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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학 찾아 떠돈 40년 항적] 고물 배 몰고 홍콩행 죽음의 황천항해 체험
해외 송출선인 카틀레야호에서 1년 동안의 장기 근무를 마치고 하선한 지 보름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 홍호이호에 승선해 달라는 선원과장의 전화를 받았다. 홍호이호는 1만 6000톤급 벌크선으로 선령 30년이 넘는 헌털뱅이 배였다. 하도 말썽 많기로 소문난 배라 이 회사에 오래 근무한 선원들은 누구나 홍호이호에 승선하기를 꺼려했다. 선실 통로에서 지나가다 어깨만 부딪쳐도 서로 눈알을 부라리며 노려볼 정도로 선원들의 분위기가 나쁘다는 배였다. 이제 막 무릎걸음으로 기기 시작하는 첫아이의 재롱에 정이 들던 나도 승선하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 마음 약한 나는 카틀레야호에서 같이 근무했던 박 선장의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다. “기관장, 홍콩 매선장(賣船場)까지 배만 몰아다 주면 끝나니까 열흘이면 충분히 돌아올 수 있어요. 휴가 중에 홍콩 구경 한 번 한다고 생각하고 같이 갑시다. 잠시 고생하고 오면 다음 승선 시에는 회사에서 제일 성능 좋은 배를 골라 태워 줄 거요.”
김해발 후쿠오카행 KAL기를 탔다. 후쿠오카에서 신칸센 히카리(光)호를 타고 시모노세키로 갔다. 시모노세키 선착장에서 통선을 타고 한 시간 정도 달려가니 건현에 벌겋게 녹물이 흘러내리는 홍호이호가 유령선처럼 덩그렇게 떠 있었다. 연돌에서는 연소 불량의 검은 연기를 계속해서 내뿜고. 삐거덕거리는 갱웨이를 타고 배에 올라가니 통로의 불빛마저 어둠침침해 더욱 음산한 기분이 들었다.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기관실에 내려가니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게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선미관이었다. 수밀 재(材)인 리그넘바이테(Lignumvitae)가 한도 이상으로 마모된 탓이었다. 그랜드 패킹 볼트를 더 죄면 누수량은 줄어들지만 마찰이 심해 열이 나서 더 죌 수가 없었다. 프로펠러 중간축도 진동이 심해 축받이 베어링(Plumber block)을 잡아주는 고정 볼트가 언제 부러질지 모를 정도로 불안했다. 이런 상태로 어떻게 배를 몰고 다녔을까? 잘못 왔구나! 당장 집에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일본 출항 후 이틀 동안은 바다가 잔잔했으나 사흘째부터 저기압이 홍호이호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배의 무게 중심을 잡아주는 밸러스트 수는 가득 실었지만 화물이 하나도 없는 공선이라 선체는 작은 풍랑에도 맥을 추지 못했다. 파도가 정면에서 들이닥치며 선체를 헹가래 치듯 밀어 올리면 배는 배구공처럼 공중으로 치솟았다. 그럴 때마다 스크루는 수면 위에 드러나 헛바퀴를 돌며 자지러지듯 비명을 질렀다. 해수 흡입구인 시 체스트에도 공기가 혼입되어 냉각수 압력이 떨어져서 경보음이 울렸다. 그런 와중에 발전기까지 꼬르륵 꺼져버렸다. 선체의 심한 요동으로 연료유 서비스 탱크의 찌꺼기가 일어나 필터가 꽉 막혀버렸던 것이다. 황천항해(荒天航海) 중에 전력까지 상실되어 버렸으니 배는 죽은 배(Dead Ship)가 되고 말았다. 선체는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들까불리는데 희미한 비상등 아래서 막힌 연료유 필터를 청소하자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발전기를 다시 시동해 전원을 복구할 때까지 십 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마음은 지옥에서 몇 시간이나 보낸 기분이었다.
이번에는 브리지의 고물 레이더가 먹통이 돼 버렸다. 거친 바다 위에서 장님 신세가 됐는데 해님도 별님도 나타나지 않으니 천측(天測)도 할 수 없었다. 정상적인 항해였다면 벌써 홍콩에 도착했어야 하는데 배가 어디쯤 있는지도 모르니 추측항법(推測航法)으로 항해할 수밖에 없었다. 바람은 갑판 위의 모든 것을 날려버릴 기세였다. 괴기한 휘파람 소리를 내며 선체를 뒤흔들었다. 해면은 비산하는 물방울로 허옇게 뒤덮였다. 선원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마다 라이프 재킷을 챙겨 놓고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서로 얼굴만 마주 보았다. 죽느냐 사느냐, 모두들 반반의 확률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이 통하지 않을 때 신을 찾는다고 했다. 죽음의 공포는 믿음 없는 사람도 기도하게 만들었다. “주여! 내가 믿겠나이다. 제발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배가 어디쯤 있는지 선위는 모르지만 수심이 얕아 앵커는 내릴 수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닻은 놓았지만 배는 여전히 심하게 흔들렸다. 강한 바람에 앵커가 끌리지 않도록 밤새도록 주기관을 사용했다. 새벽녘이 되자 바람의 기세가 한풀 수그러지고 멀리 수평선이 드러났다. 근처에 지나가는 배 한 척이 눈에 띄었다. VHF(초단파)로 위치를 물어보니 홍콩에서 60마일 떨어진 곳이라고 했다. 앵커를 올리고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해 질 무렵에 홍콩 외항 투묘지에 도착했다. 침실이고 통로고 온통 습기로 축축했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죽음의 골짜기에서 살아났다고 감사하는 눈빛이었다.
매선장(賣船場)으로 배를 옮겼다. 우시장 쇠말뚝에 매어 놓은 소처럼 팔려고 내놓은 배들이 20여 척이나 닻을 내리고 있었다. 개중에는 배가 언제 팔릴지 몰라 기름을 아끼느라 발전기도 돌리지 않고 밤이 되면 등불을 매달아 검은 실루엣만 드러낸 배도 있었다. 배를 매선장에 몰아다 놓으니 중국계 매수인(買受人)은 배가 도망가지 못하게 안전요원(Security man)만 보내놓고 나타나지 않았다. 뭔가 탈을 잡아 한 푼이라도 선가를 깎자는 속셈이었다. 자꾸만 인도(引渡) 일자가 늦어졌다. 청수도, 주·부식도 달랑달랑하는데. 나중에는 조리용 프로판 가스도 다 떨어져서 선미 갑판에 아궁이를 만들어 나무 조각으로 불을 떼서 밥을 해먹었다.
-이제 오늘 밤만 자면 내일은 새 선원들에게 인계를 해주고 집에 간다! 선원들은 기쁜 마음에 들떠 잠잘 생각도 하지 않고 끼리끼리 모여 앉아 늦게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새 사망의 골짜기에서 헤매던 황천항해의 악몽은 다 잊어버리고. 열흘이면 충분할 거라던 매선 항해는 꼭 한 달이 걸렸다. -끝- 글/ 김종찬 해양소설가
2024-04-11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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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학 찾아 떠돈 40년 항적] 입항 화물선에 ‘뇌물 지옥’ 같은 뒷돈 요구 농락
2021년 7월 9일 연합뉴스에 의하면,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에서 어선 3척으로 수산업을 하던 한인 사업가 A씨가 수산해양자원부(MFMR)로부터 불법조업 혐의로 수백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 받고 당국에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시에라리온에 투자하지 말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택에서 숨졌다고 한다. A씨의 죽음은 어족자원 보호라는 미명 아래 당국의 과도한 단속이 시행된 가운데 일어난 일이라 주변 사람들의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A씨는 현지에서 수년간 사업을 하면서 400명 이상의 현지인을 고용한 유력한 투자자로 알려졌다. 이러한 세론을 의식한 탓인지 시에라리온 정부는 정보통신부 명의의 보도 자료를 통해서 “유족과 한국 정부, 한국 국민에게 진정한 애도를 표한다”면서 MFMR 관리들의 부당함과 부패 혐의에 대한 수사를 착수했다고 공표했다.
이 기사를 읽자마자 내 머릿속에는 불현듯이 나이지리아 포트하커트(Port Harcourt)항에 입항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소말리아 어부들이 해적으로 돌변하기 전에는 아프리카에서 나이지리아가 해적으로 제일 악명 높았다. 196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나이지리아는 부족 간 대립, 종교 분쟁, 쿠데타 등으로 오랫동안 내전을 겪었다. 그러다 보니 곳곳에 은닉한 무기가 많다고 했다. 내가 승선했던 오션스타호는 태국에서 쌀을 싣고 나이지리아의 포트하커트항으로 가게 되었다. 그 쌀은 대통령 선거용으로 대국민 구휼미라고 했다. 포트하커트항은 해적의 소굴이라는 니제르델타 해역–서부 아프리카의 엉덩이 부분에 있다-에서 보니 강을 타고 내륙으로 35마일을 더 들어가야 한다. 입항 수속을 하는 검역묘지는 16마일 지점에 있었다. 거기까지는 도선사가 나오지 않고 선장이 직접 배를 몰고 들어가야 했다.
대리점의 연락을 받고 강 중간에 있는 검역묘지에 투묘(投錨, 배를 정박하고자 닻을 내림)를 했다. 바로 건너편에 작은 마을이 있고 나루터도 있었다. 현문사다리를 내려놓고 기다렸으나 제일 먼저 와야 할 대리점이 나타나지 않았다. VHF16 채널에서 대리점 호칭인 ‘보니 마린(BONNY MARINE)’을 불렀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해 질 녘이 다 되어서야 강 상류에서 보트 한 척이 새하얀 물 갈기를 앞세우고 달려왔다. 그런데 꽁무니에는 빈 수레(Cargo Tray)를 하나 달고 왔다. 관리들이 올라왔다. 모두 네 명이었다. 검역관과 출입국 담당 관리들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유창한 영어로 선장의 기를 꺾었다. “먼 항로를 거쳐 여가까지 오느라고 고생이 많았습니다. 아프리카의 모범적인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나이지리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입에 발린 인사말이 끝나자 먹이 사냥이 시작되었다. 나이지리아는 다른 나라에 비해 입항 시 제출 서류가 많기로 유명하다, 선원명부, 휴대품신고서, 예방 접종 신고서, 검역 카드, 입항 항구목록, 마약 신고서, 동물·조류 신고서, 무기 신고서, 화폐 신고서…….
