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칼럼] 공리주의에 반기를 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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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희 공모칼럼니스트

“잘못되면 누가 책임지나요?”

이 물음에 현대사회는 명확히 답을 주지 않는다. 적어도 젊은 세대는 그렇게 느끼고 있다. “가만히 앉아 있으라”는 말을 믿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바다에 가라앉은 또래의 비극을 지켜보았고, 집을 사지 말라는 말을 믿다가 영영 ‘전세 난민’이 되어 버린 벼락거지 부부를 여럿 보았다. 최근엔 코로나 백신 접종으로 인한 부작용 논란이 특히 젊은 연령층을 중심으로 발생하면서 불신이 팽배했다.

각자도생 사회가 개인주의 심화시켜
2030세대 ‘다수가 최선’ 가치에 회의
소수의견 경청하는 소통 사회 바람직

‘책임’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가장 거대한 관료조직인 정부에게 상당히 모순적이다. 개인 간 분업을 통해 쪼개진 업무만큼 책임을 나누고 희석하는 방식이 곧 관료제가 아니던가. 예컨대, 누군가 건강보험료가 지나치게 많이 청구되어 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에 전화를 건다. 과다 청구에 대한 이의 제기에 이 부서도 저 부서도 서로 책임을 미루고 결국 수화기 너머 애꿎은 상담원만 괴롭히는 꼴이 된다. 하지만 상담원도 책임을 져 주진 않는다. 실제로 지난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는 사건 이후 재판 과정에서 책임져야 할 사람을 아무도 밝힐 수 없었다.

정부의 무능이라는 문제 너머에는 관료제의 필연적인 무책임성과 복잡하고 정교한 현대사회의 시스템 안에서 작아지는 개인의 무력함이 자리 잡고 있다. 신뢰를 잃어버린 사회에서 각자도생을 위해 각박하게 살아가는 우리 세대가 자기 몫 챙기기에 열중하고 자기 안위부터 걱정하는 것을 단순히 이기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청년세대가 개인주의적인 시각에서 제기하는 새로운 사회담론과 국가와 공동체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를 통해 앞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할 수 있다.

잘 알다시피 2030, 소위 MZ세대는 집단보다 개인을 우선하고 ‘까라면 까’라는 근거 없는 상명하복 문화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따라서 청년세대는 한국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 온 공리주의 철학에 반기를 든다. 공리주의의 핵심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권리를 침해하더라도 효용의 총합을 극대화한다면 그 정책은 타당성을 갖는다. 이는 자칫 집단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율적 가치를 침범하고 희생을 강요하는 전체주의로 나아갈 위험이 있다. 개성적 가치가 존중되지 않는 사회는 비록 다수를 위한다는 선량한 목적만을 지녔더라도 소수에게는, 때론 청년세대에게는 ‘꼰대 사회’와 다를 바가 없다.

최근 가장 대표적인 공리주의 작동 사례를 꼽자면 아마도 코로나에 맞섰던 정부의 대응일 것이다. 예컨대 확진자가 연일 네 자릿수를 기록하고 있는 요즘과 달리 확진자에게 번호를 부여하던 유행 초기에는 개인 동선이 낱낱이 공개되었다. 자신의 동선이 대중에게 알려지는 것을 환영했던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사생활 침해 소지가 다분했던 확진자 세부 동선 공개는 몇 주 지속했다.

마스크 착용 의무화와 이달부터 시범적으로 도입된 백신패스 역시 마찬가지다. 마스크나 백신의 효용성에 의구심을 가지자는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런 정책 결정들이 크고 작은 반대와 소통 없이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 하에 너무나 순순히 받아들여지고 실행되었다는 점이다. 백신패스를 예로 들자면 유럽에서는 반백신 시위가 거셌다. 8월 둘째 주 프랑스 파리에서는 참여자가 20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시위 규모가 컸는데 파리 인구가 200만 명인 걸 고려하면 십 분의 일이 시위에 참여한 것이다. 서울 1000만 인구 중 100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던 광화문 집회를 떠올리면 그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다.

어떤 어젠다에 대해 모든 사람이 똑같이 생각하고 반응하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주장의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 판단을 떠나서 다양한 목소리가 자유롭게 튀어나올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맘속에 다른 의견을 품었더라도 입 밖으로 꺼내기가 쉽지 않다. 모난 돌이 정 맞는 사회의 획일성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필자가 바랐던 것은 독재적인 ‘정’이 아닌 ‘정반합’의 변증법이었다. 설령 최초의 코로나 방역이 공리주의적이라 하더라도 개인의 권리 침해에 대한 우려와 공권력을 경계하는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와 공리주의를 상대로 자유롭게 논쟁할 수 있어야 했다. 대립과 소통, 그리고 팬데믹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소수 입장을 포용하면서 “마스크 쓰자” “백신 맞자”는 정책 방향에 합의를 이루었더라면 훨씬 성숙한 시민사회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이제껏 한국 사회가 ‘모두를 위한 거야’라는 기존 문법으로 일방적인 순종을 기대해 온 것과는 매우 다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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