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형제들] 19번째 증언 "구타, 기절, 장파열…죽을 고비 5번 넘겼어요"
14살 설날, 고향 가다 부산역서 붙잡혀
빠따질에 몰매, 장티푸스, 장파열까지…
얼음 깨 손·발 씻고, 눈병엔 햇빛 보기
무릎 붓고 대장 협착, 평생 '후유증'
※편집자주-1987년 봄, 부산 사상구 주례동 백양산 자락. 육중한 담장 너머로 '형제복지원'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12년 동안 공식 사망자만 513명. 이후 33년이 지나서야 올해 5월,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작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부산일보>는 '살아남은 형제들-형제복지원 절규의 증언' 영상구술사 프로젝트를 통해 피해자들 기억 속 진실의 조각을 맞춰보려 한다. 33인의 목소리가 모여 33년 전 '한국판 아우슈비츠'의 실체를 밝히는 한 걸음, 수만 명 피해자의 아픔을 치유하는 다음 걸음으로 이어지길...('살아남은 형제들' 시리즈는 매주 토요일 연재됩니다.)
<간추린 이야기>
한상현(55) 씨는 형제복지원에서 '드라큘라', 줄여서 '킬라'로 불렸다.
새마음소대 '에이스'였고 이후에 아동소대와 청소년소대에서 조장까지 맡았다. 형제원에서 적응을 잘한 것처럼 보이지만 7년 동안 죽을 고비를 다섯 번이나 넘겼다.
한 씨는 1978년 2월 설날을 맞아 서울에서 고향(함안)으로 가는 길에 부산역에서 붙잡혔다. 손에는 국민학교에 입학하는 막내 동생에게 줄 학용품 선물이 들려 있었다.
진주에 가는 새벽 기차를 기다리며 대합실에 앉아 있는데 '선도' 완장을 찬 이들이 다가왔다. 역전 파출소에서 직원이 "그냥 놔두면 안되겠냐"고 했지만 그들은 열네 살 소년을 굳이 차에 태웠다.
돈을 벌러 어린 시절부터 서울의 식당에서 일했던 한 씨. 반항심이 가득할 시기였다. 묻는 질문에 건방지게 대답했다는 이유로 소대장의 주먹질이 시작됐다.
1시간 넘게 이어진 구타에 오줌과 피똥을 싼 채 쓰러졌다. 널부러진 한 씨에게 조장 4명이 다가와 다시 몰매를 가했다.
몇 날 며칠을 쓰러져 있던 한 씨에게 원생들이 식당에서 몰래 밥을 가져와 조금씩 먹였다.
기력을 되찾은 한 씨는 이후 맞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국민교육헌장, 주기도문 등을 외워야 했는데 글자를 몰라 소리를 듣고 따라 외웠다.
두 번째 고비가 찾아왔다. 목공장에서 각목으로 머리를 맞았는데, 못이 박혀 있었다. 쇠독이 얼굴 전체에 퍼졌다. 의무실에서 간단한 치료를 받으며 끙끙 앓은 끝에 살아났다.
낚시공장에서 '소지'(청소)를 맡게 됐다. 틈을 엿봐 다른 소지 2명과 함께 탈출을 시도하다 잡혔다. 키가 가장 큰 한 씨가 주동자로 몰렸고 주먹질이 쏟아졌다.
한 대 맞고 쓰러지면 끝날 일을 요령 없이 계속 버티다 결국 기절했다. 다음날 소대장이 공장 지지대에 한 씨를 거꾸로 매달았다. 왔다 갔다 양쪽에서 소나무 방망이질이 이어졌다. 한 친구는 "그때 안 죽고 살아난 게 신기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한 씨는 말썽을 피운 이들만 따로 수용하는 새마음소대로 보내졌다. 열다섯 살이라 막내였다. 포대 무게만 60kg 정도. 처음엔 제대로 지고 나르지 못했지만 키가 크고 힘이 세지면서 어느새 소대의 '주력'이 됐다.
하루 120회를 못 채우면 모자란 숫자 만큼 빠따를 맞았다. 맞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120회를 다 채웠다.