늘 하는 사냥이라 시간이 오래 걸릴 것도 없었다. 검역관이 엄숙한 표정으로 선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캡틴, 당장 배를 몰고 외항으로 나가야 되겠다. 이것 봐라!” 그는 검역 카드 한 장을 손에 들고 흔들었다. “이 선원은 황열 예방 접종 유효기간이 다됐다. 위험해서 배를 입항시킬 수 없다.” 그는 이제 볼일 다 봤다는 듯이 손바닥을 탁탁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출입국 담당 관리가 말했다. “캡틴, 너무 걱정하지 마라, 여기서 예방 접종하면 된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다.” 바쁜데 시간 끌지 말자는 듯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쌀 안 주고 입항한 배는 한 척도 없다. 우리도 쌀 못 가져가면 목 잘린다.”
그게 시작이었다. 빈 수레에 쌀을 가득 싣고 난 후에야 입항 허가서에 서명을 해주었다. 그들이 돌아가자 차례를 기다렸다는 듯이 세관 보트가 달려왔다. 그들도 빈 수레를 달고 왔다. 세관원은 자리에 앉자마자 다 안다는 듯이 선장을 닦달했다. “캡틴, 왜 세관 허가도 없이 화물을 유출시켰나? 관세법을 위반했으니 자인서 써라.” 각본을 짜고 그대로 행동하는 연극배우들이었다. 또 쌀을 안 뺏길 수가 없었다. 세관원도 쌀을 한 수레 가득 싣고 갔다. 대리점은 그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일부러 그랬던 것이다.
부두에 접안을 했다. 이번에는 농산물검사국 직원이라는 친구가 검사용 샘플이 필요하다며 각 화물창마다 전후좌우 각 한 포대씩 걷어 쌀 16포대를 가져갔다. 마약단속반원은 어느 선원의 침실에서 감기약 콘택600 한 알을 찾아내어 벌금 500달러를 내라고 했다. 벌금을 내지 않으면 유치장에 감금시키겠다고 협박했다. 콘택600 속에도 미량의 마약 성분이 들어있다고 한다. 하역 작업이 시작되었다. 화물창에서 네트 슬링 위에다 포갬포갬 쌓은 쌀을 데릭윈치로 부두에 늘어선 트럭 위에다 부렸다. 트럭 위에는 쌀자루를 헤아려 기록하는 검수원이 있었다.
오후 4시경이었다. 하루 중에 가장 무더운 때였다. 부두에서 갑자기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강물에 빠졌다!” 트럭 적재함 위에 봉분같이 쌓아 올린 쌀자루 위에 앉아 있던 검수원이 미끄러져 부두에 떨어졌던 것이다. 깜빡 졸았는지, 아니면 더위를 먹어 잠시 정신이 아뜩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운 나쁘게도 부두에 떨어졌다가 다시 강물에 추락했다. 강물은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검수원은 빠른 물살에 휩쓸려 금방 떠내려가고 말았다. 사람들이 아우성쳤지만 구조할 방법은 없었다. 비보를 듣고 유가족들이 모여들었다. 여자들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믿어지지 않는 듯 배와 트럭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점점 수가 많아지자 그들의 눈빛에 원망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놈의 배가 쌀만 싣고 오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을 텐데, 하는 원망이었다. 소리 없이 흘리던 눈물이 청승으로 바뀌는가 싶더니 누구의 선동인지 농성으로 변했다. “내 자식 살려내라! 내 가족 살려내라!” 애먼 선원들을 향해 고함을 지르고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당장 배에 몰려와 싸울 기세였다.
억지도 그런 억지가 없었지만 원하지 않았던 불상사가 생길까 봐 선원들은 그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소란이 커지자 하역 회사에서 연락을 했는지 대리점이 달려왔다. 유족들의 살벌한 분위기를 파악한 대리점은 선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캡틴, 물론 선원들의 잘못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하역 작업을 하는 도중에 일어난 불상사이니 유가족들을 좀 달래주는 게 좋겠다. 선원 대표가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면 된다. 약간의 조의금과 함께 간소한 음식상을 차려서…… 전에도 이런 사고가 있었는데 그렇게 달랬다.”
선장은 하이에나 떼 같은 사람들의 행태에 질려서 유족을 상대하기도 싫었다. 선원들은 서로 눈치만 살폈다. 그러자 해군 상사 출신인 삼등항해사가 총대를 멨다. 검수원이 추락한 자리에 백지를 깔고 소주 한 병에 과일 서너 개, 북어 한 마리, 촛불, 그리고 향을 피워 궤연(几筵)을 차렸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고인의 영혼을 달래는 조사를 읊었다. “아 슬프도다. 이 무슨 청천벽력인가. 하늘도 무심하고 땅도 무정하도다. 생때같은 목숨이 이리도 허무하게 가시다니…… 오호통재라,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는 불쌍한 영혼이시여. 부디 왕생극락하소서! 상향.”
세상천지에 이런 연극이 또 있을까? 삼등항해사의 구성진 청승에 구경꾼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에워쌌다. 망자를 위로한 삼등항해사가 선원들이 갹출한 조의금 50달러를 유족 대표에게 전달하자 농성은 그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출항할 때까지 선장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검역관, 세관원에게 빼앗겨 부족한 쌀과 항해 중 화물창 외벽에 발생한 습기로 인해 곰팡이 핀 쌀 문제 등을 해결하느라고 여간 골치를 썩이지 않았다. 무덥고 습기 많은 태국에서 쌀을 선적했기 때문에 싸늘한 희망봉을 지나올 때 화물창 외벽에 땀이 생겼다. 그건 어느 배나 마찬가지다. 환기를 시켜야 했지만 파도가 거칠고 날씨가 나빠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사실을 문서로 작성하여 공증을 받아야 하는데 엄청난 뇌물을 요구했다. 대리점은 대리점대로 중간에서 온갖 농간을 다 부렸다. 출항을 해서 니제르델타 해역을 벗어나자 모두들 지옥에 떨어졌다가 탈출해 천국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글/ 김종찬 해양소설가
2024-04-04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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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학 찾아 떠돈 40년 항적] 골치 아픈 중국인 ‘돈이 최고’에 혀 내둘러
중국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로 전환한 것은 1992년 10월 공산당 제14회 전당대회를 통해서였고 선원들을 국제시장에 내보낸 것은 1993년 중국원양해운공사(COSCO)가 국가의 한 부서로 확장되면서였다. 이때 선원들을 감시, 감독, 통제하기 위하여 배마다 공산당원을 한 명씩 배치했는데 이들을 통칭 ‘코민사(Communist Officer)’라고 불렀다. 중국 선원들은 외국인 선장의 지시보다도 코민사의 눈치를 더 살폈는데 그의 평가 점수가 나쁘면 다음 배를 타는 데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내가 처음 중국 선원들과 동승한 것은 1996년부터였다. 인민은 다 평등하다는 공산주의 체제에 길들어 있다가 자유세계에 나온 중국 선원들은 직책에 대한 상식도 없었다. 어느 중국인 살롱보이(사관실에서 시중 드는 당번)는 식사 시간에 선장, 기관장이 늦게 내려왔다고 화를 낼 정도였다. 식사 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자기를 기다리게 했다고.
처음 중국 선원들과 멋모르고 동승했던 일본인 선장, 기관장은 두 번 다시 동승하지 않으려고 했다. 사토분페이(佐藤文平)라는 일본인 기관장이 회사에 제출한 중국 선원에 대한 보고서 내용에는 지적 사항이 많다. ‘자기중심주의라 협조심이 전혀 없다. 권리만 주장할 줄 알았지 책임감이 없다. 매사에 책임회피만 할 줄 알았지 자기 잘못은 절대로 시인하지 않는다. 매사에 바쁜 게 없고 믿을 수가 없다. 잘 모르면서도 아는 체한다.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초기에는 급료가 낮았기 때문에 문제가 많아도 일본 선주들이 중국 선원들을 태웠는데 일본 선장·기관장들이 기피하자 한자를 조금 아는 한국 선장·기관장을 보내게 되었다.
옛날부터 ‘중국인들은 부모보다 돈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중국어 사전에는 이런 말들이 있다. ‘애재여명(愛財如命, 돈을 생명같이 사랑한다) 다친불여 전친(爹親不如 錢親, 돈이 부모보다 더 낫다) 친시친 재시재(親是親 財是財, 부모는 부모고 돈은 돈이다).’ 중국 선원들과 동승한 한국 선장들의 골칫거리 중 하나는 부식비를 아껴 나눠 가지자는 요구였다. 원래 부식비는 남아도 나눠 가질 수가 없다. 그렇지만 중국 선원들에겐 그게 통하지 않았다. ‘내가 비싼 것 안 먹고 아껴 남긴 돈인데 당연히 내가 가져야지’ 하는 심보였다. 그들은 한국 선원들이 좋아하는 사시미와 김치가 너무 비싸다고 불평을 했다. 그러자 어느 선장은 이렇게 맞섰다. 그러면 너희들은 식용유 쓰지 말라, 비싼 식용유를 너무 많이 소비한다. 중국 요리는 대부분 불과 식용유를 사용하는데 식용유가 없으면 예삿일이 아니다. 중국 선원들이 수출선을 타기 전에는 한 푼이라도 싸게 구입하기 위해 직접 시장에 나가서 부식을 사다 날랐다. 똑같이 푸르죽죽한 색깔의 작업복에 밑바닥이 평평한 끈 없는 검은 운동화를 신고 여러 명이 장을 봐서 들고 가는 모습을 나도 몇 번이나 목격했다.
중국 선원들과 동승한 배를 타고 고려아연을 싣기 위해 울산 온산항에 입항한 적이 있었다. 선원들이 한국 물가가 싸다고, 직접 부식을 구입하겠다며 통역을 부탁했다. 그래서 마지못해 따라 나갔다. 슈퍼마켓에 가서는 조금이라도 싼 것을 구입하기 위해 어제 팔다 남은 시든 채소가 없느냐? 아직 다듬어 묶지 않은 채소는 없느냐? 고 물었다. 라면도 많이 사는데 왜 할인을 안 해 주느냐? 하고 따졌다. 재래시장에 가서는 노점이나 가게를 다 둘러보고 맘에 드는 곳에서 흥정을 했다. 시금치, 부추, 마늘쫑, 양파…… 품목마다 깎아놓고 마지막으로 합산해서 계산할 때 또 깎아달라고 떼를 썼다. 옆에서 통역을 하는 내 얼굴이 뜨거울 지경이었다. 노점상 아줌마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으면서 “오늘 장사는 밑졌다”며 웃었다.
