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형제들] 28번째 증언 "시민회관 앞에서 잠들었는데, 눈떠보니 형제원이었어요"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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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 피해 시민회관 앞서 잠자다
눈떠보니 형제복지원 속으로
세 번의 도망 시도, 모두 실패
너무 맞아 허리 부상 '장애 판정'
"이젠 떳떳" 직장인 딸과 새 삶

※편집자주-1987년 봄, 부산 사상구 주례동 백양산 자락. 육중한 담장 너머로 '형제복지원'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12년 동안 공식 사망자만 513명. 이후 33년이 지나서야 올해 5월, 과거사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작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부산일보>는 '살아남은 형제들-형제복지원 절규의 증언' 영상구술사 프로젝트를 통해 피해자들 기억 속 진실의 조각을 맞춰보려 한다. 33인의 목소리가 모여 33년 전 '한국판 아우슈비츠'의 실체를 밝히는 한 걸음, 수만 명 피해자의 아픔을 치유하는 다음 걸음으로 이어지길...('살아남은 형제들' 시리즈는 매주 토요일 연재됩니다.)


<간추린 이야기>

1983년 한여름 밤이었다. 선풍기가 흔치 않던 시절, 김수길(47) 씨는 친구들과 놀다 시민회관 소강당 앞에서 잠이 들었다. 평소 동네 어르신들도 무더위를 피하던 곳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떴을 때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다. 아침밥을 먹기 위해 대열을 맞춰 선 수백 명의 사람들. 영문도 모른 채 인적사항을 적고 신체검사를 받았다.

6개월쯤 흘러 친구들과 계획을 세웠다. 아침에 구보를 돌 때 운동장 구석에 세워둔 드럼통을 밟고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아뿔싸. 담장 밖이 낭떠러지인 줄 몰랐다. 그대로 무릎이 나가 걸을 수 없었다. 택시를 잡아 탔다. 추리닝에 찍힌 '형제원' 마크를 본 택시기사는 운전대를 돌려 곧장 형제원으로 향했다.

두 번째 탈출도 실패였다. 28소대 옥상에서 점프를 해 담장까지 넘어갔지만, 방망이를 든 경비한테 잡혔다.

마지막엔 교회당에 불을 지르고 뒷산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바닥에 파놓은 '똥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너무 많이 맞았다. 몽둥이로 허리를 잘못 맞아 한동안 걷지도 못했다. '개눈깔' 소대장한텐 손날로 마구 맞아 일주일 정도 쓰러져 있었다.

86년 여름 어느 날, 부모님이 찾아왔다. 국가유공자였던 아버지는 아들이 잘못을 저질러 잡혀온 줄 알았다. 뉴스에 형제원 이야기가 나오자 그제서야 이해를 하셨지만, 어디에다 하소연해야 할지 몰랐다.

학교 생활에 적응을 못한 김 씨는 밖으로 돌았다. 형제원 출신 친구들과 어울렸다.

사회에서 딱 한 번 '개눈깔' 소대장을 만난 적이 있다. 구포시장에서 노숙을 하고 있었다. 근처 구멍가게에서 소주 2병을 사서 건네주고 돌아섰다. 아마도 술병으로 죽었을 것이다.

맞은 이에게도 때린 이에게도 형제원 담장 밖은 냉혹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아내는 도망갔고, 두 살배기 딸을 홀로 키웠다. 두어 번 고아원 앞까지 갔다 발걸음을 돌렸다. 딸아이를 자신처럼 부모없이 자라게 할 순 없었다.

10여 년 전부터 공사장 일용직으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나가고 있다. 어느새 어른이 된 딸아이는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따 첫 출근을 했다.

김 씨는 이제 형제복지원 출신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요즘엔 딸아이 친구들도 "고생 많으셨겠다"며 응원해준다.

형제원 피해생존자 중에서도 늙고 병든 이들에게 국가가 우선적으로 도움을 줬으면... 김 씨의 바람이다.

운동장에 정렬한 원생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운동장에 정렬한 원생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더 많은 이야기>

■ 도랑 건너 집이 코앞인데…

83년도에 최고 더웠을 때일 겁니다. 집이 이제 시민회관 소강당 도랑가(동천) 건너편인데. 소강당 그 앞에 박스 깔고 자고 있는데 눈뜨니까 형제복지원이더라고요.

