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만에 나온 두 번째 소설집 <아홉보다 더 많은>을 들고 있는 정영선 작가. 김효정 기자
22년 만에 나온 두 번째 소설집 <아홉보다 더 많은>을 들고 있는 정영선 작가. 김효정 기자
정영선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아홉보다 더 많은> 책 표지.
책을 읽고 난 후 그들에게 참 미안하다 싶었다. 한 때 유행처럼 관심을 가졌다 잊은 게 아닐까. 평생 친구하자 해놓고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온 것 같다. 정영선 작가의 소설집 <아홉보다 더 많은>은 잊어서는 안되는데 잊힌 존재에 관한 이야기이다.
1997년 데뷔해 요산김정한문학상, 동인문학상 등 문단의 굵직한 상을 받은 정 작가. 정작 소설집은 2004년 첫 단편집 이후 이번이 두 번째다. 장편소설에 집중하다보니 문예지나 출판사의 요청을 대부분 거절했다. 소설집을 낸다면 ‘하나의 유니버스’처럼 모두 연관성이 있는 구성으로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소설집이 나오는 데 22년이 걸린 이유이다.
<아홉보다 더 많은>은 2017년부터 2023년까지 정 작가가 쓴 6편의 단편 소설을 담았다. 6편 소설의 연결고리이자 주요 소재는 탈북민이다. 고등학교 역사 교사였던 정 작가는 한반도 분단 상황을 직면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다. 분단으로 인해 이어지는 비극과 슬픔을 확인하고 싶었다.
정 작가의 오랜 바람에 답이 왔다. 한국에 도착한 탈북민의 정착을 돕는 기관, 하나원의 청소년 학교에서 사회, 역사를 가르칠 교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2013년부터 2014년까지 그 곳에서 탈북 청소년과 어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청소년들은 북한의 생활과 탈북 과정을 가감없이 쏟아냈다. 현실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들의 이야기는 아팠다.
“2014년 4월 16일 오전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 날도 하나원의 학교에서 수업을 했죠. 북한을 빠져 나오기 위해 동생과 함께 강을 건너다 동생을 잃고 혼자 빠져나온 아이가 눈이 부을 정도로 울며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내려오니 TV에서 세월호가 기울어지고 있었어요. 살기 위해 강에 빠지는 동생을 둔 채 앞으로 가야 했던 아이의 이야기도, 구조를 기다리던 수많은 학생과 함께 침몰하던 세월호도 믿을 수 없었어요. 그 학교를 떠났지만, 이후에도 세월호 희생자에 관한 뉴스를 들을 때마다 그 아이 생각이 났어요. 삼 년 뒤 탈북민과 세월호 이야기가 담긴 소설집의 표제작 ‘아홉보다 더 많은’을 발표했습니다. 내 소설을 위해 비극적인 사고를 이용하지 말자. 책임질 수 있는 말과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홉보다 더 많은’은 함경북도 회령에서 온 순애라는 여성의 일인칭 시점으로 쓰여 있다. 방과 후 교사로 일하는 순애는 동료와 함께하는 식사자리가 늘 부담스럽다. 일상의 시간조차 마음의 경계를 늦추지 못한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 같은 순애의 불안과 고립감은 해소되지 않는다. 북한을 먼저 탈출한 순애는 돈을 마련해 브로커에게 딸의 도강을 부탁했다. 그러나 딸은 강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딸아이 생일을 맞아 휴가를 낸 순애는 진도 바다를 간다. 바다에서 아직 나오지 못한 아이들을 추모하는 노란 리본을 보던 순애의 모습은 먹먹하다.
소설의 분위기는 차분하고 건조하다. 순애는 진도 팽목항에서조차 울지 못한다. 순애 대신 독자가 울게 된다. 글을 쓴 정 작가는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셀 수가 없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라도 괜찮고, 어머니가 어떤 사람을 만나든 상관없다던 딸. 요즘 어머니가 만나는 상대가 탈북민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선 태도가 달라진다(‘아버지가 누구든’), 고등학교 동창이자 과거 사촌과 사귀었더 군수. 평소 아는 체도 하지 않다가 통일 마을 조성을 위해 탈북자인 숙모가 필요하다고 태도를 바꾸는 사건(‘묵은 유자차’), 함께 북한을 탈출했던 엄마는 중국 공안에 체포되고 자신은 성폭력을 당해 아들을 낳은 서원, 한국에 와서 아들을 동생으로 속여 쉼터에 위탁한다. 라오스 국경을 건너던 중 배가 기울어졌을 때 아들을 강으로 밀고 싶었다(‘무연고 시간’).
무심한 듯 툭툭 던지는 문장은 오히려 독자의 마음을 자꾸만 끌고 간다. 탈북민을 향한 우리 사회의 무관심과 차별, 혐오를 예리하게 짚어낸다.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하니 열심히 살라”는 말은 격려가 아니라 족쇄라고 느껴진다는 그들. 우리는 영혼 없는 통일 노래를 너무 오래 부른 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정 작가의 소설은 ‘탈북’의 시간을 지금, 이곳의 시간에 포개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의 얼굴 속으로 조용히 데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