1년이 채 안 돼 몸에 무리가 왔다. 무릎이 퉁퉁 붓고 제대로 걸음을 못 걸을 정도가 되자 다시 아동소대로 보내졌다.
덩치가 커 조장을 맡았는데, 일주일 만에 장티푸스에 걸려 또 한 번 죽다가 살아났다.
키 167cm에 몸무게 60kg. 허벅지 둘레가 24인치일 정도로 또래보다 건장한 체격이 된 한 씨. 체육대회를 하면 12개 종목 중 대부분 1등을 휩쓸 정도로 날아다녔다.
체육대회가 끝날 무렵 배를 탁 맞았는데, 장파열이 됐다. 끙끙 앓다 4일째 부산의료원을 찾았고 "생존율 25%"란 설명을 들으며 수술대에 올랐다.
다행히 살아났지만 배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고 장기 협착증과 복통 등 후유증이 생겼다.
'도망간다'는 이유로 살이 채 아물기도 전에 형제복지원으로 돌아왔다. 자원봉사를 하는 간호사 선생님이 매일 상처를 닦고 소독을 해준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다행히 친구가 수술 소식을 집에 전한 덕분에 5촌 당숙이 찾아왔다. 1985년 8월 지옥 같은 형제복지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여동생과 막내 동생을 찾아 함께 살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한 씨는 한 씨대로 동생들은 동생들 대로 피해의식과 서로에 대한 원망 때문에 다툼이 잦았다.
결국 동생들과 뿔뿔이 흩어졌다. 자살을 시도하며 한 씨의 삶은 또 한 번 망가졌다.
한 씨는 여러모로 존재감이 있어 박인근 원장 일가와도 간혹 교류를 하며 지냈다고 한다. 일반 원생들이 못한 경험을 했기에 가진 기억도 조금 다르다.
일례로 처남인 임 목사가 합류하면서 박 원장과 다투는 일이 잦았다고 기억한다. 특히 아동들을 어른 원생들처럼 폐쇄적으로 관리하는 데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고 한다.
외부에서 자원봉사로 온 간호사, 선생님 등 많은 분들의 보살핌 덕분에 형제원에서 버틸 수 있었다는 한 씨. 인터뷰 자리를 빌려 거듭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한 씨의 목표이자 바람은 피해자 관련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다. 노역에 시달리다 죽은 이들이 많은데, 네트워크를 통해 피해자들의 기억을 정리하면 유가족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상처를 치유하고 자립할 수 있도록... 한 씨는 특히 부산시가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식당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아동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더 많은 이야기>
■ 설날 고향가는 길에 '납치'
1978년 그날이 구정이었습니다. 가게를 마치고 서울서 기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한 게 (밤)12시 다 돼서 도착했으니까.
막내가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라)... 학용품을 좀 사가지고... 5촌 당숙 집에 할머니가 우리를 받아줘가지고 컸는데.
진주 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지요. 그냥 대합실에서 아침까지 기다리려고 앉아 있는데 (밤)1시쯤 사이에 '선도'라는 완장을 찬 사람들이 와가지고.
고향을 물어보고 부모님 물어보고 뭐 이래가지고 대답을 했죠. 근데 잠깐 따라오라 해가지고 따라 나갔더니 역전 앞 파출소로 가서...
파출소 직원은 "놔두시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했는데 선도원들이 "필요 없다"고 바로 차에 실어졌죠. 이상한 데서 내리고 그때부터는 뭐. 너무나도 따로인 세상에 왔으니.
주소를 해서 편지를 써준다 하더라고요. 집에 데리러 올 사람들한테. 근데 뭐 연락이 없고. 일주일 있다가 아동소대로 배치를 하더라고요. 완전히 세상이 다른 세상이더라고요.
들어가자마자 죽을 만큼 맞은 이유가 '아닙니다 맞습니다 네 아니요'만 대답해라 이랬는데. 반항심이 좀 많았었죠.
"아버지 죽었어? 살았어?" 했는데 "죽었소" "우리 엄마 도망갔소". 몇 마디 하다가 별이 반짝 하더라고요.
