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지난 6일 대전 유성구의 한 주유소 현장을 방문해 주유소 관계자로부터 유류 거래량 등 현장 상황을 듣고 유류 품질과 정량 검사 등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전쟁으로 휘발유와 경유 등 기름값이 며칠새 급속히 오르자 정부가 최고가격 지정을 검토하고 나섰다. 하지만 1997년 유가 자유화 조치 이후 30년간 사실상 사문화된 비상조치인 데다 시장 왜곡과 재정 부담 등 감당해야 할 부작용이 만만치 않아 정부의 고심도 깊어지는 모양새다.
■며칠 새 기름값 '수직 상승'
8일 정부부처에 따르면 정부가 ‘최고가격 지정제’라는 초강수를 검토하게 된 것은 중동사태 발발 후 주유소 기름값이 곧바로 수직 상승했기 때문이다. 통상 국제유가가 국내 기름값에 반영되기에는 2주일 정도 시차가 있는데, 이번엔 바로 반영돼 소비자 혼란이 컸다. 정유사와 주유소 모두 ‘기름값이 오를 것’이라는 기대심리를 이용한 결과로 보인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5일 “유류 공급에 심각한 차질이 빚어진 것도 아닌데 갑자기 주유소 휘발유 가격이 폭등했다”며 석유류 제품에 최고가격 지정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부산에서도 2월 28일 L당 1671.8원이던 휘발유 가격이 3월 4일엔 1772.9원으로 올랐고 5일엔 1800원도 돌파했다. 8일(오후 3시 기준)엔 1877.9원에 달했다. 경유가격은 더 올라 2월 28일 1576.3원이던 가격이 8일엔 1896.0원으로 300원 넘게 상승했다. 특히 경유 가격이 휘발유 가격을 추월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전국에서 기름값이 가장 비싼 서울은 8일 현재 1945원까지 올랐고, 경유는 1968원에 달했다. 특히 경유는 화물차 등 상업용 차량에 대부분 쓰이기 때문에 화물차 운전자들의 원성이 높았다.
정부는 바로 대응에 나섰다. 범부처 합동점검단이 지난 6일부터 불법석유 유통, 매점매석, 가짜석유·혼합판매 등 불공정 행위 집중 단속에 나섰다. 공정위는 주유소들의 가격 담합 여부를 조사하고, 법무부도 유가 담합 등 시장교란 행위에 대해 검찰에 대응을 지시했다. 재정경제부는 유류세 인하 여부를 검토 중이다.
이와 함께 정부는 아랍에미리트(UAE)로부터 총 600만 배럴 이상의 원유를 긴급 도입하기로 했다. 정부의 전방위적 압박에 대한석유협회와 한국주유소협회, 석유대리점들의 단체인 한국석유유통협회 등 석유 3단체는 지난 6일 “국제 유가 인상분이 주유소 가격에 급격히 반영되지 않도록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실제 도입 놓고 신중 분위기도
그럼에도 국내 주유소 기름값 상승세는 쉽게 꺾이지 않고 있다. 7~8일에도 상승폭이 줄었을 뿐, 기름값은 계속 올랐다. 특히 국제유가가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기준으로 배럴당 90달러가 넘어 앞으로도 기름값 상승세는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석유공사 오피넷에 따르면 8일 오후 3시 기준 전국 평균 휘발유 가격은 1895원으로, 하루 전보다 5원이 더 올랐다. ‘기름값 2000원 시대’가 초읽기에 들어간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이에 정부는 ‘석유 및 석유대체연료 사업법’을 근거로 최고가격 지정 고시를 위한 실무 검토에 착수했다. 이 조항은 석유 가격이 크게 올라 국민 경제의 안정을 해칠 우려가 있을 때, 산업통상부 장관이 판매 가격의 최고액을 직접 지정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위반 시 2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 벌금이 부과되고, 초과 수익은 정부가 환수한다.
다만 실제 도입 여부를 놓고 조심스러운 분위기가 감지된다. 산업부 관계자는 “석유 최고가격 지정을 포함해 모든 정책적 옵션을 열어두고 검토하는 단계”라며 “시장 부작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기에 도입 시기를 예단하기는 어렵다”고 밝혔다. 만약 정부가 인위적으로 시장에 개입해 가격을 누를 경우, 정유사와 주유소의 수익성이 악화해 공급을 줄이거나 판매를 기피하는 ‘공급 절벽’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이는 소비자의 구매 대란으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
또 석유사업법에는 사업자의 손실을 국가가 보전해 줄 수 있다는 규정이 포함돼 있다. 유가 상승세가 장기화할 경우 민간의 적자를 세금으로 메워야 해 막대한 재정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정부는 유류세 인하폭 확대와 비축유 방출 등 다른 대안도 종합적으로 검토한 뒤, 최고가격제 발동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