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형제들] 18번째 증언 "이름도 고향도 나이도...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았어요"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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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새하얘 별명 '백사'로 통해
목사님 보조 일하며 남-여 '쪽지' 전달
후원자에게 거짓 '감사 편지' 써야 해
몰래 전화 걸어 한 여학생 귀가 돕기도

※편집자주-1987년 봄, 부산 사상구 주례동 백양산 자락. 육중한 담장 너머로 '형제복지원'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12년 동안 공식 사망자만 513명. 이후 33년이 지나서야 올해 5월,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작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부산일보>는 '살아남은 형제들-형제복지원 절규의 증언' 영상구술사 프로젝트를 통해 피해자들 기억 속 진실의 조각을 맞춰보려 한다. 33인의 목소리가 모여 33년 전 '한국판 아우슈비츠'의 실체를 밝히는 한 걸음, 수만 명 피해자의 아픔을 치유하는 다음 걸음으로 이어지길...('살아남은 형제들' 시리즈는 매주 토요일 연재됩니다.)


<간추린 이야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새하얘 붙여진 별명 '백사'. 형제복지원에서 김상하(52) 씨를 모르는 원생은 거의 없다. 교회당에서 목사 보조로 일하며 간혹 청춘들의 '쪽지'를 전해준 인물('살아남은 형제들' 13번째 증언 참고)이기도 하다.

김 씨는 1976년 6월 남포동 부영극장 앞 육교에서 영문도 모른 채 단속원들에게 둘러싸여 형제복지원 파란 탑차에 올랐다. 버스 안내양의 이쁨을 받은 덕에, 여느 날처럼 버스를 타고 남포동에서 놀다 집(용호동)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용당동 형제보육원'에서 '주례동 형제복지원'으로 막 옮겨온 시기. 슬레이트 건물 몇 개가 전부였던 당시 김 씨를 비롯한 어린이들도 손수 건물을 짓는 데 동원됐다.

입소 당시 김 씨 나이는 66년생으로 '결정됐다'. '상아'인지 '상하'인지 불분명했던 이름은 '상하'로 '정해졌다'.

2년 뒤 전원 조치를 받았다. 부산 소년의집은 초등학교 과정이 없어 김 씨는 서울 소년의집으로 가게 됐다. 하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1년 만에 다시 재전원 조치가 내려졌다. 부산 출신이었던 김 씨는 부산으로... 목적지는 다시 '형제복지원'이었다.

도망갈 마음을 품었지만 소용없었다. 뛰어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운동화 뒤를 '꺾어 신게' 했다. 부산역에 도착하니 형제복지원 차량과 경비들이 눈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1987년 봄 박인근 원장이 감옥에 가고 형제복지원이 폐쇄되자 비로소 나올 수 있었다. 주례동 시절 초창기부터 마지막까지, 김 씨는 형제복지원 역사와 거의 함께한 셈이다.

그래도 운이 좋아 마지막 2~3년을 '편하게' 보냈다고 한다. 교회당 목사를 돕는 역할로 발탁돼 사무실에서 일했다. 눈에 띄는 외모에다 소대와 떨어져 '열외 생활'을 할 수 있는 자유. 남자소대와 여자소대 사이에서 또래 친구들의 '쪽지'를 전해주는 메신저 역할도 이때 본격적으로 하게 됐다.

하루는 한 여학생이 집에 전화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목사가 사무실 전화기 자물쇠의 열쇠를 김 씨에게 맡겼던 터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전화 통화에 성공했고, 며칠 뒤 그 아이는 귀가할 수 있었다. 김 씨 인생에서 가장 보람 있는 순간 중 하나다.

84년도쯤 동생이 형제복지원에 잡혀들어오기도 했다. 87년 퇴소할 때 연락이 끊겨 아직까지 생사조차 모른다. 배다른 동생이라는 이유로 적극적으로 챙기지 않은 건 아닐까. 김 씨는 못내 마음에 걸린다.

퇴소 후 서면 만화방 등지에서 생활하던 김 씨는 공장일을 시작해, 지금의 회사에서 30년 가까이 일하고 있다. 지금껏 친인척 한 명 없는 '나 홀로 세상'에서 외로이 자립의 길을 걸어왔다.

이름도, 고향도, 진짜 나이도 모르는 김 씨. 마음 속 한편엔 묵직한 응어리가 남아 있다.

형제복지원 내 낚시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김상하 씨(가운데 하얀 머리 소년).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형제복지원 내 낚시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김상하 씨(가운데 하얀 머리 소년).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더 많은 이야기>

■ 버스 안내양과 남포동

제가 부산 용호동에 살았었는데. (평상시처럼) 버스 안내양이 남포동에 내려다주면 시내 구경하다가 오후에 한 5~6시쯤에 집에 들어가려고...

그런데 부영극장 옆에 육교 위에서 형제원 단속반하고 파출소 몇 명하고 포위 식으로 돼가지고. 파란색 탑차에 그냥 실려가지고 가게 된 곳이 주례에 있던 형제원이었습니다.