열중쉬어 해가지고 두드려 패더라고요. 쓰러지면 다시 일으켜 세우고. 1시간 반 정도 구타를 당했죠.
피똥을 다 싸고 오줌 다 싸고. 이빨이고 뭐고 콧물... 피범벅이고. 한쪽 구석에 던져놨는데 조장 4명이 와가지고 또 사정없이 두드려 패더라고요.
기절하고 깨니까 아침인지 점심인지도 모르겠더라고요. 그리고 온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그 당시에. 잠이 들었다 깼다 몇 날 며칠을 그렇게 지냈죠.
비몽사몽 있는데 누가 입에다 뭘 넣어주는 거예요. 그래 또 살살 씹어서 불려갖고 먹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친구들이... 죽을까봐... 자기들 그 식당 가서 밥 먹으면서 조금 훔쳐 와서 관리자들 모르게 입에 넣어준 거예요.
그렇게 이제 혹독하게 (신고식을) 치르고 살아났죠.
형제복지원 아래 하천에서 흙과 자갈을 져다 나르고 있는 원생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안 죽고 살아난 게 신기"
암기하는 게 6가지인가 있었어요. 국민교육헌장... 사도신경... 주기도문... 사훈...
안 보고 낭독할 수 있어야 통과가 되는데. 그 당시에 제가 글을 못 읽었습니다.
뒤에 앉아가지고 그 외치는 소리를 외워가지고. 그 외치는 애들보다 빨리 외운 거죠.
적응할 때쯤 목공장이라는 게 들어왔었어요. 일을 하러 가서 한 일주일 만에 각목으로 머리를 맞았어요.
피가 주욱 나더라고요. 거기 못이 있었던 거예요... 요만한 게. 요 자리가 이제 못에 찔린... 맞으면서 못에 딱 찔려갖고.
얼굴이 이렇게 부은 거예요. 쇠독이 올라 가지고. 시퍼렇게 타고 내려오더라고요.
처음으로 이제 의무실로 갔죠. 며칠 동안 또 비몽사몽... 헤매다가 또 살아나갖고. 어떻게 또 가라앉더라고요.
겨울 되면 애들이 손이 퉁퉁 다 터요. 씻지를 못 하니까. 병동 위에 조그마한 웅덩이가 하나 있었어요.
얼음 깨갖고 거기서 피가 나는 데도 씻어요. 돌 같은 거 주워가지고. 때 나오면 맞는다 하니까.
아폴로 눈병이 유행한 적이 있었어요. 소대 전체가 막 전부 다 눈이 벌건 거예요.
아침 먹고 와가지고 하는 게 소대 그 옆에 벽으로 쫘악 서가지고 하늘 쳐다보고 있어요.
햇빛을 보고 눈 감지 마라 하거든요... 눈물이 질질 나도. 그게 소독이에요.
어떻게든 그래가 또 다 나았어요. 주사도 약도 없이.
79년도쯤 낚시공장이 들어왔었어요. 매는 거마다 불량이 나고 손에 찔리고 이러니까. 패다 패다 안 되니까 이제 나는 포기를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이제 소지(청소)를 시키더라고요. (소지를 하면) 관리자들의 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 잠깐 잠깐 있어요.
(탈출을 하려고) 풍선공장이라고 있었는데 그 뒤에 파란 통이... 물통 같은 게 촤악 재여 있었어요. 그 뒤에 가서 3명이서 통 하나에 다 숨었죠.
잡혔죠. 정말 무식하게 맞았습니다.
꿇어앉아서 있는데 때리는데... 주먹으로 딱 여기를 때리니까 몇 바퀴 굴러서 저기까지 가는 거예요. 그러고 기절하면 되는데... 안 하고 다시 들어와가 꿇어앉고. 그래가 더 맞은 거죠
그 다음날 일어나니까 소대장한테... 주동자라 해갖고... 낚시공장 위에 보면 축을 받쳐주는 삼각형으로 이렇게... 거기다가 밧줄을 매갖고 거꾸로 매달아가지고... 뒤로 손 묶어가지고.
