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구가 성장을 멈췄다. 아니 후퇴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9전 전승 우승, 2015년 WBSC 프리미어 12 우승’의 찬란했던 영광이 가득한 자리엔 ‘3연속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1라운드 탈락’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한국 야구는 2023 WBC 조별 예선에서 한 단계 아래로 여겼던 호주에 패하고, 전업 선수보다는 부업으로 야구를 하는 선수가 많은 체코를 상대로 부족한 경기력을 드러냈다. 세계 톱 클래스 수준을 자랑하던 한국 야구는 없었다. ‘라이벌’이라고 불렀던 일본과의 실력 차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
한국 야구는 2023 WBC 1라운드에서 자존심을 제대로 구겼다. 한국은 반드시 이겨야 했던 호주전(7-8)에 이어 일본전(4-13)까지 완패했다. 투수진은 두 경기에서만 21점을 내주며 스스로 무너졌다. 치열한 접전을 예상했던 일본전에는 투수 10명을 투입하고도 9점 차 패배를 떠안았다. 일본에 1점만 더 내줬다면 ‘콜드게임 패’를 당할 뻔했다.
야구는 흔히 ‘투수 놀음’이라고 한다. 투수의 실력이 곧 팀 성적으로 직결된다는 말이다. 투수의 실력을 판가름하는 요소에는 평균 구속과 변화구 구종, 제구력, 커맨드 능력 등이 있다. 그중 구속은 에이스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요소다. 단 빠른 구속을 갖췄더라도 제구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소용없다.
WBC에 출전한 한국 투수 15명의 평균 구속(스탯티즈 기준)은 시속 145.7km다. 고우석(LG 트윈스)이 153.5km로 가장 빠르고, 고영표(KT 위즈)가 136.2km로 가장 느리다.
한국전에서 완승한 일본의 상황은 어떨까. WBC에 나선 일본 투수 15명의 평균 구속(1.02 기준)은 한국보다 시속 4.7km 빠른 시속 150.4km다. 2022시즌에 일본 최고 구속(시속 164km)을 기록한 사사키 로키(지바 롯데 마린스)가 평균 158.4km로 가장 빠르다. 가장 느린 투수는 미야기 히로야(오릭스 버펄로스)로 143.8km다.
한국과 일본 투수의 구속 차이는 강속구 기준 속도인 ‘시속 150km’ 투구를 던지는 선수를 비교하면 더 극명해진다. 한국에는 고우석·정우영(LG 트윈스) 2명뿐이지만, 일본에는 사사키 로키·오타니 쇼헤이(LA 에인절스·153.1km)·다르빗슈 유(샌디에이고 파드리스·152.9km) 등 7명에 달한다. 미야기 히로야를 제외한 모든 투수의 평균 구속이 시속 145km를 넘는다.
일본 투수들의 강속구 위력은 대단했다. 사사키는 WBC 1라운드 2차전 체코전에 선발로 나와 최고 구속 시속 163km의 직구를 뿌렸다. 경기 당시 일본 도쿄돔 전광판에는 시속 160km가 찍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포크볼·슬라이더 등 변화구조차 시속 145~150km를 넘나들었다. 체코 타자들은 사사키에게 1회 1점을 뽑아냈지만 8개의 삼진을 당하며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체코전에 출전한 일본 투수 3명은 모두 16개의 삼진을 빼앗았다.
13점을 헌납한 일본전뿐만이 아니다. 한국은 호주전에서도 불안한 마운드 운영 능력을 드러냈다. 한국은 호주전에서 7명의 투수를 투입하고도 8실점하며 무너졌다. 한국은 호주와 일본 경기에서 모두 선발 투수 이후에 올라온 불펜진이 불안한 투구 내용을 보이며 대량실점하고 말았다. 특히 일본전에 출전한 김윤식(LG 트윈스)은 단 하나의 아웃카운트도 잡지 못한 채 볼넷 2개만 내주고 교체됐다.
구속도 떨어지지만 제구력도 문제였다. 한국 투수들은 구속이 떨어지니 직구를 활용한 정면 대결 대신 변화구 위주의 대결을 선택했다. 하지만 변화구마저 제대로 제구되지 않으면서 볼넷을 남발했다. 한국은 일본과의 대결에서 9이닝 동안 일본 타자에 총 7개의 볼넷을 내주며 위기를 자초했다. 한마디로 이길 수 없는 경기를 펼친 것이다.
한국 야구가 다시 세계 톱 클래스로 반등하기 위해서는 투수진 보강이 필수다. 한국야구위원회(KBO)와 10개 프로 야구단 지도자들은 지금부터라도 세계 정상급 투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투수들을 육성하는 데 발 벗고 나서야 한다. 단기적인 노력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육성 프로그램을 마련해 한국 야구를 발전시켜야만 한다.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도쿄(일본)=김한수 기자 hanga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