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을 대표하는 아트페어인 ‘아트부산 2025’가 지난 8일 부산 해운대구 벡스코 제1전시장에서 VIP 프리뷰로 시작해 11일까지 나흘 동안 6만여 명의 관람객을 만났다. 몇 년째 이어진 경기 침체 영향 등으로 첫날 프리뷰는 물론이고 일반 관람이 이어진 사흘 내내 예년의 활기를 되찾지 못하고 차분한 분위기로 진행됐다. 2023년 이후 총판매액은 별도로 발표하지 않아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1일 폐막일 당일 현장 취재를 종합하면 “큰 (판매) 성과는 안 났어도 (실적이) 크게 나쁘지도 않았다”는 게 대부분의 반응이다. 다만, “서울과 부산의 갭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아 걱정”이라는 말도 나왔다. 판매 성과와 별개로 아트페어 구성이나 참여 갤러리 수준은 괜찮았다는 평가지만, 실험적인 작품은 드물었다.
■어떤 작가·작품 인기 있었나
올해 제14회 아트부산은 17개국 109개 갤러리가 참여했다. 국제갤러리, 갤러리현대, 아라리오, 조현화랑 등 국내 대표 갤러리뿐 아니라, 캐나다(미국 뉴욕), 마시모데카를로(이탈리아 밀라노, 서울 등), 코타로 누카가(일본 도쿄) 등 글로벌 갤러리들이 아트부산을 통해 아시아 컬렉터와 접점을 넓혔다. 대형 작품을 선보인 솔로 부스가 특히 몰입감을 높였다. 마치 기획 전시장을 도는 듯한 느낌이었다. 갤러리현대 김보희 작가, 선 갤러리 우병윤 작가, 호리아트스페이스 김남표 작가, 가에타노 페셰 스튜디오 등을 비롯해 설립 4년 이하의 ‘퓨처’ 섹션에 나온 CDA(이스 작가), 갤러리 헤세드(김펄), 갤러리호호(이은경), 리나 갤러리(김준식), 나노 갤러리(임상빈), 페이토 갤러리(정고요나), 상히읗(마이클 리키오 밍 히 호) 등이 눈길을 끌었다.
여러 갤러리에서 공개한 판매 성과도 관심이 쏠린다. 침체된 경기 속에도 그나마 대형 화랑들은 체면을 세웠다. 올해 아트부산에서 가장 큰 규모의 부스를 선보인 국제갤러리는 김윤신의 회화 ‘내 영혼의 노래 2011-9’(2011)와 조각 ‘합이합일 분이분일 2019-14’(2019) 외에도 로터스 강의 신작 ‘Mesoderm (Echo III)’(2025)을 판매했다. 조현화랑은 이배의 주요 회화와 조각 작품 3점을 판매했으며, 갤러리현대는 김보희의 출품작 12점을 거의 솔드아웃 하며 10억 원 안팎의 판매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갤러리현대 정경미 전무이사는 “서울 컬렉터의 예약 판매가 대부분을 차지해 부산 컬렉터 신규 유입이 없었던 점은 아쉽다”고 전했다.
PKM 갤러리는 윤형근(1점), 홍영인(2점), 이원우(2점), 샘바이펜(3점), 정현(1~2점), 정영도(1점) 작가 등의 작품이 골고루 팔려 판매 기록을 3억~4억 원으로 추산했다. PKM 갤러리 정윤호 이사는 “우리는 작년보다 성과가 좋은 편”이라면서 “예전엔 ‘올드 마스터’ 작품 중심이었다면 올해는 세상과 소통하는 느낌의, 젊은 사람들이 봤을 때도 공감할 수 있는 작품 위주로 포커스를 맞췄다”고 밝혔다.
아라리오 갤러리는 코헤이 나와, 권오상, 유키 사에구사 등 주요 작가의 작품을 포함해 총 30여 점을 판매했다. 서정아트는 부산아트위크와 협업한 이미주 작가의 대표작을 비롯해 피정원, 루수단 히자니쉬빌리 등 전속 작가의 주요 작품을 판매했으며, 소프트코너와 쿠루 갤러리가 협업 출품한 이재진 작가의 작업이 전량 판매되며 컬렉터의 높은 관심을 확인시켰다. 가나아트 관계자는 “시장 침체 분위기는 구매 결정 속도가 느려진 데서 잘 알 수 있다. 그나마 에디강 작품은 거의 완판이다. 연휴 기간에 맞물린 시기가 아쉬웠는데 내년엔 조절되면 좋겠다”고 전했다.
이 외에도 중소 갤러리에서도 의미 있는 반응이 이어졌다. 한창 좋을 때만큼의 성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리안 갤러리, 리나 갤러리, 갤러리 엠나인, 사월갤러리, 아트소향, 갤러리 우, 맥화랑 등에서도 페어를 통해 안나박, 윤종숙, 김준식, 채성필, 안리오, 정득용, 요시무라 무네히로, 한충석, 이두원, 박영환, 방정아 등 작가들의 작품에 활발한 문의와 관심이 이어지거나 일부 판매로도 이어졌다.
젊은 갤러리를 육성하기 위해 하나금융그룹 후원으로 올해 첫발을 뗀 ‘퓨처 아트 어워드’에는 WWNN 소속 제프리 청 왕(Jeffrey Chong Wang)이 선정되었다. 그의 출품작은 전량 판매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WWNN 오주현 디렉터는 “부산 경남권 아트페어 참가는 처음이어서 홍보 목적이 컸는데, 상도 받고 판매 성과로도 이어졌다”며 “오는 11월 서울에서 있을 2인전(안재홍·제프리 청 왕)을 앞두고 국내 소개하는 프리뷰 성격이었는데 많은 관심을 보여줘 감사하다”고 말했다.
