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년 묵은 관행 ‘타워크레인 월례비’ 진통…4년전 근절 시도는 ‘실패’로

송현수 기자 song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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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부 "월례비 부담, 분양가 인상으로 결국 소비자에 전가"
건설노조 "월례비 없다면 초과근로·위험작업도 없어야"
'임금이냐 아니냐' 성격 규정한 법원 판결도 1·2심 엇갈려

민주노총 전국건설노동조합 관계자들이 지난 2일 오전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타워크레인 관련 안전수칙 준수 등 운영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방문하는 세종시 연기면의 한 건설 현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민주노총 전국건설노동조합 관계자들이 지난 2일 오전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타워크레인 관련 안전수칙 준수 등 운영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방문하는 세종시 연기면의 한 건설 현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건설노조 탄압을 중단"하라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건설노조의 불법 행위를 뿌리뽑겠다며 '강대강' 대치를 이어가면서 전국 곳곳의 건설현장에서 입주지연 등 파업 후유증이 속출하고 있는 가운데, 건설노조가 월례비를 받은 타워크레인 조종사의 면허를 정지하는 정부 대책에 반발해 이달 2일부터 사실상 태업에 가까운 '준법투쟁'에 나서면서 건설업계의 숙십년 묵은 관행인 ‘월례비’가 재소환되는 등 뜨거운 감자로 부각됐다.

10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건설노조가 지난 2일부터 돌입한 ‘준법투쟁’의 핵심은 월례비를 받지 않는 대신 그 대가인 장시간·위험 작업을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타워크레인 조종사의 △주 52시간 노동 준수 △순간풍속이 초속 10m를 초과하는 바람이 불 경우 작업 중지 △인양물이 명확히 보일 경우에만 작업 실시 △인양물을 사람 위로 통과시키는 행위 금지 △땅속에 박혀있거나 불균형하게 매달린 인양물 인양 작업 금지 등이다.

건설업계의 해묵은 관행인 ‘월례비’는 건설현장에서 기초·골조 공사를 담당하는 건설 하도급 업체들이 타워크레인 기사들에게 지급해온 일종의 '웃돈'이다. 타워크레인 임대업체와 고용 계약을 맺은 조종사들은 이에 따른 월급을 받고, 시공사에서는 월 500만 원에서 많게는 1000만 원 이상의 월례비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사 일정을 맞추는 게 중요한 시공사 입장에서는 타워크레인 기사들을 독촉해 공사를 진행하는데, 그 과정에서 현금을 조금씩 쥐여주던 1960∼1970년대 관행이 오래도록 굳어져온 것이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지난 2일 오전 세종시 연기면의 한 건설 현장을 방문해 타워크레인 관련 안전수칙 준수 등 운영상황을 점검한 뒤 간담회 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지난 2일 오전 세종시 연기면의 한 건설 현장을 방문해 타워크레인 관련 안전수칙 준수 등 운영상황을 점검한 뒤 간담회 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월례비 지급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기사들은 자재를 천천히 들어 올리거나, 인양을 거부한다. 타워크레인 위에서 현장을 내려다보며 작업자들이 안전모를 벗고 있는 모습을 찍어 고발하는 방식으로 건설사를 압박하기도 한다.

건설공사는 타워크레인이 멈추면 중단되는 특성이 있기에 시공사들은 결국 월례비를 지급하게 될 수 없다며 피해를 주장한다.

정부는 이런 월례비 관행을 건설현장 불법행위의 핵심으로 꼽는다. 건설사들의 월례비 부담은 결국 분양가 인상 등으로 소비자에게 전가된다는 점 때문이다.

국토교통부가 실태조사를 통해 신고받은 전체 건설현장 불법행위(2070건) 중 타워크레인 월례비 지급이 58.7%(1215건)를 차지할 정도다. 이 조사에서 타워크레인 기사 438명이 월례비 243억 원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기사 한 명이 연간 최대 2억 1700만 원을 받은 사례도 있었다.

지난 8일 전문건설협회가 연 '건설현장 불법·부당행위 실태 고발 증언대회'에서 연단에 오른 충청지역 건설사 대표는 "타워크레인 기사가 월 25일을 근무한다고 할 때 유급 수당을 합치면 조공(반숙련공)이 400만 원, 기능공은 700만 원 정도"라고 했다. 월급보다 비공식적으로 받는 월례비가 더 많다는 것이다.

건설노조는 월례비를 타워크레인 기사의 일방적 강요로 지급하는 게 아니라고 반박한다. 건설회사가 안전하지 않고, 무리한 작업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관행적으로 발생했다는 항변이다.

일부 타워크레인 기사들도 월례비는 시공사들이 공사를 빨리 끝내기 위해 요구하는 연장 근로의 대가, 크레인 조종 외 필요한 공사 업무를 하는 대가로 받는 일종의 성과급이라고 주장한다.

국토부가 이달부터 월례비를 받는 타워크레인 조종사들의 면허를 정지한다는 강수를 두자, 민주노총 건설노조는 주 52시간 초과 근무를 거부하고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을 위협하는 작업 요구를 금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정부는 대기업 건설사 등 원청업체도 책임을 다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원희룡 국토부 장관은 지난 8일 전문건설협회가 연 '건설현장 불법·부당행위 실태 고발 증언대회'에 참석해 원청업체에 "정신 차려야 한다"며 하청업체에 힘든 것을 떠넘기지 말고 원청도 책임을 지라고 질타했다. 원청이 타워크레인 조종사 월례비나 추가 근무 비용 문제 등을 하도급사에 떠넘겼다는 취지다.

건설노조는 "월례비를 뿌리뽑는다는 건 오갔던 돈을 근절하는 것은 물론 그 대가로 진행된 관행적인 위험 작업과 초과 근무 또한 사라진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월례비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엇갈린다.

1심 법원은 임금으로 보기 어렵다고 했지만, 지난달 2심 법원은 "하청인 철근콘크리트 업체의 월례비 지급은 수십 년간 지속된 관행으로, 사실상 근로의 대가인 임금 성격을 가지게 됐다"고 판단했다.

광주고법은 종합건설사의 철근·콘크리트 하도급 업무를 수행하는 A건설사가 "받아 간 월례비를 내놓으라"며 타워크레인 조종사 16명을 상대로 낸 부당이득금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에 대해 국토부는 "급여보다 높은 월례비는 정상적 근로계약에 의한 것이 아니고 조종사의 요구에 따라 묵시적으로 지급해왔던 것이며, 월례비가 정당한 노동의 대가라면 합법적 근로계약에 포함돼야 할 것"이라고 반발했다.

건설업계가 월례비를 없애겠다고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9년 6월 부산·울산·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한 철근·콘크리트 업체들이 지급하지 않겠다고 뜻을 모았고, 이런 움직임에 다른 지역 업체들도 동참했으나 이후에도 월례비 관행은 지속됐다.

전문가들은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안이 필요한 동시에 그간 뿌리 깊게 자리 내렸던 건설문화를 바꾸는 데는 장기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송현수 기자 song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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