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산청군 생비량면 상능마을 모습. 지난 7월 수해 이후 땅밀림 현상이 이어지자 마을 전체 이주가 결정된 상태다. 김현우 기자
수해와 산사태 등 자연재해의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경남 산청군 상능마을에 설치하려 한 ‘메모리얼 체험관’ 구축 사업이 사실상 백지화됐다.
산사태로 무너진 지반이 아직도 안정화되지 않아 공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앞서 확보한 예산의 사용처마저 이미 변경됐다.
30일 경남 산청군 등에 따르면 생비량면 상능마을은 지난 7월 극한 호우로 인해 땅밀림 현상이 발생했다. 산 정상부에서 쓸려 내려온 흙이 마을 전체를 뒤덮은 것도 모자라 지반 자체가 폭삭 주저앉았다. 주민 16명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다시 마을로 돌아가진 못했다.
당시 땅밀림 현상과 토사 유실이 발생한 면적은 축구장 18개 크기인 13만㎡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땅밀림은 산의 지반 전체가 미끄러져 땅이 움직이는 현상이다. 땅 전체가 움직이는 만큼 흙이나 바위가 조금씩 쓸려 내려가는 산사태에 비해 피해 규모가 크다.
추가 지반 붕괴 우려가 있는 만큼 산청군과 경남도는 주민 전체 이주를 결정했다. 이주단지는 주민 의견을 수용해 마을에서 약 800m 떨어진 곳에 조성한다.
이주단지엔 마을 주민 13가구 16명의 마을 주민이 살 집과 마을회관이 들어서며 2028년 입주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산청군은 재해 현장을 그대로 보존해 땅밀림·산사태 피해의 위험성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메모리얼 체험관(이하 체험관)’을 건립하기로 했다.
대만 타이중 921지진교육원구 모습. 921대지진 당시 현장을 그대로 보존해 세계적인 지진 방재 교육장으로 자리매김했다. 김현우 기자
1999년 921대지진 이후 그 위험성과 대비 방안 등을 알리기 위해 2007년 타이중 우펑구에 조성한 921지진교육원구를 벤치마킹하기로 한 것이다.
921지진교육원구는 실제 피해 현장을 중심으로 단층 갤러리와 지진 공학관, 영상관 등이 설치됐다. 현재 연간 34만 명이 방문하는 세계적인 지진 방재 교육장으로 이름 높다.
산청군과 행안부도 최초 단계에서는 상능마을을 이 같은 시설로 구축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계획은 구상 단계에서부터 어그러지며 백지화된 상태다. 땅밀림은 지진과 달리 추가 발생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작은 외부 충격에도 대규모 땅밀림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특히 집중호우가 발생하면 위험성이 더 커진다.
실제 상능마을 주변으로 여전히 땅밀림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등 지반이 안정화되지 않았다. 산청군이 구축 중인 방재시설은 2027년 6월 완공 예정이고, 이마저도 땅밀림을 막아줄 것이란 보장은 없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니 당장 설계조차 하기 힘든 현실이다.
산청군 관계자는 “아직 지반이 안정화되지 않았다. 지금도 흙이 내려오기 때문에 마을 밑에 침사지를 설치해 놓은 상태다. 여기에 배수로라든지 방재시설도 설치해야 한다. 현재로선 현장 보존 외엔 어떤 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라고 말했다.
예산도 문제다. 애초 행정안전부는 산청군과 협의해 이주단지 조성과 체험관 구축에 305억 원의 예산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런데 체험관 구축이 어려워지면서 행안부와 산청군은 일단 해당 예산을 마을 이주와 방재시설 설치 등에 투입하기로 했다. 차후 예산 확보를 장담할 수 없는 만큼 현장을 활용한 체험관 조성은 사실상 어려워졌다는 분석이다.
대신 산청군은 상능마을 이주가 마무리되면 2~3억 원을 들여 새 마을회관 2층에 수해 당시 상황을 기억할 수 있는 전시 공간만 구축할 계획이다.
산청군은 행안부 협의를 통해 일단 방재시설 등에 우선 투입하기로 했다. 해당 예산을 사용하면 추가로 예산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세계적인 재난 교육시설을 기대했던 주민들은 아쉬운 반응이다.
산청읍 한 주민은 “수해나 산사태, 땅밀림은 더 이상 책 속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라며 “현장에 이 같은 위험성을 알리는 시설이 들어선다고 들어서 기대했는데 차후에라도 추진됐으면 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