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형제들] 09번째 증언 "부산역서 엄마 등에 업힌 채 끌려가…그길로 40년째 생이별"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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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랑 함께 끌려간 '형제복지원'
아동끼리 서로 때리고 맞으며 '감금 생활'
옮긴 시설서도 '맞고 일하는' 삶 그대로
가슴 속 한(恨)·응어리 사라지지 않아

※편집자주-1987년 봄, 부산 사상구 주례동 백양산 자락. 육중한 담장 너머로 '형제복지원'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12년 동안 공식 사망자만 513명. 이후 33년이 지나서야, 최근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작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부산일보>는 '살아남은 형제들-형제복지원 절규의 증언' 영상구술사 프로젝트를 통해 피해자들 기억 속 진실의 조각을 맞춰보려 한다. 33인의 목소리가 모여 33년 전 '한국판 아우슈비츠'의 실체를 밝히는 한 걸음, 수만 명 피해자의 아픔을 치유하는 다음 걸음으로 이어지길...('살아남은 형제들' 시리즈는 매주 토요일 게재됩니다.)


<간추린 이야기>

"엄마도 보고 싶고, 가족들도 보고 싶어요."

안종환(44) 씨가 간직한 엄마와의 마지막 기억은 따뜻한 등이다. 경북 점촌이 고향인 안 씨는 40년 전 부산역에서 엄마 등에 업힌 채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갔다.

너무 어릴적 일이라 가물가물하지만, 여러 사람들과 함께 탑차를 타고 거대한 철문 앞에 다다른 기억이 난다.

안 씨는 형제복지원 안에 들어가자마자 엄마와 헤어졌다. 엄마는 성인소대, 자신은 아동소대로 향했기 때문이다. 이후 안 씨는 한 번도 엄마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아동소대 문을 여는 순간 폭행이 시작됐다. 소대장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사정없이 뺨을 휘갈겼다.

사실상 감금 생활이었다. 밥을 먹을 때 빼고는 소대 안에서 지내야만 했다.

한창 신나게 뛰어놀아야 할 시기. 아동소대엔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재밌는 놀이 대신, 번갈아가며 서로 뺨을 때리게 시켰다. 안 씨 기억 속 아동소대는 맞고 또 맞았던 경험 뿐이다.

거기서 얼마나 지냈을까. 갑자기 방송에서 안 씨의 이름을 불렀다. 그를 포함해 4명의 아이들이 아동보호시설인 '덕성원'으로 옮겨졌다.

이름이 불리는 순간 지옥에서 탈출하는 기분이었다. 엄마 생사조차 몰랐지만 형제복지원을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좋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하루가 지나자 또 다시 폭행이 이어졌다. 이름만 다를 뿐, 똑같은 생활이 계속됐다.

안 씨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밭일을 해야 했다. 화장실에서 똥을 퍼다 날라 밭에다 거름으로 뿌렸다.

형제복지원 시절부터 안 씨는 뼈만 앙상한 마른 몸이었다. 우유 한 번 먹어본 적이 없었다.

다행히 국민학교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났다. 돌아가며 반찬을 싸주신 덕분에 영양을 보충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과 함께 시설에서 나와 생계 전선에 뛰어든 안 씨. 정주영 회장처럼 돈을 많이 벌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냉동탑차를 사서 전국을 누볐고, 생선 도매업을 하며 큰 돈을 만졌다.

하지만 주변은 그를 가만히 놓아주지 않았다. 어느날 시설 원장이 찾아왔고, 엄마라는 생각에 모은 돈을 빌려줬지만 결국 떼이고 말았다.

몇 번이나 나쁜 생각을 품었다. 손목을 그으려다 순간 '내 자신이 아깝다'는 생각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노가다 일을 하며 술과 담배로 세월을 보내다 10년 전 '좋은 사장님'을 만났다. 지금은 에어컨 설비 일을 하며 다시 힘을 내고 있다.

일에 미치다시피 생활하며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하지만, 마음 속 깊이 자리 잡은 '응어리'는 그대로다.

인터뷰 내내 연신 눈물을 훔치던 안 씨는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법을 통해 사각지대를 없애 달라"고 호소했다.

안종환 씨의 형제복지원 입소 당시 신상기록카드. 안종환 씨의 형제복지원 입소 당시 신상기록카드.

<더 많은 이야기>

■ 애들한테 '서로 때리기' 시킨 그 사람

힘들었던 건 먹는 거하고... 구타.

