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형제들] 20번째 증언 "나와 누나 '형제원'에 맡긴 아버지, 2년 뒤 본인도 잡혀와"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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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원 어떤 곳인 줄 모르고
남매 맡기고 사라진 아버지
본인도 잡혀와 정신이상자로

사회선 '고아' 낙인에 비행 생활
사장 '매타작'에 '적금' 떼이기도
세 가족 비극…책임 물어야


※편집자주-1987년 봄, 부산 사상구 주례동 백양산 자락. 육중한 담장 너머로 '형제복지원'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12년 동안 공식 사망자만 513명. 이후 33년이 지나서야 올해 5월,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작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부산일보>는 '살아남은 형제들-형제복지원 절규의 증언' 영상구술사 프로젝트를 통해 피해자들 기억 속 진실의 조각을 맞춰보려 한다. 33인의 목소리가 모여 33년 전 '한국판 아우슈비츠'의 실체를 밝히는 한 걸음, 수만 명 피해자의 아픔을 치유하는 다음 걸음으로 이어지길...('살아남은 형제들' 시리즈는 매주 토요일 연재됩니다.)


<간추린 이야기>

"너거 아버지 왔다" 경비아저씨의 말에 한종선(44) 씨는 '드디어 형제복지원에 나간다'고 생각했다.

잠시 뒤 한 씨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아버지가 원생들과 똑같은 파란 추리닝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4년 10월 어느 날, 아버지는 학교에 갔다온 9살 한 씨와 12살 작은누나를 데리고 시내 구경을 시켜줬다.

새 옷과 신발까지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동광파출소 앞 벤치에서 "잠깐 앉아 있으라"는 말과 함께 아버지는 사라졌다.

잠시 뒤 형제복지원 차량이 파출소 앞에 섰고, 사람들이 한 씨와 누나를 들쳐업고 태웠다.

1987년 3월, 형제복지원 폐쇄 결정이 내려지면서 서울 소년의집으로 옮겨갈 때까지. 한 씨는 하루도 빠짐없이 구타와 노역으로 점철된 일과를 보냈다.

자신이 당한 성폭력을 제외하고 가장 끔찍했던 기억은 무엇일까. 그는 간질(뇌전증)을 앓던 한 친구가 매맞다 쓰러진 뒤 돌아오지 못한 일을 떠올렸다.

매를 맞으며 발작과 제정신을 왔다갔다 하던 그 친구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던 중 방망이에 머리를 강타당했다. 머리가 터졌고 고름과 허연 액체가 흘러나왔다.

소대 현황판에는 '의무과 1'로 표시됐다가 '병원 1'로 바뀌었다, 얼마 뒤 '총원 120'으로 1명이 줄어든 채 그 친구는 돌아오지 못했다.

한 씨는 서울 소년의집과 마리아갱생원을 거쳐 1991년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고아' 딱지를 지닌 아이들에게 사회는 냉혹했다.

한 씨는 첫 공장에서 친구가 저지른 '차 털이' 누명을 썼다. 이후 "너거 같은 고아 새끼들은 손버릇이 문제"라며 사장의 매타작이 시작됐다.

옆 공장 형님이 "그렇게 맞다가 뒤지겠다"며 서울 천호동의 구두공장을 소개시켜줬다. 구두 한 켤레를 혼자서 온전히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익혔다.

월급은 고작 30만 원. 그마저도 25만 원은 "적금을 들어주겠다"며 사장이 가져갔다. 150만 원을 주겠다며 스카웃 제의도 있었지만 부산 출신 여사장님을 엄마처럼 여기며 계속 일했다.

1996년 아버지를 찾겠다며 그동안 모은 돈을 요구하자 사장은 돌변했다. "니 돈이 어딨냐"며 내민 통장의 명의는 사장 이름이었다.

"형제복지원에 다시 집어넣는다"는 협박에 공장을 뛰쳐나왔고, 그길로 비행청소년 생활이 시작됐다.

