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셋 신인 배우 이화자(가운데) 씨가 지난해 11월 열린 제6회 감동진연극제에서 연기를 하고 있다. 북구연극공동체 온 제공
“생각해 보면 참 기막힌 반전 아닙니까? 글 한 자 모르던 이화자가 무대 위에서 교장 노릇도 해보고, 아흔이 넘어서야 평생 소원하던 교복도 입어보게 되었으니 말이에요. 이만하면 성공한 인생 아닌가 싶어 절로 콧노래가 나옵니다.”
<온도 80> 169쪽에 나오는 이야기다. 읽다 보면 눈가가 촉촉해지는 1934년생 이화자 씨의 인생사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열두 살에 부모를 모두 잃고 모진 세월을 견딘 할머니가 아흔에 닥친 마음의 병까지 이겨낸 원동력이 바로 연극이었다는 내용의 글은 ‘아흔셋이지만 신인 배우입니다’라는 소제목에 담겼다.
북구연극공동체 온이 펴낸 창작극 대본집 '온도 80'.
<온도 80>은 ‘부산북구연극공동체 온’(이하 온)이 발간한 창작극 대본집이다. ‘온’은 민간 소극장 하나 없는 부산 북구에서 꿋꿋이 연극을 만들어 무대에 올리는 아마추어 극단 네 곳이 뭉친 연극 공동체. 어린이극단 ‘소풍’, 청소년극단 ‘별숲’, 시민극단 ‘감동진’, 그리고 실버극단 ‘청춘은봄’이 그들이다. 책에는 지난 4년간 이들 네 극단이 무대에 올린 작품 중 2편씩, 모두 8편의 공동 창작극 대본이 수록돼 있다.
하지만 <온도 80>을 단순히 연극 대본집이라고만 규정하기에는 너무 아쉽다. 무대의 화려한 조명 뒤에 숨겨진 단원들의 진솔하고 생생한 고백이 더 눈길을 끌기 때문이다. 책에는 청춘은봄 단원인 ‘아흔셋 신인 배우’ 이화자 씨의 구술 채록을 포함해 네 극단 단원들의 사연이 인터뷰나 후기 형식으로 담겨 있다.
지난해 11월 제6회 감동진연극제에서 선보인 어린이극단 소풍의 창작극 '핸드폰에 빠진 아이들' 공연 모습. 북구연극공동체 온 제공
‘누가 대사를 잊으면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하고 순서에 맞게 대사나 행동을 하고 소품을 챙기는 것도 연극의 한 부분이라는 걸 알게 된’(소풍 단원 김주원) 과정은 초등학생 또래 친구들이 경험하기 힘든 깨달음과 배움을 남겼을 게 분명하다.
‘우리의 서툰 마음들이 모여 하나의 세상을 만들었던 그 벅찬 성취감’은 감동진 단원 강병용 씨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무언가에 열정을 쏟아본 적도, 내가 누구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도 없는 무채색의 아이’(별숲 단원 박서준)는 귀찮기만 하던 일들을 책임감 있게 해내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는 단단한 청소년으로 성장했다.
지난해 11월 열린 제6회 감동진연극제에 참가한 극단 단원들원 가족들. 북구연극공동체 온 제공
‘온’의 역사는 201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극단 자갈치 출신의 이상우 씨가 창단한 극단해풍이 북구 구포동의 문화공간 창조문화활력센터에 터를 잡으면서부터다. 생활 속 연극을 통해 예술의 저변 확대를 꾀하던 이상우 대표는 이듬해 지역 성인들로 구성된 시민극단 감동진을 창단했다.
2020년 코로나 집합 금지로 실내 공연이 힘들게 되자 야외로 눈을 돌린 이 대표는 해풍과 감동진의 공연을 묶어 제1회 감동진연극제를 출범시켰다. 2회 땐 소풍과 청춘은봄이 창단돼 함께 축제를 열었다. “우리도 극단 만들어 주세요.” 청소년들의 요청에 별숲이 탄생하고 3회 연극제를 함께했다. 이렇게 세대별로 빠짐없이 결성된 아마추어 극단 네 곳이 모여 2022년 말 ‘온’이 출범했다.
북구연극공동체 온 소속 세대별 극단 단원들이 '온도 80' 책자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북구연극공동체 온 제공
‘온’이 이끈 나비효과는 힘찬 날갯짓을 멈추지 않았다. 마을 연극단(남산정종합사회복지관)과 실버 연극단(화정종합사회복지관)에 이어 두 곳의 장애인 연극단(부산뇌병변복지관의 ‘바이올렛플레이’와 부산소테리아하우스의 ‘인생극장’)까지 이어졌다. 지난해 제6회 감동진연극제는 부산문화재단의 공공예술지원사업에 선정됐다. 덕분에 전문 극단과 타 지역 시민극단까지 초청해 12개 단체가 13회의 공연을 올리는 성과를 거뒀다.
지난 1일 열린 '온도 80'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청소년극단 별숲 단원들. 북구연극공동체 온 제공
‘온’은 지난 1일 오후 화명도서관 시청각실에서 조촐한 <온도 80>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부산 연극계의 든든한 후원자 최우석(최우석치과의원 원장) 씨도 축하객으로 참석했다. 그는 “온도가 80도인 줄 알고 왔는데, 실제 느낌은 180도였다”라며 훈훈했던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책 제목의 ‘80’은 ‘온’ 소속 네 개 극단의 단원을 합한 숫자이다. 이상우 ‘온’ 예술감독은 <온도 80>이 자신들만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이 책은 ‘온’의 지난 길을 보여 주는 성적표”라면서도 “또 다른 연극 단체들이 무대를 준비하는 이정표가 되길 바란다”는 소망을 덧붙였다. 책은 하마터면출판협동조합에서 펴냈다.
북구연극공동체 온 이상우 예술감독이 '온도 80' 출간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김희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