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프로 야구와 축구에 열광하는 시대이지만 한때 권투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시절이 있었다. "엄마, 챔피언 먹었어"라는 말로 대표되는 그때 그 시절, 세계타이틀전이 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온 국민들의 눈과 귀는 TV와 라디오로 향했다. 전광석화 같은 원투스트레이트로 세계를 제패한 김상현(54)씨. 그는 김성준(WBC 라이트 플라이급) 박찬희(WBC 플라이급)씨와 함께 1970년대 말 챔피언 트로이카 시대를 이끌었다. 부산 출신으로는 첫 권투세계챔피언이기도 하다.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김상현씨는 어떤 모습으로, 뭘 하고 있을까? 전 세계챔피언 김상현씨를 부산 사상구의 한 사무실에서 만나 함께 차 한 잔을 마시며 옛날이야기를 나누었다.
권철현 주일 대사 친분 계기 도시발전연구소서 일 도와
기회된다면 권투·헬스 접목 웰빙 권투체육관 운영 꿈
- 너무 반갑습니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요.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재 권철현 주일대사가 운영하고 있는 부산 사상구의 도시발전연구소에서 권 대사의 지역구 일을 돕고 있습니다.
- 권투 세계챔피언이 정치권에 있다는 게 다소 의아스럽네요.
△권철현 대사는 체육관 운동 선배입니다. 권 대사 형제분들과 함께 같은 체육관 관장으로부터 권투를 배웠지요. 권 대사는 제가 합숙 훈련을 할 때 자주 찾아와 격려를 하곤 했었죠. 그렇게 인연을 이어오다 1995년 권 대사가 국회의원에 출마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짐싸서 내려와 경호 겸 의전담당을 맡아 일한 게 계기가 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 1983년 은퇴 후 그동안 권투와는 어떤 관계를 유지해 왔는지 궁금하네요.
△은퇴 후 한동안 스포츠전문용품점과 레스토랑을 운영하기도 했었죠. 한때는 서울에서 체육관 관장 겸 트레이너로서 김용광 선수를 세계챔피언으로 만들기도 했었지요. 이후 연예인 이경규씨의 매니저도 하고 이것저것 많은 일을 했던 것 같네요.
- 아무래도 올드 권투팬들은 1978년 태국의 '괴물'무앙수린을 눕히고 챔피언 벨트를 찬 모습을 잊을 수 없을 겁니다. 당시의 모습을 회상해 주시죠.
△무앙수린은 신체 검사때 여자팬티를 입고 나타나고, 여자 화장실을 이용할 정도로 괴짜였지요. 시합 조인식 때는 제 턱을 만지기도 하고, 링에 올라서는 도전자 자리인 청코너를 고집하는 등 돌출행동이 많았습니다. 그때 저는 꾹 참고 '링 위에서 보자'며 별렀지요. 무앙수린의 펀치를 맞아보니까 주먹이 묵직해서 일단 힘을 빼도록 해 후반에 가서 결판을 본다는 작전을 구사했지요. 시간이 지나면서 호흡이 거칠어진 무앙수린이 마침내 11라운드부터 저돌적으로 나오더라고요, 그러다 13라운드 때 서로 레프트 카운터를 주고 받았는데, 제가 날린 주먹이 바로 무앙수린 턱에 꽂히면서 무앙수린이 드러누웠지요. 그때가 12월 30일이었는데 한국 전체가 난리였지요. 당시 언론은 물론 권투계에서조차 제가 이길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었죠. 막상 챔피언이 돼 귀국하니 스타가 돼 있더라고요.
- 3차 방어전에서 미국의 사울 맘비에 진 것은 당시 의외라는 반응이었는데요….
△체중감량이 문제였지요. 12~13㎏ 감량 상태에서 시합 하루 전 300~400g이 덜 빠져 사우나 안에서 2시간 이상 움직이다 보니 힘을 많이 뺀 상황이 되었지요. 나중에 안 사실인데, 당시 맘비도 저의 펀치에 옆구리를 많이 맞아 뼈에 금이 가 경기를 포기하려 했다더군요. 득점에서 유리한 상황이라고 판단하고 치고 들어가다 맘비의 기습적인 원투 스트레이트를 맞아 무릎을 꿇은 거죠.
- 은퇴 후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지난 날 아쉬운 점이 있다면.
△국내에서 전 세계챔피언만 40명 정도 되는데 모두들 사기를 안 당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순수하고 세상 물정을 모릅니다. 운동에 몰두하다 사회에 나와보니 전부가 적이더라고요. 링에서는 심판이 싸움을 붙여주고 말리지만 사회에서는 도와준다고 해놓고선 돌아서고 떼먹고 하니 말입니다. 피땀 흘려서 번 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게 아쉬운 거죠. 주위 사람들은 세계챔피언까지 했으니 많은 돈을 벌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전혀 아닙니다.
- 김상현 선수는 당시 헝그리 복서들과는 다르게 비교적 부유한 생활 여건 속에서 운동을 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복싱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선친이 부평동 국제시장에서 과자 공장을 경영했었지요. 중2 때 영도로 과자 배달을 갔는데, 당시 영도 전차종점 앞 건물에 위치한 아시아체육관에서 권투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지요. 그 때 지하체육관에서 물씬 풍겨오는 땀 냄새에 반해 권투를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부모님이 반대했지만 고1때 부산 아마추어 신인왕 시합에 나가게 되면서 부모님도 할 수 없이 승락을 하셨지요. 이후 전국체전에 나가서 메달도 따고, 부산 대표팀 상비군까지 했었답니다.
- 한국 권투계가 그야말로 암흑기입니다. 다행히 얼마 전 김지훈이 남아공서 슈퍼페더급 벨트를 가져왔습니다만….
△권투 체육관도 시대의 흐름에 맞게 변해야 합니다. 부산은 아직도 1970년대식의 시설을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이른바 웰빙 차원에서 건강을 다지고 체중을 줄이려 할 뿐, 옛날같이 먹고 살기 위해 뛰는 복서는 이젠 있을 수 없다는 거죠. 거기에다 이종격투기 같은 화끈한 시합이 생기다 보니 글러브 끼고 12라운드까지 가는 권투를 지루하고 식상하게 생각하는 거죠. 소질 있고 체력적으로 타고난 사람들이 열정과 근성을 갖고 운동해야 하는데 힘들다 보니까 시도조차 않는 겁니다. 바다에 물고기가 널려 있다고 해서 모두 자기 것이 아니잖습니까?
- 앞으로의 계획이나 바람이 있다면요.
△사회인으로서도 성공적인 삶을 살고 싶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권투와 헬스를 접목한 웰빙 권투체육관을 운영하고 싶습니다. 권투인들이 은퇴 후 사회에서도 존경 받고 잘 살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 올드 권투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권투를 많이 사랑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얼마전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한 중년남자가 자꾸 쳐다보시더니 "혹시 안면이 없냐"고 해서 "예전에 권투하던 김상현입니다"라고 했더니 다짜고짜 "커피값 내라"고 하시데요. 그래서 같이 밥을 먹게 됐는데, 한때 다방을 운영했다는 그 분 말씀이 저의 2차 방어전때 권투시합 중계를 보러 몰려든 다방 손님들이 경기가 2라운드 KO로 너무 빨리 끝나자 커피도 시켜먹지 않고 우르르 나가 막대한 손해를 봤다는 우스갯소리를 하시더라고요. 그 시절 그 때가 정말 그립습니다. sds@busan.com
사진=강원태 기자 wk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