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살라 밝힌 님의 빛에 우리는 아직도 빚졌습니다
■5·18 광주 밖 희생자 임기윤 목사
김일성 탄압 피해 월남 부산서 진보적인 목회 활동
광주 학살 진상 알리다 계엄군 끌려가 8일 만에 숨져
최근 서울고법서 유족에 위자료 추가 국가배상 판결
막내 아들 임정현 씨 “피해 가족 애끓는 심정 이해를”
임기윤 목사는 민족 운동을 하다 해방 후에 공산정권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임기윤 목사 유족 제공
기자의 지인이 지난달 16일에 열린 한 재판 결과 관련 짤막한 기사를 보내면서 관심을 가져달라고 했다. 1980년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의 진상을 알리다 계엄합동수사단 조사 도중 숨진 고 임기윤 목사 유족들에게 서울고법이 위자료 1억 4000만 원을 추가로 인정했다는 내용이었다. 5·18민주화운동 관련 진실 규명과 명예 회복이라는 과제가 아직도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이 났다. 임기윤 목사가 어떤 분인지는 잘 몰랐다. 지인은 어린 시절 다니던 부산 서구 동대신동 교회의 담임목사였다고 했다. 당시 어른들은 임 목사가 돌아가신 이유에 관해서는 쉬쉬했고, 교회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민주공원 상설전시실 부산 지역 민주 열사 존에는 임 목사 영정이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부산에서 민주화운동의 첫 순교자였던 임기윤 목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찾아보니 임 목사 관련 국가배상 추진위원회는 2023년 사단법인 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이 중심이 되어 기독교인 60명과 외부 인사 60명 등 총 120명으로 구성됐다. 추진위원회 대표 발기인은 김영주 목사와 송기인 신부가 맡았다. 먼저 추진위 관계자로부터 임 목사가 어떤 분인지 이야기를 들었다.
임 목사는 197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진보적인 기독교 운동에 뛰어들었다. 임기윤 목사 유족 제공
임기윤 목사는 1922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태어났다. 청년 시절에는 조만식 선생 밑에서 민족 운동을 했다. 해방 후에 공산정권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왔다. 남하 도중에 소련군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빠진 일이 있었다. 이때 탈출에 성공하면 목회하겠다고 결심했다. 1951년 중앙신학교를 졸업하고 제주도에서 전도사 생활을 시작했고, 1950년대 후반에 부산으로 이주했다. 1956년 기독교대한감리회 목사 안수를 받고, 1958년부터 1980년까지 서구 부산제일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했다.
임 목사는 197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진보적인 기독교 운동에 뛰어들었다. 1974년에 유신헌법 개헌 청원 서명운동을 벌였다. 1975년에는 ‘사회정의구현 부산기독인회’를 결성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개신교에서는 심응섭·최성묵·김정광 목사, 가톨릭에서는 송기인·오수영 신부 등 부산의 진보적 종교인들이 참여했다. ‘부산기독인회’는 함석헌·서남동(민중신학 선구자)·문동환 등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며 유신 체제 반대 운동을 벌여 나갔다. 1976년에는 부산교회인권선교협의회를 창립해 회장으로 취임했다. 부회장은 송기인 신부와 최성묵 목사가 맡았다. 1979년에는 부산신학교 운영 이사장이 되었다.
임기윤 목사는 부산에서 김대중 계열로 민주화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임기윤 목사 유족 제공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의 광주 학살이 벌어지자 임 목사는 부산에서 기도회와 시국강연회를 열어 광주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애썼다. 설교 도중에 신군부의 등장은 역사적 죄악이라고 정면 비판했다. ‘사상이 의심스럽다’라는 내용의 협박 편지가 교회로 온 뒤 경찰이 찾아와 전두환 통치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임 목사는 “정치 잘하고 있다고 말 못 한다”라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이후 부산지구계엄합동수사단으로 출두하라고 연락이 와서, 다음 날인 7월 19일에 나갔다. 임 목사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관련 참고인으로 조사받던 중 21일 12시 30분께 혼수상태에 빠지고, 26일 세상을 떠났다. 합동수사단 출석 사흘 만에 쓰러져 8일째 사망한 것이다. 향년 59세였다.
임 목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 보안사는 가혹 행위를 부정하고, 고혈압이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간호사 출신의 부인 최광명 씨는 임 목사의 혈압은 정상이었고, 고혈압 약을 먹은 적도 없다고 했다. 임 목사의 유해는 1999년 5월 5·18 민주 묘지로 이장됐다. 당시 유가족과 관계자들은 유골을 수습할 때 두개골 부분에 외부의 가격에 의해 생긴 금이 있는 것까지 확인했다. 지난 2001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국가 폭력에 의한 사망’을 인정했지만, 의문사로 결론지었다. 임 목사는 5·18민주화운동으로 희생당한 유일한 목회자이자, 광주 밖 네 번째 희생자였다.
임 목사의 막내 아들 임정현 씨는 이소선 합창단 상임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4일 서울 서초구 ‘공간소선’에서 임 목사의 막내 아들 임정현 씨를 만나 그동안의 경과와 소회를 들었다. 임 씨는 서울예고와 서울음대를 거쳐 이탈리아와 독일, 폴란드에서 8년간 공부했다. 2002년 브린디시 국제 콩쿠르에서 2위에 입상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달린 테너가수였다. 2014년부터는 이소선 합창단 상임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아버지 임기윤 목사는 어떤 분이셨는가.