당시에 대충 이 나이로 보인다 이래서 76년도에 66년생으로 만들었다가. 나중에 병역 신체검사 문제 때문에 그렇고, 검정고시 때문에 그렇고 이래갖고 66년생에서 68년생으로 고치게 돼가지고. 아직까지 그렇게 쓰고 있습니다.

(7월생도 실제로 7월인지 아닌지 모르네요?)

예. 그냥 뭐 내가 7월 7일이면 좋겠다 이래갖고. '상하'인지 '상아'인지도 모르고 그냥 서로 '상' 자에 물 '하' 자로... '상하'겠지 하고 한자 이름도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박인근) 원장이 호주였었는데. 나중에 원장이 출소해가지고 원에 있던 사람들을 다 정리했는갑더라고요.

(본적도 형제원 주소로?)

예. 여기가 고향이다 뭐...

처음 왔을 때는 천막 몇 동 있고. 그 다음에 슬레이트 건물이 서너 동 있은 거 같아요. 용당에서 막 이사도 오고...

80년대는 '소대'로 쳤었는데 그때는 '단'이라고... 1단 2단 3단 4단... 수용카드 작성하고 3단으로 아마 배치가 된 것 같아요.

78년도에 소년의집에 잠깐 갔다 올 때가 있었는데. 초등학생은 서울 소년의집으로 간다 해가지고 1차 2차 걸쳐서 한 100~200명 정도 가지 않았을까요.

형제원에서 나가는 것 자체만 해도 '설마 여기보다 더하겠나' 싶어서 다들 들떠있었고. 막상 가니까 더... 좋았지요.

79년도에 갔다가 재전원 조치가 됐습니다. 제가 부산에서 왔기 때문에 80년도에 거기서 형제원으로 다시 전원 조치된 겁니다.

도망갈 생각도 없잖아 있었는데. 기차를 한 칸이나 두 칸을 통째로 빌려가지고. 뛰지 못하도록 운동화 뒤를 꺾어 신어가지고.

부산역에 도착하자마자 안 그래도 형제원 차가 미리 대기하고 있더라고요. 경비들하고... 그래서 도망갈 엄두도 안 났고. 87년도 형제복지원 폐쇄될 때까지 있었습니다.

(그럼 주례에 형제복지원이 만들어질 때부터 문 닫을 때까지 거의 쭈욱?)

예. 그런 셈이죠.

형제복지원 선도차량(파란 탑차)에 올라타는 사람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형제복지원 선도차량(파란 탑차)에 올라타는 사람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서울 소년의집 시절 김 씨의 '아동카드'. 사실과 다른 형제복지원 기록을 바탕으로 '남포동 지역에서 구걸하다 단속됨'이라고 적혀 있다. 서울 소년의집 시절 김 씨의 '아동카드'. 사실과 다른 형제복지원 기록을 바탕으로 '남포동 지역에서 구걸하다 단속됨'이라고 적혀 있다.

■ 원생들 중 '백사' 모르면 간첩

제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하얀데. 낚시공장에 그 사진에 보면... 특이해서 다 알죠. 나는 다른 삼천 몇백 명 되는 사람들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다 저를 알 거라고.

(별명이?)

'백사'라고 불렸습니다. 이름은 몰라도 별명 대면 다 아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서로) 별명으로 다... 통했습니다.

80년도에 다시 와서는 자갈도 나르고, 보로코(블록)도 나르고, 시멘트도 나르고, 모래도 나르고, 이런 식으로. 건물 다 완성되기 전까지는 신체가 불구 아닌 이상은 대부분 다 사람들이 일을 해야 됐었습니다.

자루를 메고 '돈내기'라고 이래서 체크를 해가지고. 몇 개 이상 못 하면은 빠따를 맞든지 기합을 받든지... 한 이틀 일을 더 하면 되는 건데 왜 그런 식으로 구타를 하고 때렸을까...

아침부터 저녁 점호 끝날 때까지 무사히 넘어가는 날이 대부분 없고. 누구 하나 때문에라도 맞든지 그런 일은 다반사였기 때문에... 취침시간 들어가기 전까지는 매일 불안한 생활이었죠.

야간 중학교를 만들었고. 그 다음에 어린 애들은 개금(국민학교)분교라고 있었는데. 우리는 야간에 (교실을) 사용하고 초등학생들은 낮에 사용하고...

야간중학교 다니면서 목사님 사무실에서 일하게 됐어요. (아침)점호 끝나고 나면은 목사님 사무실로 출근했다가 다시 소대로 복귀해가지고 퇴근하는 이런 식으로.

편했지요. 다들 단체생활 하고 뭐 선착순 하고 이러는데. 소대에서 열외 생활을 할 수 있었으니까.

잔심부름도 하고... <새마음>지라는 책자를 또 발간했어요. 목사님 사무실 맞은편에 지금으로 치면 인쇄 작업이라든가... 거기도 왕래하면서. 뭐니 뭐니 해도 일단 소대에서 열외로 있는다는 게...

