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정의 월드 클래스] 우크라이나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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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팀장

아무도 우크라이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난다는데, 러시아는 미국에, 미국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전쟁 위험이 커지자 각국은 자국민을 빼내가기 바빴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이 장면이 익숙한 듯했다. 유라시아의 대표적 곡창지대로 꼽히는 우크라이나는 과거부터 강대국의 침입에 시달렸다. 유럽 세력이 동방으로 진출할 때, 러시아가 흑해를 통해 지중해로 나아갈 때 꼭 거쳐가는 곳이 우크라이나였다. 그래서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자원이 있었음에도 늘 가난을 면치 못했다.

우크라이나는 1991년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뒤로도 전쟁을 치르거나, 전쟁에 대비하며 30년을 보내왔다. 독립 이후로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영향력 아래에 두고 싶어했고 우크라이나에서는 ‘친러’와 ‘친서방’ 대통령이 차례로 집권하면서 친유럽의 서부, 친러 동부가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친러 정권이 붕괴하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남단의 크림반도를 빼앗은 뒤 동부 지역의 분리 독립을 지원하며 분열을 부추겼다. 동부에서는 지난 8년간 정부군과 친러 분리주의 반군간의 전투로 무려 1만 4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에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가입해 러시아와의 악연을 끊어내려는 열망이 강하다. 그러나 소련 해체를 서방의 강요에 의한 치욕으로 여기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어떻게 해서든 막으려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진실이 무엇인지는 묻힌 지 오래다. 누가, 무엇 때문에 이 전쟁을 원하는지는 미·러 간의 정보전, 여론전에 묻혀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게 됐다.

강대국 사이에 끼인 우크라이나의 운명이 우리나라와 너무도 흡사해서일까. 그런 와중에 터져나온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목소리는 절규로 느껴졌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가 아닌 서방을 향해 위기를 조장하지 말라고 했고, 최근에는 ‘나토 가입’이 그저 꿈과 같다며, 포기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전쟁을 피할 수만 있다면 ‘백기’라도 들고 싶었을 처절함이 밀려왔다. 201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우크라이나 출신 벨라루스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저서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참전 여성 200여 명의 ‘목소리’를 전했다. 전쟁터에 다녀온 후로는 줄줄이 걸린 붉은 살점의 고기를 볼 수 없어 시장에도 못 다닌다는 여성 등 한번의 전쟁 경험이 평생을 옭아매는 삶이 생생히 전해졌다. 그녀는 “전쟁이라면 토할 것 같고 전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역겨운, 그런 책을 쓸 수만 있다면 미치도록 쓰고 싶었다”고 했다. 이토록 전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막아 내야 하는 일인 것이다. yourfoot@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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