원목을 싣고 일본에 입항하면 하역을 하기 전에 화물창 소독을 한다. 그날 밤은 당직자만 배를 지키고 나머지는 밖에서 잠을 자야 하는데 각자 알아서 하라고 숙박비를 지급했다. 중국 선원들은 그 돈이 아까워 여관에서 자지 않고 생수와 모포를 가지고 나가 지하상가나 공원 같은 곳에 모여서 노숙을 했다. 이상하게 여긴 주민들의 신고로 대리점에서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다음부터는 돈을 나눠주지 않고 예약한 숙박업소에서 자게 했다. 일본의 작은 항구에는 세관 감시소가 없다. 아무도 지키는 사람이 없으니 중국 선원들은 상륙했다가 귀선할 때 남의 집 앞에 세워둔 자전거를 끌고 오거나 화분을 들고 오는 일이 잦았다. 원목을 하역하고 나면 화물창에 나무껍질이 많이 남는다. 이것을 청소하는 일이 꽤 힘들다. 대신에 제법 많은 작업 수당이 나온다. 네 개의 화물창 청소를 마치자면 2~3일이 걸리고 중노동이라 선원들은 녹초가 된다. 그러다 보니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요령을 피우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중국 선원 다루는 데 도가 튼 박 선장은 이때를 노리고 있다. 박 선장은 쌍안경을 목에 걸고 작업 현장을 감시한다. 한나절 동안에 누가 화장실에 몇 번 갔다 왔는지, 허리를 몇 번 폈는지 노트에 다 기록을 하는 것이다. 이 기록부를 보고 작업 수당을 지급할 때 차등 분배를 한다. 아무리 공산(共産)이라고 떠들어도 일한 만큼 지급하겠다는 데 항의하는 선원은 없었다. 누가 열심히 일했고 누가 게으름을 피웠는지는 자기들도 다 알기 때문이다.
차은송(車銀松)이라는 ‘성질’ 고약한 코민사가 있었다. 직책은 1등 기관사였지만 홍위병 출신이라 영어는 한 마디도 못했다. 그래도 당원이라고 선원들에게는 무섭게 군림했다. 부당하다 싶으면 박 선장한테도 삿대질하며 마구 대들었다. COSC0에서 공문이 오면 선원들을 식당에 모아놓고 뭐라고 떠드는지 한 시간이나 걸렸다. 홍위병 때 완장 차고 어지간히 설쳤을 성싶었다. 하도 말썽이 많아 일본에 입항하면 강제 하선시킬 예정이었다.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일본이 가까워질수록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반쯤 넋이 빠진 사람처럼 헛웃음을 웃다가 혼잣소리로 떠들기도 했다. 박 선장이 식사를 하고 있는데 차은송이 한 손으로 볼을 감싸 쥐고 들어왔다. 제 자리에 앉자 손바닥에 이빨을 하나 올려놓고 선장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캡틴, 이거 내가 병원에 안 가고 내 손으로 뺐으니 병원비 오케이?” 박 선장은 노려보기만 하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말이 안 통하니 말할 수도 없었다. 차은송이 나가고 나자 통신장이 들어와 부연했다. 차은송이 석 달 전부터 이가 흔들려 자기 손으로 뺐는데 병원에 안 갔으니 100달러 달라고 한다는 소리였다.
중국 선원들은 걸핏하면 아프다고 엄살을 떨며 병원 진료 신청을 했다. 그게 귀찮아 선주가 10개월 동안 병원에 한 번도 안 가고 하선하는 사람에게는 100달러를 지급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그 돈을 달라는 소리였다. 박 선장은 “사정은 가상하지만 전례를 남겨서는 안 된다”며 거절했다. 이튿날 아침에 기관실에 내려가니 차은송은 잇몸에 솜을 박고 있었다. 안 아프냐? 했더니 끄떡없다고 팔뚝에 알통을 세워 보이며 중국말로 뭐라고 목청 높여 떠들어댔다. 쫓겨 가는 마당에 기관 부원들에게 하는 하소연이었다. “내가 이래 봬도 COSC0에 있을 때는 끗발 잡았는데 이 배에 와서는 영어 모른다고 사람 병신 되고 말았다. 엔진 스탠바이, 슬로우 스피드, 풀 스피드, 스몰, 라아지……, 나도 이 정도는 아는데 A, B, C도 모른다고 한다. 캡틴 베리베리 노 굿이다, 날씨가 나빠 주기 RPM이 저절로 떨어졌는데, 나는 손도 까딱 안 했는데 내가 손댔다고 미친개처럼 발광을 하고 나를 쫓아 보낸다. 캡틴은 일소일소, 일노일노도 모르는 싸움닭이다!” 차은송은 내가 못 알아들었을까 봐 흑판에다 ‘一笑一少 一怒一老’라고 적었다. 나는 속으로 숯이 검정 나무란다 싶었지만 드러내놓고 웃을 수는 없었다. 그는 겉으로는 강한 척해도 마음은 여린 사람이었다. 글/ 김종찬 해양소설가
2024-03-28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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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학 찾아 떠돈 40년 항적] 망국의 헐벗은 여인네들 거리로 내몰려
‘병사들의 구두코엔 먼지만 쌓이고 공장의 기계는 녹슬기만 한다. 호밀빵 배급소 대기 줄은 길어만 가고 노동자의 허리는 줄어만 간다. 이대로는 싫다, 이대로는 싫다. 우리는 원한다, 변화된 내일을!’ 러시아에 페레스트로이카 바람이 거세게 몰아칠 때 빅토르 최가 결성한 록그룹 키노가 불러서 젊은이들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노래다. 변화를 꿈꾸던 빅토르 최의 노래들이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펴 페레스트로이카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빅토르 최는 1962년 6월 고려인 아버지와 우크라이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예술학교 공예학과를 졸업했지만 음악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는 캄차트카 거리의 지하 보일러실에서 화부 노릇을 하면서 숙명처럼 노래를 불렀다. 1984년 22세 때 게오르규, 유노, 알렉세이와 함께 4인조 록그룹 키노(Kino)를 결성하여 레닌그라드 록 축제에 참가하여 이름을 알렸다. 1987년에는 ‘혈액형’이라는 앨범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이 전쟁을 반대하고 변화를 꿈꾸는 메시지라 소련 사회에 염증을 느끼던 젊은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986년 4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가 터지자 그해 12월부터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발트 3개국에서 소비에트 중앙정부의 강제 병합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그러자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5개국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독립을 원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차츰 규모가 커지면서 소련 정부는 통제 불능 상황이 되었다. 1987년,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시행되면서 키노의 인기와 활동 무대는 더욱 넓어졌다. 빅토르 최의 인기는 1988년에 절정에 올라 공연 입장권은 암거래로 열 배를 주고도 구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목덜미를 덮는 긴 머리에 낡은 청바지를 입고 신들린 듯 허공으로 뛰어오르며 기타를 치면 젊은 남녀 팬들은 우레같이 열광했다. 이름이 알려지면서 프랑스, 덴마크 등 자유국가에서도 공연을 했다. 1990년 초 모스크바 레닌 스타디움에서 열린 공연에는 6만여 명의 관객이 몰려 축구경기장이 꽉 찼다고 한다. 어렵사리 당국의 허가를 받아 10월에는 아버지의 조국인 한국과 일본에서 공연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8월 15일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빅토르 최가 몰고 가던 승용차가 맞은편에서 오던 대형버스와 정면 충돌해 차체가 뭉개지면서 시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죽었던 것이다. 사고 버스 운전수는 빅토르 최가 누군지 알지도 못했고 그가 과속 운전을 했기 때문에 일어난 돌발 사고였다고 주장했지만 그걸 믿는 러시아인은 별로 없었다. 개혁 개방을 반대하는 보수파와 뒷전에서 암약하는 KGB 출신들이 눈엣가시 같은 빅토르 최를 계획적으로 살해했다고 의심했다. 그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러시아의 젊은이들은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고 추모의 열기가 너무 뜨거워 장례식을 몇 차례나 연기했다고 한다. 그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다음 해인 1991년 12월, 소비에트 연방은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1994년 5월 24일, 나는 냉동화물선 미스트라우(Mistrau)호를 타고 빅토르 최의 묘지가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항에 입항했다. 화물은 콜롬비아 투르보(Turbo)항에서 선적한 바나나 16만 6000박스였다. 당시 러시아는 정치, 경제, 사회가 극도로 혼란한 시기라 입항하는 외국 배 선주들은 아무도 국영 대리점을 믿지 않았다. 미스트라우호도 발트해에 들어서기 전, 덴마크의 칼룬드 보그(Kalund borg)에서 미리 연료유를 싣고 주·부식을 구입하고 선용금을 받았다. 미스트라우호가 접안한 부두는 대(大)네바 강어귀에 있는 23번석 잡화 부두였다. 부둣가에 늘어서 있는 크레인들은 말라죽은 고목처럼 녹슨 팔을 내려뜨리고 움직일 줄 몰랐다. 근처에 우뚝우뚝 치솟은 높은 굴뚝에서는 한 군데도 연기를 내뿜는 곳이 없었다. 대부분의 공장들은 원료 부족으로 놀고 있었다.
현문사다리를 내리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입항 수속 관리들이 올라왔다. 저마다 권력과 지위를 과시하듯 제복의 어깨에는 왕별 견장을, 소매에는 금줄 수장을, 가슴에는 약장을 울긋불긋하게 달고 있었다. 관리들은 입항 서류는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밀쳐놓고 먹이에만 눈독을 들였다. 본드 스토어에 담배 위스키가 얼마나 있는지, 부식 창고에 쇠고기 닭고기 돼지고기가 얼마나 있는지 그것에만 정신이 쏠려 있었다. 검역관과 세관원이 창고에 들어가 재고를 확인하고는 관리 한 사람당 쇠고기 2kg, 말보로 두 보루를 달라고 억지를 부렸다. 세계 여러 항구에 입항해 봤지만 쇠고기를 달라는 관리는 처음이었다. 시중에서는 쇠고기 구하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소리였다. 선원들이 먹는 부식을 줄 수는 없다고 거절하자 부식 창고를 밀폐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부식 창고가 불결해 전염병을 옮길 우려가 있다고……. 아무리 국가 경제가 파탄 났다고 해도 제복을 입은 관리들이 쇠고기 한 덩이에 자존심을 내던지다니. 그건 부패하고 가난한 아프리카 관리들이 써먹는 가장 치사한 수법이었다. 하지만 관리들이 염치 불고하고 내놓으라는 데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고성을 지르며 흥정한 끝에 쇠고기 1kg과 담배 한 보루로 낙착을 봤다.
