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색 벽돌과 콘크리트로 이뤄진 '에케' 외부 계단 측면 모습. 김은영 기자 key66@
붉은 벽돌 건물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석양 햇살이 긴 그림자를 내는 오후에 방문했더니 붉은 벽돌 위에서 나뭇가지 흔들리듯 일렁이는 빛 그림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여유로웠다. 건물 하부는 붉은 벽돌, 상부는 콘크리트 재질로 지어졌고, 마당 한가운데는 작은 정원을 넣었다. 크지 않은 5층짜리 건물인데 가장 낮은 쪽과 가장 높은 쪽이 10m 정도 차이가 나는, 삼각형 땅을 묘하게 살려서 지은 건물이다. 오죽했으면 건물 이름도 독일어로 모퉁이를 뜻하는 ‘에케’(ECKE)로 정했을까.
2024년 10월 문을 열었고, 이듬해 8월 부산시가 발표한 ‘2025 부산다운 건축상’에서 금상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부산 달맞이길의 숨은 보석 ‘에케’(해운대구 달맞이길 117번길 219)를 찾아갔다. 복합상업문화공간 ‘에케’를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하고, 그 안에서 큐레이션 리빙 편집숍 ‘에크루’(ecrue)도 운영하는 이효진 대표를 만나, 일상과 취향을 공유하는 ‘에케’의 어제와 오늘 이야기를 들었다.
■‘느슨한’ 공동체를 꿈꾸는 ‘에케’
“‘에케’를 오픈하고 1년까지는 정신이 없었어요. 이제 사계절을 다 지내봤으니까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저는 여길 한 번이라도 찾으셨던 분이, 언제든 다시 찾고 싶은 곳으로 기억되면 좋겠거든요. 어떤 여행지를 두세 번째 간다면 꼭 다시 들르고 싶은 곳이 있는 것처럼요. 온라인 홈페이지 개통과 판매를 주저하는 이유도, 일부러 찾아오고, 온 김에 그 옆 다른 공간에도 들렀다가 가면 좋겠다 싶어서입니다.”
이 대표의 말 때문이었을까, ‘에케’는 단순히 상업 공간이 모인 집합체가 아니라, 이 대표와 오랜 인연을 이어 온 사람들이 ‘느슨한’ 공동체처럼 모여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대표는 ‘에케’를 구상할 때 “함께 나이 들고, 오래도록 기억을 쌓아가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었단다.
“건축을 처음 해 보는 거니까 엄청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설계부터 오픈까지 4년이 걸렸어요. 처음에는 2층짜리 단층 상가 건물을 생각했는데, ‘나도 함께하고 싶다’는 지인들이 하나둘 생기면서 갑자기 지하도 파게 되고, ‘스테이’까지 들어오면서 복합문화공간으로 점점 규모가 커졌어요. 다양한 브랜드를 한 건물에 담아내려면 전체적인 방향 정리도 필요했어요. 저는 이 안에서 먹고, 자고, 보고, 쇼핑하고, 느낄 수 있는, 오감을 만족시키는 곳으로 만들고 싶었어요. 이 모든 것이 한 공간에서 일어나면 시너지도 있을 것 같거든요.”
'에케' 1층 A호에 위치한 브런치 카페 ‘치즈치즈치즈’에서 맛볼 수 있는 샐러드. 김은영 기자 key66@
■‘에케’에서 만날 수 있는 브랜드
현재 ‘에케’에 입점한 브랜드는 11개. 작게는 여섯 평, 큰 곳은 마흔 평 규모다. A호는 ‘치즈치즈치즈’ 3호점 브런치 카페, 그 옆 B호는 이곳을 설계한 라라호호건축사사무소, C호는 공예 작품과 빈티지 오브제를 다루는 ‘에크루’, D호는 한국인 아내와 일본인 남편 부부가 운영하는 예약제 일식당 ‘오라 스키’이다. 중정을 사이에 두고 E호는 다양한 전시와 팝업을 여는 ‘에임.히어’, F호는 1인 베이크 숍 ‘사이에 베이크’, G호는 아트워크 숍 ‘마니 델 갸또’가 이어진다.
층을 달리하면 H호는 미쉐린가이드 그린 스타와 원 스타의 예약제 파인다이닝 ‘피오또’, I호는 일본 세라믹 브랜드 아리타재팬의 한국 공식 판매처 ‘1616 아리타재팬’, J호는 소파 가구의 라이프스타일 서비스를 제공하는 ‘펠리토’, 그리고 K호는 빈티지 가구와 하루를 온전히 경험할 수 있는 스테이 ‘아파트먼트풀 포룸스’이다. 스테이의 경우, 4개의 방마다 콘셉트를 달리하고, 덴마크, 독일, 프랑스 등 나라별로 다른 빈티지 제품을 만날 수 있다. 일종의 ‘경험’을 파는 셈이다. 간간이 ‘에크루’나 ‘1616 아리타재팬’에서 파는 제품도 놓여 있다.
