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에는 황제의 무덤 즉 황릉이 두 개 있었다.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과,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건설한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이 바로 그것이다.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은 산탄젤로 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두 마우솔레움은 테베레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비스듬하게 마주보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은 옛 영화를 완전히 잊은 채 거의 폐허처럼 변해버렸다. 반면 산탄젤로 성은 옛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리스 카리아 왕의 무덤
마우솔레움은 건축물 형태의 대형 무덤이다. 왕은 물론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람의 시신이나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만든 대형 구조물을 의미한다. 로마에서 시작한 건축물은 아니지만 로마의 두 무덤이 워낙 유명해 대부분 사람은 마우솔레움이라고 하면 로마를 먼저 떠올린다.
2세기 무렵 그리스 지리학자 파우사니아스가 쓴 <그리스 안내>에 따르면 마우솔레움은 고대 그리스에 있던 카리아의 수도 할리카르나소스에서 유래한다. 지금 터키의 아나톨리아 지방이다. 이 건축물은 카리아의 마우솔로스 왕이 묻힌 무덤이었다. 그래서 마우솔레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 당시에는 ‘세계의 7대 신비’로 불릴 정도로 엄청난 건축물이었다.
마우솔레움은 카리아의 독창적인 창작품은 아니었다. 그들도 다른 곳에서 배워온 것이었다. 페르시아 영토였던 리키아의 크산토스에 있던 거대한 무덤 네레이드 추모탑이 원조였다. 리키아는 오늘날 터키의 페티예 지역이다.
마우솔로스의 무덤이 얼마나 웅장하고 아름다웠던지 나중에 할리카르나소스를 점령한 로마인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후 로마인은 큰 무덤을 마우솔레오라고 부르게 됐고, 이것이 영어로는 마우솔레움이 됐다.
■황제와 그의 가족은 신이다
하드리아누스는 선임 황제와 가족을 신격화하는 게 권력 기반을 강화하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황실 관련 인물이 죽으면 모두 곧바로 신격화시켰다.
양아버지 트라야누스가 세상을 떠나자 유해를 트라야누스 포룸에 있는 트라야누스 원주에 모신 다음 신격화시키고 신전을 만들어 헌정했다. 트라야누스 신전 위치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마르스 평원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드리아누스와 친하게 지냈던 장모 마티디아와 어머니 마르키아가 세상을 떠나자 둘도 신격화시킨 뒤 마르스 평원에 신전을 만들었다. 하드리나우스가 즉위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진 트라야누스의 부인 플로티나가 죽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로마 역사상 여성을 신격화해서 신전을 바친 것은 이 세 명이 처음이었다.
하드리아누스는 가족을 신격화시키는 동시에 자신의 사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가 만든 것은 마우솔레움이었다. 아우구스투스가 건설한 마우솔레움에는 빈자리가 모자라 황제가 죽더라도 유해를 넣을 수가 없었다.
하드리아누스는 마우솔레움 건설 부지를 직접 골랐다. 모든 로마인과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 마우솔레움처럼 그도 마르스 평원을 선택할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그는 뜻밖에도 테베레강 건너편을 골랐다. 당시에는 아게르 바티카누스(바티카누스 평원)로 불리던 곳이었다. 이곳은 로마의 종교적 경계였던 포메리움 밖이었다.
고대 로마인이 대부분의 건축물을 일곱 언덕으로 구성된 로마 시내나 마르스 평원에 지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당시 그곳에는 네로의 전차경주장 외에 건축물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마디로 당시로서는 로마에서 꽤 멀리 떨어진 외곽에 마우솔레움을 지은 것이다. 그는 왜 이곳에 마우솔레움을 건설했을까?
아우구스투스는 황제 자리에 앉은 뒤 로마를 거의 떠나지 않았지만 하드리아누스는 20년 재위 기간 중 12년을 외국에서 보냈다. 평생 로마제국 속주 곳곳을 순행하고 다닌 것이다. 물론 여행만 한 것은 아니고, 속주나 식민지 곳곳을 둘러보며 문제점을 개선하거나 현지 병사, 주민을 격려하고 위로했다.