수속이 끝난 뒤 누군가가 선장 방문을 두드렸다. 금방 수속을 마친 여자 출입국 담당 관리였다. 검은 제복 차림 그대로였다. 묵직한 가방을 들고 서 있다가 선장이 문을 열자 잽싸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 여자가 무슨 트집을 잡으려고 또 찾아왔을까? 선장은 경계심이 앞섰다. 여인은 다 안다는 듯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캡틴, 죄송하지만 절 좀 도와주세요. 혹시 보드카 좋아하세요? 사실은 제 남편이 월급도 못 받고 있어 내 월급만 가지고는 세 아이들 게라쿨래스(보리죽) 먹여 키우기도 힘들어요. 그래서 이렇게……. 이 로원베리 레드라벨은 한 병에 5달러이고 블루라벨은 10달러입니다.” 여인은 가방 속에서 보드카 두 병을 꺼내놓으며 애원하는 눈빛으로 선장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살기가 어려우면 제복 입은 관리가 이렇게 남 부끄러운 짓을 하겠는가? 선장은 쇠고기 때문에 치솟았던 짜증도 잊고 측은지심이 앞서 두 병을 모두 사 주었다.
부원 식당에서는 가죽 점퍼를 걸친 두 건달 녀석이 선원들을 부추기고 있었다. 한국 선원들을 많이 상대해 본 듯 제법 능숙한 우리말과 쉬운 영어를 섞어가며. “한국 친구들, 만나서 반갑다. 내 이름은 드미트리, 이 친구는 오시모프다. 우리 나쁜 사람 아니다. 한국 친구들도 많이 있고 예쁜 아가씨들도 많이 알고 있다. 모두 직장 여성이다. 재봉사, 간호사, 제빵사, 굼 점원, 요리사……. 연애하고 싶은 사람은 미리 말해라. 그래야 퇴근할 때 미팅을 시켜줄 수 있으니까. 우리 거짓말 안 한다.” 공산국가에서는 어느 나라나 매춘이 불법이다. 그러나 공공연하게 뚜쟁이 노릇을 했다. 그들은 러시아 마피아의 행동 대원들이었다. 선원들과 부두 노동자들은 세관 게이트를 통과할 때마다 몸수색을 당했지만 그들은 승용차를 몰고 맘대로 드나들었다. 게이트 밖에서 상륙하는 선원들을 기다리는 택시 운전수들도 모두 그들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자동차 부두에는 고급 외제 승용차 수십 대가 통관 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으로 낡아빠진 고물차 한 대가 굴러왔다. 건장한 두 젊은이가 내리더니 고물차의 번호판을 뜯어내어 고급 외제차에 부착했다. 고물차는 버려두고 외제차만 몰고 경비원들이 지키고 있는 세관 게이트로 버젓이 빠져나갔다. 아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들이 바로 러시아 마피아들이었다. 그들의 보스는 은퇴한 KGB 고위층이라고 했다.
거리에서 열린다는 인민 시장을 구경하기 위해 전차를 탔다. 리테아누이 대로로 가는 155번 노선이었다. 요금은 150루불이었다. 1992년 3월까지만 해도 15코페이카–1루불은 100코페이카-였는데 1993년 10월에 30루불로 오르고 1994년 5월에는 150루불로 올랐다. 4개월이 지난 그해 9월에는 1000루불로 한꺼번에 거의 7배나 올랐다고 한다. 155번 전차 터미널은 모스크바행 역 앞에 있었다. 역 광장에는 꽃과 과일을 파는 좌판 상인들과 담배, 보드카, 신문, 캐비아 등속을 파는 박스 가게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주로 할머니들이 지키고 앉은 꽃 좌판에는 장미 백합 글라디올러스 튤립 같은 화훼와 오이 샐러리 토마토 피망 브로콜리 같은 채소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이 꽃과 채소들은 개인 소유로 분배해준 50평 정도의 텃밭에서 농민들이 직접 재배한 것이라고 했다.
인민 시장은 오후 3시부터 5시 사이에 대로를 따라 굼(백화점)을 빙 둘러싸며 자연스럽게 줄을 지어 열렸다. 젊은 남자만 눈에 띄지 않을 뿐 열서너 살 소녀부터 아가씨, 아주머니, 중늙은이,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한 푼이라도 돈이 궁하고 배고픈 사람은 다 나왔다. 어느 누구도 입으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직 눈빛으로만 말했다. 4시가 지나자 나올 사람은 거의 다 나왔는지 길게 이어진 줄은 굼을 한 바퀴 에워싸고도 남았다. 벨벳 투피스를 입은 미모의 30대 여인은 하이힐과 실크 블라우스를 들고서 수치심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어느 40대 여인은 약사 출신인지 아스피린, 페니실린, 마이신 같은 약 종류를 양 손바닥에 올려놓고 있었다. 팔러 나온 사람은 이렇게 많은데 사는 사람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굼에서 한 블록 떨어진 뒷골목에는 더욱 가난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터가 있었다. 여기는 시골 장바닥같이 자존심도 내팽개치고 거리낌 없이 웃고 떠들었다. 들고나온 물건도 대로변에 비해 보잘것없었다. 헌 운동화, 낡은 구두, 재봉틀의 북, 드라이브 세트, 톱, 망치, 탁상시계……. 팔아 봐야 흑빵 한 덩이 값도 안 될 성싶었다.
한 집안이 망하면 처자식이 헐벗고 굶주리지만 나라가 망하면 제일 먼저 무너지는 게 아녀자들의 순결이라고 했다. 역사적으로 고찰해보면 그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인민 시장에 들고 나갈 겉옷은커녕 갈아입을 속옷 한 장도 없는 여인들은 당장 빵과 바꿀 것이라곤 젊은 육체뿐이었다. 내일 아침에 먹을 흑빵 한 조각 구하기 어려운 현실 앞에서 국가를 원망하고 정치 지도자를 원망해봐야 나올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스크바 근교에 사는 어느 30대 여성은 자기 자식 2명을 목 졸라 죽이고 경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게라쿨레스(보리죽)도 먹일 수 없는데 어떻게 키우겠는가. 차라리 내 손으로 죽이고 이런 비참한 현실을 세상에 알리려고 자수를 했다.” 판매 부수가 절반 이하로 떨어진 러시아 언론은 이 비극을 사실 그대로 보도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굶어 죽느냐, 비굴하게 사느냐? 자포자기에 빠졌던 여인들은 하나둘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다. 수없이 빨고 빨아서 너덜너덜해진 팬티와 함께 자존심은 던져버리고……. 최근에는 정치 지도자를 잘못 만난 베네수엘라 인텔리 여성들이 먹고살기 힘들어 일자리를 찾아 국경을 넘고 있다고 한다. 글/ 김종찬 해양소설가
2024-03-21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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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주꾼 거짓 신고에 함정 10척 작전 돌입 [해양문학 찾아 떠돈 40년 항적]
2012년 8월 10일. 신문을 펼치다 참으로 분통 터지는 기사를 보았다. ‘지난달 5일 오전 8시. 112 종합 상황실에 부산 다대포 앞바다에 무장공비로 추정되는 잠수함이 나타났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이 신고로 경찰 30명, 해경 8명, 육군 41명, 해군 97명 등 총 176명의 수색 인력과 해군 경비정 1척, 고속정 2척, 항만 경비정 3척이 투입되어 1시간 이상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벌였지만 허탕이었다. 경찰은 허위신고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최모(49) 씨의 신병을 확보했다. 경찰에 따르면 최 씨는 경찰과 군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보고 싶어서 그랬다고 진술했다.’ 나는 이 기사를 보면서 30여 년 전에 있었던 거문도 대간첩작전이 떠올랐다.
1973년 7월 어느 날이었다. 나는 그때 호위구축함인 DE-73 충남함 보수관이었다. 충남함은 그날 제주도 남방에서 순항속력으로 담당 해역을 경계하고 있는데 함대사령부로부터 긴급 전문이 왔다. ‘거문도 간첩 상륙. 전문 수령 즉시 거문도 외곽에서 간첩선 도주로를 차단하고 의아 선박을 검색하라!’ 충남함은 부랴부랴 보일러 증기압을 최대로 올리며 전속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속력을 올리자 함수에 새하얀 물갈기를 세우며 경주마처럼 껑충껑충 뜀박질을 했다. 도주하는 간첩선을 갑작스럽게 조우할 경우를 대비해서 함장은 멀리서부터 각종 장비 점검을 하고 전투배치 명령을 내렸다. 거문도가 가까워질수록 승조원들은 바짝 긴장해서 눈빛이 빛났다. 함교 외벽에 자랑스러운 간첩선 격침 마크를 하나 더 다는 게 아닌가 하고 은근히 기대하면서. 전문으로 지시한 위치에 도착했을 때는 해질 무렵이었다. 그때까지 의아 선박은 한 척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 작전에 동원되었던 해군 함정은 구축함을 비롯해서 초계함, 고속정 등 십여 척이나 되었다. 간첩이 출몰했다는 거문도에는 경찰 및 해병대 일개 중대가 긴급히 투입되었다. 섬 외곽으로는 함정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경찰과 해병대가 온 섬을 이 잡듯이 뒤졌다. 그러나 간첩선은커녕 간첩의 흔적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이 작전은 아무런 성과 없이 사흘 만에 종료되고 말았다. 당시 매스컴에는 이 사건이 일절 보도되지 않았다.