아기여도 어느 정도 통통해야 되는데 나는 당시에 바짝 말랐다고. 밥을 제대로 못 먹었지.

밖으로 못 나오게 한 걸로 기억해요. 아동... 애들은... 안에 열쇠가 있는 게 아니고, 못 나가게 밖에서 열고 하는 그런 문이었어요.

그리고 구타가 심했지. 많이 맞았지. 들어가자마자 맞았어요. 아동소대 문을 열자마자 맞은 겁니다. 그게 아직까지 생각이 뚜렷해요.

어떤 여성 같은 분이 얼굴에다 '팍팍' 이렇게 때리는 거지. 항상 맞았어요. 시간만 나면. "돌아가면서 서로 때려라" 시키고.

(그 사람을) 죽여버리려고 형제보육원(복지원)에 갔어요. 고등학교 졸업 후에. 없어졌더라고요.

너무 한이 맺혀갖고. 내가 너희들한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내가 맞아야 되고...

나 지금 그 생각하면... 분노가 마...

탑차를 타고 형제복지원에 끌려들어가는 장면. 형제복지원 피해자 한종선 씨 그림 탑차를 타고 형제복지원에 끌려들어가는 장면. 형제복지원 피해자 한종선 씨 그림

■ 엄마 등에 업혀 형제복지원으로

당시에 제가 아기였어요. 엄마 등에 업혀 온 것까지 기억납니다.

그러다가 부산역에 도착했는데 어떤 경찰관이 오라 하더라고. 엄마 등에 업혀갖고 파출소로 간 거죠. 내 아닌 다른 사람들도 모여 있었어요.

트럭 같은 데 있지 않습니까. 시골에 가면 소 몰고 가는 그런 큰 트럭. 거기 태우더라고.

도착한 데가 형제보육원(복지원) 주례동인데... 당시에 철문이었고... 내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머니하고 떨어지셔가지고?)

그렇죠. 거기서 이제 떨어진 거죠. 그 안에서.

왜냐하면 아동은 아동소대로 분류가 되고. 어른은 어른대로 분류가 되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나는 엄마랑 가족하고 이제 이별이 된 거죠.

아직까지 난 수수께끼입니다. 약 40년이 지나서 가족도 못 찾고. 얼마나 억울하겠능교.

무엇을 잘못해가지고 내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 되는지... 안 당해본 사람은 몰라.

형제복지원 아동소대의 어린이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형제복지원 아동소대의 어린이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지옥에서 나와 또 다른 지옥으로

내가 한 일곱 살인가 여덟 살 때 '덕성원'으로 간 걸로 기억이 됩니다.

이름을 호명하는 거예요. 김정미, 서승민, 김광주라고. 나까지 포함해서 네 명이 거기서 나왔어요.

너무 행복했었어 거기서 나가는... 이름 부르는 순간. 지옥에서 벗어난 거 있지 않습니까. 그런 기분이었는데.

근데 여기나 거기나 똑같아요. 들어가자마자 구타를 또 시작하는 겁니다.

그냥 뼈만 있고 살이 없었죠. 그 말 한마디에 다... 열악하다는 게 다 포함돼 있어요.

국민학교 때 좋은 선생님 만나서 돌아가면서 밥 반찬을 싸주셨는데... 그걸로 살찌운 겁니다. 우유 한번 못 먹어봤어요 어렸을 때.

도망은 가고 싶었는데 잘 곳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있었던 거죠.

똑같은 인간인데 왜 쟤들은 저렇게 살고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될까. 그게 억수로 궁금했어. 너무 억울했고.

우리는 학교만 갔다오면 일했어요. 형제보육원(복지원)이나 덕성원이나 똑같아요. 천국인 줄 알고 나왔는데...

똥 뭐 이런 건 기본이고 여름에. 수세식(화장실 변기)에서 똥을 퍼서 씨앗 있는 주위에다 다 날랐어요.

그 원장을 뭐라고 별명을 지었냐면, 우리끼리 '김일성'이라고 불렀어요. 완전 북한보다 더 심했어요.

먹는 거... 귤 이런 거 있죠. 며칠 지난 거 주고. 라면도 유통기한 지난 거. 정부에서 정부미 몇 년 안 팔리는 거. 그런 거만 먹고 자랐어요. 먹어도 죽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이 열망이 너무 강하다 보니까. 사회에 나와서 내가 돈을 벌고자, 정주영처럼 되고 싶어서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요.

진짜... 진짜 열심히 했어요.

