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부산에선 전 세계 관심이 쏠린 국제회의가 열렸다. 유엔 플라스틱 협약 제5차 정부간협상위원회(INC-5) 회의는 마지막 날 새벽까지 이어질 정도로 격론이 펼쳐졌다. 플라스틱 규제 방안을 두고 ‘폐기물 단계에서의 규제’와 ‘플라스틱 생산 자체의 감축’이라는 두 주장이 엇갈리면서 결국 결론을 짓지 못하고 빈손으로 끝났다. 여러 환경 단체를 비롯해 한국 외교부와 환경부 장관까지 나섰지만, 플라스틱 규제에 대한 해법은 찾지 못한 셈이다.
2024년 현재 플라스틱은 인류에 재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환영받지 못하지만, 플라스틱이 탄생했을 때만 해도 인류는 플라스틱을 축복이자 혁신으로 여겼다. 안타깝게도 플라스틱의 편의성 이면이 드러나며 이젠 인류가 해결해야 할 숙제가 되었다. 미술계 역시 이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있다.
부산 수영구 현대 모터스튜디오 부산은 플라스틱의 양면성을 생각하게 하는 전시 ‘플라스틱, 새로운 발견’을 진행하고 있다. 오는 5월 25일까지 열리는 이 전시는 세계 최고의 디자인 미술관 중 하나인 독일 비트라뮤지엄과 함께 준비했으며, 플라스틱이 발전해 온 과정을 톺아본다. 학술 세미나 혹은 박물관의 교육 행사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전시는 유쾌하고 재미있다. 최고의 디자인 스튜디오와 예술가, 큐레이터, 기획자들이 뭉친 만큼 다양한 장르의 예술품과 영상을 보면서 플라스틱이라는 소재를 직시하게 하고 한편으로 기존 관념에서 벗어나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현대 모터스튜디오 부산은 “플라스틱이 급부상하고 유례없이 대중화된 한편 파괴적인 영향력을 드러내게 된 과정을 조명하고 디자인의 역할을 탐구하고자 한다. 플라스틱이 만든 역사를 돌아보는 건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노력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네 개의 섹션으로 구성된 2층 공간에서 시작된다. 첫 번째 섹션은 아시프 칸 작가의 ‘칼파’(Kalpa)라는 영상이다. 지구 해양 미생물이 출현하는 태초부터 해저에서 축적되고 변형되는 과정을 거쳐, 20억 년 후 석유의 형태로 발견되기까지 여정을 소개한다. 영상 후반부는 플라스틱 제품과 폐기물로 덮인 자연을 기록하고, 결국 분해된 미세 플라스틱으로 세계 해양 생태계가 오염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상의 배경에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곡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깔린다. 이 곡은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연주되었는데 반합성 플라스틱인 ‘피크신’이 이 행사에서 은메달을 수상했고, 이는 플라스틱 산업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두 번째 섹션은 ‘신세티카’(Synthetica)로 19세기까지의 초기 플라스틱 진화 과정과 함께 ‘플라스틱 시대’를 연 최초의 100% 합성 플라스틱을 소개한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19세기 말에도 플라스틱은 지정학적 갈등의 중심에 있었다. 서유럽 국가들은 식민화를 통해 남반구의 토지와 자원을 착취하였고, 상아나 천연고무 같은 재료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천연자원 시장 공급이 부족했다. 초기 합성 플라스틱의 발명은 자연을 회생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현재 환경에 재앙으로 불리는 플라스틱이 당시에는 자연 파괴, 환경 파괴의 대안으로 환영받았다는 말이다. 최초의 합성 플라스틱 상품들과 이를 활용한 예술품이 눈길을 끄는 섹션이다.
세 번째 섹션은 1920년대 석유 화학 산업 활성화로 새롭게 발명된 비닐, 아크릴, 나일론 등의 플라스틱들이 어떠한 형태로 우리의 일상에 스며들었는지 보여준다. 화석 연료 소비 급증과 두 차례 석유 파동 이후 일회용 문화에 대한 경각심을 기반으로 생겨난 환경보호 캠페인도 만날 수 있다. 특히 이 섹션에선 20세기 후반 대량 생산 공정이 발전하면서 한 번 쓰고 버리는 플라스틱 문화가 확산되었고, 1970년부터 오늘날까지 전 세계 연간 플라스틱 생산량은 4억 톤으로 처음에 비해 8배나 증가했다.
2층의 마지막 섹션인 ‘다시 만들다(RE-)’는 플라스틱의 선순환을 연구하는 디자이너들과 과학자, 기업 등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미래를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제공한다. 디자이너들이 만든 창의적인 플라스틱 대용품들이 눈길을 끈다.
전시관 3층은 현대자동차의 친환경 신소재를 직접 눈으로 관찰하고 체험하는 공간이다. 전시장 벽면에는 현대 전기차인 아이오닉에 활용되는 다양한 재활용∙친환경 소재들이 적용된 부품을 한눈에 볼 수 있다. 3층 전시관 한편에서는 페트병의 병뚜껑을 녹인 후 몰드로 새로운 상품을 제작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아이, 어른 모두 재미있어하는 공간이다.
현대 모터스튜디오 부산과 독일 비트라 뮤지엄이 준비했지만, 전 세계 유명 미술관, 박물관에서 귀하게 빌려 온 초기 플라스틱 작품은 이 전시의 특별한 매력이다. 주최 측은 독일 비트라 뮤지엄의 유럽 네트워크가 큰 도움을 주었다며 특별히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기업의 사회 공헌 프로그램으로 진행돼 대형 규모의 전시지만, 입장과 체험은 모두 무료이다. 연령 관계없이 즐길 수 있어 가족 단위로 현장을 많이 찾고 있다.