1981년, 나는 외항선을 타면서 동승했던 거문도 출신 조기장 박필만 씨의 입을 통해서 뒤늦게야 그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 박필만 씨는 포상금에 눈이 어두워 허위 간첩 출현 신고를 했던 정칠봉(가명) 씨와 한마을에 살았던 사람이었다. 모주꾼인 정칠봉 씨는 그날 아침나절부터 마누라한테 붙잡혀 어쩔 수 없이 콩밭을 매고 있었다. 한낮이 되자 뜨거운 햇살은 등덜미를 푹푹 삶기 시작했다. 연신 흘러내리는 땀으로 눈이 따가웠다. 목은 마르고 막걸리 생각이 간절했지만 새참 갖다 줄 사람도 없었다. 칠봉은 제풀에 짜증이 나서 호미질이 거칠어졌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마지못해서 하니까 온갖 잔꾀가 떠올랐다. 그의 머릿속에는 며칠 전에 반상회에서 마을 이장이 하던 말이 자꾸만 맴돌았다. ‘간첩선을 신고해서 나포하면 포상금 3000만 원! 간첩을 신고해서 체포하면 500만 원!’ 엉뚱한 생각을 하니 손발이 따로 놀았다. 헛된 꿈 깨라고 호미 끝이 손등을 쪼고 말았다. ‘아얏!’ 손등에서 피가 번지기 시작했다. 피를 보는 순간 칠봉은 ‘바로 이거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끝까지 우기면 알 게 뭐야?’ 그는 망설일 틈도 없이 호미를 내팽개치고 일어섰다.
“밭매다가 갑자기 어디로 내빼요?” 마누라의 타박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배탈 난 사람처럼 아랫배를 싸안으며 바쁜 걸음을 쳤다. 마누라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칠봉은 제 손으로 옷을 찢고 흙바닥에 뒹굴었다. 뾰족한 돌멩이로 얼굴을 때려 상처를 만들었다. 가쁜 숨을 헐떡거리며 파출소를 향해 달렸다. 파출소에 들어선 칠봉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가가 간첩이…… 밭매다가 배가 아파 똥 누러 가는데 낯선 놈이 불쑥 나타나…… 깜짝 놀라서 당신 누구요? 뭣 하는 사람이요? 하고 물었더니 그 새끼가 불쑥 단도를 빼 들고 소리도 없이 날 죽이려고…… 그래 치고받고 싸우다가 도망쳐 왔어요. 그 새끼 간첩이 틀림없어요! 근처 콩밭에는 우리 마누라 혼자서 밭을 매고 있는데 해코지나 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최초에 신고를 받은 파출소 당직 경찰은 칠봉의 어설픈 연기가 의심스러웠다. 그렇다고 함부로 묵살할 수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문도에서는 그때까지 간첩 사건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진위를 확인하느라고 신고자와 입씨름을 하며 시간을 허비할 수도 없었다. 나중에 진짜로 간첩이 출현했다는 증거가 나타나면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래서 사실대로 관할 경찰서에 보고했다. 경찰서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군경합동 거문도 대간첩작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대간첩선 작전은 함대사령부에서 지휘했지만 군경합동수사본부는 전남경찰국에 있었다. 수사본부에 파견된 해군보안대 허양구(가명) 소령은 물샐틈없는 수색 작전에도 아무런 성과가 없자 아무래도 신고자의 태도가 의심스러웠다. 목격자는 신고자 한 사람밖에 없었다. 칠봉은 신고와 동시에 경찰서로 이송되었다가 수사본부에 이첩되었다. 직책 높은 사람들 앞에서 똑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받던 칠봉은 이제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다. 그는 사건이 이렇게 크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허 소령은 흔들리는 그의 눈빛을 바라보며 자상한 목소리로 달랬다. “이 봐요, 정칠봉 씨.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바른 대로 말해 봐요. 내가 책임지고 상부에 보고해서 조금도 벌을 안 받게 해줄 테니. 당신의 신고로 대간첩작전에 동원된 인력과 함정이 몇 척이나 되는지 알아요? 구축함 한 척을 한 시간 동안 움직이는 데 필요한 돈이 얼마나 되는 줄 알아요? 당신 논밭 재산 다 팔아도 어림도 없어요. 지금 거문도 외곽에는 열 척이 넘는 군함이 에워싸고 있어요. 그러니 일 초라도 빨리 바른말 하는 것이 대한민국을 돕는 길이요!”
겁에 질려 불안에 떨던 칠봉은 허 소령이 온화한 말로 회유하자 구세주라도 만난 듯이 반가웠다. “사실을 콩밭을 매다가 날씨는 무덥고 목은 바짝바짝 타는데 중참 갖다 줄 사람도 없고…… 그래 혼자 부애가 나서 헛손질을 하다가 고마 죄 없는 손등을 쪼싸부렀지요. 손등은 아파 죽것는디 피까지 흐르는 거를 본께 갑자기 간첩을 신고하면 포상금이 나온다는 생각이 나서……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모르고 끝까지 우기모 될 줄 알고…… 선상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더!”
허 소령은 기가 막혔지만 무식한 촌사람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대간첩작전은 함대사령부의 명령으로 종료되고 말았다. 허 소령의 약속대로 정칠봉은 아무런 벌칙도 받지 않고 풀려났다. 중국집에서 자장면 대접까지 받았다고 자랑했다. 멀쩡한 몸으로 귀가한 그를 보고 동네 사람들은 이렇게 놀려댔다. “어이, 칠봉이. 자네 장한 일 했다고 도경에서 높은 사람 만나고 칙사 대첩 받았다면서? 우리 동네 인물 하나 났네 그려! 그래 포상금은 얼마나 받았는가? 한턱내야 쓰것네!” 글/ 김종찬 해양소설가
2024-03-14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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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 센 항해사 동생 대신 형이 또 입대 ‘들통’ [해양문학 찾아 떠돈 40년 항적]
병영 문학을 읽다가 어느 병사가 쓴 수필을 보았다. 같은 부대에 쌍둥이 형제가 근무했는데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지 분간 못해 일어나는 실수와 해프닝을 써놓은 글이었다. 문득 오래전에 있었던 거짓말 같은 사건이 떠올랐다. 어느 바닷가 마을에 붕어빵같이 닮은 일란성 쌍둥이 형제가 있었다. 쌍둥이라고 형님은 쌍곤이, 동생은 또곤이라 불렀다. 농고를 졸업한 형 쌍곤이는 일찍이 해병대에 지원해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해 농사일을 거들고 있었다. 해양고를 나온 동생 또곤이는 대일 화물선을 타고 있었다. 그때는 선원들의 월급도 보잘것없어 일본에서 여자 속옷이나 파라솔, 청바지, 시세이도 화장품 등속을 몇 개씩 가져와 국제시장에 있는 외제 깡통시장에 넘겨 용돈이나 마련하곤 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국적선은 몇 척밖에 없었고 해기사를 양성하는 해양·수산계 학교도 많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선원 수출 길이 열리면서 해기사들의 몸값이 치솟기 시작했다. 잘살아보자고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던 시절이었다. 외국어 잘하고 유능한 선장, 기관장들은 해외 송출선에 취업할 길이 열렸다. 항해사, 기관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해외 수출 길이 열리니 갑자기 해기사 품귀 현상이 생겼다. 그렇다고 부족한 해기사를 하루아침에 양성할 수는 없었다. 그 바람에 해고 출신인 또곤이도 귀하신 몸이 되었다. 예전에는 배를 한 번 내리면 다음 배 승선하기가 어려워 선원과 직원에게 밥이라도 한 끼 사며 인사를 해야 됐는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연가를 받아 집에서 쉬고 있으면 어떻게 알았는지 이름도 모르는 회사에서 좋은 조건으로 채용하겠다며 자기 회사로 오라는 전보가 여러 통 날아왔다. 인력이 부족하니 진급도 빨라지고 급료도 엄청 오르게 된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바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또곤이가 수출선 일등항해사가 되었을 때 한 달 급료는 시골에서 논 한 마지기를 살 수 있는 거금이 되었다. 바로 그 무렵에 또곤에게 군에 입대하라는 영장이 나왔다. 또곤이는 고민이 컸지만 병역을 기피할 수는 없었다. 그때 형 쌍곤이가 반농담조로 기발한 제안을 했다. “야, 또곤아, 내가 니 대신에 군대 한 번 더 갔다 올게. 대신에 제대할 때까지 니 월급 반반씩 나누자.” 그때만 해도 시골 면사무소에서는 호적이나 병역에 관한 모든 기록을 펜촉으로 하던 시절이었다. 일란성 쌍둥이인 쌍곤이와 또곤이는 지문만 빼고는 목소리까지 닮았다. 쌍둥이 형제를 나란히 세워 놓고 지문 대조를 하지 않으면 누가 누군지 마누라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대리 복무를 해도 누가 고발하지 않으면 발각될 염려는 없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그런 범법 행위를 한 전례도 없었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농담으로 여겼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또곤이도 귀가 솔깃했다. 이건 성님 좋고 아우 좋고, 괜찮은 거래다 싶었다, 해병대 병장으로 제대한 쌍둥이 형님이 동생 대신에 육군 이등병으로 다시 한번 입대하겠다는 데 마다할 까닭은 없었다. 또곤이는 군에 안 가고 근 3년 동안 계속해서 배를 타면 선장 진급도 빠르고 그동안 월급으로 논을 수십 마지기나 살 수 있다. 그 논을 반반 나누면 성님도 살기가 편해진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도 아니다. 법을 어기는 일이긴 하지만 쌍둥이 형제는 죄의식도 느끼지 못했다. 옛날에도 부잣집 아들은 병역 대신 군포를 내거나 종놈을 보내지 않았던가? 뼈 빠지게 농사지어 봐야 손에 들어오는 돈은 몇 푼 안 되는 쌍곤이 동생 또곤의 많은 월급이 아까워서 한 말이지만 농담이 진담이 되고 말았다. 해병대 병장 출신인 쌍곤이 동생 또곤이가 되어 논산 훈련소에 입대하고 또곤이는 수출선 일등항해사로 바다에 나갔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북한 124군 부대 요원들이 청와대를 깨부수고 박정희 대통령의 목을 따겠다고 내려온 것이다. 그 바람에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다. 신병훈련소 훈련을 마치고 육군 이등병으로 복무 중인 쌍곤이 앞으로 예비군 훈련 통지서가 나온 것이다. 세상에는 행운만 계속되는 법이 없다. 부모들에게는 청천벽력이나 다름없었다. 형제끼리 잘살아보겠다고 벌인 일인데 까딱하면 아들 둘이 한꺼번에 범법자가 되어 영창에 끌려가는 꼴을 볼 것만 같았다. -아이구 큰일 났구나. 이 일을 우짜모 좋것노?