무거운 흙과 자갈 포대를 어깨에 메고 나르는 원생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무거운 흙과 자갈 포대를 어깨에 메고 나르는 원생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후원자에게 쓴 '거짓 편지'

그 안에서 아무리 철두철미해도 그래도 밥 먹으러 왔다갔다하면서 여자소대 애들하고 쪽지도 주고받은 일도 있고... 이런 과정에서 (한 여학생이) 자기 집에 전화 연락 좀 해달라고...

다이얼 전화기에 요만한 자물통이 잠겨져 있었는데. 그 목사님이 열쇠를 저한테 맡겨놓고 다녔었거든요.

집에 전화를 하도록 이제 열쇠를 한 번 풀어준 적이 있는데. 발각이 됐으면 큰일 날 그런 거였는데 어떻게 성공 돼갖고... 집에서 데리러 왔더라고요. 보람... 보람 있었습니다

(그 여학생은 집에 귀가를 하신 거네요?)

예. 외부하고 전화는 물론... 서신 편지 같은 것도 다 단절됐기 때문에. '하늘에 별따기' 같은 얘기죠.

저는 직접적으로 상대방의 후원 받아보고 이런 건 아닌데. 저쪽에서는 일방적으로 후원이고...

그러니까 내가 받은 것처럼 (편지를) 베껴주는 일을 했죠. (후원) 답장을 아동이 써야 되는데 그 선생이 아동 몫을... 10장이면 10장, 20장이면 20장 다 답장을 써가지고...

이제 우리는 필체가 아동이니까. 선물 잘 받았습니다... 용돈 잘 받았습니다... 내가 받은 것처럼 이렇게 (내용을) 쓴 답장이더라고요.

사진은 찍었는지... 찍어도 그런 데 사용했으리라고는 모르고 있습니다. '너네 후원자가 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알고 하는 거는 없어요.

그때 목사님이 말년쯤 돼서 호주로 간 다음에 낮에는 봉제공장 다니고 오후에 아마 야간중학교 다니고 이런 과정인 것 같은데.

도망가려고 형제원 추리닝 안에다가 이런 사복을 다 입고. 옷 박스가 어느 정도 1톤 차에 남아서 박스를 이렇게 세워가지고 그 뒤에 숨어가지고 나오다가... 경비가 차 나갈 때 검사하는데 그 후문에서 한 번 들켜가지고.

많이 맞았지만 그때처럼 진짜로 안 죽을 만큼... 선도실이라는 곳에 별도로 가서 맞고 다른 소대로 배치되고. 나머지 소대원들은 또 기합은 기합대로... 또 뭐 단체로 맞기도 하고...

70년대 슬레이트 지붕 시절 형제복지원 모습. 사진과 달리 실제로 여가 활동은 거의 없었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70년대 슬레이트 지붕 시절 형제복지원 모습. 사진과 달리 실제로 여가 활동은 거의 없었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배다른 동생도 끌려와 '생이별'

87년도 그때가 5월 6월쯤 돼서 하루에 몇 명씩 이렇게 상담 끝난 다음에 사회로 나오게 된 것 같습니다. 어린 사람들은 다른 시설로 전원조치 되고, 좀 성장된 사람들은 사회로...

형제원에 있을 때 동생도 왔었는데. 83~84년도인가 아마 그때쯤. 나는 몰라봤는데 지가 동생이라고 하더라고요.

87년도에 해산되면서 동생은 아마 다른 시설로 전원조치 됐을 건데. 나오자마자 그걸 챙겼어야 되는데 어디로 갔는지... 나와서도 그렇게 또 연락이 끊겼는데...

동생이 다니던 학교도 가보고 용호동도 가보고 이랬는데 별로 성과가 없었습니다. 엄마가 또 계모라서 그랬는가... 꾸준히 끝까지 안 챙긴 것도 아마 배다른 동생이니까 안 챙겼을 거고.

제가 형제원에서 나올 때 봉제공장에서 일했다고 12만 원인가 주더라고요.

서면에서 당시에는 뭐 500원만 주면 자는 데도 있었고. 만화방 같은 데 그런 데서 얼마 좀 있다가 감전동에 있는 스텐 공장을 누가 추천해서.

(그 다음에 일한) 실내화 공장에서 어떻게 이쪽 회사하고 인연이 돼가지고. 근 한 30년 가까이 되니까... 거의 요 회사에 다 있었습니다.

(가족을 찾으시거나?)

용호동에 가봤는데 지금 아파트도 들어서고. 머릿속에 그리던 용호동이 아니더라고요.

진상 조사를 해가지고... 나라에서 뭐 사과할 일 있으면 사과하고. 속에 응어리진 거 좀 풀고.

형제원에 있다가 나온 사람들은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충격이 많고... (형제복지원 안에) 있는 동안에 학업도 못 하고...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도 해줘야 되지 않겠나...

저 같은 경우에는 아직도 무학이에요. 이름도 몰라요. 고향도 몰라요. 본 나이도 몰라요. 그러니까 이건 뭐...

이대진 기자 djrhee@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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