“자기 말에 책임지는 강단 있는 분이었다. 박정희 독재를 보면서 ‘김일성 탄압 때문에 내려왔는데 여기에 그 못지않은 놈들이 있구나!’라고 탄식하곤 했다. 교회 앞에 항상 경찰 백차가 와 있던 기억도 난다. 정치적으로 쫓기는 분들이 우리 집을 많이 거쳐 갔다. 김대중 씨가 진주교도소에 수감돼 있을 때는 이희호 여사가 면회를 가기 위해 집에서 자고 가기도 했다. 나는 고1이 되던 1980년에 서울로 올라와 선배들과 데모하러 다녔다. 아버지가 그걸 알았는지 서울에 올라왔다가 헤어질 때 ‘정현아, 몸조심하거라’라고 했다. 나도 ‘아버지, 몸조심하세요’라고 했는데, 그게 부자간 마지막 인사가 됐다.”
-가장의 갑작스러운 변고로 가족들이 어려움을 많이 겪었을 것 같다.
“사실상 가족이 해체되어 각자도생했다. 1녀 3남 중에 남자는 다 뿔뿔이 흩어졌다. 맏딸이었던 누나가 엄마를 모셨는데 사정이 급해 사채까지 썼다고 했다. 빚쟁이들이 새벽에 쳐들어와서 소란을 피우는 일도 있었다. 소심했던 누나는 충격을 많이 받았다. 결혼도 안 하고 평생 혼자 살았는데 너무 많은 뇌출혈로 뇌 기능이 거의 사라진 상태로 지금은 요양병원에 있다. 어머니는 30년 가까이 아버지 사인 진상 규명을 위해 애쓰다 2008년도에 돌아가셨다.”
임정현 씨는 국제 콩쿠르에서 2위에 입상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달린 테너가수였다. 본인 제공
-음악하겠다고 하니 아버지가 반대하지는 않으셨나.
“내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게 노래다. 세계적인 테너가 되고 싶었다. 아버지는 자식 중 한 명이라도 목사가 되길 바랐는데, 음악 목사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바로 허락했다. 서울대 성악과에 입학한 뒤 동아리 활동과 노래패를 하면서 세상을 바꾸는 일로 진로가 바뀌게 되었다. 김민기 형을 알게 되어 ‘노래를 찾는 사람들’ 음반 작업에도 참가했다. 최초의 노동자 노래 운동 단체인 ‘새벽’에서 민중가요 가수로 활동하면서 운동권 테너로 이름을 얻었다. 방위로 복무하던 시절에는 부산에서 노래패 ‘노래야 나오너라’를 꾸려서 활동했다. 한창 잘 나갈 때는 노래 테이프 팔아서 많이 먹여 살렸다.”
-계속 엘리트 음악가의 길을 가지 않은 데는 아버지 삶이 영향을 미친 것인가.
“젊었을 때는 아버지 때문에 운동을 하는 것인지 스스로 헷갈릴 때가 많았다. 시간이 지나며 아버지하고는 별개로 나의 삶을 사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아들 전태일의 뜻을 이어 평생을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았던 이소선 여사가 2011년 세상을 떠났을 때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이 함께 구성했던 영결식 추모합창단이 모태가 되어 2014년 이소선 합창단이 창단됐다. 영결식 때 연락 온 걸 계기로 지금까지 상임지휘자를 맡고 있다. 다양한 직업의 노동자들이 모인 합창단은 매주 수요일 퇴근 후에 모여 연습한다.
-5·18을 장난이나 놀이로 포장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잘못 가르친 것이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해도 남의 상처를 건드리는 이야기를 함부로 하면 안 된다. 아픔에 대해서는 서로 감싸주고, 들어 주고, 같이 애도의 뜻을 표해야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사회에 공포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어서 누구도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수십 년이 지나 피해자는 잊히고 가해자들의 논리만 남아 계속 인용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 안타까운 심정을 알아주면 좋겠다.”
임정현 씨는 이소선 합창단 상임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본인 제공
-사람들에게 바람이 있다면 말해달라.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은.
“국가배상은 아버지의 사인을 규명해 명예 회복을 시키는 차원에서 시작했다. 불법적인 국가 폭력에 대한 사과가 듣고 싶었는데,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명예 회복이 안 되었으니 재상고하기로 했다. 무책임한 국가의 행동에 경종을 울릴 생각이다. 한편으로 내가 음악감독을 맡은 전국 민주시민합창 축전이 올해는 9월 19~21일 제주시 문예회관에서 열린다. 한강 작가한테 허락받고 이번 축전의 제목을 ‘작별하지 않는다’로 정했다. 전국에서 13개 팀 합창단원 400명이 참가해 마지막 곡으로 ‘작별하지 않는다’를 부른다. 많은 관심을 가져 줬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으면 그때에는 죽고 망하는 것 같지만, 역사는 그를 살려냅니다.” 임 목사가 평소 설교에 즐겨 쓰던 구절이라고 한다. 임 목사는 부산 민주화 운동의 대부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은 그동안 이상할 정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가 임기윤 목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글·사진=박종호 기자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