저기서 밀고... 가면 저기서 때리고... 양쪽에서 방망이 커다란 소나무 방망이를 들고 때리는 거예요. 죽으라고. 그게 몇 대 맞았는가 기억도 없이 기절해버렸어요.
그러고 살면서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한 10년 전인가 친구가 이야기를 해주더라고요. 니 그때 안 죽고 살은 게 희한... 신기할 정도다...
78년도까지만 해도 인원이 그렇게 많지가 않았어요. 제가 들어갈 때만 해도 1800에서 2200명 왔다갔다 했어요.
딱 '2차 공사' 하러 들어가니까 인력이 동원되는 게 애 어른이 없는 거예요 이제. 오늘 저거 돌 다 안 깨면 안 되고. 며칠까지 저 2층 집이 안 올라가면 안 되고.
많이 맞고... 참 진짜 지금 내가 생각하면 너무 많이 죽었을 거예요 그 당시에. 힘없는 사람들도 많아요 사실은 거기에. 일하다가 쓰러지고.
84년도 85년도쯤 되니까 인원이 늘기 시작하더라고요. 3000명 넘어가고. 성인들이 많이 잡혀오더라고요 그때부터는.
형제복지원 교회당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원생들(오른쪽 두 번째가 한 씨). 한상현 씨 제공
■ 60kg짜리 120회
15살 말쯤 새마음소대로 갔죠. 말썽자들만 모아서 노역만 시키는 소대에 있었는데. 시멘트 져다 나르고... 자갈 져다 나르고...
포대 지는 중량이 60kg 정도 돼요. 근데 저는 얹으면 주저앉아버리니까. 맞는 거 말고 육체적으로 고통이 이제 시작된 거죠.
삽질부터 이제 퍼주는 거부터 시작을 하고... 그 다음에 들머리 하다가... 조금 더 크니까 지고 나르는 걸 시작했죠. 16살쯤에 이제 새마음소대 주력부대가 됐죠 제가.
120회. 60kg짜리를 (120회) 이상 넘겨야 되는 거예요.
119회 하면 빠따 1대. 만약에 100회밖에 못 가면 빠따 20대.
너무 그게 이제 무서워서... 120회를 다 채웠죠. 초능력이 있는 것처럼 달렸죠.
비가 조금 있는 날 고무신을 신고 뛰니까 내리막을 내려오면서 발이 이렇게 가다가 딱 굽혀졌는데. 뼈가 나올 정도로 다 파인 거죠.
근데 치료도 못하고 그대로 일을 계속 했죠. 절룩거리면서.
너무 힘든 거예요 이게. 아침에 일어나면 일어나지를 못하겠는 거예요. 안 일어나면 패요.
억지로 지고... 식은땀 질질 흘리면서 가요. 웃기는 게 한 다섯 번 정도 하고 나면 몸이 풀려갖고 아픈 게 없어져요.
한 1년도 안 돼서 어느 날 갑자기 양쪽 무릎이 퉁퉁 붓는 거예요. 한 발도 앞으로 갈 수가 없는 거예요. 계단마다 뒷걸음을 해서 다 내려댕겼어요.
아동소대에 이제 다시 복귀를 했죠. 일이 안 되니까.
1m 68cm에 몸무게가 58~60kg 정도 나갔었어요. 이 허벅지가 24(인치)가 나갔어요. 이 둘레가. 그 정도로 몸이 좋고 이러니까 조장을 시켜주더라고요.
조장을 하고 한 일주일도 안 돼가지고... 장티푸스가 걸려버렸어요.
한여름에 열이 39도 40도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거예요. 열이 더 올라가면 죽는다는 거 아니까 이불 안 덮어주고. 계속 닦아준 거예요... 찬 수건으로.
일주일 동안 앓은 거 같아요. 그래 또 나았죠.
사실은 구타를 안 할 수가 없죠. 한 명이 잘못해도 전체 빠따를 때립니다 나는.
내가 하지 않으면 이 질서가 무너져서 중대장이 올 것이고. 중대장의 눈이 넘어가면 원장이 올 것이다. 강도는 이거보다 훨씬 강하다.
