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 원전 수명 연장 ‘허점투성이’ 기준이 문제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탁경륜 기자 ta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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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선환경영향평가 기술 기준
선진 수준 대신 국내 과거 승계
해외 사고와 비교해도 떨어져
‘고리1’과 비슷한 안전 설비 비용
탈핵단체 “수명 연장에만 초점”
가동 중단돼도 전력 문제 없어
사용후핵연료 포화 대책 세워야

부산 기장군 고리원자력본부 고리1~4호기 전경. 내년 4월 고리2호기를 시작으로 고리3·4호기 등 여러 원자력발전소의 운영 허가 기한이 잇따라 만료된다. 부산일보DB 부산 기장군 고리원자력본부 고리1~4호기 전경. 내년 4월 고리2호기를 시작으로 고리3·4호기 등 여러 원자력발전소의 운영 허가 기한이 잇따라 만료된다. 부산일보DB


내년 4월 고리2호기를 시작으로 고리3호기(2024년 9월), 고리4호기(2025년 8월), 한빛1호기(2025년 12월) 등 국내 원전의 운영 허가 기한이 줄줄이 만료된다. 친원전 기조를 강조한 윤석열 정부의 임기 동안 무려 6개 원전의 수명 연장(계속 운전)이 추진된다. 사실상 고리2호기가 다른 원전의 기준이 될 여지가 커 안전 대책을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 속도보다는 ‘안전’

한국수력원자력은 올 4월 고리2호기 계속 운전을 위한 안전성 평가서를 원자력안전위원회에 제출했다. 올해까지 방사선환경영향평가서 초안에 대한 주민 의견을 수렴한 뒤 계속 운전 허가를 신청할 방침이다. 2026년 8월까지 설비 개선 등 재가동을 위한 모든 절차를 마무리한다는 계획이지만 안전을 둘러싼 논쟁이 격화하는 바람에 일정이 틀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미 방사선환경영향평가서는 주민 의견 수렴 단계에서부터 제동이 걸렸다. 지난달 부산 부산진구, 울산 울주군에서 열린 주민 공청회는 부산·울산 환경단체 등의 반발로 파행했다. 시민사회는 공청회 방식 등을 문제 삼지만, 저변에는 노후 원전에 대한 ‘안전 우려’가 깔렸다. 한수원이 ‘졸속 추진’ 비난을 잠재우려면 안전 우려부터 해소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 수명 연장을 위한 법적 안전 기준에는 빈틈이 많다. 원안위의 ‘원자로 시설의 계속 운전 평가를 위한 기술 기준 적용에 관한 지침’에는 방사선환경영향평가 기술 기준을 동일 부지에서 가장 최근에 수행된 평가 기준을 따르도록 했다. 고리2호기는 가장 최근에 평가를 수행한 신고리 5·6호기, 신고리 5·6호기는 직전 신한울 1·2호기의 기준을 따르는 식이다. 노후 원전 위험 요인을 해소할 해외 선진 기준이 아니라 국내의 과거 기준을 그대로 승계하는 형식을 취하는 셈이다. 세계 최대 원전 밀집지에 거주하는 시민 입장에서는 해외의 중대 사고 기준과 비교해 수준이 떨어지는 ‘안전 평가’를 두고만 볼 수 없다.

더불어 평가서에 나오는 고리2호기 안전 설비 개선 비용 3000억 원은 표면적으로 앞서 계속 운전이 추진된 고리1호기, 월성1호기보다 적거나 비슷한 수준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대해 한수원 측은 “계획 예방 정비로 설비 개선이 수시로 이뤄져 왔기 때문에 필요한 비용이 줄어든 것”이라면서 “원안위가 설비 개선을 더 요구하면 (한수원이)할 수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탈핵단체 등은 이러한 일련의 평가서 세부 내용은 원전 안전보다 빠른 가동(수명 연장)에 초점을 맞춘 관계 기관의 인식을 반영한다고 지적한다.

이정윤 원자력안전과미래 대표는 “최신 기술이 적용되도록 지침을 바꿨을 때 어마어마하게 설계 변경이 이뤄지고 그에 따라 막대한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개선을 쉬쉬하는 것”이라면서 “미국처럼 원전에 대해서는 위험 요소를 모두 드러내고 과감하게 없애는 적극적인 대응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 2호기 멈춰도 전력 문제없다

고리2호기를 비롯해 설계 수명이 도래하는 국내 원전이 잇따라 멈추더라도 전력 공급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고리2호기는 내년 4월 8일부터 최소 2년 이상 가동이 중지된다. 11일 전력거래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가장 낮았던 예비전력은 6075MW(2019년 8월 13일 오후 5시)였다.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전기 출력이 650MW인 고리2호기의 중단 영향은 크지 않다.

절차상 고리2호기가 고리3·4호기 등 다른 원전과 동시에 중단될 가능성도 있지만, 그 시기에 맞춰 새 원전의 가동도 예정돼 있다. 전력거래소는 내년 9월 신한울2호기, 2024년 3월 신고리5호기, 2025년 3월 신고리6호기가 준공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들 3개 발전소의 발전 용량은 각각 1400MW다. 노후 원전 안전 우려를 해소한 뒤 계속 운전을 추진해도 전력 수급에는 이상이 없다는 얘기다.

재가동에 따른 수익도 크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올 4월 공개된 고리2호기 계속 운전 경제성 평가에 따르면, 고리2호기 수명을 10년 연장(심사, 설비 보강 기간 포함)하면 폐쇄하는 것보다 1600억 원가량 이익이다. 계속운전을 위한 설비 개선 비용 3000억 원보다도 적어 수명 연장에는 실익이 없다는 목소리도 크다.


■ 사용후핵연료 대책부터 세워야

한수원에 따르면 고리원전에 저장되는 사용후핵연료는 2031년 포화 상태에 이른다. 고리2호기도 저장률이 93.6%(올 6월 30일 기준)다.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 방안도 없는 상황에서 설계 수명이 다한 원전까지 더 가동하는 것은 원전 산업 부흥을 위해 지역 주민의 안전을 외면하는 처사라는 지적이 나온다. 부울경 시·도민 입장에서는 안전과 직결된 원전 문제가 해소되지 않고 쌓여만 간다는 인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또 현재 원전 부지 안에 건식 저장 시설을 설치하는 내용의 특별법이 추진되고 있지만, 주민에게는 지역 내 핵폐기물 용량을 더 늘리는 것으로 비춰질 뿐이다. 민은주 부산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은 “사용후핵연료를 빽빽하게 저장하면 사고 위험은 커질 수밖에 없고, 피해 규모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탁경륜 기자 ta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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