비록 못 배운 시골 무지렁이라고 해도 자식 앞에 위기가 닥쳤는데 부모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했다. 인간도 위기에 처하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설치는 법이다. 법에 걸리는 짓을 했다고는 해도 남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국가에 대해서도 또곤이가 귀한 달러를 많이 벌어들이니 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해를 끼치는 일은 아니다 싶었다. 찾아보면 해결할 방법이 영 없지는 않을 것 같았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어쩌면 좋겠느냐고 하소연을 했더니 중대장한테 찾아가 상의해 보라고 귀띔해 주었다. 창설 초기라 시골 예비군 중대장이 그리 대단한 존재도 아니었다. 좁은 시골 바닥이라 수소문해보니 중대장이 영 모르는 남남도 아니었다. 부모들은 중대장 옷자락을 붙잡고 제발 아들 둘을 살려달라고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만 해도 시골 인심이 그리 야박하지도 않았다. 예비군 훈련을 대신 해줄 사람만 구하면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도 있었다. 딱한 사정을 아는 이웃 사람들은 알아도 모르는 척했다.
그렇게 해서 두 아들이 한꺼번에 구속되는 큰 위기는 넘길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해외 취업자는 출국 신고만 하면 예비군 훈련은 자동으로 면제되었다. 또곤이는 이제 맘 놓고 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군 복무를 형이 대신해 준 덕분에 또곤이는 계속해서 배를 탈 수 있어 진급이 빨라 동기생들보더 먼저 선장이 되어 오래 근무하다 정년퇴직을 했다. 그런 과거를 숨기며 살아온 쌍둥이 형제도 이제 나이가 팔순이 다 되었다. 글/ 김종찬 해양소설가
2024-03-07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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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학 찾아 떠돈 40년 항적] ‘귀두 도장’ 찍는 기지 발휘해 구사일생
해군사관학교 1기생은 1946년 2월 8일부터 3월 18일까지 3차에 걸쳐서 총 113명이 입교하여 1947년 2월 7일 61명이 졸업했다. 2기생은 1기생이 졸업한 2월 7일 오후에 86명이 입교하여 1948년 12월 15일에 48명이 졸업했다. 3기생은 1947년 9월 2일에 136명이 입교하여 1950년 2월 25일에 54명이 졸업했다. 1~3기의 교육 기간이 1년, 1년 10개월, 2년 6개월로 제각각이었던 것은 정부 수립 이전에 간부 인력이 시급하게 필요하여 애초 계획한 3년 교육 기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들쭉날쭉 임관시켰던 사정 때문이다. 1기, 2기, 3기에서 이렇게 입학생 대비 졸업생 비율이 낮은 것은 교칙이 엄해 성적 불량, 적성 불량, 교칙 위반 등의 벌칙으로 퇴교를 당하는 생도들도 많았지만 더 큰 이유는 좌익 프락치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생도들 간에 좌우 사상 대립이 얼마나 심했는지 밤중에 실종된 생도가 날이 새면 변기통에 거꾸로 처박혀 시체가 되어 발견될 정도였다. 대부분 좌익 프락치들의 소행이었다.
교관 중에서도 좌익 프락치가 있었다. 학과목 교육 중에도 은근히 공산주의 사상을 선동할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북한에서 공산주의가 싫어 월남해 제일 안전한 곳인 줄 알고 사관학교에 들어왔는데 여기도 있을 곳이 못 되구나!’하고 탄식하며 자퇴하는 생도가 한두 명이 아니었다. 학교 당국에서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좌우 대립으로 워낙 혼란한 시국이라 적색분자를 색출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좌익 프락치는 2기생 가운데 제일 많았는데 그 증거는 곧 현실로 드러났다. 2기생은 해사 역대 기수 중 가장 적은 인원인 48명이 졸업했는데 졸업 후에도 함정 납북 또는 미수죄로 10명이나 검거되는 불명예를 짊어져야 했다. 2기생 좌익 프락치들은 졸업 후 소위 계급장을 달고 함정에 배치되자마자 남로당의 지령을 받아 상관을 살해하고 함정을 납북하는 등 끔찍한 짓을 자행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명령을 받은 남로당은 해군 좌익 승조원들에게 1948년 5월 10일 남한의 총선거를 전후하여 함정 납북을 지령했다. 지령을 받은 좌익 승조원들은 그해 5월 7일 JMS –311 통천정을, 5월 15일에는 YMS-517 고원정을 북으로 몰고 갔다. 1949년 5월 11일, 해사 2기생인 YMS-508 강화정 부장 이송학 소위는 좌익 승조원들과 결탁하여 정장 이기종(해사 1기) 소령과 훈련대 사령 황운서(특임) 중령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함정을 원산으로 몰고 갔다.
1949년 5월 서운걸(해사 2기) 소위는 부산 3부두에 정박하고 있던 JMS-302 통영정(정장 공정식 대위)을 납북하려다 승조원들의 반발로 미수에 거쳤다. JMS-307 단천정, 301 대전정도 좌익 승조원들에 의해 납북될 뻔했으나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났다. 같은 해 5~6월 사이에 PG-313 충무공정, JMS-305 두만강·307 단천정, YMS-502 경주·505 김해·506 강계·510 강경정 등 무려 7척의 부장들이 모의하여 집단으로 함정을 납북하려다 사전에 적발 검거되었다. 여기에 가담한 부장들은 대부분 2기 출신 좌익들이었다. 1962년 4월 28일, 동해 해상에서 경비 중이던 PC-707 오대산함에서 납북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01시 45분경 좌익 프락치로 해군에 입대해 기회를 노리고 있던 수병 최방순이 권총을 들고 조타실에 난입하여 침로를 북으로 돌리라고 협박했다. 이를 제지하던 과정에서 부장 최성모(해사 9기) 대위는 복부 관통상을 입고 즉사하고 3명의 중상자가 발생했다. 범인 최방순은 납북에 실패하자 권총으로 자살했다.
나는 NROTC 17기로 1972년 2월 25일 해군 소위로 임관하여 2년 동안 호위구축함인 DE-73 충남함 보수관으로 근무했다. 제대 후 외항선을 타면서 싱가포르에서 해사 2기생인 고 박무호 사장을 만나게 되었다. 박 사장은 대령으로 예편한 후 이민을 가서 1970~1990년 싱가포르에서 선식업을 경영했다. 고객들은 주로 해사 출신 선장들이었다. 고 박무호 대령은 평양일고 출신으로 젊었을 때는 해군참모총장을 지낸 함명수 제독과 냉면 대접에 소주를 가득 부어 마실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지만 별은 달지 못했다.
해사 2기생들의 추석 연판장 사건은 고 박무호 대령한테서 직접 들은 이야기다. 추석이 되었는데 고향이 먼 생도들은 외출을 나가도 돈도 없고 갈 곳도 없었다. 학교 급식은 부실했고 배가 고프니 고향 생각이 간절했다. 특히 이북 출신 생도들이 더 외롭고 쓸쓸했다. 어느 진해 출신 생도가 그런 동기생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평양이 고향인 박무호 생도도 초대를 받았다. 진해 생도의 집은 진해시 여좌동에 있었다. 다다미가 깔린 일본식 가옥 2층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생도들은 저마다 조국의 앞날을 걱정했다. 의도했던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어느 생도가 일어나서 이런 제안을 했다. “동기생 여러분,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리들의 결의를 다짐하기 위하여 이 종이에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읍시다!”
그러자 몇몇 생도가 “옳소! 찬성이요!” 하면서 박수를 짝짝 쳤다. 아무런 반대 없이 연판장이 돌기 시작했다. 박무호 생도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평양에서 공산당원들이 궐기대회를 할 때 하던 분위기와 흡사했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반대는 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언제 목이 졸려 변기통에 거꾸로 처박힐지 알 수 없었다. 연판장이 돌고 돌아 박무호 생도 앞에 왔다. 박무호 생도는 연판장에 이름도 쓰지 않고 허리띠를 풀고 훌러덩 바지를 내렸다. 그러고는 껄껄 웃으면서 소리를 질렀다. “야, 사내자식들이 손도장이 다 뭐냐! 남자는 거시기 도장보다 확실한 게 어딨어. 나는 거시기 도장을 찍겠어!” 박무호 생도는 ‘털방망이’를 꺼내 귀두에 인주를 벌겋게 묻혀 연판장에 꾹 눌렀다. 그 꼴을 보고 멋모르는 생도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좌익 프락치들은 속으로 이를 갈아붙였겠지만 그 후 다른 위해는 없었다. 박무호 생도가 그날의 모임에 대해 함구했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흘러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함정 납북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자 뒤늦게 사상 검열이 엄격해졌다. 그날 연판장에 서명을 하고 인장을 찍었던 대부분의 동기생들은 이미 이적 죄를 지어 처형되거나 예비검속을 당해 군복을 벗었다. 사관학교 동창회 명부에는 ‘전사’라는 기록만 있을 뿐 어느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기록도 없다. 그러나 박무호 생도는 별은 달지 못했지만 대령까지 진급했다. 지문(指紋)도 없는 털방망이 도장이 박무호를 살려주었던 것이다. 글/ 김종찬 해양소설가
2024-02-29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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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학 찾아 떠돈 40년 항적] 내 가슴에 음식물 왈칵 쏟아낸 간호 중위
나는 그때 해군 중위로 호위구축함인 DE-73 충남함 보수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날 충남함은 제주도 근해에서 순항속력으로 경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신바람 나는 전문을 받았다. -목포항에 입항해서 간호사관생도 여행단을 싣고 제주항까지 수송하라! 함정에 오는 전문은 모두 비밀이지만 이 전문을 금방 함내에 다 퍼졌다. 젊은 아가씨들, 그것도 간호장교가 될 사관생도를 수송한다니 젊은 대원들은 벌써부터 분홍빛 기대에 부풀어 가슴을 설레었다. 고참 수병, 부사관 할 것 없이 총각 대원들은 맞선보러 가는 신랑감이나 되는 것처럼 설레발쳤다. 눈치코치 볼 것 없이 세면을 하고 주름 잡힌 외출복을 갈아입고 부산을 떨었다. 그러지 않아도 깨끗한 복장으로 손님을 맞이하라고 지시를 할 판인데 제 손으로 온갖 멋을 다 부리니 탈 잡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목포항에 입항했다. 수송할 인원은 인솔자를 포함해서 60명이었다. 간호사관생도 50명에 인솔자가 10명이나 됐다. 인솔 책임자는 여군 소령이었고, 군의관 대위 3명과 간호 대위·중위 6명이었다. 먼저 침실 배정부터 했다. 군인인 주제에 기합이 빠져 머리를 더부룩하게 기른 군의관들은 고생 좀 해보라고 함수 위관장교 침실을 내어주었다. 간호장교들은 함미에 있는 기관장교 침실에 모셨다. 파도가 치면 함수보다 함미가 뜀박질을 덜하기 때문이었다. 50명의 생도들은 제일 넓은 함 중앙 대원침실에 수용했다. 목포항을 출항해서 제주항에 도착할 때까지 항해 당직에 걸린 노총각들은 애가 달아 어쩔 줄을 몰랐다. 근무 시간을 바꿔달라고 기혼자들에게 흥정을 했다. -한 시간에 담배 한 갑! -한 갑에는 안 한다. 두 갑 내라!