형제복지원에서 빵 배식을 기다리고 있는 아동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형제복지원에서 빵 배식을 기다리고 있는 아동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돈도 못 받고, 장가도 못 가고

냉동탑차 살 돈을 모았어요. 어느 정도 생선을 살 수 있는...

여기서 남는 걸 억수로 싸게 사와서 요기서 푸는 거죠. 한 달에 500만 원씩 보험도 넣고 이렇게 했는데.

(덕성원 원장이)그걸 어찌 알고 나한테 찾아왔더라고요. 그때 내가 돈 한 3억 원 갖고 있을 시기였어요.

소송 비용이 필요하니까 빌려 달라는 거예요. 장가 갈 때 돌려준다고 하더라고요. 엄마라 생각하고 빌려줬는데.

25살 정도에 결혼할 여자가 생겨서 "저도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까 돈을 주시오". 그런데 안 주더라고요.

그때 제가 충격 받았어요. 돈은 돈대로 못 받고 장가는 장가대로 못 가고. 카드는 카드대로... 내 동의 없이 9개나 만들어갖고. 내가 사회에 나와서 다 갚아야 되고.

나 진짜 그 사람 죽여버리려고 고속도로에 다니다 보면 칼 있다 아닙니까. 세 개나 샀어요.

먹고는 살아야 되니까 '노가다' 있지 않습니까. 그걸 10년 일했어요. 다른 일은 못하고.

술 담배로 의지를 한 거죠. 술 담배가 없었다면 큰일이 일어났을 거예요.

말씀하시니 갑자기 생각이 나네요. 요만한 몽둥이로 내 머리하고 때려서... 그때 기절해가지고 실려갔어요.

여기(관자놀이) 맞고 여기(정수리) 터지고... 거기서 일어난 거죠 덕성원에서. 이 팔이 부서졌었어요 그때. 뼈가 덜렁덜렁 했다고.

이 분노가 너무 많다 보니까 맥주병 있잖아요. 이거를 씹은 적 있었어요. 너무 화가 나갖고. 그때 이빨이 좀 다 부서졌죠.

지금은 (손목 흉터가) 없어졌는데. 옛날에 그으려고 했어요.

여기... 한 번 긋고... (한 번 더) 하려고 하다가... 아까운 거예요 내 자신이.

이래 죽으면 너무 값어치 없다는 걸 그때 딱 깨달았지요.

일에 미치다 보니까 조금씩 없어지기 시작해서... 지금은 많이 호전됐고 완화가 되었어요.

형제복지원 식당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아동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형제복지원 식당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아동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복지계' 때문에 인생 망가져

엄마 이름은 기억합니다 '김성분'이라고. 내 추측인데요. 그냥 직감... 거기 형제복지원에서 (엄마가) 죽지 않았나.

본적이 있더라고요 그 (신상기록)카드에. 제 본 나이하고... 그때 이름이 '안종한'이더라고.

고향 마을 그 장면은 지금도 생생해요. 소 잡아서 일가들 불러가지고 잔치한 거. 기와집 큰 데 이래갖고.

돈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거는 돈 주고 살 수 없는 상처를 줬기 때문에.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서도 안 되고. 법을 통해서 확실하게 사각지대를 없애야 돼요.

독일 그 유대인 사건. 다 국가에서 사과했잖아요. 선진국이 되려면 이런 거부터 없애야 되고 치유를 해야지. 그래야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는 첫 발걸음이 됩니다.

부랑인이었다면 할 말이 없어요. 근데 저는 가족도 있고 떳떳한 국민의 한 사람이었는데.

아기 때부터 가족하고 대화를 못 해본 사람입니다. 한순간에 부산역에 와가지고.

(가족을) 정말 찾고 싶은데... 할아버지도 보고 싶고. 가족들도 보고 싶어요 지금.

제 나이가 사십 넘었어요. 잘 살고 있다가 괜히 경찰관에 의해서 한순간에 삶이 무너지고.

또한 덕성원 아동보호시설에 간 거... (형제복지원에서) 당한 게 또 일어나니까. 일어날 힘이 없는 거예요. 열심히 살고 싶어도.

당하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제 심정... 정말로. 얼마나 한이 맺히겠습니까.

진짜 열심히 살았는데. '복지' 쪽 이런 사람들 때문에 인생 다 조진 거예요.

그 응어리가... 이게 안 없어져요.

내가 당한 고통을 생각하면. 내가 열심히 한 노력의 값어치... 해왔던 내 노력의 대가가, 좋은 일하고 없어지니까.

이 사회라는 것이... 진짜...

이대진 기자 djrhee@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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