교도소를 들락날락 하는 과정에서 경찰 도움(?)으로 부산에 사는 큰누나를 찾았다.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에 신세를 질 수 없어 100일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나쁜 짓'을 하며 다시 교도소에 수감된 한 씨. 면회를 온 큰누나의 "너 이런 모습 보일려고 나 찾았냐"는 한마디에 충격을 받아 마음을 고쳐먹었다.

2000년대 초 마지막으로 출소한 뒤 닥치는 대로 일했다. 하지만 2007년 허리를 다치며 또 한 번 나락으로 떨어졌다.

자살을 시도하기 직전 '기초생활수급' 제도를 알게 됐고, 수급권 신청을 위해 동사무소를 찾았다 아버지와 작은누나 소재를 확인했다.

언양과 부산의 정신병원에 수감돼 있던 아버지와 누나. 형제복지원에서 정신이상자로 전락한 모습이 꿈이 아니었다.

최소한 아버지와 누나를 이렇게 만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고 싶었다. 한 씨는 2012년 무작정 피켓을 만들어 상경했다. 국회 앞에서 1인 (노숙)시위를 이어가며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책 <살아남은 아이>의 저자 겸 주인공인 한 씨. 국회에서 고공 노숙농성을 한 최승우('살아남은 형제들' 03번째 증언자) 씨 등과 함께 지난 5월 '과거사법 개정'을 이끌어냈다.

"피해자들이 억울함을 풀고, 책임 있는 이들의 진정한 사과를 받아낼 때까지. 피해 당사자들이 스스로 기록하고 스스로 말해야 합니다".


형제복지원 입소 당시 신상카드에 실린 9살 소년 한종선. 한종선 제공 형제복지원 입소 당시 신상카드에 실린 9살 소년 한종선. 한종선 제공

<더 많은 이야기>

■ "잠깐만 앉아 있어" 그 한마디

1984년 10월로 돼 있을 거예요 아마. 학교를 작은누나랑 나랑 이렇게 같이 갔다가. 그날따라 집에 왔는데 아버지가 집에 있는 거예요.

부산역 그리고 자갈치시장 뭐 이런 데 용두산공원까지 다 돌고. 영화 한 편 보고 옷도 사주고.

그러고 나서 집에 가는 길에 동광파출소가 있었어요. 아버지가 "잠깐만 여기 앉아 있어라".

파출소 앞으로 형제복지원 차량이 섰고. 거기에서 세 명이 내렸고. 한 명은 파출소 소장하고 악수하고. 한 명은 내 앞에서 누나랑 나랑 달래주고 있었고. 그리고 한 명은 파출소 문 앞에 있었고.

사인 같은 거 그 사람들이 하는 거 보고, 저를 이제 번쩍 들고 누나 번쩍 들고 차에 실은 거죠.

식당에서 밥 먹는 것조차 '선착순'이었다. 한종선 그림 식당에서 밥 먹는 것조차 '선착순'이었다. 한종선 그림
양치는 굵은소금이 전부였다. 한종선 그림 양치는 굵은소금이 전부였다. 한종선 그림

■ 구타-선착순-구타-노역-구타

시간 순서대로 (형제복지원) 하루를 이야기를 하자면...

새벽 4시에서 5시경에 기상을 해요. 굵은소금을 손바닥에 다 받아서 손가락으로 양치를 했고.

조장들이 바가지로 물을 부어 줘요. 세 바가지를. 부어 주는 속도에 맞춰갖고 물 다 떨어지면 나가야 되는 거예요.

기상나팔 소리 울리고 기도문 같은 게 스피커로 나와요. 그러면 그거 따라 부르고.

5시 반쯤 중대장이 문을 따요. 밖에서. 그리고 안에서는 소대장이 철창 문을 따고. 중대장이 인원보고를 받아요.

6시 될 때까지 운동장에서 군가 부르면서 구보 돌다가 줄을 맞춰서 서가지고. 한 열씩 식당에 들어가갖고 밥을 받아 먹어요.