내리라고 해서 내렸는데 거기 사람들이 좀 있더라고요. 내가 내렸을 때 한 15명 정도 될 겁니다. 우리 또래 아이들이 내하고 한 3~4명 있었고.

(자는 채로 납치를 당한 거네요?)

그대로 실려가 가버렸다니까요. 어린아이들은 잠이 많다 보니까 차에 실어도 그대로 자는 거라예. 그때는 또 우리 어르신들이 부채 들고 많이 주무셨거든요. 전부 동네 어르신이니까. 근데 내가 이제 잘못 걸린 거지요.

형제복지원에 딱 들어오니까 아침 한 6시? 밥 먹을 시간 있잖아요. 인적사항 작성하는 사무실이 있고. 올라와갖고 옆에는 이제 의무과... 거기서 신체검사를 하고.

일요일 되니까 교회를 가더라고요. 유년부 선생님(한테) 집 전화번호를 내가 줬는데... 그분들도 검사를 받는지 (집에) 연락이 안 돼 갖고. 편지를 적어라 해갖고 편지를 집에 보냈는데... 그것도 안 됐어요.

(형도 형제복지원에 같이 가셨다고요?)

예. 형이 이제 그 안에서 바깥에 일하러 다녔거든요. 한 번씩 치약하고 먹을 거 내한테 몰래 주고 가거든요.

거기서 멀리서 봤는가 봐요. 우리는 함부로 못 움직이니까. (바깥일) 마치고 올 때 잠시 우리 소대 위에 올라와서 던져주고 가고...

(형이) 고등학교 때 (집을) 나가서 연락이 없었으니까...

운전교육장이 설치된 대운동장. 담장 너머는 깎아지른 높이였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운전교육장이 설치된 대운동장. 담장 너머는 깎아지른 높이였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세 번의 탈출, 세 번의 실패

새벽에 예배를 보고 이제 구보를 나가요. 친구들끼리 짰어요. '저 담벼락 넘으면 밖이다.' 그리 높을지는 몰랐지요... 도랑가가...

5바퀴인가 6바퀴 돌 땝니다. 3명이서 후다닥 뛰어서 바로 드럼통 밟고 뛰어내렸는데... 그 자리에서 무릎이 가버린 거예요.

나는 택시를 탔고 둘이는 다른 데로 빠졌는데 여기 보면 추리닝 마크가 있어요. '형제복지원' 마크. (택시기사가) 딱 보드만 그대로 철도 지나서 (형제원으로) 싣고 가버리더라고요.

선도실도 아닌데 하여튼 어두컴컴한 데서 억수로 많이 맞았어요. 제가...

두 번째(도망)는 이제 28소대에 있으니까. 위에 담벼락하고... 옥상이잖아요. 딱 요 거리밖에 안 되거든요. 뒤에서 뛰어갖고 담벼락만 잡으면 되거든요.

도망가다가... 몽둥이 들고 있는 아저씨가 있어요. 잡혀서 끌려오니까 이제 나이가 어리니까... 소대장한테...

'개눈깔'(소대장)이라고 부르거든요. 그분한테 이거(손날)로 엄청 맞았어요. 오줌 싸는 아이들(용으로) 깔아 놓는 이불이 있어요. 거기다 눕혀 놔갖고 한 일주일 그냥 있었죠. 너무 많이 맞아가지고...

미국에서 닥터 박사가 와요. 제가 입양을 갈 뻔했거든요. 기타 들고 사진 찍고 막 이래 했는데. (한 친구가) 거기 가면 '마루타'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 안 되겠다 도망가자' 이래가지고... 그게 두 번째 도망이에요.

세 번째는 어느 정도 이제 우리가 청년기니까. 교회당에 불지르고 도망간 적이 있어요. 그거는 아마 불 크게 났을 겁니다.

산에 가면 '똥구덩이'가 있어요. 이렇게... 땅에 파놓은 데 (나는) 거기 이만큼 빠져가 있었고. 한 사람은 가다가 경비 서는 아저씨한테 잡혔고.

솔직히 너무 많이 맞았어요. 밤새도록 맞을 수도 있고. 침대에 자다가도 일부러 떨어뜨려버리고 이러는데.