황제가 로마를 장기간 떠나 있는 모습을 로마인과 원로원은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뒤 2대 황제로 취임한 티베리우스가 로마를 떠나 카프리 섬에 틀어박혀 있었던 모습을 떠올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드리아누스가 죽자 원로원이 기록 말살을 의결해 하드리아누스의 모든 기록을 없애려고 할 정도였다. 황제도 그들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드리아누스는 평생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제국의 평화와 번영을 유지하게 위해 애쓰는 황제의 노력을 이해하지 못하고 뒤에서 욕만 하는 로마인, 원로원과 죽어서나마 멀리 떨어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다른 이유를 제시한 역사학자도 있었다.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에서 선을 그으면 판테온을 거쳐 트라야누스 원주까지 직선으로 이어진다. 마우솔레움 꼭대기에 올라가면 판테온과 원주를 볼 수 있었다. 로마인에게 그가 건설한 판테온의 위대함을 과시하고 트라야누스의 후계자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 자리는 전망이 매우 좋은 곳이었다. 주변에 높은 언덕도 없어 마우솔레움 꼭대기로 올라가면 로마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여기서는 판테온, 원주는 물론 포로 로마노의 유피테르 신전, 키르쿠스 막시무스도 다 보였다. 그는 살아서 통치했던 로마를 죽은 뒤에도 지켜보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빵처럼 생긴 원기둥 무덤
마우솔레움은 하드리아누스 생전에 완공되지 못했다. 그가 죽고 1년 뒤인 139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가 공사를 마무리했다. 이곳에는 하드리아누스는 물론 부인인 사비나 황후, 아일리우스가 묻혔다. 하드리아누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그의 아내 파우스티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와 시리아 출신 부인인 율리아 돔나, 그의 두 아들인 카라칼라와 게타도 묻혔다.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 부지는 한 변의 길이가 89m인 직사각형 모양이다. 가운데에는 지름 64m인 원통 모양 마우솔레움이 만들어져 있다. 직사각형 네 모퉁이에는 탑이 세워져 있는데, 고대 로마 시대에 만든 게 아니라 나중에 마우솔레움을 성으로 바꿀 때 추가한 것이다.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은 역대 교황이 수시로 개축했기 때문에 종전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고대 역사학자들이 남긴 기록에서 겨우 그 흔적을 일부 찾아볼 수 있다.
원래의 마우솔레움은 전체적으로 정사각형 기단 건물과 부푼 빵 같은 원통 본체, 그리고 꼭대기의 구조물로 이뤄졌다고 한다. 원통 본체는 흙과 식물로 만든 언덕으로 덮었다고 전해진다. 다른 주장도 있다. 기단이 기본 구조였던 것은 맞지만, 위에는 3단 원형 케이크 같은 건물이 이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의 외부 기단은 파로스산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기단 위에 세워진 원통형 마우솔레움 본체 건물은 석회암으로 지었다. 1층 면적은 84㎡였고 높이는 10m 정도였다. 벽은 석회암이었지만 표면에는 대리석을 붙여 놓았다. 벽 뒤에는 다시 두께 60㎝ 정도의 내벽이 있었다. 상층부에는 역시 대리석으로 만든 사람과 말 석상 여러 개가 설치됐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마우솔레움 꼭대기에는 사두마차를 모는 하드리아누스 청동상이 세워져 있었고, 원통 본체에도 여러 인물 석상과 말 석상이 세워졌다.
지금은 안을 볼 수 없는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처음에는 낮은 청동 철책 담장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마우솔레움 입구에는 청동으로 만든 문이 달렸다. 문에는 석회암 기둥 네 개가 세워져 있었는데, 기둥 위에는 금박을 입힌 청동 공작새 조각이 달려 있었다. 그 중 일부는 뜯겨져 지금은 바티칸박물관 솔방울정원에 있는 솔방울 조각을 장식하고 있다.
■나라는 성벽이 지키는 게 아니다
3세기 무렵 군인황제 시대에 로마제국은 야만족의 거듭된 침략에 시달리고 있었다. 제국의 수도인 로마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허물어버린 성벽을 로마에 다시 건설하기로 했다. 그것이 바로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이었다. 황제가 생각한 성벽에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도 포함됐다.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은 세르비우스 성벽보다 훨씬 범위가 넓었다. 그는 성벽을 쌓으면서 마르스 평원 맞은 편에 자리 잡고 있어 군사적으로 매우 위치가 좋았던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을 성채로 사용하기로 했다. 마우솔레움의 구조를 성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여러 조각품과 석상을 뜯어내거나 부숴 버렸다.