“‘에케’라는 공간의 분위기를 크게 해치지 않는, 결이 맞는 분들이 함께하고 있어요. 사실 월세를 잘 내겠다는 병원 입주 요청도 있었지만, 우리가 그렸던 그림은 아니어서 거절했어요. 예를 들면, H호에 들어온 파인다이닝 ‘피오또’는 직접 운영하는 농장의 채소와 지역 재료를 활용한 코스를 구성하는, 자기만의 철학을 가진 곳이죠. G호의 ‘마니 델 갸또’는 고양이의 손이라는 뜻인데, 이 브랜드를 만든 분이 진짜 손재주가 좋아요. 감각적이고 위트 있는 소품을 참 잘 만들어요.”
■아늑하고 힙한, 공간이 주는 힘
H와 G, 무슨 암호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공간을 나타내는 호수 표기이다. 그러고 보니 건물 외부, 눈에 보이는 사인물도 콘크리트 담벼락에 써 놓은 ‘ECKE’라는 로마자 알파벳 네 글자가 전부이다.
아주 심플하게 만든 '에케'의 층별 안내도. ABCD로 구분한 호수 표기와 상호명만 있을 뿐이다. 김은영 기자 key66@
붉은색 벽돌 하부 구조와 같은 계열의 색깔로 이뤄진 '에케' 1층 일식당 '오라 스키' 출입구 모습. 김은영 기자 key66@
“사실 간판을 크게 하면 인식은 쉬운데, 우리가 생각하는 ‘결’과는 다른 방향이어서 최대한 자제했어요. 사인이 없더라도 모일 수 있는 아이덴티티를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으니까요.” ‘에케’를 설계한 B호 입주자 라라호호건축사사무소 조호제 건축가의 말이다. 그는 “공간 건축이지만 지역적인 특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고민, 그리고 기존에 있던 주변 사람들과 조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전했다.
‘에케’가 부산다운 건축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입체적인 도시경관과 자연 지형을 존중한 설계”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까지 각각의 층이 도로와 직접 연결돼 다양한 방향에서 자연스럽게 진입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특히 중정은 윗마을과 아랫마을을 이어주는 공공 계단과 연결돼 지역 공동체(커뮤니티)의 유기적인 흐름을 만들어낸다.
붉은색 벽돌 하부 구조와 같은 계열의 색깔로 이뤄진 '에케' 1층 '에크루'(문이 열려 있는 왼쪽)와 '오라 스키'(문이 닫힌 상태의 오른쪽) 출입구. 김은영 기자 key66@
이 대표는 “설계를 의뢰할 때부터 가장 먼저 중정을 두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어요. 문을 열면 마켓이 펼쳐지고, 사람들이 벤치에 걸터앉아 공간을 즐기는 장면을 상상했거든요.” 작지만, 의미 있는 도시의 새로운 문화적 거점이 탄생한 배경이다.
■수시로 열리는 전시·팝업 스토어
‘에케’에 입주한 11개의 브랜드 중 대부분은 큰 틀에선 ‘고정’된 형식을 취한다. 공간 플랫폼이라는 성격이 말해주는 것처럼 E호 ‘에임.히어’는 방문할 때마다 ‘콘텐츠의 주인공’이 달라졌다. 그동안 회화, 주얼리와 조명, 디자인, 공예 전시 등을 다양하게 선보였다.
'에케' 1층 E호 ‘에임.히어’에서 열리고 있는 ‘나무, 곁’이란 제목의 김수근 개인전 포스터. 예누하 제공
지금은 ‘나무, 곁’이란 제목의 김수근 개인전이 열리고 있다. 지난 18일 시작한 이 전시는 부산에서 목선반과 도자기 작업을 하는 부부 공예가 ‘예누하’의 강진주(부인) 작가가 남편 김수근 작가를 위해 특별히 마련해 준 것이다. 강 작가는 “흙을 만지는 사람으로서 저는, 그가 나무라는 생명에 새겨온 고독한 시간을 이해한다”면서 “그는 매일 묵묵히 나무를 깎아 왔지만, 그 가치를 세상에 내놓는 일에는 늘 서툰 사람이었고, 그가 쑥스러움 뒤에 숨겨 두었던 나무의 내밀한 언어를 제가 빚어온 이해의 그릇에 담아보려 한다”고 전했다. 전시는 3월 1일까지로, 오전 11시~오후 5시에 관람할 수 있다.
이 대표가 운영하는 곳은 C호 ‘에크루’이다. 그가 여행이나 출장을 다니며 모은 빈티지 가구와 아기자기한 소품,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조명한다. ‘에크루’를 만들기 전에는 생활소품 브랜드 ‘코코로박스’를 만들어 이름을 알린 바 있다. 마지막으로 1년 4개월의 소회와 바람을 들려준다.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굴러가는 거 같아요. 다만, 이 공간이 널리 알려져 좀 더 많은 사람이 와서 온기가 채워지길 바라요. 사실, 식당도 예약제여서 북적북적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주차 공간도 협소한 편이거든요. 지금 조성 중인 달맞이공원에서 언덕 쪽으로 에스컬레이터가 생기거나 지난해 <행복이 가득한 집>에서 개최한 ‘2025 행복작당’ 행사 때처럼 해운대 일대 명소를 도는 ‘셔틀버스’를 해운대구청 같은 데서 운영해 주면 참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