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오전 10시께 부산 남구 대연동 남구청 지하주차장. 각양각색의 차량 수십 대가 세워져 있었다. 한 검은색 SUV 차량 앞 유리 너머로 ‘전화 주세요’란 문구와 함께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갓길, 이중주차 등 위급한 상황에 연락을 받기 위한 용도로 적어 놓은 것이다.
이날 취재진은 남구청 지하주차장을 돌아다니면서 불과 20여 분 만에 전화번호 30여 개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악의적인 의도를 가졌다면 전화번호를 카카오톡 같은 SNS에 입력해 이름이나 성별 같은 기본적인 인적 사항은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상황이다.
차량에 무심코 둔 전화번호가 사실상 개인정보가 유출되는 구멍이 될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위급한 상황을 대비해 차량에 남겨둔 전화번호가 무방비하게 노출된 탓에 범죄에 악용될 가능성이 제기되자 부산의 일부 기초지자체가 안심번호 도입을 추진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15일 개인정보위원회에 따르면 지난달 한 달 동안 접수된 개인정보 침해 신고·상담 건수는 6657건이다. 하루에도 220건이 넘는 개인정보 침해 사례 혹은 민원이 발생하는 셈이다.
대부분은 온라인에서 개인정보 침해가 발생하지만, 오프라인에서도 개인정보 유출은 언제든지 이뤄질 수 있다. 특히 주차 차량에 무심코 공개해 둔 전화번호가 주요 개인정보 유출 통로로 지목된다. 만일에 대비해 개인 연락처를 남겨두는 특유의 주차 문화 탓이다.
실제 2021년 서울 한 아파트 단지에서 차량에 부착된 전화번호를 수집한 50대 남성이 경찰에 붙잡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해당 남성은 전화번호 1건당 일정 금액을 받기로 약속하고, 자동차 번호판과 차량에 남겨진 전화번호를 촬영했다. 같은 해 인천에서도 20대 남성이 주차 차량 속 전화번호를 수집하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당시 상담사로 근무한 남성은 불특정 다수에게 영업할 목적으로 전화번호를 수집한 것으로 파악됐다.
전화번호 유출 우려가 커지면서 전화번호를 숨기면서 필요시 통화도 가능한 ‘안심번호’가 주목받기도 했다. 안심번호는 원래 전화번호 대신 ‘050’ 등으로 시작하는 일회성 번호다. 각 통신사가 해당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고, 최근에는 배달 문화가 발달하면서 배달 플랫폼 회사가 배달 기사와 고객 사이의 통화를 연결할 때 이 번호를 활용하기도 한다.
지자체 차원에서도 안심번호를 운영하는 사례가 전국적으로 늘고 있다. 제주도의 경우에는 지난해 6월부터 도민들에게 개인 전화번호와 연결되는 QR코드를 지급했다. QR코드를 인식하게 되면, 해당 차량 주인과 통화할 수 있는 식이다.
다만, 부산 16개 구·군 중에서는 아직 안심번호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곳은 없다. 남구청의 경우 최근 주차 안심번호 도입을 검토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남구청 관계자는 “조례 개정 등 여러 절차가 남았고 현재 내부 검토 중”이라며 “개인정보 보호에 대한 중요성이 높아진 만큼 안심번호 필요성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