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슈 나우] 조선인 15만 명 끌려간 치쿠호 탄광… 대를 이은 진실 캐기

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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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재야 연구자·재일동포 등
극비문서 발굴해 강제동원 규명
희생 조선인 1400~2000명 추정
유골 신원 확인 등 과제 산적

지난 5일 일본 후쿠오카현 다가와시 아리랑 문고. 방 한 칸에 재야 연구가 고 요코가와 테루오 씨의 연구 자료가 박스 등에 담겨 놓여있다. 아리랑 문고는 일본 내 조선인 강제징용 실태를 파헤친 기록작가 고 하야시 에이다이 씨의 작업실 겸 자료실로 쓰이던 공간이다. 손혜림 기자 hyerimsn@ 지난 5일 일본 후쿠오카현 다가와시 아리랑 문고. 방 한 칸에 재야 연구가 고 요코가와 테루오 씨의 연구 자료가 박스 등에 담겨 놓여있다. 아리랑 문고는 일본 내 조선인 강제징용 실태를 파헤친 기록작가 고 하야시 에이다이 씨의 작업실 겸 자료실로 쓰이던 공간이다. 손혜림 기자 hyerimsn@

지난 5일 일본 후쿠오카현 다가와시. 주택처럼 보이는 2층짜리 흰 건물의 다홍색 현관문을 열자 오래된 종이 냄새가 훅 풍겼다. 빼곡한 책장에는 책이 두 겹으로 꽂혀 있었고, 거실과 방마다 미처 정리되지 못한 종이 자료와 녹음테이프가 상자째 쌓여 있었다. 책등에 ‘아소광업’이라고 적힌 파일들이 눈에 띄었다. 표지를 넘기자 ‘유골 보관증’ 등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 실태를 보여주는 자료들이 잇따라 모습을 드러냈다.이곳은 2017년 세상을 떠난 기록작가 하야시 에이다이 씨의 작업공간이자 자료실로 쓰였던 ‘아리랑 문고’다. 현재는 2021년 사망한 재야 연구자 요코가와 테루오 씨의 자료가 대량 보관되어 있다. 작가의 자료는 후쿠오카시로 옮겨져있다. 대신 이곳은 요코가와 자료실로 활용될 예정이다.

이곳으로 취재진을 안내한 재일동포 향토사학자 박강수 씨는 자료들을 쳐다보며 “연구자 1~2명이 정리할 수 있는 자료가 아니다”며 “국가기록원이 우선 자료를 모두 가져가 정리한 뒤, 다시 이곳으로 돌려보내는 방안이 좋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었다”고 말했다.


지난 5일 일본 후쿠오카현 다가와시 아리랑 문고 책장에 꽂힌 파일 책등에 ‘아소광업’이라고 적혀있다. 아소광업이 운영한 아소탄광에는 아시아·태평양 전쟁 시기 약 1만 명의 조선인이 노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손혜림 기자 hyerimsn@ 지난 5일 일본 후쿠오카현 다가와시 아리랑 문고 책장에 꽂힌 파일 책등에 ‘아소광업’이라고 적혀있다. 아소광업이 운영한 아소탄광에는 아시아·태평양 전쟁 시기 약 1만 명의 조선인이 노무 동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손혜림 기자 hyerimsn@
지난 5일 일본 후쿠오카현 다가와시 아리랑 문고 전경. 손혜림 기자 hyerimsn@ 지난 5일 일본 후쿠오카현 다가와시 아리랑 문고 전경. 손혜림 기자 hyerimsn@

■ 한평생 치쿠호 탄광 파헤친 이들

아리랑 문고가 위치한 다가와시는 일본 후쿠오카 시내에서 동쪽으로 차로 약 1시간을 달리면 나오는 치쿠호 지방의 도시다. 치쿠호는 일본 최대의 석탄 생산지로, 다가와시, 이즈카시 등에 300개 이상의 크고 작은 탄광이 밀집해있었다. 이곳의 조선인 강제동원 역사는 1970년대부터 현지에서 조사와 자료 수집을 이어온 재야 연구자와 기록작가에 의해 파헤쳐졌다.

