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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잉크가 아닌 피와 눈물로 쓰여진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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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경찰의 가혹 행위로 사망한 흑인 조지 플로이드를 추모하며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렸을 당시 참가자의 마스크에 ‘흑인 생명도 중요하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AP연합뉴스 2020년 경찰의 가혹 행위로 사망한 흑인 조지 플로이드를 추모하며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가 열렸을 당시 참가자의 마스크에 ‘흑인 생명도 중요하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AP연합뉴스



이 책은 추천사로 시작한다. 추천 글을 쓴 정재민 변호사는 “이 책에서 소개하는 재판들은 미국 법정에서 벌어진 가장 격렬한 전투들이다. 미국 사회를 뒤흔든 판결들만 모아놓았다”라고 소개한다.

책은 법리 논쟁과 재판 결과보다 법정에 선 사람들의 사연과 얼굴, 목소리(주장)로 채워져 있다. 각각의 애틋하고 극적인 사연은 마치 단편 소설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베이징대학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이후 미국으로 이주해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해 변호사로 활동한다. 20년 넘게 변호사로 일하며 앞서 판례들과 사례를 통해 미국의 법률, 사회, 역사를 이해할 수 있었고,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나라’라고 믿었던 미국이 실은 허점투성이 나라였다는 걸 여실히 깨닫는다.

독립선언문의 이념과 다르게 헌법은 중립적이지 않았다. 노예제를 ‘적극적인 선’이라 칭하고, 인종 분리를 ‘남부의 생활 방식’이라 포장했다. 사랑할 권리마저 빼앗았던 법은 그저 권력의 편에 서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활용되고 있었다. 노예제, 흑인 차별 등 과거 이야기가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책에는 최근 판결까지 거론하며 여전히 힘들게 싸우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도 전한다. 예를 들어 1973년 여성들의 자기 결정권과 임신 중지권을 보장한 판결이 지난 2022년 같은 연방대법원에 의해 뒤집혔다. 법은 진보할 수 있지만 불완전하고, 언제든 후퇴할 수 있다는 것까지 솔직하게 드러낸다.

책에 언급된 사건 몇 개를 보자. 흰 피부와 파란 눈동자, 금발 머리, 말투, 행동까지 완벽한 백인인 소녀 모리슨은 남부 농장주에게 노예로 팔린다. 모리슨은 농장에서 도망쳤고, 농장주는 그녀를 상대로 소송을 시작한다. 모리슨은 자신은 흑인이 아니며 납치돼 흑인으로 팔렸다고 오히려 자신이 농장에서 학대당했다며 보상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농장주는 그녀의 선조까지 추적해 흑인 노예 혈통이 있다는 걸 서류로 증명하며, 한 번 노예는 그의 후손까지 모두 노예라는 걸 인정받는다. 물론 역사책에서 배웠듯 참혹한 내전과 60여만 명의 국민, 한 사람의 대통령까지 희생된 후에야 미국에서 노예 제도의 속박이 강제로 깨졌다.

중국계 이민자 린궁과 미국 여성 캐서린은 결혼해 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지만, 어느 날 학교에서 “중국인 아이는 백인 학교에 다닐 수 없다”라고 통보해 평범한 일상이 무너진다. 사립학교에 보낼 형편이 되지 않았던 이 가족은 이 관행과 맞서는 소송을 시작한다. “성실한 학생인데 인종을 이유로 쫒아낼 수 없다”라고 주장하지만, 주 대법원은 “입법자의 의도는 백인 학생을 다른 인종과 분리하는 데 있다. 학교 당국의 조치가 정당했다”라고 인정한다. 남북전쟁이 끝났어도 남부는 법으로, 북부는 관행으로 흑백을 분리했고, 앞서 린궁 가족의 판결처럼 “분리하되 평등하다”라는 논리가 만연했다.

백인 남편 리처드 러빙과 흑인 아내 밀드레드 러빙은 워싱턴DC에서 합법적으로 결혼했지만, 고향 버지니아로 이사 오자 ‘인종혼인금지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주 밖 추방형을 선고받는다. 이 법은 혼혈을 막아 백인의 순수성을 지키겠다는 노골적인 인종 규제였다. 러빙 부부는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데 이게 왜 불법이냐”라고 주장하며 연방대법원까지 이 사건을 끌고 간다. 대법원은 인종혼인금지법이 평등권과 자유권을 침해한다고 판시해 주들이 인종을 이유로 결혼을 금지하는 권한이 없다고 판결한다. 이 판결로 수많은 혼혈 가정과 그 자녀들이 ‘존재 자체가 불법 취급되던 시대’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됐다.

책에선 승리의 서사만 제시되지 않는다. 정의는 한 번의 판결로 완성되지 않는다. 법을 바꾸는 일은 법률가만의 몫이 아니라 부당함 앞에 침묵하지 않는 시민, 불의를 기록하는 목격자, 변화를 믿고 법정에 서는 평범한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법을 움직이는 진정한 힘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류쭝쿤 지음/강초아 옮김/들녘/476쪽/2만 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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