(허리) 이거는 이제 빠따 맞아갖고. 제 같은 경우에 지금 허리가 이래 뒤틀려가 있거든요. 마 그냥 갖다 때려버리는 거예요. 소 돼지 잡듯이...

내가 말로 해서 그럴 뿐이지 상상도 못 합니다. (맞고 나서) 걷지도 못 했을 걸요? 의무과에 바로 실려 갔거든요. 안티푸라민 그거 발라갖고 붕대 채워버리더라고요. 그래가 한 보름 정도?

그게 이제 고질병이 돼버린 거예요. 장애등급 받았어요. 허리 때문에...

제일 많이 죽은 데가 병동... 내가 의붓아버지라고 불렀던 아저씨도 거기서 그냥 알게 모르게 죽어가 나갔고. 우리하고 같이 생활하던 애도 두 명인가 죽어 나갔거든요.

형제복지원 병동실 못 봤지요? 내가 봤던 기억은 '돼지우리'라 보고... 결핵환자실 거기는 문을 잠가 놓아요. 즈그끼리 그냥 나아라 이거예요. 의무과에서 약 올려주는 거 그거만 먹고. 내가 알기로는 거진 다 죽은 걸로 알고 있어요.

경비원 감시 아래 풀장에서 더위를 식히는 원생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경비원 감시 아래 풀장에서 더위를 식히는 원생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무슨 그런 데가 있노?"

86년도 마지막 여름... 마지막 수영하고 있는데 집에 가야 된다고 오라는 거예요. 어머니하고 아버지가 오셨더라고요.

"어찌 알았냐" 이러니까 아까 내가 말씀드린 그 선생님... 그분이 그 전화번호를 머릿속에 기억을 했는가 봐요. "애가 자꾸 이렇게 전화를 해달란다." 그래갖고 어머니 아버지가 온 거예요.

아버지는 내 때려죽일라 하죠. 내가 죄를 짓고 온 줄 알고 있고. 어머니는 그 옆에서 울고만 계셨는데. 집에 가서 (부모님께) 설명을 해줬는데 "무슨 그런 데가 있노?"

아버지도 몰라요. 그런 걸... 보상 받을 데도 없는 거고. (그냥) 넘어갔어요. 아버지하고... 배운 게 없으니까요. 뉴스 나왔으니까 뭐 해결됐겠지...

거기 있던 생활이 몸에 배다 보니까 (학교) 아이들하고 이래 막 싸움이 억수로 많았어요. 솔직히 저는 학교 선배가 없어요. 매일 싸우다 보니까. 그러다가 제가 가출을 했지요.

만나는 게 전부 형제복지원 살았던 사람들이라... 한 2년 또 같이 놀러 다니고 하다가... 적응을 못 하니까 자꾸 바깥으로만 도는 거예요.

우리는 자유가 없는... 갇혀 있는 데서 딱 이거 시키면 요것만 했거든요. 근데 여기(학교)는 즈그가 하고 싶은 대로... 가질 수 있는 건 다 가지니까. 우리가 생각하면... 즈그가 건방지게 보이는 거예요.

사고를 너무 많이 쳤어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내가 정신을 차렸거든요.

와이프는 도망가버리고, 애를 이제 세 살 때부터 내가 델꼬 내 혼자서 그냥... 두 번인가 고아원 앞에까지 갔다가 내가 도저히 못 버리고. 나도 그리 자랐기 때문에...

술집 장사를 좀 오래 했었죠. 새벽에 가면 아이 혼자 있는 거예요. 밥도 못 먹는 거예요.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밤만 되면 아빠도 없고 엄마도 없고 지 혼자 있어야 되니까.

거기서 이제 내가 마 완전히 이제... '이거 접어야 되겠다.'

인천에 올라가 있다가 거기서 또 사고를 쳐버린 거예요. 부산으로 이감을 하고...

인천에서 내려오다 보면 휴게소가 있어요. (경찰한테) 사정을 해서 다시 차 돌려갖고 "우리 딸내미하고 좀 델꼬 갑시다" 그래가 같이 내려왔거든요.

노가다 반장을 하는 친구가 있어요. 그때 그 친구가 내보고 "노가다를 해라." 하다 보니까... 지금 여기까지 와버렸지요.

지금도... 애가 성인이지만 어디 나가면 무조건 10시까지 들어와라 하거든요. 불안하니까. 너무 나쁜 것만 보고 지내오다 보니까 딸한테까지 피해가 가는 거예요.

