 전부 다 그거였어요. 공동묘지. 맞아서 죽어서... 연고자가 없는 사람들은 그 뒤 산에다가 파묻고...

가장 기억에 남는 게 그 분이 아마 김철원? 저하고 친했는데, 그때 당시에 연세가 좀 있었어요. 그분이 하여튼 무슨 일로 거기(선도실) 끌려갔다가 실려서 나오더라고요.

그래가지고 딱 보니까 그 위로 올라오더라고요. 몰래 따라올라가서 딱 지켜봤는데 거기서 그냥... 묻어버리더라고요.

구타를 당해가지고 죽었는데 그 '사망서' 이런 걸 하잖아요. 병원들이랑 협약이 맺어져 있어서 '병이 있어서 죽었다' 이런 식으로 쓰는 거예요.

그거는 내가 이야기를 누구한테 직접 들었냐면 총무라고 있었어요. (나중에 사회에 나와서 만났는데) 자기가 직접 그런 얘길 하더라고요.

심지어 시체를 주면 '인체해부용으로 한다'는 얘기도 들은 적도 있고요.

형제복지원 교회당(새마음교회) 앞 야외기도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형제복지원 교회당(새마음교회) 앞 야외기도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빠따' 열 대 넘어가니 감각 사라져

외부에서 오는 선생들이 있었어요. 나하고 나이가 똑같은 여자가 있었는데 저하고 사귀게 됐어요.

"힘든 거 없나"(고 묻는데) 근데 솔직하게 말 못했죠. '괜히 발설하면... 첩자일 수도 있고...'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담배) '솔' 하고 '장미' 이런 걸 올 때마다 가방에다가 두 갑 세 갑씩 넣어와서 몰래 줬어요. "윗사람한테 줘라"

그런데 그 중에 한 명이 그걸 위에다가... 쉽게 말하면 '고자질'을 해가지고. 빠따(방망이)를 한 번도 안 쉬고... 150대를 정확하게 맞았어요.

"맞고 사귈래? 기합만 받고 끝낼래?" 그러길래 저는 "맞겠습니다" 이랬습니다. 10대 정도 맞을 때에는 "아야 아야" 이렇게 했었는데 그 이후로는 엉덩이에 그냥 감각이 없더라고요.

심하게 윗사람한테 달려들고 그러면... 약이 있었어요. 약을 주는데 그걸 먹으면 정신 상태가 몽롱해져요. 막 힘도 못 쓰고...

안 먹겠다고 하면 그냥 막 입 벌려가지고 주전자에다 물을... 어휴... 참... 지금은 이렇게 웃으면서 얘기하는데.

악몽을 꿔요. 악몽을 꾸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막 주먹으로... 어떨 때는 집사람 얼굴을 한 번 때릴 때도 있어요.

(아내 : 난 처음엔 '왜 저러지?' 생각했어요. 자꾸 고함을 지르고 막 이러더라고요.)

꿈에서는 내가 막 그 사람을 패는 거예요. 온 몸이 막 식은땀이고...

형제복지원 주변 골목길을 돌며 연주를 하고 있는 '악대반'.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형제복지원 주변 골목길을 돌며 연주를 하고 있는 '악대반'.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살아남기 위해선 '보복'해야

"차렷!" "이빨 꽉 깨물어!" 딱 힘주면 그냥 이유 없이 때리는 거예요.

"몇 대 맞을래?" "두 대요" "열 대!" 그러면 이유 없이 그냥 열 대 맞아야 되는 거예요.

(치아가) 아픈 것도 없이 그냥 이렇게 막 쑥쑥 빠지더라고요.

그 사람만큼은 내가 워낙 많이 맞고 했기 때문에 이름도 까먹지를 못 해요. 너무 생생하고... 이가 갈리지요.

그 양반을 우리 (형제복지원) 친구들이 만나면... '작업' 하려고요. 진짜 거짓말 아니고요. 항상 여기에... 칼을 차고 다녔어요.

시내 곳곳에 깡패들이 활개치고... 우리도 먹고살아야 되는데... 당하면 안 되잖아요.

예를 들어서 다른 애들이 누굴 때렸다, 구타를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든지 보복을 해야 돼요. 그래야 우리가 살아남으니까.

동생(친동생 김대우 씨·'살아남은 형제들' 2번째 증언자)은 기억이 생생하더라고요. 나는 워낙 맞아서 그런가 한번씩 깜박깜박 해요.

어떨 때는 마비가 와요. 머리가 되게 심하게 아프면... 이쪽이 딱 오른쪽이 그래요.

10년 넘게 결혼생활 하면서 거의 쉬어본 적이 없어요. 한푼이라도 벌어야죠. 지금 우리 식구가 5인 가족이잖아요.

형제복지원에서 나와가지고 오갈 데 없잖아요. 그러면 결과적으로 뭐 하겠습니까. 나쁜 쪽으로 거의 눈을 많이 돌리거든요.

운동 잘하면 깡패 생활... 아니면 뭐 어찌 하다가 사고쳐버리면... 교도소. 뻔한 거예요.

이유 없이 잡혀갔잖아요. 지금 우리 피해생존자 분들이 너무 힘들게 살아요. 지원이 좀 됐으면 좋겠어요. 솔직하게 그게 제 심정이에요.

(아내 : 삼촌(시동생 김대우 씨)도 그렇고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많고. 제가 피해자는 아니지만 옆에 같이 살고 있는데 보면 참... 마음이 진짜 많이 안 좋고 그래요.)

이대진 기자 djrhee@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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