목포항을 출항했다. 한껏 멋을 부린 고참 하사들이 갑판을 기웃거리며 생도들의 동태를 살폈다. 올망졸망한 섬 사이를 빠져나오는 동안 바다는 잔잔했다. 기온도 포근했다. 간호사관생도들은 항해하는 동안 잠시 휴식할 캔버스 침대를 배정받고 항해 시 주의사항을 듣자마자 갑갑한 침실을 벗어나 갑판으로 쏟아져 나왔다. 달리는 함상에서 바라보는 주변 풍광은 젊은 생도들에게 경이롭기만 했다. 생도들의 이번 여행은 졸업을 기념하는 함상 체험 여행이었다. 섬 사이를 빠져나오자 바다가 확 트이고 수평선이 멀어졌다. 함정을 처음 타 보는 생도들은 잔물결 반짝이는 바다 위에서 아득한 수평선만 봐도 가슴에 뭔가 모를 그리움이 일었을 것이었다. 함정은 신나게 달리고 지나온 바다 위에는 새하얀 물거품이 안개꽃처럼 흐드러지며 항적을 남겼다. 먼바다를 바라보며 누군가 먼저 동심에 젖어 노래를 불렀다. 동요는 어느새 합창이 되어 함상에 울려 퍼졌다.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파아란 하늘빛 물이 들지요, 어여쁜 초록빛 손이 되지요….
누가 먼저였는지는 알 수도 없다. 말을 붙이고 싶어 안달이 나서 갑판을 기웃거리던 노총각들과 간호사관생도들은 어느새 한 무리가 되었다. 봄 소풍 나온 여고생같이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둘러앉았다. 젊은 남녀가 뒤섞여 앉은 동그라미는 세 개나 되었다. 처음 만난 남녀끼리 모여 앉자마자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도 많을까? 간호사관생도들에게는 추억 만들기였고 노총각들에게는 신부 구하기였다. 서로 경쟁이나 하듯 재잘거리다가 어느 팀에서 먼저 수건돌리기 놀이를 시작했다. 잡힌 사람은 벌칙으로 노래를 불렀다. 청춘 남녀들이 넓은 갑판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즐겁게 떠들고 노는 모습을 보고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함정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흐뭇한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미소를 머금게 했다. 제주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다. 노총각들은 짧은 시간에 어떻게 해서라도 인연을 맺어보려고 생도들에게 온갖 친절을 다 베풀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했던 방해꾼이 나타났다. 바다가 심술을 부리기 시작했다.
수송 작전은 일몰 전에 마쳐야 했다. 넓은 바다에 나오자 충남함은 서서히 속력을 올렸다. 게다가 넓은 바다로 나오니 굼실굼실 높은 물너울이 갑판을 넘겨다보며 시샘을 했다. 속력을 20노트로 올리자 함정은 훌쩍훌쩍 말달리기를 했다. 갑판에는 세찬 바람이 일어나고 파도의 비말이 쏟아졌다. 즐겁게 웃고 떠들던 생도들의 표정이 굳어지며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동그라미는 금방 허물어지고 말았다. 뱃멀미는 돌풍처럼 갑자기 위장 속을 흔들었다. 생도들은 울컥 치미는 토악질을 참지 못해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배정받은 침실로 뛰어들었다. 노총각들은 마음 같아선 괴로워하는 생도들을 침실까지 부축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하사 이하는 간호사관생도들이 수용된 침실에 출입할 수가 없었다. 장교들과 중·상사 이상만 보살펴줄 수 있었다.전속 항진으로 함체의 요동이 심하고 바람이 거세어 비상이 걸리자 인솔 간호장교들이 생도들을 염려하여 갑판으로 나왔다. 하지만 멀미에는 계급도 소용이 없었다. 갑판에서 생도들이 수용된 중앙 침실로 들어가려면 ‘수밀(水密, Water tight) 스커틀’을 통하여 경사가 심한 계단을 밟고 내려가야 한다.
내가 안전 순찰을 돌기 위해 계단으로 올라가는 순간이었다. 갑판에 나갔다가 되돌아오던 간호 중위와 계단에서 마주쳤다. 그 짧은 순간이었다. 간호 중위는 훌쩍 뜀박질하는 함체의 요동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내 가슴 위로 퍽 엎어졌다. 그와 동시에 왈칵 토악질을 하고 말았다. 검은 동근무복을 입은 내 가슴은 졸지에 오물 범벅이 되고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뜻하지 않았던 선물에 나는 더러운 줄도 모르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내 가슴을 붙잡고 비틀거리는 간호 중위의 어깨를 신부처럼 부축하여 후부 장교 침실로 안내했다. 침실에 들어가니 거기도 이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화장실 변기에는 토사물이 가득했다. 토하고 난 뒤 세척수를 내릴 기력조차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투복 차림으로 군화 끈도 풀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던 여군 소령은 달랐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다. 나는 냄새 나는 변기에 세척수를 내리고 브러시로 간단히 소제까지 해주고 나왔다. 그들이 떠나면 곧 우리가 사용할 침실이었다.
어둡기 전에 제주항에 도착했다. 울고불고 법석을 떨던 생도들은 바다가 잔잔해지자 벌써 기운을 되찾아 해죽해죽 웃고 있었다. 짧은 여행이 아쉽다는 듯 현문을 나서며 “갈 때 또 봐요!” 하고 귀엽게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내 가슴에 먹은 것까지 다 토해 준 중위님은 어디에 숨었는지 얼굴도 볼 수 없었다. 그후 노총각들은 은근히 기다렸지만 생도들이 돌아갈 때는 여객선을 이용했는지 충남함은 부르지 않았다. 그 간호 중위님도 이제는 할머니가 되었을 것이다. 글/ 김종찬 해양소설가
2024-02-22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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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학 찾아 떠돈 40년 항적] 10월 선상 미팅 중 여대생 1명 물에 풍덩
1968년 10월 하순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수산대학에 재학 중인 마산고등학교 출신 동문회에서 애인 없는 졸업생들의 신부감을 구해주기 위해 후배들이 마련한 단체 미팅이 있었다. 애인 없는 졸업생들은 캠퍼스를 떠나면 곧 원양어선을 타고 머나먼 바다로 나갈 예비 항해사들이었다. 캠퍼스를 떠나기 전에 대학생 신분으로 짝지를 구할 마지막 기회였다. 상대는 교대생이었는데 같은 도시, 마산고등학교 바로 근처에 있는 마산여고 출신들이 많았다. 졸업할 때까지 애인 하나 사귀지 못할 정도로 말주변 없는 선배들이라 할 이야기가 없으면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라도 하라고 일부러 그렇게 주선을 했던 것이다.
교대생을 택한 것은 직업이 사람의 품격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학교 선생님이라면 남편이 바다에 나가 오랫동안 집을 비워도 가정을 탈 없이 지켜줄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날 밤의 미팅 장소는 부산 남항에 정박해 있는 트롤선 강화호 갑판이었다. 강화호는 1600톤급으로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트롤선 중의 한 척이었다. 대서양에서 조업하다 북태평양 어장에 진출해 첫 항차 40여 일 만에 청어를 한 배 가득 잡아 수산업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배였다.
그 시절만 해도 여자들이 어선에 올라간다는 것은 금기였다. 재수 없다는 미신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성격이 활달하고 배포가 큰 선장은 대학 후배들의 성가신 요청을 흔쾌히 들어주었던 것이다. 트롤선 갑판 위의 미팅은 아마도 그날 밤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당시 부산 충무동 앞바다에 닻을 내린 어선들의 통선은 엔진이 달린 통통선이 아니고 노를 젓는 거룻배였다. 거룻배는 한 번에 7~8명밖에 탈 수 없었다. 50명 남짓한 여학생들을 실어 나르자면 일고여덟 번 왕복해야 했다.
그날 밤 부산 남항은 시월의 싸늘한 달빛과 자갈치 안벽에 풍선같이 늘어선 포장마차 불빛이 해면에 반사되어 휘황찬란한 수궁처럼 아름다웠다. 여학생들은 평소에 느껴보지 못했던 낯선 분위기에 매료되어 벌써부터 들떠 있었다. 노 젓는 거룻배는 한 번 왕복하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다. 여학생들은 어서 빨리 훤하게 불을 밝힌 낯선 배에 올라가 보고 싶어 안달이 났다. 거룻배가 강화호 선미에 닿으면 여학생들은 그물을 내리고 끌어올리는 미끄럼 갑판에 설치해 놓은 줄사다리를 붙잡고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가야 했다. 이제 남항 부두에 남은 여학생도 몇 명밖에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조심을 했으나 여러 번 아무런 문제 없이 왕복하다 보니 거룻배 사공도 방심을 했다. 배에서는 첫 항해와 마지막 항해를 조심하라고 했는데….
거룻배가 마지막 남은 여학생들을 싣고 왔다. 기다리느라 지쳤던 어느 여학생이 어서 빨리 올라가자고 앞서가는 친구의 엉덩이를 밀며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그 여학생은 발을 헛디디며 바다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앞사람의 엉덩이를 밀면 배가 뒤로 밀린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시월이라고 해도 밤바다의 수온은 얼음처럼 차디찼다. -이거 큰일 났구나. 심장마비라도 일으키면 죽을 수도 있는데, 예비 여선생님이 미팅하러 왔다가 물에 빠져 죽으면 큰일인데!