항상 선착순으로. 밥 먹는 시간은 5분 안쪽도 안 되는 거죠. 선착순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은 또 두드려 패고... 빠따 치고...

아침 8시에 (형제원 내)분교에 가는 학생들은 학교 가고. 나머지 학생들은 노역을 하는 거죠.

봉투 접는 거... 모나미 (볼펜)심 작업하는 거 있었고. 과일... 우산 달려있는 거 있죠. 찍어먹는 거.

제일 재밌어했던 게 뭐냐면 8연발 권총... 화약총 있죠. 갖고 놀아야 할 시기에 나는 이걸 만들고 있었다는 거. 그거에 좀 꽂혀 있었던 거 같아요.

11시 반에 이제 작업을 끝내고. 또 4열종대로 열 맞춰갖고 밥 먹으러 갈 때 또 군가를 부르면서 구보를 돌고. 5분 내로 밥 다 먹고.

12시 반에서 2시 반까지의 '단체 기합'이 대개 있었던 거죠. 계속.

개금분교 앞에 가스통을 매달아 놓은 게 있는데 그게 이제 '종'이에요. '깡깡깡깡' 이렇게 치면 전 소대원들이 식당에 가서 콩국하고 공갈빵...(먹어요)

자유시간을 30분... 근데 이 30분도 조장 마음이라. "일점!" 하면은 움직이질 못해요. "2점" 해야지만 자유롭게 풀리는 거예요.

4시에서 5시... 또 저녁식사 시간 사이잖아요. 또 소대를 가갖고 또 두들겨 맞고.

저녁식사 시간에 내려와갖고 또 구보 돌고. 똑같은 패턴... (밥 먹고) 들어가서 또 맞고.

훈령 같은 거 뭐 이런 거. 이걸 이제 또 4열종대로 다 맞춰 앉아갖고 그거 암기해야 되고.

6시 반쯤 되면 이제 그 중대장이 또 소대를 돌면서 인원점검 받고... 보고 받고... 그다음 밖에서 문 잠그고. 안에서 문 잠그고.

스피커폰에서 막 울려요. "하나님이 어쩌고저쩌고... 일과가 끝났다" 뭐 이런 식으로.

그러고 이제 자유시간이 주어져요. 취침 되면 9시부터는 이제 2인 1조로 불침번을 서고.

그게 일과예요.

방망이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한 친구. 한종선 그림 방망이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한 친구. 한종선 그림
피를 흘린 채 쓰러진 친구는 의무실로 실려간 뒤 돌아오지 못했다. 한종선 그림 피를 흘린 채 쓰러진 친구는 의무실로 실려간 뒤 돌아오지 못했다. 한종선 그림

■ '총인원 -1' 그 애는 어디로

내 얼굴에 이거 흉터... 하루는 밥 먹기 전에 운동장에서 '선착순'을 시킨 거라. 나보다 한 몇 개월 늦게 들어온 친구가 있었어요.

"빨리 와" 하면서 앞을 딱 봤는데 앵글이 하나 삐죽 나와 있는 거야. 순간적으로 피한 게 여기 얼굴에 박혀가지고 기절해버렸어요.

눈 떠보니까 의무실이라. 빨간약만 바르고 거즈만 이렇게 딱 붙여가지고. 쇳독이 올랐을 거 아녜요. 이게 팅팅 부은 거예요.

이 상태로 죽는 줄 알았는데 또 살긴 살아지데요. 이상하게.

볼거리 걸렸을 때도 사제 약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그리고 홍역 걸렸을 때도 치료가 뭐냐면 팬티만 입은 채로... 소대 내부가 시멘트 바닥이잖아요. 거기에서 30분에 한 번씩 뒤집는 거예요.

뭐 정확하게 끔찍한 이야기를... 이야기할 수 있는 거라면... 나를 이제 성폭행했었던 그 사람... 그 기억하고.

그냥 인정사정없이 막 두들겨 팰 때가 있어요. 제일 아픈 부위는 '발바닥'. 야구방망이로 휘두르는 것처럼 그런 속도로 발바닥 맞아 봐요. 죽어요 진짜.