마우솔레움을 성채로 바꿨다고 로마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왕정 시대에 쌓은 세르비우스 성벽을 BC 1세기 중엽에 없애면서 “로마를 지키는 것은 성벽이 아니라 시민의 마음”이라고 했다. 이 말은 5세기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표현이었다. 이미 나라를 지킬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잃어버린 로마에 수 차례에 걸쳐 야만족이 쳐들어왔다.
서고트족을 이끌던 알라리크가 가장 먼저 410년 로마로 쳐들어갔다. BC 390년 갈리아의 ‘로마 약탈’ 이래 800년 만에 로마는 야만족의 발에 짓밟히고 말았다. 이 때 서고트족은 마우솔레움에 안치돼 있던 유해 항아리를 모두 부숴버렸다. 안에 들었던 유해는 모두 테베레강에 버리고 말았다. 537년 토틸라가 이끄는 동고트족이 다시 로마로 쳐들어왔다. 이때 마우솔레움에 틀어박혀 싸우던 로마인은 동고트족 병사들을 쓰러뜨리려고 성 안에 있던 모든 돌과 석재 제품을 모두 성 아래로 집어던졌다. 이 때문에 그나마 남아 있던 조각들마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의 비극은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그래도 조금 남았던 여러 조각이나 장식은 중세에 교회 등을 꾸미기 위해 뜯겨 나갔다. 하드리아누스 유해를 모신 것으로 알려진 석관은 라테라노 대성당으로 옮겨져 12세기 교황 이노센트12세의 관으로 사용됐다. 관 뚜껑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 모신 동로마제국 황제 오토2세의 관에 사용됐다고 한다. 이 뚜껑은 나중에는 어딘지도 알 수 없는 교회 예배당 공사에 재료로 이용돼 아예 사라져버렸다.
■페스트와 대천사 미카엘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은 급기야 이름마저 잃어버리게 됐다. 바로 기독교와 페스트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590년이었다. 고대 로마제국은 멸망했고, 아직 르네상스 시기가 오기까지는 먼 시간이 필요한 시대였다. 로마에 페스트가 번져 수많은 사람이 쓰러졌고,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로마 시내 곳곳에는 병에 걸려 숨진 사람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병에 걸릴까 겁나 시체를 치울 생각조차 못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로마 시내를 내려다보던 교황 대 그레고리오1세는 하나님의 힘을 빌려 전염병을 몰아내기로 했다. 그는 성모자를 그린 성화 살루스 포풀리 로마니를 들고 ‘아가타 수부라’라고 불린 로마의 끝 부분에 있는 교회까지 행진하기로 했다.
살루스 포풀리 로마니는 <누가복음>을 쓴 성 누가의 작품이라고 로마인은 믿었다. 전설에 따르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을 떠나자 성모 마리아는 개인 소지품 몇 가지를 챙겨 사도 요한의 집에 갔다. 그 중에는 성 요셉의 작업장에서 목수였던 예수가 직접 만든 탁자도 있었다. 성모 마리아는 성 누가에게 초상화를 하나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성 누가는 탁자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동안 성모 마리아가 들려주는 예수의 인생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여기서 들은 이야기를 나중에 <누가복음>에 담았다.
성화는 한동안 예루살렘에 보관돼 있었다. 4세기 무렵 성 헬레나가 예루살렘에 성지 순례를 갔다가 성화를 발견했다. 그녀는 성화를 콘스탄티노플로 가지고 돌아갔다. 나중에 로마에 올 때 그림을 가져왔다.
아가타 수부라의 교회에는 이교도는 물론 일부 기독교도까지 몰래 신봉하는 우상이 있었다. 기독교도도 머리를 숙인 덕분에 우상은 파괴되지 않고 비밀리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교황은 교회에 도착하자마자 우상에게 걸어가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악마의 상징아! 로마에서 떠나도록 하라!”
