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어두운 동굴 안 박쥐가 돼버렸다” 기록조차 남기지 못한 그들
잊힌 재일 한센병 조선인 역사
구마모토 요양소 기쿠치케이후엔
1948년 ‘우애회’ 결성 조선인들
권리 되찾기 위한 투쟁 이어가
피해 규모 명확히 밝혀지지 않아
더 늦기 전에 실태 재조명 시급
일본 구마모토 소재 한센병 요양소 ‘기쿠치케이후엔’ 내 조선인 단체 ‘우애회’는 1968년 회원 93명의 명부를 남겼다. 왼쪽은 이 요양소에서 만난 경북 영천 출신 제갈조(94) 씨. 손혜림 기자 hyerimsn@
“육지의 외딴섬이라 불리는 요양소라는 다른 세계의, 암흑과 같은 골짜기 안에서 어느새 정신까지 일본인화됐다. 갑자기 해방이 되었다고 해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어두운 동굴 안 바위틈에 눌러붙은 박쥐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일본의 한센병 요양소 중 한 곳인 구마모토현 고시시 ‘기쿠치케이후엔’의 조선인 모임 ‘우애회’가 1968년 발간한 〈우애회 20년사〉에서는 광복 직후의 분위기를 이같이 묘사한다. 요양소 바깥에서는 조선인들이 조국 귀환 움직임에 분주했지만, 내부엔 무력감만 맴돌았다. 민족의 염원인 해방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일제의 강제 격리 정책에 갇혀 있었다.
일본 내 한센병 요양소 속 조선인의 역사는 국내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재조명이 시급하다. 우애회 회원은 한때 120명에 달했지만 이제 남은 사람은 3명뿐이다.
일본 구마모토 소재 한센병 요양소 '기쿠치케이후엔' 내 조선인 단체가 1968년 펴낸 <우애회 20년사> 표지와 명부. 명부에는 회원 93명의 일본 입국 경위가 징용, 모집, 군인, 군속(군무원) 등으로 기재됐다. 명부 한 입소자의 '도일동기(일본 입국 경위)'가 '모집'이라고 적힌 모습. 손혜림 기자 hyerimsn@
■“평생 간직한 한복, 죽을 때 입고파”
“태어난 곳은 한국이에요. 한국을 생각하면…” 지난달 17일 기쿠치케이후엔에서 만난 제갈조(94) 씨는 차오르는 눈물에 말을 잇지 못했다. 1932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제갈 씨는 10살쯤 한센병이 발병해, 구마모토 소재 요양소였던 ‘타이로인’에 입소했다. “아버지가 치료를 위해 땅을 팔아 날 입원시켰어. 일본에 온 지도 84년이 됐네.”
제갈 씨는 요양소에서 ‘가나자와 미와코’로 불린다. 요양소 근처 건축 사무소의 이름을 그대로 본떠 지었다고 했다. 요양소에서는 바깥의 가족에게 한센인 낙인이 미치지 않도록, 입소 후 가명을 받아 생활했다. 기쿠치케이후엔에 온 건 20살 무렵이다. 그는 우애회 20년사 명부에도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요양소는 겉으로 치료시설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환자들에게 자급자족을 강요하며 ‘환자작업’이라 불리는 노동에 내몰았다. 한국의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고자 필사적으로 환자작업에 참여했다는 제갈 씨는 “양재와 세탁, 간병, 설거지에다 천으로 옷을 직접 만들었고 군복도 제작했다”고 회상했다.
입소자들은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한센병이 유전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1873년 밝혀졌지만, 문명국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일제는 ‘식민지병’이라 불린 한센병 환자들을 멸종 대상으로 봤다. 제갈 씨의 방에는 요양소 개방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보육원 아이들 사진이 붙어있다. 그는 “출산 생각은 없었지만 아이를 무척 좋아한다”며 “늘 바나나나 과자를 선물하곤 한다”고 말했다.
한국에 있는 친척과 편지, 사진을 주고 받고 한국에도 여러 번 다녀왔다. 그렇지만 생의 마지막은 평생 살아온 요양소에 남을 생각이다. 고된 기억을 함께 해온 동료들이 모두 이곳 납골당에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30대에 선물 받아 평생 간직하고 있는 진분홍색 한복을 휠체어에 앉아있는 몸 위로 대어보며 “죽었을 때 입고 갈까 생각하고 있다”며 웃었다.
한국에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평화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아침 저녁으로 한국의 평화를 기도한다”며 “전쟁하면 안 된다. 결핵이 생기고 한센병이 생긴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기록할 수 없어 기억되지 못한 피해
강제 격리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는 2001년에서야 처음 이뤄졌다. 한센병 피해자들이 제기한 국가배상소송에서 구마모토지방재판소가 강제 격리의 위헌성을 인정하면서였다. 조선인도 일본인과 동일하게 보상금 지급 대상은 됐다.
그러나 이는 한센인이자 식민지배 피해자로서 이중 억압에 놓인 조선인에게는 반쪽짜리 정의에 불과하다. 조선인이 일본 내 요양소에 존재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인 식민지배의 역사에 대해 일본 정부는 사과와 망언을 반복해왔기 때문이다.
규명되지 않은 피해의 역사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요양소에서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군이 개발한 약물을 투여하는 인체시험이 벌어지거나, 사망자 해부가 자행됐다는 보고도 있다. 조선인의 피해 규모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피해를 당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피해에 대한 기록을 남길 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해방 후에야 요양소 내 조선인 조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데다, 글을 쓰거나 읽을 줄 모르는 이들이 많아 해방 전 기록은 희박하다.
우애회 또한 해방 반년 뒤에서야 처음으로 조선인 48명의 명부를 만들었다. 그 과정은 “자신이 조선인이라고 밝히는 사람은 없고, 물어보면 ‘그렇다’는 정도였다”고 기록됐다. 1945년 조선인 입소자가 62명이라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일부는 조선인임을 밝히지 않았던 것으로 풀이된다. 강제로 요양소에 살아야 했던 조선인들은 해방 이후에도 투쟁의 역사를 써왔다.
흩어지고 잊혀진 역사는 뒤늦게 조금씩 퍼즐이 맞춰지고 있다. 조선인 단체들이 남긴 간행물 기록, 재일조선인 사진작가 조근재 씨의 요양소 내 촬영기록 등을 단서로 재일동포 3세인 국립한센병자료관 김귀분 학예연구원 등을 통해 당시의 기억들이 조금씩 축적돼왔다. 김 씨는 2018년 요양소 속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다룬 책 〈재일조선인과 한센병〉을 펴내기도 했다. 매년 요양소별 조선인 인원 수가 확인되는 것도, 요양소별 연보를 확인해 정리한 김 씨의 노력 덕이다. 그는 “입소자가 모두 사라진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며 “역사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책임”이라고 했다.
구마모토(일본)/글·사진=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
손혜림 기자 hyerimsn@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