다 인지해요 그 이야기를. 내가 이런 말 하면은.
지금까지는 그래도 같이 있던 소대원들 중에 저보고 멱살 잡을 정도로 할 친구는 아직 아무도 없고. 한 친구는 내가 조장할 때 같으면 형제원에 있을 만 했답니다.
체육대회 때 장애물 달리기를 하고 있는 한 씨(오른쪽 빨간 반바지). 한상현 씨 제공
■ 장파열 4일만에 수술
(박인근)원장은 저보고 '꼴통'이라 그랬거든요. 저를 부를 때 항시 "꼴통 저놈" "잘해 임마" "사람 돼야 돼" 맨날 내보고 그랬거든요.
그 당시에 제 별명 '드라큘라'였는데. 어릴 땐 이게(치아가) 더 커보였나 봐요. '킬라'로 이제 자연스럽게... '킬라' 하면 다 알죠.
정확하게 내가 85년도인지 84년도 가을인지는 모르겠는데. 체육대회를 했었습니다.
끝나다가 이렇게 배를 탁 맞았는데 그게 '장파열'이 됐어요. 그 자리에서 119 싣고 구포에 있는 병원에 갔죠. "이상 없다... 델꼬 들어가라" 하더라고요.
소대에 들어오면 문 잠가버리니까. 아 좀 있으니까 너무 아픈 거예요 배가. 4일 정도 아무것도 못 먹고 그러고 있었어요.
4일째 병원을 델꼬 가더라고요. 부산의료원 (당시) 연산동에...
의사가 하는 말이 "한종현 군은 장파열 수술이고..." "생존율은 25% 정도... 사인해주세요".
"알았습니다" 하고 바로 사인을 해버리더라고요.
동생도 보고 싶고... 할머니도 보고 싶고. 마취를 놓은 상태인 데도 그 짧은 순간에 눈물이 나더라고요.
대장 파열이니까... 3~4일 동안 방치해놓으니깐 창자 속에 있어야 될 세균들이 온몸에 다 퍼진 거죠.
다 끄집어내갖고 씻어가지고 다시 다 밀어넣었다 하더라고요.
(회복 중에) 배에서 물이 나오는 거예요 여기서. 시커멓게 구멍이 나 있는 거예요 배에서.
살이 다 안 찼는데 (퇴원하고) 형제원 들어왔는데. 그 당시에 자원봉사하러 왔던 간호사 선생님인데. 최은주 선생님인지 이은주 선생님인지 기억이 안 나는데. 정말 감사하게 그 선생님이 매일 와가지고 안에 다 닦아내고.
그렇게 또 고비를... 죽을 고비를 넘기고. 39kg인가 41kg인가 나갔어요... 수술하고 나서.
의료원에 있을 때 친구가 찾아왔더라고요. (형제원) 안에서부터 친한 친구인데... 그 친구가 소식을 듣고.
고향 주소를 불러주고 '내가 지금 죽다 살아났다' (집에) 이야기 해도. 그래가지고 그 친구가 가게 되고.
어느 정도 회복단계에 있는 중에 집에서 찾아온 거예요. 당숙이. 며칠 있다가 이제 '귀가조치 한다'.
체육대회 때 수상을 하고 있는 한 씨(빨간 반바지). 한상현 씨 제공
■ "죽든 살든 알아서 해라"
(1985년) 8월 17일날 220만 원 정도의 적금을 받아서 숙부님하고 이제 고향에 갔죠.
노가다... 요즘 말하면. 첫날 하는데 일을 너무 잘한다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포클레인 이런 게 없었고 전부 다 삽·곡괭이거든요.
(오후)3시에 참을 국수를 먹어버린 거예요. 먹고 일하려는데... 쓰러지는 거죠.
고향 친구가 오토바이를 타고 함안역까지 와가지고... 함안서 기차를 타고 사상 와서 사상에서 택시를 타고 형제원 철둑 밑에까지 와갖고. 그 친구가 나를 업고 형제원 정문 앞에까지 왔죠.
