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공영방송 BBC는 2008년 DMI(디지털 미디어 이니셔티브)라는 초대형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목표는 야심차고 명료했다.
BBC의 모든 콘텐츠 제작, 편집, 아카이빙 과정을 하나의 거대한 통합 디지털 플랫폼 안으로 끌여들여, 모든 직원이 자기 책상 위 컴퓨터만으로 작업을 완수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DMI가 목표한 것은 부서 간 비협조, 자원의 제약, 인간의 실수와 같은 것들이 모두 사라진 완벽한 질서의 세계였다. 영국 정부와 BBC 이사회는 전폭적으로 지지했고, 8170만 파운드(한화 약 1600억원)를 지원했다.
하지만 몇년 지나지 않아 DMI는 9840만 파운드의 손실이라는 재앙으로 기록됐다. 이유는 DMI 프로젝트가 처음부터 순수한 기술 혁신이 아니라 BBC 내부에 오랫동안 존재한 다른 왕국들 간의 영토분쟁, 즉 ‘정치’를 기술 언어로 포장한 대리전이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을 통합하는 단일 플랫폼’이라는 목표에 숨어있는 ‘표준화’라는 단어 속에는 ‘실패의 완성도를 높이는’ 모든 코드가 필연적으로 숨어 있었던 것이다.
LG그룹의 비즈니스 컨설턴트이면서 여러 대학에서 강의해온 박종성은 신간 <혁신은 왜 실패하는가>를 통해 세계 최고의 조직들이 같은 방식으로 무너진 이유는 단 하나라고 말한다. 문제를 정의하지 않은 채 해답부터 들이밀었기 때문이라고.
이 책은 ‘왜 어떤 혁신은 성공하고, 어떤 혁신은 실패하는가?’라는 질문을 넘어선다. ‘왜 우리는 같은 실패를 기술만 바꾼 채 반복하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를 추적한다. 비즈니스 컨설턴트로서 15년간 현장에서 수많은 실패를 목격해온 저자는 혁신이 실패하는 이유를 개인이나 조직의 무능이 아닌, 누구나 빠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착각에서 찾으며, 이를 ‘메타 착각’이라 정의한다.
시대와 기술이 바뀌어도 왜 인류는 늘 같은 함정에 빠질까? 1900년대 전기 혁명부터 2020년대 생성형 인공지능(AI)까지, 100년 넘게 반복되어온 다섯 가지 메타 착각을 추적한다. 글로벌 기업들의 25가지 혁신 실패 사례를 통해 기술 앞에서 우리가 빠지기 쉬운 착각의 본질을 해부하고, 이를 예방함으로써 기업이 생존하며 진정한 혁신으로 나아가는 전략을 제시한다.
이 책은 기업의 성공사례가 아닌 ‘실패의 해부’에 집중함으로써, 기존 혁신 담론이 회피해온 불편한 진실을 정면으로 다룬다. 혁신 실패의 원인과 문제점을 분석할 뿐만 아니라, ‘사전 부검 체크리스트’라는 처방전을 제시해 프로젝트의 성공률을 높이도록 도우려 한다. 이를 통해 기술의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바꿔야 할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신기술 도입이 왜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지 궁금한 경영자와 리더, 실패를 반복하고 싶지 않은 실무자, 기술 낙관론과 공포론 사이에서 균형 잡힌 시각을 갖고 싶어 하는 일반 독자들 모두에게 유용한 지침이 될 수 있다. 박종성 지음/세종서적/488쪽/2만 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