선도차량에서 내리는 아이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선도차량에서 내리는 아이들.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개눈깔' 소대장의 최후

제가 술을 먹으면 감당을 못 해요. 이제 옛날 생각도 나고 막...

노가다하면서 주위에 나이 드신 형님들이 "마 정신 차려라! 정신 차려라! 원에 있은 거는 원에 있은 거고... 지금 딸하고 니하고 둘이 살아야 되니까... 살 궁리를 해야지." 옆에서 많이 잡아 주신 것 같아요.

(누가) 시비를 걸잖아요. 그러면 어릴 때 우리가 막 개잡듯이 맞은 그런 기억이 있으니까. 무조건 내가 먼저 때려야 되는 거예요.

솔직히 밖에를 안 나가요. 밤에는 절대 안 나갑니다.

모라(동)에서 여기로 이사 왔거든요. 거기는 장애인이 많다 보니까... 형제원에 보면 막 병동 있잖아요. 병동 같이 보이고 이래갖고 도저히 못 있겠더라고요.

우연찮게 딸내미가 이제 간호조무사 자격증하고 (따서) 오늘 첫 출근을 했거든요. 엊그제 아이가 2살 3살 같은데 벌써...

내야 고맙죠. 내가 뭐 짜다리 해준 건 없는데. 지가 저래 하니까 내가 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나도 정신 차리고...

박인근이 아들이 여기 해수온천에 있었거든요. 자기가 관리를 하면서... 잡혀가는 것까지는 봤는데.

솔직한 심정으로는 저 아이를 갖다가 델꼬 와가 때려죽이고 싶어요. 근데 아이는 잘못이 없고 자기 아버지 잘못이기 때매.

'개눈깔' 그 사람은 돌아가셨어요. 구포시장 거기서 내가 한 번 딱 만났거든요. "저 수길입니다. 개눈깔 소대장 아닙니까?" 이러니까 알더라고요. 구멍가게가 있어요. 소주 2병 사주고... 그게 마지막입니다.

어디 갈 데가 없는 갑더라고요. 잘 돼가 있고 마 그랬으면 제가 뭐 소주도 안 사줬겠지요. 도로 가서 뭐... 나쁜 행동을 했을 수도 있고.

그런 분들이 갈 데가 없는 거예요. 죄는 지어 놨지... 아동소대 있던 사람들은 (그 소대장을) 때려죽일라 할 겁니다. 얼마나 많이 맞았으면...

아마 술병으로 돌아가셨을 거예요. 왜냐면 거기서 노숙을 하고 주무시니까...

안과 밖을 가르는 육중한 철문.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안과 밖을 가르는 육중한 철문. 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 군대 대신 '특공대'

솔직히 우리 딸한테도 말해요. 떳떳하게... 딸 친구들도 많이 오거든요. 집에...

"아빠는 군대 안 갔어요?" 이러면 "나는 특공대 갔다 왔다!" 그러면 "어디?" "형제복지원!"

(딸 친구들이) 유튜브에서 아마 ('살아남은 형제들' 시리즈) 본 거 같아요. "많이 힘들었겠네요" 이러면서... (딸한테도) 아빠 뭐 부끄러울 것 없다. 형제복지원에 있었다 해라.

일반 시민들은 (형제원이) 주례에 있었는지도 몰라요. 자기들이 지금 아파트 짓고 살면서도 좀 많이 퍼져버려야 되는데... 아직 너무 모르니까.

내는 그냥 뭐 내 평범하게 살고 있으니까. 그 사람들 심판만 해달라는 거지... 다른 건 없어요. 형제원에 살던 친구들한테도 내가 이야기하거든요. 마음잡고 살면 되는 건데... 일단 저쪽에서 잘못한 건 국가에서 알아서 하겠지.

첫째는 아픈 사람들 위주로 해갖고 먼저 치료를 해줄 수 있는... 두 번째는 좀 이제 어린 나이에 들어갔던 사람들... 인권이 완전히 유린돼서 (나와서) 부모 못 만난 사람도 있거든요

나머지는... 어찌 보면 훈련받았다 생각할 수도 있는데. 우선적으로 힘없고 아프신 분들... 국가에서 해줘야 될 건 좀 해주라... 이거지요.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대진 기자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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