그리고 무릎 꿇고 손바닥 펴가지고. 이 자세로 몽둥이를 이렇게 맞을 때. 그게 두 번째로 제일 아프고.

(간질을 앓던) 그 친구가 맞는 도중에 발작이 왔고, 조장은 그 자리에서 막 잘근잘근 밟고. 근데 애가 맞는 도중에 갑자기 또 정신이 확 돌아온 거예요. 그래 이제 "살려달라"고 이렇게 또 막 하는 도중에 애가 또 픽 한 거예요.

쓰러지는 과정에서 몽둥이가 이제 머리에 빡 터졌는데... 피고름 같은 게 쫘악 흘러 내렸어요. 허연 액체랑... 그러면서 얘가 눈이 완전 뒤집어졌고. 팔은 바들바들 떨고 있고...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고. (입에서) 거품은 계속 나오고 있고. 그래 들쳐업고 의무과 갔어요.

소대장 책상 앞에 현황판이 있어요. '의무과'에서 '병원'으로 바뀌어요 다시. 얘가 안 돌아오고 120명으로 총인원이 바뀌어요. 그럼 난 이제 (걔가) 죽었다고 보는 거죠. 그런 경우를 내가 두세 번 봤다고.

그 '물고문'은 아주 특별한 케이스라. 취침시간(전) 8시 되면 자유시간이잖아. 그때는 조장들도 웬만하면 터치를 안 해요. 내가 걸린 거예요.

빨랫감 위에서 뛰노는 거 보고 "개새끼 따라와" 하면서 세면장으로 바로 끌고 들어간 거예요. 옷 다 벗고...

그래 또 두드려 맞다가 "살려달라"고 막 바지끄댕이 잡고 매달리니까 "개새끼야" 하면서 손발을 다 묶어버리는 거예요.

그때 한겨울이었거든요. 찬물 촥촥 끼얹는 거라. 잡수통에다가 집어넣어갖고 숨도 못 쉬게 만들고. 깔딱깔딱하면 또 대가리 빼고 또 다시 집어넣고.

그때부터 이제 찬물에 대한 공포가 생긴 거라. 찬물로 샤워를 못 해요... 한여름에도. 그게 이제 몸이 기억하는 트라우마지.

(운동장에) 서가지고 있는데 경비아저씨가 온 거예요. "니가 영태 아들이야?" 이래요. "예 맞는데요" 이러니까 "야 너거 아버지 왔다" 이런 거예요.

나는 '귀가'를 생각한 거죠. 근데 아버지가 똑같은 (형제원) 추리닝을 입고 있는 거예요. 순간적으로 '이건 뭔가 잘못됐다'.

그때부터 이제 '아버지를 어떻게 죽일까' 이런 생각만 하고 있었지. 원망이 차 가지고...

추리닝 보는 순간부터 "아버지 여기 왜 왔노?" 이렇게 됐지. "신애(작은누나)는 잘 있나?" 이 말 한마디 했고. 내가 "신애 또라이 다됐다". 그 말 하고 그냥 돌아서 왔지.

신규 입소자를 싣고 형제복지원에 들어가는 차량. 한종선 그림 신규 입소자를 싣고 형제복지원에 들어가는 차량. 한종선 그림

■ "형제복지원에 다시 집어넣는다!"

(1987년에) 원체 급박하게 폐쇄 결정이 나가지고. 사람 구조하는 목적으로 (서울 소년의집) 수녀님들이 와가지고 버스 3대로 우리를 차에 실어서 나눠서 온 거거든요.

91년도까지 있었나... (91년) 초까지 있다가 '마리아 갱생원'으로 넘어가서... 91년도 때인가 나왔죠.

성남 태평동 거기에서 한 6개월 정도 일을 했는데. 같이 취업을 했던 친구가 '차 털이'를 하다가 걸린 거예요. 동네 주민들한테.

그래갖고 이놈은 도망쳐버리고. 그랬더니 주민들이 다 나한테 손가락질 한 거예요. '저놈'이라고 '저놈'이라고.