현재 아리랑 문고에 남겨진 자료의 주인인 요코가와 씨는 고교 지리 교사로, 후쿠오카현 조선인 강제동원에 관한 결정적 자료를 발견한 인물이었다. 후쿠오카현도서관에서 전시기 후쿠오카현 조선인 연행자 수치를 명시한 현청 자료를 찾아냈고, 또 현청 극비문서 ‘노무동원계획에 의한 이입노무자 사업장별 조사표’를 찾아내 탄광별 강제동원 규모를 구체적 수치로 밝혀냈다. 한국 정부로부터 용역을 받아 후쿠오카현 조선인 강제동원에 관한 기초조사를 수행하기도 했다.

국민 훈장 동백장을 받은 재일동포 고 김광렬 씨 또한 치쿠호에서 끈질기게 강제동원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김 씨는 1969년 다가와시로 이주해 치쿠호의 사찰 300여 곳을 찾아다니며 방치된 유골을 조사하고, 끈질긴 조사 끝에 일부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 명부나 보험대장을 확보하기도 했다. 김 씨는 2015년 세상을 떠났고, 그가 46년간 모은 자료 13만여 건은 2018년 유족에 의해 한국 국가기록원에 기증됐다.


■ 오류 수정·신원 확인 과제 여전

지난 5일 일본 후쿠오카현 다가와시석탄역사박물관에서 재일동포 향토사학자 박강수 씨가 구 미쓰이다가와광업소 수직갱도타워를 바라보고 있다. 손혜림 기자 hyerimsn@ 지난 5일 일본 후쿠오카현 다가와시석탄역사박물관에서 재일동포 향토사학자 박강수 씨가 구 미쓰이다가와광업소 수직갱도타워를 바라보고 있다. 손혜림 기자 hyerimsn@

극비문서까지 찾아내며 반세기 가까이 역사를 파헤쳐온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치쿠호 곳곳에는 강제동원 진상규명 과제가 산적해 있다. 치쿠호 조선인 탄광 노동자 사망자 수도 아직 정확히 집계하기 어렵다.

박 씨는 선대 연구자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를 떠올리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절대 그분들의 노고를 흉내낼 수도, 똑같이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치쿠호 곳곳을 취재진에 안내한 박 씨는 희생자를 기리는 순국비 설명판에도 부정확한 사망자 수가 적혀 있다고 지적했다. 다가와시의 사찰 호코우지의 조선인탄광희생자순국비에는 탄광에서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인 유골 수십 구가 합장 안치돼있다. 안내판에는 강제연행된 조선인 15만 명 중 약 2만 명이 사고나 병으로 숨졌다고 적혀있다. 박 씨는 이를 두고 “종전까지 늘어났을 사망자 수를 감안해도 실제 추정치는 1400~2000명 선”이라며 “중국인 사망자가 포함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다가와시석탄역사박물관 내 설명도 석연치 않다. 중국인은 ‘강제연행’이라 표기한 반면 조선인은 ‘탄광노동’으로 표기한데다, 내용 또한 조선인 강제동원이 1944년 국민징용령이 적용되면서 비로소 시작된 것으로 서술됐다. 박 씨는 이 같은 표기가 1939년부터 모집·관알선·징용의 형태로 이어진 강제동원의 실제 시작 시점과 강제성을 축소한다고 지적했다. 지역 내 사찰이나 공동묘지 등에 잠자는 유골에 대한 신원 확인 과제도 여전히 미완성이다.

정확한 진상규명을 위한 연구는 이어져야 한다. 박 씨는 “사실을 정확히 짚어가야 한다”며 “이곳에서 연구를 이어가야 하는 나의 과제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후쿠오카(일본)/글·사진=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


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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