그때 갑자기 천둥 같은 큰 소리가 우상에서 터져 나오더니 우상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교황은 이 장면을 침착하게 지켜보고는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교황은 귀가하는 길에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 앞에 있는 폰스 아일리우스 다리를 건너게 됐다. 그는 다리 위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대 로마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묻혀 있는 마우솔레움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아무도 돌보지 않아 무척 황폐해진 상태였다.
그때 갑자기 피가 철철 흐르는 길고 가느다란 칼을 든 미카엘 대천사가 마우솔레움 꼭대기에 나타났다. 깜짝 놀란 교황은 그가 미카엘임을 알아보고는 고개를 숙였다. 미카엘은 망토로 칼에 묻은 피를 닦고 칼집에 넣은 뒤 사라져버렸다. 교황은 그 모습을 보고 이렇게 선언했다.
“하느님이 드디어 분노를 푸셨다. 더 이상 희생을 원하지 않으신다.”
신기하게도 교황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짓말같이 로마에서 페스트는 사라져버렸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 돌아간 대 그레고리오1세는 마우솔레움 꼭대기에 세워져 있던 하드리아누스의 사두마차 석상을 없애고 미카엘 대천사 석상을 만들어 세우라고 했다. 그는 또 고대 로마의 건축물을 이교도의 흔적이라고 부르면서 모두 파괴하라고 했다. 그래야 로마에 하느님의 분노가 재발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로마인은 대 그레고리오1세가 로마의 비밀 우상 숭배를 막은 덕분에 페스트를 사라지게 했다고 믿었다. 그들은 대천사가 나타난 하드리아누스 마우솔레움을 ‘천사의 성’이라는 뜻인 산탄젤로 성으로 부르기로 했다.’
미카엘 조각상
■교황의 숙소와 과학자의 감옥
산탄젤로 성 꼭대기에 세워진 미카엘 석상은 여러 차례에 걸쳐 바뀌었다. 16세기 들어 교황 레오10세는 몬테풀로에게 산탄젤로 성에 성모 마리아를 모시는 예배당을 지으라고 하면서 미카엘 대천사를 상징하는 대리석 조각상을 만들어 꼭대기에 세우게 했다. 17세기에는 벨기에 출신 조각가 베르샤펠트가 청동으로 미카엘 조각상을 새로 만들어 세웠다. 이 바람에 몬테풀로가 만든 조각상은 산탄젤로 성 내부 정원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 버렸다.
16세기 중엽 교황 바오로3세는 산탄젤로 성에 고급 숙박시설을 건설했다. 그는 선임 교황이었던 클레멘스7세가 로마를 침탈한 신성로마제국 카를5세 때문에 교황청에서 달아나 산탄젤로 성에 갇혀 고생한 일을 지켜본 바 있었다. 앞으로 똑같은 일이 생길 경우 성에서 편하게 지내려면 숙박시설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펼쳐 신도를 고난에서 구해내는 것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던 게 당시 로마 교황의 실상이었다.
산탄젤로 성은 감독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무한 우주론과 지동설을 펼치다 교황청과 갈등을 빚은 조르다노 브루노가 갇힌 곳이 바로 여기였다. 범죄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16세기 조각가 겸 금 세공사였던 벤베누토 첼리니도 이곳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산탄젤로 성에 들어가면 먼저 엄청난 크기의 전실이 나온다. 과거에는 대리석으로 덮여 있던 곳이다. 큰 벽감이 보인다. 이곳에는 한때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대형 석상이 서 있었다. 거대한 경사로를 따라 위로 올라간다. 분명히 위로 올라가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아주 깊은 지하세계로 걸어 내려가는 기분이 든다. 마침내 산탄젤로 성의 핵심부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유해를 담은 항아리가 있던 방이다. 지금은 아무 것도 남아 있는 게 없다.
하드리아누스는 세상을 떠날 무렵 남긴 ‘작은 영혼’이라는 시를 남겼다. 그는 자신의 사후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작은 영혼이여 가여운 나그네여
갈 곳 없는 떠돌이여
이제는 어디에 머물려 하는가
모든 게 암울하고 모든 게 외롭구나
언제나 즐거움 가득했던
인생길 끝자락에 서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