빠따 15대 맞고 파출소에서... 손바닥 15대 맞고. 사장을 불렀죠.

"아이고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막 그러고 뭐 쓰고 나와서. 그러고 나서 그 다음날부터 사장의 매타작이 시작된 거라. 너거 같은 고아 새끼들은 손버릇이 문제라면서.

옆 공장에서 일하던 형이 "너 여기서 일하다가는 맞아 뒤지겠다. 내 좋은 자리 소개시켜 줄게" 한 곳이 서울에 천호동에 그 구두공장이라.

그때 당시에 월급이 30만 원. 근데 내가 가진 기술이 그 당시에 기본이 150만 원. 25만 원은 사장 이름으로 적금을 꽂고. 5만 원만 내가 한 달에 월급 받았는데.

한번은 금강제화하고 엘칸토 바이어 형들이 와가지고 시험을 한 거예요. 거기서 내가 1등을 했어요.

"형 따라 안 갈래? 150만 원 줄게" 이러는 거예요. 그때 사장이 부산 여자였거든. 진짜 뭐 엄마처럼 대해주는 것처럼 난 느껴져서 "아 난 안 간다"고 막 그랬지.

96년 IMF 터지기 직전에 아버지 찾게 (그동안 모인) 돈 달라니까 (사장이) "니 돈이 어디 있냐". 통장을 딱 보여주는데 그 사장 이름이 적혀 있는 거예요.

금융실명제법이 그때 만들어진 거라. '니 돈 없다' 이 소리라.

"니 형제복지원에 다시 집어넣기 전에 돈이 필요하면 가불을 해라" 이러면서 10만 원 수표를 한 장 주는 거라.

집어들고 공장으로 안 가고 바로 도망가버렸지. 형제복지원에 잡혀갈까봐 다시... 그러고 나서 이제 비행청소년이 진짜 돼버린 거고.

형제복지원 내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아동 원생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형제복지원 내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아동 원생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큰누나와 재회, 아버지·작은누나는…

교도소를 몇 번 왔다갔다하게 된 거죠. 그러는 과정에서 내가 큰누나를 찾게 돼요.

오토바이 절도(누명)로 내가 파출소에 잡혔어요. "훔친 거 아니다... 내 후배 꺼다". 훔치지도 않은 거 훔쳤다고 범죄자 만들 생각하지 말고 우리 큰누나나 우리 가족 좀 찾아달라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죠. 형제복지원에서부터 이야기를 쫙 해줬드만. 지문으로 큰누나 주민등록번호를 찾아낸 거예요.

그 연락처 받고... 밤 12시경에 슈퍼가 아직도 문 안 닫고 공중전화가 있더라고.

"여보세요" 하니까 누나 목소리가 딱 들린 거예요. 아무 말도 못 하겠는 거라. 근데 큰누나가 딱 한마디 하는 거야. "니 혹시 종선이니?" 이런 거예요. 이십 몇 년 만에. 와 울음이 쏟아지더라고.

누나 만나러 이제 부산역까지 온 거죠. 98년도 때. 요만한 방구석에 매형하고 조카랑 누나랑 나까지. 거기서 한 100일 정도 생활하다가 '이건 아니다' 싶은 거라. 그래갖고 "서울에 눈구경 하러 갈게" 하면서 도망치듯이 도망친 거예요.

또다시 후배들 만나면서 나쁜 짓 하다가 교도소 가게 된 거죠. 그래 누나가 왔어. "너 이런 모습 보여주려고 나 찾았냐" 이러는 거예요. 그래 순간 뒤통수에 해머로 맞은 듯한 느낌이 드는 거야.

2002년 2001년 그쯤에 다시 나와서 내 후배고 선배고 연락처 다 끊고. 노가다에서부터 안 해본 거 없이... 막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 그러다가 2007년도 때 허리가 나간 거고.