(경비원이) "나가라... 들어오지 마라" "죽든 살든 알아서 해란다".
나는 형제원에 가면 이 수술을 다시 해줄 줄 알았죠. 난감하더라고요.
친구가 나를 다시 업고 부산의료원으로 갔죠. 여기서 수술해갖고 이랬는데 이렇게 다시 왔다니까 "입원 수속을 밟아서 정식적으로 하세요" 해서 "나는 가족도 없다".
부산의료원 바로 옆에 파출소가 하나 있었어요. 거기 너무 힘들어서 이렇게 가다가 앉았는데 기절해버린 거죠.
(깨어나 보니) 병동 저 뒤에 중환자들 암환자들 있는 데... 죽으면 (시신) 씻는 데 그 앞에 벽쪽에... 밀대 침대에 누워 있더라고요.
아픔은 없어지고... 며칠 굶어놓으니까 협착이 떨어진 거죠.
그러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는데... 조금만 하면 들러붙는 거예요 창자가. 너무 아파서 손을 못 대고 살았어요. 지금까지 56살 동안에.
무릎하고 배는 아무리 더워도 잘 때는 덮고 자야 돼요. 그 정도로 후유증을 지금 가지고 있고.
형제복지원 교회당 입구 계단 앞에 선 한 씨(뒷줄 오른쪽)와 친구들. 한상현 씨 제공
■ 피해자들 네트워크를 위해
군대 영장이 날아왔더라고요. 방위들 댕기는 데. 교육 제대로 못 받았어요.
어중이떠중이 모아다가 제식 훈련을 가르치는데 뭐 됩니까. 내가 나가갖고 제식 훈련 시키고. 형제원에서 몸에 딱 붙어있는 것처럼...
교육 받고 그때부터는 창원 함안을 10년 넘게 있었죠. 남동생을 중3때... 내가 함안을 가서 자취를 하면서 공부를 시켰죠.
(남동생이) 고등학교 한 2학년쯤에 여동생을 찾았죠. 그러고 이제 3명이서 한집에서 살았죠.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까 3명이 다 부대껴요 서로가. 막내는 형 니 때문에 평생을 갖다가 원망하고 살았다고 생각하고 있고.
여동생은 여동생대로 남의 집 보내져가지고 어렵게 살았다고 원망을 가지고 있고.
나는 나대로 뭣도 모르고 돈 벌러 나가갖고 형제원에서 8년을 갖다가 썩고... 몸이 이래 엉망진창으로 왔는데.
그때 당시에 나는 여동생한테 돈을 벌면 다 갖다줬어요 모으라고. 한 50만 원 되면 도망가버리고... 돈 100만 원 되면 도망가버리고. 다 쓰면 어디서 전화 와서 "오빠 여기 있다... 데리러 온나".
몇 번 그러다가 한 번... 뺨을 갖다 한 30대 때렸죠. 잘못했다 안 하니까.
12시에 일 마치고 택시 마치고 집에 딱 가니까 텅텅 빈 거예요. 용달차 불러갖고 도망가버렸네 애가.
자살을 시도했죠. 못 먹는 술을 먹기 시작했고. 또 한 번 완전히 망가졌죠.
지금은 이제 형제복지원에 대한 네트워크... 아직 나오지 않고 있는 이 친구들이 다 만나져가지고 체계적인 연대 식으로 정리돼서 다 맞춰지면.
죽은 사람들 너무 많거든요. 우리가 기억을 해놓으면 유가족한테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그런 네트워크가 만들어지는 게 내가 지금 희망사항이고.
피해자들 있잖습니까. 이 사람들에 대한 보상이라든지 사과라든지 당연히 또 이뤄지겠지만.
차후 특히 부산시가 피해자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죽은 사람도 너무 많고... 저 같은 경우에도 그 잘나갔다는 사람도 자살을 시도했으니...
너무 많이 자살해서 죽었고... 요번에 알아보니...
남아 있는 사람들이라도 더 이상 자살이라든지... 사회 반항인으로 안 살 수 있도록 조치가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대진 기자 djrhee@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