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우양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터너: 인 라이트 앤 셰이드’(Turner: In Light and Shade) 개관에 맞춰 한국을 찾은 영국 맨체스터대학 부설 휘트워스 미술관 이숙경 관장. 우양미술관 제공
영국 맨체스터에 자리한 휘트워스 미술관은 런던 밖에서 가장 큰 규모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기관이다. 런던 테이트 모던의 시니어 큐레이터로 16년간 활동했던 이숙경 관장은 2023년 여름 이곳의 관장직을 맡으며, 전통과 혁신을 아우르는 새로운 미술관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날씨는 좀 흐리지만, 맨체스터는 스포츠뿐 아니라 문화적으로 굉장히 활기찬 도시예요.” 한국인 최초로 유럽 미술관장을 맡고 있는 이 관장의 목소리엔 맨체스터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났다. 팝 그룹의 본고장, 스포츠 열정의 도시 맨체스터는 부산을 연상케 한다. 130년의 역사를 지닌 휘트워스 미술관은 맨체스터대학 부속 기관이지만, 지역 시민에게는 도시의 상징이자 자부심의 원천이다. “런던의 테이트(테이트 모던)가 중심이라면, 맨체스터는 유럽 중간 도시로서 바르셀로나나 브뤼셀처럼 독립적인 위상을 지닌 곳이에요. 그런 점에서 이 미술관이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협업 전시를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죠.”
‘터너: 인 라이트 앤 셰이드’(Turner: In Light and Shade, 빛과 그림자) 전시 포스터. 우양미술관 제공
경주 우양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터너: 인 라이트 앤 셰이드’(Turner: In Light and Shade, 빛과 그림자)는 바로 이 관장이 이끌어 낸 협업의 결실이다. “휘트워스는 터너의 판화 세트를 완전한 형태로 소장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미술관이에요. 6만 점이 넘는 소장품 가운데 터너, 렘브란트, 그리고 섬유예술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컬렉션을 자랑하죠.”
그는 특별히 터너 탄생 250주년을 맞아, 덜 알려진 판화 작업을 중심으로 전시를 기획했다. “터너는 풍경화와 판화를 독립된 예술 장르로 끌어올린 실험적 인물이에요. 유화 대신 단색의 명암과 빛으로 세계를 해석한 그의 시도는 지금도 현대적이죠.”
전시 준비는 단순히 작품 이동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우양미술관은 실험적이고 통사적인 전시에 관심이 깊었어요. 단지 유명세보다 ‘작품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파트너였죠. 그래서 100년 만에 공개된 터너 판화를 한국 관객에게 소개할 수 있었습니다.”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의 '스코틀랜드 벤 아서'(Ben Arthur, Scotland), 1819년 1월 1일 발행, 에칭, 메조틴트, 갈색 잉크 인쇄. ©Wooyang Art Museum
이 관장은 미술관의 본질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머물며 살아가는 곳”이라 정의했다. 휘트워스 미술관은 전시 무료 공개를 원칙으로 하며, 접근성과 평등성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미술은 지식이 아니라 경험이에요. 누구나 와서 쉬며, 영감을 얻을 수 있어야 하죠. 대학 부설 미술관이기에 가능한 개방성과 연구의 자유를 활용해, 다양한 세대와 계층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꾸리고 있어요.”
그러한 철학은 전시 주제에도 반영된다. “맨체스터는 산업혁명과 식민지 역사의 중심지였어요. 그래서 저희 미술관은 이런 역사적 맥락을 오늘의 사회문제와 연결하려 합니다.” 최근 선보인 아마존 원주민 작가의 전시는 식민주의와 인간의 존엄을 환기시키며 큰 반향을 얻었다. 그는 “글로벌한 문제와 로컬한 현실은 결국 맞닿아 있다”며 “예술을 통해 공감과 연대가 확장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경북 경주에 있는 우양미술관은 12월 17일부터 2026년 5월 25일까지 ‘터너: 인 라이트 앤 셰이드’(Turner: In Light and Shade)를 열고 있다. 사진은 전시 전경. 우양미술관 제공
휘트워스 미술관은 아시아와 남미 기관들과 공동 전시를 잇달아 계획 중이다. 대표적으로 한국 청주공예비엔날레 기간에 열린 영국-한국-인도 섬유예술 특별전은 그 일환이었다. “역사적으로 맨체스터의 방직 산업은 인도에서 가져온 전통 섬유와 깊은 관계가 있죠. 이런 얽힌 역사를 현대 작가들과 다시 바라보는 것이 중요했어요.”
이 전시는 청주를 시작으로 2026년 인도 뉴델리, 다시 맨체스터로 이어질 예정이다. “여러 나라가 협력하면 비용도 줄고, 작가들은 더 많은 관람객을 만날 수 있어요. 현대자동차 같은 기업이 지원해 주기도 합니다. 전시의 확장은 결국 예술가와 관람객 모두에게 열린 무대가 되는 거죠.”
경주 우양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터너: 인 라이트 앤 셰이드’(Turner: In Light and Shade) 개관에 맞춰 한국을 찾은 영국 맨체스터대학 부설 휘트워스 미술관 이숙경 관장. 우양미술관 제공
테이트 모던 생활을 끝내고 맨체스터로 이동한 이유를 묻자 이 관장은 웃으며 말했다. “왜 이렇게 오래 있었을까 싶었어요. 휘트워스는 훨씬 통사적이고 매체적으로 다양해요. 현대미술의 정신과도 더 잘 맞죠.” 테이트에서 백남준 회고전을 기획했고,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2015년)에 이어 일본관(2024년) 큐레이터로 초청받은 그가 다음 단계로 선택한 곳은 ‘새로운 실험을 허용하는 미술관’이었다. “대학 미술관이야말로 가장 열린 실험의 장이에요. 그리고 미술이 사회와 만나는 바로 그 접점이죠.”
이 관장이 말하는 미래의 미술관은 하나의 ‘사회적 플랫폼’이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로 다른 기억과 현실, 문화를 연결하며 자신의 삶을 비춰본다. “미술관은 결국 사람을 위한 공간이니까요. 조금 더 나은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 그 시작점이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