부산의 신진 작가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마련한 ‘아트 악센트’ 섹션 운영에 대해선 쓴소리도 나왔다. 지역의 A 기획자는 “‘아트 악센트’는 시 보조금 일부를 받아 진행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맨 구석 코너에 신진 작가 7명을 한꺼번에 밀어 넣고, 작가나 작품 정보도 제대로 없는 데다 지킴이도 참여 작가들에게 일임해 청년 작가를 홀대하는 느낌이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럼에도 ‘아트 악센트’에서 선보인 최민영 작가의 회화 작업 대부분을 포함해 다수 참여 작가의 작품이 고르게 판매돼 지역 신진 작가들이 상업 플랫폼과 연결될 수 있는 구조를 선보여주기도 했다.
■“젊은 작가 조명하는 플랫폼 됐으면”
아트부산 한가운데 위치해 유독 많은 인파를 집중시켰던 ‘커넥트’ 특별전 중에도 주제전 ‘영토와 경계’는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을 역임한 고원석 라인문화재단 디렉터가 총괄 큐레이터로 주도했다. 해외 기관과 협업한 이번 전시는 권도연, 김상돈, 김옥선, 박기원, 알렉산더 우가이(고려인 3세), 호우이팅(대만) 등 6인의 작가를 조명했다. 특히 김상돈은 과거 망자를 저승으로 운송하는 거대한 상여와 거대 자본이 개인을 삶을 지배하는 현실을 상징하는 쇼핑 카트가 결합 대형 설치 조각 작품 ‘카트’(2019~2020)를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주제전 외에도 10개의 프로젝트를 선보였으며, 도모헌 야외 정원에는 조각가 정현의 대형 장소 특정적 설치작이 전시되었다. 갤러리 부스 외 공간에서 예술적 실험을 확장한 이 기획은 아트페어의 경계를 허무는 시도로 평가받았다.
토크 프로그램 ‘컨버세이션스’(CONVERSATIONS)는 도쿄 겐다이, 개러지 현대미술관, 서퍼 클럽 홍콩, 베를린 현대미술관(Hamburger Bahnhof) 등 아시아와 유럽 주요 기관과 협업을 통해 총 9개 세션으로 짜임새 있는 구성을 선보였다. 한국과 아시아 작가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또 아시아 유럽 러시아를 아우르는 세계 각지의 기관 관계자와 동시대 예술의 지형과 협력의 방향성을 다각도로 조망했다.
특히 이번 행사에는 여러 해외 컬렉터와 어드바이저가 방문해 눈길을 끌었다. 프랑스 컬렉터이자 기업가인 파비앙 파코리는 올해 처음으로 아트부산을 방문해 사흘간 머물면서 페어장을 찾고 VIP 프로그램에도 적극 참여했다. 주중 프랑스상공회의소 부회장이자 까이에 다르(Cahiers d’Art) 중국 앰배서더이기도 한 그는 “기존 대형 페어와 달리 아트부산은 한국의 젊은 작가를 조명한 게 좋았다. 이 정체성을 더 살려간다면 의미 있는 플랫폼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컬렉터로서 투자 개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지만, 작가를 지원하고 미술사의 일부가 되는 것에서 컬렉션의 의미를 찾는다”고 밝혔다. 그는 또 “이탈리아 르네상스, 프랑스 바로크, 미국 전후 뉴욕이 성장한 것처럼 이제는 미술사 흐름이 아시아로도 넘어온 듯하다. 경제적 발전과 소프트파워 위상이 올라가면서 아시아가 부상하고 있는 것인데, 이런 터닝 포인트에 아시아의 중심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대된다”고도 덧붙였다. 그가 이번에 주목한 작가로는 오에이오에이에서 발견한 이수진, 로이 갤러리 신교명(커넥트 섹션), 최민영(아트 악센트 섹션), 중정갤러리 박진규, 상히읗의 마이클 리키오 밍 히 호(퓨처 섹션), 이산갤러리 이건용 초기작 등이다.
한편 로이갤러리 박가범 디렉터는 “과거와 달리 젊은 컬렉터들은 ‘내가 컬렉터!’라고 셀프 브랜딩을 하면서 컬렉터라는 페르소나를 드러내는 시대 양상이 인상적이었다”면서 달라진 MZ세대 컬렉터 경향을 언급했다. 오케이앤피 부산, 아트소향 등 지역 화랑들은 “아트페어지만 축제 분위기를 살려서 관람객을 더 찾게 하는 방법이 모색되면 좋겠다”는 바람도 보탰다.
올해 처음으로 대표직을 맡아 아트부산 행사를 치른 정석호 대표이사는 “올해 아트부산은 콘텐츠의 밀도, 국제적 연결성, 그리고 지역 간 균형에 중점을 두고 기획했다”면서 “단일 행사장을 넘어 도심 전역으로 확장된 예술 경험, 국내외 기관과의 협업, 다양한 컬렉터와의 유기적 교류를 통해 아트페어를 넘어서는 문화 플랫폼으로서의 가능성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지금과 같은 시장 환경에서는 단기적인 판매 실적만큼이나 지속 가능한 관계 형성과 신뢰가 중요하기에 아트부산은 앞으로도 장기적인 시장 신뢰를 쌓아가는 기반이 될 수 있도록 방향성을 꾸준히 이어가고자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