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부산 블록체인 특구, '지역 생태계'가 먼저다
심준식 비온미디어 대표
부산에 본사를 둔 블록체인 회사를 운영하다 보면 꼭 듣는 질문이 있다. “왜 지사도 아니고 본사까지 부산에 두셨어요?” “특구니까요” 하고 답하면 상대는 대개 고개를 갸웃한다. 지사만 둬도 혜택은 같은데 왜 본사까지 옮기느냐는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사람과 돈이 몰린 수도권에 본사를 두고 부산엔 지사만 두는 편이 기업으로선 합리적이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올해 지원사업도 본사든 지사든 부산에 주소만 있으면 신청할 수 있다. 그러나 연구개발과 고용을 실제로 옮긴 기업과 서류상 지사만 둔 기업을 같은 줄에 세우면, 부산에 뿌리내릴 이유는 오히려 사라진다. 기업을 붙잡는 힘은 사무 공간이 아니라 여기 남을 이유에서 나온다.
최근 공개된 자료는 고민을 더한다. 부산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에는 2019년부터 2024년까지 416억여 원이 투입됐지만, 2022년 이후 새 실증과제가 없었고 외국인 직접투자 실적도 잡히지 않았다. 이를 모두 부산시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가상자산을 배제한 초기 설계와 중앙 부처 규제, 더딘 법제화 등 지방정부 혼자 넘기 어려운 벽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기업을 발굴하고 무엇을 성과로 부르며 어떻게 부산에 눌러앉게 할지는 부산시가 바꿀 수 있다. 시는 지난달 블록체인 특화 클러스터 사업으로 19개 기업에 55억 원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잘하는 기업에 힘을 싣는 일은 필요하다. 다만 짚어야 할 불편한 사실이 있다.
시, 특화 클러스터 19개 기업 지원
잘하는 기업에 힘을 싣는 일은 필요
평가 방식, 행사 횟수·해외 수상 위주
수도권·대학 연구실 출발 기업 유리
부산 잔존율·지역 고용 등 공개해야
청년 창업가·초기 기업 육성 설계를
지금의 평가 방식은 ‘얼마나 잘하나’를 기준으로 기업을 뽑는 데 가깝다. 특허와 실적으로 줄을 세우면 앞자리는 인력과 자본을 갖춘 수도권 기업, 그리고 대학 연구실에서 출발한 소수 기업이 차지하기 마련이다. 공정한 심사라는 이름으로 스펙 순위를 매길수록, 이제 막 시작한 부산 청년 창업가는 정작 명단에 오르지 못한다. 그렇게 예산은 준비된 소수에게 쏠리고 부산 기업은 수도권에 밀린다. 평가가 틀린 것이 아니라 설계가 낳은 결과다.
부산에 필요한 것은 대표기업 몇 곳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생태계다. 새 기업이 끊임없이 나오고, 넘어진 창업가가 다시 뛰며, 먼저 자란 기업이 후배에 투자하는 순환이다. 화려한 국제행사와 해외 수상은 목표가 아니라 생태계로 가는 수단일 뿐이다. 수상 소식 한 줄보다 값진 것은, 그 기업이 부산 청년을 몇 명 뽑고 부산에서 실증을 몇 건 쌓았는가다. 그러니 조금 부족해도 부산에 뿌리내리려는 기업의 애로를 먼저 듣고, 제 발로 서도록 키워야 한다.
참고할 만한 모델이 중소벤처기업부의 팁스(TIPS)다. 민간 운영사가 유망 기업을 먼저 발굴해 자기 돈을 투자하고 보육·추천하면, 정부가 평가를 거쳐 연구개발·사업화 자금을 얹어주는 구조다. 핵심은 민간의 평가가 아니라 민간의 돈이다. 외부 평가위원은 기업이 망해도 손실을 함께 지지 않지만, 제 돈을 먼저 넣은 운영사는 선발 뒤에도 후속 투자와 판로, 인재까지 챙길 이유가 생긴다. 고르는 권한과 실패의 책임을 한 줄로 묶은 것, 이것이 팁스가 작동하는 힘이다. 부산이 새 기관을 만들 필요는 없다. 이미 민간이 먼저 투자한 기업을 지원하는 B-TIPS가 있고, 부산기술창업투자원이 민간 연계와 지역 펀드를 맡고 있다. 기존 블록체인 예산 일부를 이 구조에 연결해 ‘블록체인 B-TIPS’ 트랙으로 키우면 된다. 운영사는 공개경쟁으로 복수 선정하고 반드시 자기 자금을 먼저 투자하게 하되, 추천 한도와 이해관계 회피 기준으로 쏠림을 막으면 된다. 시는 기업을 직접 고르기보다 규칙을 설계하고 감독하는 편이 낫다.
부산의 예산이 BIFC에 간판만 건 외지 기업의 손쉬운 재원이 되어서는 안 된다. 초기 사무 공간과 실증은 지사에도 열되, 대규모 사업화 자금은 본사 이전, 부산 연구개발 조직, 지역 고용 같은 실질 기여에 연동해야 한다. 청년팀과 초기 기업에는 작은 실증 기회를 따로 열어, 스펙 경쟁에 밀린다는 이유로 부산 청년이 출발선조차 밟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성적표도 바꿔야 한다. 입주 기업 수와 행사 횟수, 해외 전시·수상 건수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원 종료 2년 뒤의 부산 잔존율, 지역 고용, 민간 후속 투자, 유료 매출, 실증의 상용 계약 전환율을 공개해야 한다. 재는 자를 바꾸면 행정이 향하는 곳도 바뀐다. 지난 1일 출범한 전재수 시정은 이 판을 다시 짤 기회를 얻었다. 바꿔야 할 것은 예산이 흐르는 길과 성과를 재는 잣대다. 정책의 연속성은 특정 인사가 아니라 공개된 규칙에서 나와야 한다.
4년 뒤 부산이 내밀어야 할 것은 몇몇 기업이 해외에서 받아 온 상패가 아니다. 부산에서 창업한 청년이 얼마나 남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용했으며, 외부 자본이 얼마나 들어왔고, 부산에서 만든 서비스가 얼마나 팔렸는가다. 수상 실적도 값지다. 그러나 그것은 부산의 생태계가 살아 있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부산 블록체인 특구는 소수 정예를 겨루게 하는 대회장을 넘어, 지역 기업이 함께 자라는 생태계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