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희와 함께 읽는 우리시대 문화풍경] 경쟁, 만남의 다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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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학교 강사

일본의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고다이라 나오는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다. 신기록을 세우자 환호가 터져 나왔다. 고다이라는 관중석을 향해 환호를 멈추어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다음 순서로 출전하는 이상화가 경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뜻이다. 이상화는 고다이라에 이어 은메달을 땄다. 두 사람이 서로 어깨를 감싸며 마음을 나누는 모습은 평창올림픽 명장면으로 꼽는다. 진정한 올림픽 정신과 국경을 초월한 우정이 은빛 스케이트날처럼 반짝였다. 고다이라는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출전했으나 성적이 부진했다. 경기가 끝나자 서툰 한국어로 인사를 전했다. “상화, 잘 지냈어? 보고 싶었어요.”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계속 분발하겠노라고. 중계석에서 이상화는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공정한 경쟁으로 승부를 가리는 일은 스포츠의 본질이다. 그러나 결과는 실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막힌 우연이나 이변이 속출하고 도핑과 반칙이 난무한다. 보이지 않는 권력이 작동하기도 한다. 예술경연대회도 마찬가지다. 2003년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3등에 선정된 피아니스트 임동혁은 수상을 거부했다. 2등 수상자의 실력을 인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특정 심사위원의 부당한 개입 가능성에 대한 항의였다. 2010년 쇼팽 콩쿠르 2등에 오른 잉골프 분더도 논란이 됐다. 일부 심사위원과 청중이 관객상과 특별상을 휩쓴 그를 옹호하며 심사 공정성에 의혹을 제기했다. 심사를 거부한 사례도 있다. 1980년 쇼팽 콩쿠르에서 이보 포고렐리치가 본선에 진출하지 못하자 심사위원장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널리 회자된 콩쿠르 스캔들이다.

사실 예술경연대회는 그 자체로 모순이다. 스포츠와 달리 예술은 점수로 서열을 매기기 어렵다. 듣는 이에 따라 감동의 결이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릴 때부터 콩쿠르라는 경쟁 무대에 나서는 까닭은 무엇일까. 과거에는 국제 콩쿠르 입상을 국가적 성과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만큼 세계대회의 권위와 영향이 컸다. 콩쿠르 입상은 곧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나 음반 발매, 강단 등 다른 자리로 나아가는 발판이었다. 일종의 등용문이었던 셈이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새로운 국제대회가 많이 생겨났고 수상자도 두루 배출된다. 수상자 선정에 문화산업의 논리가 작용하기도 한다. 콩쿠르에서 한국 예술가들의 쾌거는 환영할 만하다. 그러나 과도한 경쟁에 몰입하고 그 결과만을 중시하는 행태는 곤란하다. 콩쿠르라는 말은 ‘함께 달리다, 만나다’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웹스터 사전은 ‘함께 융합되는 행위나 과정, 군중이 모이는 열린 공간’이라 정의한다. 가혹한 경쟁의 장이 아니라 함께 달리며 하나로 어우러지는 만남의 공간. 이상화와 고다이라의 빙판도 그렇다. 얼음처럼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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