몸뚱이조차도 고장이 났으니까 먹고 살 길이 없잖아요. 자살 시도하기 전에 인터넷에다 '신문고' 비슷한 거에다 글을 올렸는데. 기초생활수급자 한번 동사무소 가서 신청해보라.

그래 동사무소에 갔더니 '부양 의무자'라고 하는 거예요 갑자기. 주소대로 찾아가 보니까 언양 보람정신병원이었고.

형제복지원에서 아버지랑 누나가 정신이상 된 거는 알고 있었는데. '그게 착각이 아니었구나. 꿈이 아니었구나'라는 걸 알게 된 거죠.

매일 점심과 저녁 사이, 콩국과 공갈빵 1개가 간식으로 주어졌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매일 점심과 저녁 사이, 콩국과 공갈빵 1개가 간식으로 주어졌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아무도 해결 안 해줘 '스스로'

최소한 아버지랑 누나를 이렇게 만든 책임에 대해서는 알아야 되지 않겠냐. 2007년도 때 아버지랑 누나를 찾으면서 그 생각을 했는데...

어떻게 알릴까가 되게 중요하더라고요. 선뜻 생각나는 게 뭐가 있겠어요. 박인근(형제복지원 원장) 찾아가서 죽이는 거? 묻지마 칼부림?

2008년도 때 광우병 촛불집회가 있었죠. 뉴스를 신뢰를 못 하겠는 거라. 어떤 게 맞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듣고 싶었던 거예요.

근데 집회 현장까진 가지도 못 했어 나는. 어떤 아저씨가 막 항의를 한 거라. 경찰이 뭔데 이렇게 길을 막냐고.

그러니까 지휘하는 사람이 "다 잡아들여!" 이렇게 돼뿐 거라. 끌려 들어가갖고 두들겨 맞고 이제... 해갖고 (벌금) 250만 원 나온 거예요. 정식재판을 청구를 해서 1심부터 대법까지 무죄가 다 나온 거예요.

우리나라는 어디서나 집회·시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1인 시위는 더더욱 불법이 아니다라는 걸 알게 된 거예요.

형제복지원 사건을 알릴 때 이런 식으로 집회·시위를 하면 되겠구나.

몇 년 뒤 (2012년부터) 국회 앞에다가 이렇게 설치해 놓고. 노숙을 하기 시작한 거고.

처음에는 사람들이 막 멱살 잡고. 얼굴에 침 뱉고 가고 막 협박하고. 왜냐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잖아. 대한민국 민주국가에서.

"니들이 뭔가 잘못했겠지".

"그래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범죄자) 그런 사람들이 잡혀갈 수도 있고. 근데 죄를 지었으면 죗값을 받게끔 교도소로 보내면 되지. 그 시설 안에 가둬 놓고 사람을 죽이는 게 말이 되냐고".

처음에 전규찬 교수님을 만나면서 <살아남은 아이> 책을 쓰게 됐지만. 국회에서 이제 학자로서 발표회가 있지 않습니까. 그걸 지나가다가 우연찮게 나를 본 거예요.

나의 입소자료 속에 내 사진을 본 거예요. 이 아이의 정체는 뭘까.

(교수님이) "기억나는 그대로 한번 써보시라" 해가지고 한 게 <살아남은 아이> 책이 된 거예요.

87년도 때 폐쇄될 때부터 생각했었던 게 뭐냐면 '이 형제복지원 사건은 누군가 언젠가는 해결해주겠지' 하면서 믿어왔거든.

그런데 아무도 해결을 안 해주니까. 결과적으로는 내가 피해 당사자로서 할 수밖에 없는 위치까지 온 거죠.

진상규명의 목적은 말 그대로 피해 당사자들의 억울함을 풀게끔 하는 거고. 그거에 대해서 사과할 부분이 있으면 국가는 사과를 해야 되고.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게끔 열어주는 것.

그때까지 우리는 좀 더 건강하게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기록하고. 증거로서 차곡차곡 스스로 말을 해야 된다는 거죠.

그게 이 운동의 핵심이에요. 피해 당사자 운동...

이대진 기자 djrhee@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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