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의 생각의 빛] 낙엽도 보기 전에 가을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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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지인과 어쩌다 한 번씩 들르곤 하는 주점이 있다. 사장인 아주머니를 도와주는 젊은 여성분이 ‘핼러윈’ 이야기를 꺼내기에, 이 서양 축제를 우리 젊은이들이 요새 부쩍 즐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답의 요지는 이랬다. 명절만 되면 온 집안 식구들이 모여서 온갖 질문을 하는 통에 여기에 질려 버린 젊은이들이 결국 핼러윈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아닌 게 아니라 한국 사람의 ‘가족애’는 유난하여, 일 년에 두어 번 얼굴을 보는 자리에서 그간 쌓였던(?) 궁금증들을 풀려는 듯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되는 부분들까지 집요하게 묻고, 따지고, 한 수 가르치는 말씀들이 넘쳐난다. 그 명절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이태원 참사가 벌어졌고, 늘 그랬듯 책임의 소재를 두고 여태껏 공방 중이다.

‘이태원’ 보면서 앞선 여러 참사들 떠올라

겉모습 유사해도 의미나 방향은 각각 달라

지난날의 과오 되풀이하지 않는 게 중요

낙엽도 제대로 안 보고 가을을 보낼 수야…

그러는 사이 집으로 날아온 책 봉투들이 가을 낙엽처럼 차곡차곡 쌓였다. 슬픔은 언제나 기억을 안고 뒹구는 법이다. 그것은 사건으로 말미암아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벌어진 자리에 남은 흔적들이 걸어온 시간의 추념 속에서 자라난다. 그러니까 희생된 젊은이들은 어제 길에서 마주쳤던 사람이었고, 또한 다가올 날에 만나기로 했던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그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슬픔의 노리개가 되어 흐느끼거나, 분노하거나, 주먹을 불끈 쥐게 되는 것이다.

또 그러는 사이 가을이 지나간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는 ‘상추객(賞秋客)’들이 지나가는 가을을 붙잡으려 풍경을 올리고 ‘참사’와 상관없이 사람들은 ‘좋아요’를 누르며 동참한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슬픔을 통째로 자신에게 들여놓을 수 없다. 잠깐 지나가는 우울이거나, 어쩌면 또다시 맞이할 비극의 전조일 수 있다고 느끼면서도, 나날이 영위해야만 하는 생활공간에 포섭된 채로 살아가는 게 사람이다. 이런 말이 어쩌면 ‘소극적 숙명론자’의 현실도피로 비칠 수도 있겠다. ‘모 아니면 도’ 식의 논법만을 일삼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을 보는 눈이 분명하다. 이들에게는 오로지 인과론적 결정주의와 그런 ‘과학적인 세계 분석’에 따른 역사의 진보와 쇠퇴만이 존재한다. 특히 정치하는 사람들일수록 이분법적 사고가 강하게 자리 잡는다.

이태원 참사를 둘러싼 책임의 소재와 범위는 앞으로 뚜렷하게 밝혀지겠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드러난 국민 정서와 감정의 평행선들을 보면서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이렇게도 세월호 참사와 똑같을 수가 있는지 말이다. 참사가 일어나고, 참사에 대한 책임 공방이 벌어지고, 참사를 계기로 분열된 진영의 속내가 선거에까지 이어지면서 정권이 뒤바뀌는 일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속에서 증오와 분노는 추풍낙엽처럼 날리거나 흩어지지 않고 오히려 쌓이면서 단단하게 뭉쳐지곤 했던 일들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다. 이를 두고 역사의 반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똑같아 보이지만 실은 겉모습만 그럴 뿐 거기에 담긴 의미와 방향은 분명 다를 것이다. 그러므로 속단하는 일만큼 지난날의 과오를 되풀이하는 지름길도 없다.

허수경 시인은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라는 시를 썼다. ‘떠난 사람 자리가 썩는다/붉은 고추가 익는다/막 옮기기 끝낸 고추밭에/편편이 몸을 누인 슬픔이/아랫도리 서로 묶으며/고추모 사이로 쓰러진다’. 시는 곧이곧대로 이해해서는 안 되기에, 슬픔을 거름처럼 여겨야 하는 당위성을 이 시에서 찾으면 곤란해진다. ‘슬픔의 거름화’ 이전에 켜켜이 누적된 눈물들이 피워 올릴 수밖에 없는 앞날의 싹들이 지금의 우리들이다. 그래서 언제라도 과오를 저지를 수는 있겠지만 우리를 살게 했던 진실의 자리마저 잊어서는 안 된다. 진실은 정서나 감정의 흐름에 따라 언제든지 색칠할 수 있는 종이 같은 게 결코 아니다. 진실은 거부하거나 용인할 수 있는 어떤 ‘사실’이 아니라 언제든 그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움직이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전제요 초석이다.

일이 터지면 그 일이 터지게 된 배경을 살피거나 원인을 파헤쳐서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분석을 하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책임질 영역이 뚜렷이 가려지게 되고 대책 방안이나 방지책이 기존의 매뉴얼에 보태지기도 한다. 가을을 보려는 사람이 정작 보는 것은 계절 자체가 아니라 계절이 흩뿌린 흔적인 단풍과 낙엽이다. 참사 이후, 참사를 인식하는 담당 기관장들의 마음은 마치 낙엽만 감상하면서 가을을 애도하는 자의 마음과 같다. 낙엽이야말로 가을이 저지른 대참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낙엽도 제대로 보지 못한 채로 다음 계절을 기다리는 자들이 가을을 들먹일 자격이 충분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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