그날 밤 강화호 당직사관은 삼등항해사였다. 우물쭈물할 겨를이 없었다.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그는 벼락같이 바닷물에 뛰어내렸다. 두꺼운 겨울옷 차림으로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익수자의 뒷덜미를 붙잡아 줄사다리로 이끌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대학 선배인 삼등항해사는 물에 흠뻑 젖은 예비 여선생님을 샤워장으로 안내했다. 차가운 바닷물로 흠뻑 젖은 옷 때문에 체온이 더 떨어지기 전에 온수로 샤워부터 시켜야 했다. 온수 샤워를 하고 젖은 옷을 말릴 동안 입을 깨끗한 작업복을 구해 문틈으로 넣어주었다. 얇은 속옷은 전기 다리미로 급속으로 말려 입고 두꺼운 겉옷은 탈수기로 돌려 물기를 빼고 건조기와 통풍으로 말려야 했다. 익수자는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예비 선생님답게 부끄럼을 타거나 당황하지 않고 낯선 항해사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잘 따랐다.
갑판에서는 미팅이 시작되었으나 분위기는 착 가라앉았다. 참석자들의 마음은 모두 익수자가 별일 없는가 하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사회자는 분위기를 띄워보려고 목청을 높였으나 참석자들의 불안은 쉽게 걷히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물에 빠졌던 여학생이 선원작업복 차림으로 생긋 웃으며 나타났다. ‘내 파트너는 어디 있어요?’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모든 참석자들이 환성을 지르며 항구가 떠나갈 듯이 요란하게 박수를 쳤다. 그날 밤의 히로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물에 빠진 예비 여선생님이었다. 그때 나는 대학 1학년으로 물에 빠진 예비 여선생님과 마지막 거룻배에 같이 탔었다. 빨리 올라가자고 앞 사람의 엉덩이를 밀고는 바다에 풍덩 빠지는 모습도 똑똑히 보았다.
갓 스물이었던 나도 어느새 칠순이 넘었다. 선상 미팅에 참석했다가 하마터면 물귀신이 될 뻔했던 그 예비 여선생님도 지금은 호호백발 할머니가 되었을 것이다. 옛날부터 뒷간에 빠지거나 물에 빠졌다가 구조된 사람은 명이 길다는 속설이 있다. 그날 밤 익수자의 주눅 들지 않은 활달한 태도를 미루어보면 아마도 그 예비 여선생님은 학교장까지 역임하고 정년퇴임을 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하지만 교대 출신 친구들을 통해 수소문해 봤지만 도무지 족적을 알 길이 없었다. 아마도 그날의 해프닝에 대해 본인이 입을 다물었거나 세월의 강물에 떠밀려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모양이다. 그날 밤 차디찬 바다에 풍덩 뛰어들어 물에 빠진 그녀를 구해 준 삼등항해사, 대학 선배는 다른 여인과 결혼했다. 그러면 그녀는 누구와 결혼을 했으며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새삼스럽게 그녀의 근황이 궁금하다. 글/김종찬 해양소설가
2024-02-15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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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학 찾아 떠돈 40년 항적] 에프킬라, 폭발물로 오인… 비행 1시간 지연
그때 우리 일행은 북대서양 뉴펀들랜드 어장에 출어할 트롤선 다니카호를 인수하러 가는 길이었다. 다니카호는 라스팔마스 아스티칸 조선소에 입거해 있었다. 우리 제2진이 탑승할 비행기는 17시 40분 김포발 파리행 에어프랑스 271편이었다. 기종은 보잉 747이었다. 제2진은 15명으로 기관장인 내가 인솔자였다. 일행이 많고 짐도 많아 일찌감치 탑승 수속을 마쳤다. 이제 고국 땅을 떠나면 2년 후에 돌아온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싱숭생숭한지 선원들은 너도나도 가족 친지들에게 전화를 하느라고 바빴다. 2월 하순인데도 김포공항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 있고 바람은 바늘로 귓불을 찌르는 듯 맵차 우리들의 마음은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파리행 에어프랑스 271편은 정시에 김포공항을 이륙했다.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 약 1시간 동안 지체하며 장거리 비행에 필요한 연료와 식품을 보급받고 새 승객을 태웠다. 다음 경유지는 앵커리지였다. 비행기는 21시에 나리타공항을 박차고 어두운 밤하늘로 솟아올랐다. 나리타에서 탑승한 승객으로 이제 기내는 빈 좌석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만원이었다. 도쿄에서 앵커리지까지 비행시간은 6시간 25분. 비행기는 고도 1300~1800m, 시속 500~900㎞로 북극 상공을 가로지르며 날았다. 기내 화면은 계속해서 비행 중인 항로와 현재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식사가 나왔다. 후추 친 연어, 계란 버섯 곁들인 감자 퓨레와 버터로 조리한 브로콜리, 샐러드, 치즈, 초콜릿 케이크, 바케트 빵, 그리고 컬럼비아 커피. 난생처음 먹어보는 프랑스 음식이라고 선원들은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비행기는 새벽 4시에 앵커리지에 도착했다. 현지 시각은 아침 10시. 여기서 한국인 스튜어디스는 모두 외국인으로 교체되었다. 머나먼 바다로 장기 조업 나가는 선원들이 맘에 걸렸는지 포도주도 아낌없이 따라주고 집 떠나면 맛보기 어려울 거라고 밤톨만한 고추장도 나눠주었는데, 떠날 때는 연민의 정이 듬뿍 담긴 눈빛으로 “건강하게 잘 다녀오세요!”하고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한국 스튜어디스가 떠나자 기내 우리말 방송도 들을 수 없었다.
이윽고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경찰이 동승하여 호송하는 버스를 타고 오를리 공항으로 이동했다. 오를리 공항에 도착하자 비행기 표와 선원수첩을 공항 관리가 보관하고 대합실에서 3시간 동안 꼼짝도 못하게 했다. 목은 마르고 배는 고팠지만 공항 내에서는 물 한 모금 사 먹을 수가 없었다. 비상금으로 달러는 조금씩 가지고 있었지만 매점에서는 달러를 받지도 않고 환전소도 없었다. 프랑스는 수질이 나빠 생수를 사서 마셔야 하는 줄 알면서도 목마른 선원들은 화장실에서 목을 축이는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탑승 시간이 되어 마드리드행 에어프랑스 보잉 707기에 올랐다. 마드리드로 가는 동안 모두 배가 고파 기내식을 깨끗이 비웠다. 오를리 공항에서 당한 분풀이라도 하듯 볼이 쪼글쪼글한 할머니 스튜어디스에게 음료수를 거듭 요청했다. 할머니 스튜어디스는 사정을 알 만하다는 듯 눈웃음 지으며 꼬박꼬박 시중을 들어주었다.
마드리드에서 라스팔마스까지는 국내선이라 탑승할 비행기는 스페인의 이베리아 항공사 소속이었다. 그래서 국제선 청사에서 국내선 청사로 이동해야 했다. 배기지 클레임에서 무거운 고생보따리를 찾아 마드리드 공항의 명물인 장거리 벨트 컨베이어(Esca-lade)를 타고 국내선 청사로 이동했다. 거기서 다시 4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공항 내 식당에서 닭다리와 감자튀김 그리고 코카콜라로 저녁 식사를 때웠다.
수화물 탁송 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 탑승하려고 대합실에서 셔틀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무슨 큰 문제라도 생긴 듯 무장한 검색요원이 헐레벌떡 우리 일행에게 달려왔다. “여기 인솔자가 누구냐!” “내가 인솔자다. 무슨 일이냐?” 내가 나서자 검색요원은 두말하지 않고 따라가자고 손짓만 했다. 내가 따라간 곳은 수화물 검색요원 사무실이었다. 그곳의 책임자라는 여자 검색요원이 따로 골라놓은 허름한 가방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가방 주인이 누구냐?” 꼬리표를 보니 서울에서 온 우리 일행의 가방이 틀림없었다. 기관원 김삼룡이 주인이었다. “왜 그러느냐?” “이 가방 속에 폭발물이 들었다.” 폭발물(Explosive)이라는 말에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급히 김삼룡을 불렀다. 삼룡이 나타나자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녀석은 무슨 특공대원처럼 개구리 무늬 야전 점퍼를 입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예사로 보았는데 사건이 생기니 그것도 눈에 거슬렸다. “야, 삼룡아, 도대체 가방 속에 무엇이 들었느냐? 니 가방 속에 폭발물이 들었다고 공항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그러자 삼룡이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며 기어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에프킬라, 강구 약 에프킬라가 두 통 들었심더.” 그 말을 듣자 나는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세상에, 장거리 국제선 비행기를 타면서 에프킬라를 가지고 오는 친구도 있단 말인가? 김포공항과 에어프랑스 검색대에서는 왜 발각되지 않았을까? 아마도 단체 선원들 짐이라고 해서 일일이 체크하지 않고 그냥 통과시킨 모양이었다. 마드리드 공항에서는 항공사가 바뀌는 바람에 다시 검색하는 과정에서 발각되었던 것이다. 나는 검색요원에게 내용물을 설명하고 가방을 열어보자고 했다. 여자 책임자는 안 된다고 손을 내저으며 무전 교신을 했다. 상부의 허락을 받았는지 잠시 후에 열어도 좋다고 했다.
에프킬라 한 통을 꺼내 그림을 보여주며 한번 쏘아볼까 했더니 못하게 했다. 책임자는 의심이 풀렸는지 다시 뭐라고 교신을 했다. 아마 살충제라고 상부에 보고한 모양이었다. 그 사이에 시간은 꽤 흘렀다. 여자 책임자가 말했다. “폭발물은 아니지만 액체 가스도 위험물이라 압수한다. 그리고 가방 주인은 단체 승객이 분명하니 탑승해도 좋다.”
여자 책임자는 우리 때문에 비행기가 이륙하지 못하고 활주로에 대기하고 있으니 빨리 탑승하라고 손짓했다. 나는 서투른 스페인어로 “무차스 그라시아스!(Muchas gracias!, 매우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삼룡이와 나는 무슨 VIP라도 되는 것처럼 검색요원이 모는 지프를 타고 활주로에 대기하고 있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정말 그만하기 천만다행이었다. 관리들이 부패한 후진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무슨 곤욕을 치렀을지 모른다. 그러나 스페인은 라스팔마스에 한국 수산회사들이 많이 진출하고 있어 그런 아량을 베풀어주었던 것이다.
삼룡이와 내가 비행기에 들어서자 모든 승객들의 눈총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눈총을 감당할 수 없어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에프킬라 때문에 비행기는 한 시간이나 지체되었다. 나중에 삼룡이는 에프킬라 건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데구리 배 타는 내 친구가 배에 가모 강구가 잠잘 때 발가락을 물어뜯는다 캐서, 에프킬라는 꼭 갖고 가야 된다 캐서…….” 글/김종찬 해양소설가
2024-02-08 [1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